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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Traveling Light)
- 유진 피터슨 (Eugene H. Peterson) -
1. 모든 것에 대한 자유(요8:31-32, 36)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1-32,36)
우리는 자유에 대한 환상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환상에 엄청난 돈과 거대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며, 권력, 섹스, 명성, 여가 등에 기대어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슬프게도 자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그 환상은 불모의 땅과 같아서 말이나 행동을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들여 값비싼 환상들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의 실제 삶은 대부분 무력하고, 지루하고, 모호하고,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유의 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가 실재하기도 한다. 그리 분명해 보이는 것 같지 않지만, 적어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자유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유로우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자유로운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 안에 살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중심에 계시고, 모든 창조 세계와 피조물이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필요성이 아닌 자유는 언제나 더 깊고 오래 지속되는 실재다. 이러한 믿음의 중심에,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분이셨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임의로 부는‘ 바람 같은, 자유로우신 성령의 증거가 계속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에 참예하였다는 증거들이 문화와 나라마다 수 없이 많으며, 내 경험으로도 증거할 수 있다. 믿음 안에 살 때 나는 자유롭다.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둘 때 나는 엄청난 자유와 놀랄만한 자발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내 의지대로 살아 갈 때에는 자유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것은 갑갑하고 염려가 많은 삶이다.
강조해야 할 진리
내가 목회를 하던 시절, 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들이 움츠림과 수치심과 방어적인 삶 속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욕구를 잃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일깨워 줄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나는 믿음의 삶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인간됨의 핵심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케케묵은 진리라는 것은 없다. 4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해야 했고, 16세기에는 이신칭의를 강조해야 했듯이, 아마도 지금은 믿음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자유를 강조해야 하는 듯하다.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를 삶에서 드러내는 일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며, 내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 선물을 주는 일이다. 자유는 어떤 추상적인 것도, 어떤 물건도 아니다. 자유는 선물이요 기술이다. 자유는 누군가가 주는 선물이며, 각 사람이 실제적 한계 내에서 훈련해야 하는 기술이다. 자유를 이해하려면 자유를 배워야 하고, 자유를 얻으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
전문가의 도움
나는 이 책을 쓰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전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신앙생활에 활력과 열정을 회복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 모든 것에 대한 자유로운 삶으로 세상과 맞서게 하려고 이 서신을 사용하셨다. 실로 그 삶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해준다. 갈라디아서 본문의 진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삶으로 입증된다. 그 경험은 가능하며 확실한 것이다. 우리는 환상의 세계에 있지 않으며, 필요성으로 축소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나는 의도적으로 둘 사이(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바울의 말과, 교회와 세상에서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두 방향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했고, 그 말들이 상호 작용하도록 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했으며, 가르치고 설교하고 격려하고 지도했다. 내 생각과 사역에서도 두 요소가 긴장을 유지하도록 했다. 하나는 자유의 에너지가 끓어 넘치는 갈라디아서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포기하고 냉담하게 숙명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삶의 방식과 그 분의 자유에 대하여 훈련하고 훈련 받는 계속적인 사역에 대한 잠정적인 보고서다.
자유로운 심령의 개척자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운 심령과, 자유로운 삶의 개척자들이라는 특권과 두려운 책임을 지닌 이들이다. 두려움에 짓눌려 위축된 상황에 처한 사람들 속에서 자유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일, 냉담하고 비관주의에 젖어 에너지와 기대가 줄어든 채 하루하루를 나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말과 행동으로 자극을 주는 일, 이는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로워지라는 임무와 심령의 자유를 사수하라는 임무를 주셨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든,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요하는 일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2. 살아갈 자유(갈1:1-5)
삶과 죽음의 이야기
성경의 첫 페이지에는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오며, 그 뒤에는 인간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나온다. 역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죽음을 택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교차되어 나오는 이야기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인간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다”(Samuel Beckett)
기독교 이전 시대의 현자(창세기의 저자), 기독교 개종자(바울), 그리고 기독교 후기시대의 허무주의자(베케트)가 적어도 인류의 이야기는 죽음의 이야기라는데 동의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경 이야기가 바로 그 시작이며, 성경은 생명의 하나님을 힘차게 선포하고, 하나님이 죽은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음을 선포하고 증거한 기록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살아 갈 자유가 있다. 그러기에 바울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를 선포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기상나팔을 부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하셨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무언가가 행해졌다. 삶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도하신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속박과 제한, 경계, 제약들로 삶을 시작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황들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삶은 자유롭지가 않다. 우리는 안전하게 태어나지, 자유롭게 태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워질 운명과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는 믿음의 삶 속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얻기만 한다면 자유는 해방이다. 자유는 수 년 동안의 학습과 협상, 시련과 실수, 사고와 치유, 모험과 실패의 결과다. 자유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얻는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나 혼자서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자유는 허용과 요구, 분투, 고난, 위험을 필요로 한다. 삶을 살아 갈 자유는 루시퍼의 추락과 하늘에서의 전쟁으로 드러나는 캄캄하고 극적인 고뇌와, 십자가 수난에 대한 울부짖음과, 공포에 찬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의 현재 삶의 자유로운 순간은 평화가 자연스럽게 축적된 결과가 아니라, 불화와 화해, 진보와 후퇴, 전쟁과 평화로 구성된 갈등의 역사의 한 시점이다.
