題 : 寓懹 (우회/ 감회를 읊음)
讀 書 常 擬 濟 時 艱 (독서상의제시간) 책 읽으며 생각해 보면 세상 구제 힘든 일
奔 走 紅 塵 幾 暑 寒 (분주홍진기서한) 홍진 세상 분주히 오고 간지 몇 몇 해였나
寇 亂 七 年 無 一 策 (구란칠년무일책) 도적들의 칠년 대란을 물리칠 방책없으니
還 慚 白 髮 始 歸 山 (환참백발시귀산) 부끄러운 마음으로 백발되어 돌아 가누나
<어 휘>
常 擬 : 늘 헤아려 봄
濟 時 : 세상의 어려움을 잘 해결함
紅 塵 : 세상, 속세
署 寒 : 더위와 추위 (여름과 겨울로써 한해를 의미함)
環 慚 : 부끄러이 돌아 감 (慚은 慙과 같은 글자임)
歸 山 : 고향으로 돌아 감
<지은 이>
정 탁 (鄭琢, 1526 - 1605), 자는 자정(子精), 호는 藥圃(약포) 또는 栢谷(백곡), 본관은 청주에 시호는 정간
(貞簡)이다. 1526년(중종 21년) 10월 8일, 外家인 醴泉郡(예천군) 金堂谷에서 태어나다. 13세에 栢潭(백담)
具鳳齡(구봉령) 선생과 金沙寺에서 독서하였고, 17세에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35세에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香室(향실)에 직숙할 때 佛事에 香을 올리라는 文定王后의 명을 따르지 않아
여론이 이를 훌륭하게 여겨 주목을 받았다. 후에 예조 정랑, 부수찬, 헌납, 지평, 수찬, 교리 등의 관직을 역임
하였으며, 46세 3월에는 退溪 李滉 선생의 장례에 참여하여 賜祭文(사제문)을 지었다.
이후 점점 관직의 품계가 높아지면서 동부승지,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 이조참판, 한성 판윤을 맡았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왔다. 60세가 되면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서 鄭汝立의
獄事(옥사)가 일어나자 국문에 참여하여 崇政大夫에 오르며 우찬성 겸 지경연춘추관사가 되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御駕(어가)를 호종하여 서북으로 피난하였고, 7월에 東宮의 分朝를 따라가서 庶務를
재결하고 大朝와의 연락을 맡았다.
71세 2월에는 의병장 金德齡(김덕령)을 伸救(신구)하였고, 이듬 해 3월에 조정에서 李舜臣을 拿鞫(나국/체포
하여 국문함)하자 변호하는 차자를 올려 석방케 하였다. 74세에 좌의정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머물
렀다. 79세 7월에 扈從功臣(호종공신)으로 西原府院君(서원부원군)에 봉해지고, 9월에는 忠勳府에서 화공을
보내 공의 畫像(화상)을 만들게 하였다. 마침내 醴泉郡(예천군) 高坪里(고평리)에서 별세하니, 향년 80세였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선생께서 만년에 혼란스럽고 어려웠든 벼슬 길을 떠나며 낙향하는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선비가 글을 배워서 세상을 잘 다스리기가 매우 힘들고 어렵다는 시인의 고백을 듣노라면, 이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