이 악한 세대
죄는 평안한 삶을 살아 갈 능력과 생명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며,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연수에 연수를 거쳐, 세대에 세대를 거쳐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다. 그것이 복음의 약속이며,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다.
죄는 하나님의 임재의 목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이로 인해 우리는 다양한 제한과 한계, 불충분, 연약함을 경험한다. 의지나 충동이나 욕망의 훼방이 모두 자유를 훼방하고, 이 훼방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의 삶은 결코 자유 할 수 없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는 바울의 외침은 전형적인 것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자유는 이 구속의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우리는 미래도 없고, 관계 맺는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 이를 수도 없는 “이 악한 세대”의 예속 상태에서 구속을 받았다. ‘건지다’는 “어디 에로부터 이동이 아니라,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속은 세상이나 한계나 경계로부터의 구속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세계와, 예정된 구원으로부터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구속이다.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시작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세웠느니라”(행7:9-10). 요셉은 하나님의 건지시고자 하는 뜻에 참여함으로써 건지심의 결과를 증폭시키고, 그것을 전 세계에 퍼뜨린 사람이 되었다. …그가 변화를 일으켰다. 요셉 이야기를 기억하는 우리는, 구덩이나 감옥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건지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자유가 한 사람 안에서 일단 자리를 잡으면 정치적ㆍ사회적 관계와 문화 운동 속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유로운 심령
갈라디아서 시작 부분은, 바울에게 자유의 삶을 가져다 준 그의 구속 경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다. 첫째로, 그는 자신을 사도라 부른다(갈1:1). 사도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서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선포하고 사람들이 이 믿음의 삶을 받아 들이도록 초청하여 그분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기 위해 부르신 사람이다. 이것이 바울의 정체성이다. 두 번째로, 바울의 자기 이해는 정확하고 심오하다(갈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계시된 죄와 은혜, 창조와 구속, 심판과 구속의 측면에서 본질적인 자유에 이르렀다. 세 번째로, 바울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자유로웠다(갈1:2). 공동체는 자유의 일면이며, 자유를 지지하고 격려한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바울은 1세기에 살았던 가장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양육 공동체에 깊고 겸손하게 관여했다. 우리는 성숙시키고, 온전하게 하고, 강하게 하는 자유를 우리 스스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자유는 항상 믿음의 형제들과 공유하는 삶을 통해 발견한다.
자유로부터의 후퇴
모든 세대, 소수의 사람들은 자유 가운데 총명하고 용기 있게 살아간다. 역사상 몇몇 결정적인 시기에 이 서신에 귀 기울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생명의 파도를 타는 것과, 쇠퇴의 길로 표류하는 것의 큰 차이를 인식시키며 그 세대의 방향을 변화시켰다. 사람들이 두려움과 억압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느끼고, 염려와 불안으로 마비가 되었을 때, 이 서신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서신이 되었고, 그들을 격려하여 에너지 넘치는 소망을 갖게 했다. 인생의 의미와 불확실성과 혼란이 멀리 퍼졌을 때, 이 서신은 열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에게 살아 갈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 구속에 참예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갈1:3)→은혜!(삶의 선물), 평강!(삶은 온전하다), 이 두 단어는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결정적으로 살아 갈 자유가 있음을 선언한다.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폐허가 된 가정과 문화에서 우리가 건져 낸 것이 아니다. 삶은 우리가 나아가는 온전한 목표점 일뿐, 길에서 낚아 챌 수 있는 조각이 아니다.
3. 저주할 자유(갈1:6-12)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의 삶을 왜곡하는 사람에게 강력하고 이중적인 저주를 내뱉는다. 신명기에 기록된 저주와 축복의 개념, 바울의 서신에서 나타나는 저주의 개념들은, 하나님이 자유의 오용을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 오용을 무가치하게 하는 결과를 선포한다.
이단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
이단자는 전체 진리에서 단 하나의 항목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부인하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여 선택한 진리를 유일한 진리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과 모든 실재의 유기체적 충만함에 이르는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런 선택에는 단순화가 있지만(이는 매력적이다),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빈곤이 있다. 이단자는 우리 삶을 축소시킴으로써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
바울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듣고 있을 때 그것을 관용하지 않는다. 그런 거짓말이 그들의 삶을 축소시키고, 그들의 심령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과거의 죄책감에 가두며, 염려와 두려움으로 그들을 무력하게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믿는 내용보다 우리 삶의 방식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나약함과 비겁함, 두려워하는 마음과 병적인 감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 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내용을 일게 되면 우리 자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초라하거나 악한 삶을 살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 하는 것은, 실재와 삶의 왜곡이자 삶의 모든 과정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바울은 한 때 다른 복음을 믿었고, 그의 명석한 두뇌와 에너지와 도덕적 열의는 종교적인 미움과 박해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견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진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울에게 다가왔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 모든 것을 잘못 받아 들였고 그가 따른 것은 ‘다른 복음’이었음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심을 확실히 보여주셨다. 죄는 우리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핑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계기임을 확신시켰다.
복음(좋은 소식, ‘유앙겔리온’euangellion)→사40:1-2,9-10.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방책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과 구원이 실로 구원의 모든 것의 중심에 있으며, 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삶이 가능하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늘 사실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삶의 중심이 되거나,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거나,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권세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통합과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의미 있게 여기고,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변화를 이루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소식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며, 자비롭게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소식이다.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신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바다. 우리는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는 용서받아 믿음 가운데서 살 것이다. 우리는 우울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위축되지도 않을 것이고, 징징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찬양하며, 모험하며, 만들어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표현되었고, 온전히 성취되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그분을 영접하면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우리 삶은 죄책감에 사로 잡히고 두려움에 시달리는 데서 자발적이고 희망 가득 찬 삶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4. 변화될 자유(갈1:13-24)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자유의 이야기다. 각각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어떻게 작은 개념들의 한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매인 사슬에서, 죄책과 후회라는 감정적 감옥에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해방되었는지를 다룬다. 우리는 변화될 자유가 있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잘 정돈된 공식처럼 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이야기는 자아와 역사의 복잡성과 모호함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바울의 이야기에 나오는 회심의 5가지 요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진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전의 삶(첫 번째 요소:갈1:13)
바울이 보기에는 종교는 어떤 일을 하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교육을 활용하고, 자신의 종교적 과업으로 너무 바빴으며, 풍요로운 문화적 유산과 신학적 식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위한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갈망이다. 종교란 하나님이 제공하신 자비와 사랑에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다.
대 역전(두 번째 요소: 하나님의 계시→갈1:15-16)
바울의 인생에서 대 역전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더 이상 주변부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신다. 하나님이 핵심 주동자요 창조자였고, 바울은 따라 움직이고 창조되는 존재였다. 바울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각각 “택정하심”을 입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preloved) 이들이다. 이 계시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음을 알았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이 너무 커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는 의미다. 그 이후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이 그에 대해 아시는 바와 같이 그를 위한 계획과 그에게 보여주신 바와 같이 그에게 주신 명령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모시고 받아 들인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생의 살아계신 중심이시며, 우리가 그분을 의식하며 그분과 만족스러운 관계 가운데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분이심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에 따라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도덕적인 계획에 따라 살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맛본다.
고독의 시간(세 번째 요소:갈1:16-17)
아라비아는 고독의 장소였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동화(同化)와 묵상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실재하시며, 우리는 아름답게 정돈된 그분의 창조 세계에 계획된 자녀다. 습관적인 죄책감과 거부감으로 사는 데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와 용납의 삶을 사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한 방법은 아라비아이다. 그곳은 묵상하고 찬양하는 곳이며, 친구나 가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새로 발견한 진리 속으로 우리를 가라앉히는 장소와 시간이다. 일상에서 떠난 고독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세세한 의미를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용납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다. 이러한 날들과 시간을 통해 새로운 힘이 솟아나고, 자유를 누리는 기술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기능을 발휘한다. 바울에게 아라비아는 느긋하게 묵상 훈련을 하는 시간과 장소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새로운 삶의 양식에, 그리고 자신이 용납 받은 존재이고, 가벼이 여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에 익숙해지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기(네 번째 요소: 예루살렘에서→갈1: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는 나누어져야 한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를 택정하여 인격적으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공통되는 구조를 인식한다. 또한 그분은 각각의 이야기가 신선하고 독창적이 되도록 우리의 몸과 감정과 개별적인 특징들을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여 사용하심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의 개별적인 특징들을 이해하며 즐거워한다. 그때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역사가 되는 때’다.
그 이야기를 나누기(다섯 번째 요소:갈1:21-24)
믿음의 이야기는 소명의 영역으로 발전하며, 믿음의 삶은 개인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넘쳐흘러야 한다. 바울의 삶은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사의 삶으로 넘쳐흘렀다. 믿음의 이야기는 언제나 매일의 삶을 향해 열려 있고, 자유로운 사랑의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며 다양한 일의 세계에서 실현된다.
나를 바꾸소서
변화된 삶의 이야기에서 쓸모없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 변화는 단지 ‘영적인’좋은 면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부분과 우리가 살아온 삶을 관통한다. 우리의 열등감, 불충분함, 죄, 차이들, 이 모든 것이 자유의 이야기에 포함되며,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특징들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낸다.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찬양할 자유, 기도할 자유, 믿을 자유,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시간을 가질 자유, 자유를 창조하는 말을 거듭해서 들을 자유를 갖고 있음을 안다.
5. 저항할 자유(갈2:1-10)
성경 자료에서 얻어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경험, 즉 고통과 기쁨, 불가사의한 일과 통찰, 성취와 좌절 등을 인간의 자유의 한 측면으로서 탐구해가며, 각각의 경험을 통해 의미와 은혜를 찾으며 열심히 사는 사람의 모습이며, 그들의 삶은 의심할 여지없이 춤추고 도약하고 용감하게 직면하는 삶이다. 그러나 사실 자유로운 삶을 잘 경험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또한 자유를 잃어버릴 위험에 가장 잘 빠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라디아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전초지였지만, 그곳은 자유를 심히 혐오하고, 밟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유지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자유에 적대적인 세력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인생에서 자유가 위기에 처했던 중요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자유를 억압하는 이들
바울에 따르면 위험의 근원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때문이다” .이들이 자유를 억압하려는 적절한 이유는 전통을 보호하고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은 어떤 민족보다도 도덕의식이 투철했고, 그들에게 자유는 이러한 전통과 도덕을 동시에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위협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고 중요한 것, 즉 자유를 우선적 위치에 두는데 주의를 기울인다. 복음은 자유를 존재의 중심에 둔다. 그것은 부차적이거나, 선택 가능하거나, 전통과 도덕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상부가 아니고 바로 토대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에서 도전 받았던 두 가지 영역은, 디도가 할례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과,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사역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저항할 자유가 있었다.
전제조건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출신 그리스도인인 디도는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복음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 들였고, 존재의 중심에서 용납 받았음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유대인으로부터 할례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우리가 서로를 부분적으로, 혹은 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은 거부와 같다. 그 받아들임은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선물이 아니라, 어떤 길을 따르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내미는 당근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적이고 조건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이 도전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살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이 되는 자유가 없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나 복음은 이 과정을 역전시킨다. 복음은 받아들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자유가 영혼 속으로 밀고 들어와 영적이고 도덕적이고 책임 있는 삶이 자라게 한다. 바울은 염탐에 저항했고 할례의 우위성이나 다른 종교적인 전제 조건과 맞서 싸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냈다.
섬길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두 번째 위협은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역에 대한 도전으로 찾아왔다. 그 당시의 복음 사역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2:10)라는 원리가 잘 확립되어 있었지만, 그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의 자유가 예루살렘에서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틀(예수님과 함께 훈련을 받고, 오순절에 부어진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기도와 금식을 하는 가운데 특별한 위임을 받은 이들)은 아주 분명했지만, 바울은 틀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아이들. 친구, 배우자, 지도자들)에게 이런 사도의 틀을 요구하고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전략을 너무 잘 알아서 우리가 그들을 위한 대본을 써주어야 하며, 그들의 삶을 조종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누군가 자유롭게 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다. 그러면 염려스럽기도 하고 혹 부러워지기도 한다. 가만히 들어가 그들의 자유를 면밀히 살피며, 모든 것이 조직도에 잘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좀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복음이 주는 자유 가운데 하나를 잃어 버린 셈이다. 사랑과 긍휼을 경험할 수 있는 자유, 우리 부모님은 사랑조차 못해본 행위, 우리 동료들은 감히 도전해보지 못한 증거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위대한 자유 중 하나가 선례에서 떠나 독창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아주 독특한 경험과 지성과 상황이 조합된 존재다. 그 독특함을 따라 사는 방식은 아무리 현명하고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위임해줄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자신의 믿음의 반응으로 창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긍휼을 보일 자유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세워놓은 공식에 순응하라는 압력에 저항할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방식에 대해 세워놓은 선례에 대항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들을 듣지 않고 돌아설 자유는 없다. 우리 사회의 실패자들과 거절당한 자들에 대한 가장 미미한 경멸조차도 수용할 자유는 없다.
경계하기
우리들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으로 표현되는 믿음의 자유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통제하고 싶어하며, 그들의 목적에 맞게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며, 힘들게 개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려고” 신앙 공동체에 침투하여 종종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축소, 제한, 관리할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이들의 계략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복음으로 살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할당한 대본을 기억하고 암송하려고 노심초사하며 애쓴다. 그러한 상황은 안전할 수 있지만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종교적인 공동체로는 남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됨의 의미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고, 사랑과 믿음과 소망가운데 넓은 마음으로 살지는 못할 것이다. 바울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용기로부터 유익을 얻는 모든 자유로운 사람은 그가 시작한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끊임없이 깨어 있을 것이다.
6. 탐구할 자유(갈2:11-21)
그리스도는 세상이라는 한계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열린 공간으로 인도하신다. 세상의 강박적인 자기 몰입에서 나와 광대한 공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기로 결단할 때, 우리는 신비의 세계로, 성숙함으로, 분리하거나 관리하는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풍부함으로 들어간다. 실재는 그것을 관리하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 확장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정욕이나 탐욕이나 두려움이 있는 좁은 영역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믿음 가운데서 건전한 자유를 키우고 보호하는 힘든 삶을 사는 서로를 격려한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로부터 세상에 속박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는 법, 사로잡혀 사는 법이 아니라 자박적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즉 여기에서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자유로운 삶의 여러 요소들(5가지)을 탐구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갈2:16, 첫 번째 탐구)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최고의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의롭게 되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과 참여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는 창조를 확증하시고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대행자시며, 우리를 창조 때의 상황으로 회복시키며,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다. 인간성의 외적 한계에 대해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분이시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2:16, 두 번째 탐구)
이 구절은 율법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바로 의식되어져 있는 선한 행위나 종교적 행위이다. 이러한 것들은 꼭 누군가를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를 옥죈다. 이러한 삶에는 기쁨이 없고, 우리 마음을 말하고, 우리 마음에 있는 대로 행하고, 찬양하고, 믿고,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되고,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용납 받는 자유로운 공간이 없다.
죄인으로 드러나면(갈2:17, 세 번째 탐구)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선해지려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는 죄인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들에 대해 항상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자신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에 대한 비난을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에 투사하느라 지칠 필요가 없이,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실제의 우리 모습을 만나게 되고, 엄청난 영역에서 책임감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용서를 경험할 수 있고,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창조적인 새로운 성장을 향한 에너지가 흘러넘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 네 번째 탐구)
십자가 죽음은, 한 방식의 삶을 마감하고 다른 방식의 삶을 여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소중히 여기고 만족시키고 칭송하던 삶을 끝내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과 산 제사로 올려지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끝은 우리가 새로 출발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경험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경험한다. 그리스도로 출발해서, 십자가의 부활을 통한 온전한 계시로 출발해서 우리는 광대하게, 대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갈2:21, 다섯 번째 탐구)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대기와 같다. 은혜의 영역들을 탐구하면서 우리는 취하는(take)존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receive)존재에 다가간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자유롭게 산다면 우리는 수용하며 감사할 것이다. 은혜를 개인적으로 탐구하면 모든 사람과 사물에 관련된 자유를 키워갈 수 있다.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 그저 발견하고 받아들이고 탐구한다.
7. 생각할 자유(갈3:1-14)
겉모습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 종교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특히 그들에게 그들의 입장에 대해, 특히 할례라는 표징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할례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삶의 가장 찬란한 상진이며, 할례 받은 사람은 명령을 받은 사람, 순종하는 사람,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할례는 육체의 일부를 없애는 것인데 이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방된 삶의 표시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섯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들은 종교의 겉모습을 통과하고 내면의 실재를 보게 하는 X-Ray이다. 우리는 지성(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추론하는 능력, 오늘 일어난 일과 작년에 일어난 일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가시적, 비가시적 증거를 다 모으는 능력, 우리가 약속으로 받은 것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지각으로 경험한 것을 붙잡는 능력, 성경을 정확하게 읽고,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읽는 능력은 자유로운 삶에 필수적이다. 겉모습과 실재의 이런 본질적 차이와 대조적인 요소를 파악하는 이 복잡한 작업과, 그 요소를 내부에 있는 창조되고 구속된 질서를 분별하는 일이 지성의 과제다)을 사용하지 않으면 겉모습의 포로가 되어간다. 우리에게는 종종, 우리의 무디고 생각 없는 상태를 뿌리치고, 발달단계를 분별하고 인간관계들을 점검하게 해줄, 즉 우리의 생각의 자유를 훈련하게 해줄 자극이 필요하다.
균형감각(갈3:1, 첫 번째 질문)
실재를 정확하게 인지하려면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한다. 분별 있는 사람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려내어 적절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모든 사실에 우선하는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것은 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할례와 상관이 있으며, 능력과 의미의 측면에서 이런 상징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인들은 십자가를 종교적으로 하찮은 목록으로 취급하고 할례를 중요한 이슈로 삼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일은 핵심이자 근본적인 실재이며, 필수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십자가는 그 진리를 알려준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음을 인식한다.
경험(갈3:2, 두 번째 질문)
제 정신(우리의 경험을 기억하고 유지하고 사용한다는 의미)인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성찰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정신 나간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접촉하지 못하며, 그들은 어린 시절과 동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당시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최근에 느꼈던 분노나 죄책감이나 수치나 기쁨 같은 감동적인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진행되고 있는 현재와 통합하지 못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인긴 관계를 맺고 있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 경험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며 그분의 삶을 우리와 공유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이다. 이 기본적인 신뢰는 우리의 모든 관계와 지각을 통해 효력을 발휘한다. 그것을 잊고 있다면 이는 실재에 기본이 되는 것을 잃고, 파편화되는 것이며, 결코 통합적으로 살 수 없게 하는 편향된 감정이나 사건이나 기억에 좌우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다시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닿게 해준다.
상식(갈3:3, 세 번째 질문)
상식은 정상적인 사람의 한 측면이다. 상식은 매일의 실재와 관련하여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는 능력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는 삶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이르는 길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길을 시작하고,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강렬하고 더 풍요롭게 살아간다. 복음에 계속 뿌리를 두며, 복음을 굳게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위대한 진리들을 매일의 일들에 적용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관(갈3:4, 네 번째 질문)
우리는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건전한 가치체계를 갖는다. 우리에게 가치관이 없다면 ‘헛되이’사는 것이다. 가치관을 잃으면, 모든 유혹과 권유와 돈, 에너지, 시간에 대한 요구들에 좌우된다. 가치관은 방향과 목적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우리 삶을 연결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고상한 목적을 위해 더 큰 목적을 향해 가는 자유를 갖게 해준다. 복음은 우리를 정상적이고 건전한 가치관에 맞닿아 있게 해준다.
하나님(갈3:5, 다섯 번째 질문)
복음은 우리에게 풍요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맞닿아 있게 해준다. 하나님이라는 실재와 떨어져 있다면, 우리 삶은 궁색해지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기억하고 사는 우리는 내려놓음의 의식으로 살며, 담대한 즐거움과 자유로운 신뢰와, 자유로운 소망과, 자유로운 사랑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그 실재와 맞닿아 있기를 바란다.
8. 실패할 자유(갈3:15-27)
실패할 자유가 있는 사람은 가장 자유롭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자유를 방해하며, 실패할 수 있는 자유는 자유를 격려한다. 믿음의 삶은, 종종 실패로 귀결되더라도 위험을 감수할 것을 격려한다. 그것은 위기와 미지의 것을 향한 인간의 모험을 격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나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종종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가 결코 재앙이 아닌 것은 그 실패가 우리 인간성의 새로운 깊이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깨닫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성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유로운 삶이 있다. 바울의 설교에서, 실패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대면해야 하고 견뎌내는 것이다. 율법은 실패와 대면하고 그것을 견뎌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지침서다.
믿음에 대한 각주
자유로운 삶은 믿음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삶에서 시작된다. 모세는 항상 아브라함 아래 있어야 한다. 율법은 항상 믿음의 각주여야 한다. 그러나 바울의 이전 경험에서 모세는 성공적인 삶의 교과서였고, 아브라함은 단순한 서문 역할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중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모세 율법의 성격도 바뀌었다.
율법은 믿음의 삶에서의 실패들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도록 사용되는 대신, 믿음의 순례 여정에서 경험 없는 인간들을 안내하는데 사용되는 대신 성공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즉, 그것은 지키기만 한다면, 삶에서 위험과 모험과 성숙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회가 칭송하는 완벽한 행위를 보증하는 일련의 규칙들이었다. 바울은 이제 원래의 비중을 되찾는다. 아브라함은 자유로운 믿음의 삶의 철저하고 완전한 해설이 되었고, 모세는 믿음의 삶에 통상적으로 있는 실패를 통과하는 우리를 격려하고 지도하기 위한 좀 더 작은 부록이 되었다.
자유를 위한 화살표
율법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반응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정신과 건강과 자유를 보존해 주었다. 율법의 히브리어 어근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던지다’이다. 그것은 과녁을 향해 가는 화살처럼 방향을 정해 놓고 던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적 방향 감각’이다. 율법 화살표가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한 그것은 믿음의 자유로운 삶을 지원한다.
율법을 능숙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무엇에 사용할지 정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철저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삶의 첫 번째 반응도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종교와 본향과 문화와 안전을 버려두고 서방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 하나님이 중요했고, 하나님께 귀 기울였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을 믿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믿음의 삶의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는 바로 우리 삶으로 응답한다. 우리 속에 있는 것과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이 근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에 따라 조정되고 정리된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움직이고, 인도받는 대로 담대하게 삶의 모험을 감행해 나간다.
인생은 열려 있다. 갈대아 우르의 답답하고 지루한 삶(풍요롭고, 억압적이고, 단조로운 삶)대신, 금욕적인 사막에서의 바람에 날리는 삶이 있다. 그곳은 인간적인 성취는 없지만 위대하고 보이지 않는 은혜와 사랑과 소망에 응답할 기회는 충분히 있는 곳이다. 삶은 모험, 성장, 탐구, 믿음이 된다. 아브라함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실제적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상세한 지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바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실패와 의심과 죄와 절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내었다. 그는 따랐고, 고백했고, 기도했고, 믿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하나님이 그의 중심이셨다.
일시적인 초등교사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라 부른다. 즉, 율법은 우리를 믿음의 장소로, 그리스도께 넘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험을 감행하고 선택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우리는 실패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믿음으로 실패하며, 믿음으로 용서하며, 믿음으로 자비롭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살지는 못한다. 성공은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성공은 믿음의 위험과 모험을 거부하고, 인간이 되기보다는 옳게 보이고자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취하는 비 성경적인 짐이다.
9. 믿을 자유(갈3:28-4:11)
종이냐, 유업을 이을 자냐?
자유란, 스스로 자유로우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수동적인 신뢰로 시작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에 관한 실제 상황을 모른다면 자유롭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면(우리를 아들과 딸들이 아니라 종으로 잘못 파악한다면) 무력감을 느끼며 냉담하게 살거나, 해방의 기회가 얼마 없음을 알고 분노하며 모든 단계를 싸우며 나갈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해도 해방되는 때가 오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미래의 정복을 꿈꾸며 공상과 환상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미래에 있고 꿈같은 상상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되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종이 아니며, 독립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유산을 모두 받을 수 있는 다 자란 아들이요 딸이다. 움켜쥐는 것도 없고 환상도 없다. 받는 것만이 자유에 이르는 방식이다.
관계에서의 자유
자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격적인 경험이다. 아들이나 딸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묘사하며, 우리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존재이고, 우리의 인간됨을 한 분과의 관계 안에 둔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실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그분은 우리 삶의 기원이 되시고 계속해서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시는 하나님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같고, 이 자유의 경험을 살아 낸다는 것은 날마다 자유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등한 자유(갈3:28)
우리는 자유롭게 살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과 본질적으로 동등함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로서의 모든 차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중요하고 공통된 관계(공통된 기원, 공통된 본성, 공통된 운명, 공통된 주님)아래 종속된다. 이제 우리가 지음 받은 이 모든 기본적인 조화와 연속성은 경험할 수 있고 발전될 수 있다. 동등하게 용납 받은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경험한다. 축소나 협박을 두려워 않고서 말이다.
값비싼 보물(갈4:3-5)
자유롭게 살 때 우리는 또한 엄청난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열등감을 품고 성장하며, 우리는 늘 쉽게 자기 회의에 빠진다.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중요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수고는 그리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에게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며, 불충분하다는 느낌은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장점을 표현할 동기도 없고, 우리의 은사를 개발할 확신도 없고 그 날의 축복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복음은 구속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런 식으로 종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3-5). 이 일은 우리 각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다. 우리는 구속 받기 위해 선택되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한 값이 지불되었다. 나는 이제 아들이 되었으므로 특별한 돌봄과 세심한 관심을 받는다. 나는 독특한 존재이다. 그러한 가치 의식으로 나는 이전보다 더 깊고 넓은 영역에서 자유를 경험한다.
가족의 친밀함
자유롭게 살 때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깨닫는다. 바울은 이 친밀함을 아빠(Abba)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묘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친밀감으로 들어간다. 우리 자신을 나누는 자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는 자유, 자발적이고 인격적이고 방해 받지 않을 자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자유, 이것은 친밀하고 자유로운 가족관계다.
지금 자유롭다
“때가 차매”(갈4:4)라는 구절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은 모두 지금 실현됨을 주장한다. 현재 순간은 다른 어느 때보다 영원과 닮아 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 모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온전히 경험하기를 거부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믿음으로 우리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유롭게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현재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살기를 선호하는 것은 향수다. 과거는 우리가 달려 온 경주의 경험을 정리하는데 아주 유용하며, 현재의 강렬한 삶에 추진력과 지혜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공상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된다면 죄다. 미래에 살기를 선호하는 것은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에게 목적의식을 주고, 초점과 방향을 주는 소망을 표현하는데 아주 유용하지만, 환상으로 도피하는 미래는 죄다.
“때가 차매”(이 현재가 더 이상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복합적인 현재임을 강조)와 “유업을 이을 자”(약속의 과거와 기대하는 미래가 실현된 자유의 현재에 꼭 들어맞는 특별한 사람을 묘사)라는 단어는 시간의 세 측면을 자유로운 현재로 모아준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계1:8)인 예수님은 현재로 시작하고 과거를 모으고 미래를 끌어 들인다. 이렇게 현재는 더 이상 단순한 현재가 아닌, 자유가 수용되고 실현되는 강렬하고 거대한 “때가 찬 순간”이다. 때가 찬 시대를 사는 유업을 이룰 자는 “자유의 온전한 의미를 회복할 “ 자리에 있다. 종은 제한 속에서 살고, 아들과 딸은 기회가 확장되는 가운데 산다. 우리는 받을 자유가 있고 지금 날마다 더 많은 것이 열려 있다.
10. 신뢰할 자유(갈4:12-31)
필연적인 자유
자유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통제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자유롭게 굴복함으로써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존재가 낯선 이의 질병이든, 압도적인 실망이든, 이해할 수 없는 실패든, 무익한 고독감이든 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약속을 하는 사람들을 좇음으로써가 아니라, 긍휼과 사랑 어린 섬김의 행위를 통해 자유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는 유명 인사나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삶의 부드러운 해결책을 움켜쥠으로써가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과 질병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깨닫는다.
바울의 심한 질병과 갈라디아인들의 긍휼 어린 돌봄이 만나는 순간은 그들의 삶에서 멋진 순간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당시에 자유를 알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갇혀 있었다. 바울은 의도했던 곳으로 갈 수 없었고,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필요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깊은 만족이었다. 자유는 조종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통제하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문제들을 맡기는 데서 나온다.
우리의 계획에 얽매임
잘 알려진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신뢰할 때 오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려 할 때 찾아오는 자유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한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고, 다른 아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의심으로 태어났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조급함의 산물이었고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한 것이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자신의 일을 하신 결과였다. 이스마엘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삭은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이어갔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대 재앙은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는데 하갈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인생의 업적은, 그가 실행에 옮겼던 계획이나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해주신 일이었다.
옛 역사의 편린에서 얻는 교훈은 분명하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삶을 조종하려는 순간, 우리는 우리 계획의 노예가 되고, 우리 자신의 형식주의에 매이고, 슬프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맞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마엘 자손들은 수세기 동안 믿음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유의 삶은 받아 들이고, 믿고, 용납하고, 소망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이 약속을 지키시므로 우리는 자유로이 신뢰한다.
우리가 신뢰할 때까지
“자아를 넘어서는 영원한 문인 종교조차도 하나의 기술이 된다. 자기 개선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한, 더 영원한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한, 거룩함을 생산해 내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종교를 통해 자기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기도드리기, 포기하기, 미혹을 이겨내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자아는 너무나 자주 재건축과 완벽한 자아를 희망하여 하늘에 계신 궁극적인 해결자에게로 나아간다. 이것은 자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고,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통제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럴드 메이 -『Simply Sane』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습과 그분의 자비로 우리가 될 수 있는 모습 그대로 있도록 우리를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우리를 조종하고 이용하려는 시도들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구속 받지 않는 믿음의 삶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격려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며 우리 삶을 통제하려는 그들의 말을 믿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11. 서 있을 자유(갈5:1-12)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서있을 자유가 있다. 필연이라는 울창한 숲에 잘 치워진 공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라갈 수 있고, 용서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 서있기 위해서는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맞서 싸워야 한다. 자유의 선물과 경험은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한 평의 땅을 의미한다. 그것은 포기해서도 안되며 그것은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해서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한 평의 땅을 위해 승리하신 전투에서 자기 생명을 주셨다. 그것은 잘 보존되어야 하며, 어느 누구도, 무엇이라도 그 땅을 침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땅에서 자유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의 공기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눌린 자를 자유롭게”(눅4:18)하는 것이라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해방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해방가운데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선언 받고 경험한다.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죄와 금지와 처벌이 있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자아와 편견, 두려움과 죄의 감옥으로부터 흠잡을 데 없는 상태로 풀려난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고 자유의 휘파람을 부는데 영원히 서있을 수는 없다.
과거의 노예
바울에게 출애굽 이야기는 자유에 대한 어떤 이해에서든 중심축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네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작동시키시고, 제공하시고, 창조하시는 말씀이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우주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약속하셨고, 복을 주셨다. 다시 말해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집트에 있는 그들의 후손은 일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그들에게 어디서 살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예배할지를 말해주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지배했을 때 그들은 자유롭게 살았지만, 인간이 그들의 삶을 지배했을 때 그들은 종이 되어 살았다.
그 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은 그들 뒤로 남겨진 종의 삶에서 떠났다. 그들은 또한 안락한 안전과 정교한 문화 등, 의지할 수 있는 일상으로 판명 난 그 곳을 떠났다. 황량한 광야에서 그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자유와 하나님께 드리는 약간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된 불안정한 식사뿐이었다. 그들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야영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는 삶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종이 아닌 자유로운 백성으로 사는 법을 훈련 받을 것이고,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법이 의미하는 바를 발견할 것이고, 바로의 폭정이 아닌 하나님의 신중한 축복아래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갈 것이다. 4세기 동안 그들은 몇몇 미라를 보존하기 위한 장엄한 무덤들을 세웠지만, 이제 그들은 살아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자유의 헌장
십계명은 자유로운 삶의 가치관을 제공하고 보호해준다. 즉 하나님의 실재와 진리가, 상업화와 온갖 조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인간의 삶이 존중 받으며 일의 존엄성이 보호를 받는다.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진리가 존중 받는다. 각각의 계명은, 그것이 없다면 자유로운 삶이 불가능한 실재를 표현하며 보호한다.
사람들은 항상 요구는 하지 않고 보상만 해주는 종교, 기다림이나 공허함 같은 것이 없이 그들을 매료시키고 흥겹게 해주는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따라 살 수 있는 환경으로 거대하고 아름답고 복잡한 창조 세계를 제공해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고통스럽고 철저하게 완성하신 구속을 제공해 주셨다…..그러나 우리는 자유나 믿음의 힘겨운 삶이 지루해져서 하나님을 어떤 장식이나 부적이나 흔적으로 축소시키는 옛 종의 종교로 후퇴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는 고통을 경감시켜주고 공허함과 기다림의 순간을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인 개념과 관행을 사들인다. 살아 있는 믿음은 유아기적 종교와 교환된다. 우리는 어리석고 게으르게도 자유의 확실한 토대를 버림으로써 그리고 옛날의 정서적인 의존 상태나 영적인 미신과 같은 가시덤불에 연루시키는 관행에 손을 댐으로써 우리 삶을 격하시키고 축소시킨다.
종교의 위협
자유로운 삶의 가장 큰 위협은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곳에서 온다. 즉 종교, 특히 이전의 종교, 어린 시절의 종교, 신경증적인 종교로부터 온다. 불안정과 매서운 바람을 수반하는 자유로운 공기 가운데서 자유롭게 사는 우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이전 종교에 대한 갑작스런 향수에 빠진다. 이는 과거에서 빌려온 것 일수도 있고, 환경과 눈에 띄지 않게 타협한 것 일수도 있다 (예: 금송아지, 유대주의의 할례, 감상주의적인 기도, 정형화된 감정, 형식적인 설명…등). 종교적인 친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향상시키거나 바로 잡거나 정당화하는 방법들을 제안하거나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순응하며 안전이나 칭송을 보상으로 받고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소한 일탈은 서서히 자유의 기초를 침식하고 그리스도께서 해방을 통해서 만들어 놓으신 큰 공간을 축소시킨다.
가롯 유다는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지만 그 자유 안에 굳게 서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준 자유를, 그 해방자를 파괴시키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종살이였다.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엄청난 짐을 진 그는 자살을 함으로써 자유를 모독하는 최종적인 행위로 생을 마감했다.
천둥 같은 소환
바울에게 자유는 핵심적인 것이었다. 자유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고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다시금 자유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잃을 것이다. 엘룰은 이렇게 쓴다. “새로운 자유의 행위가 계속 요구된다. 자유는 결코 안정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것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실재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 성스러운 것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나는 천둥 같은 소환에 다시 응답해야한다”( 『Ethics of Freedom』 중에서)
12. 사랑할 자유(갈5:13-21)
바울은 자유의 이중적인 면모를 의식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받은 자유를 아껴서도 안되고, 움츠러들게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회다. 자유는 기회의 한 측면일 뿐 우리가 수동적으로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선택을 하는 탁 트인 공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는 선원에게 불어오는 상쾌한 미풍과 같다. 이는 그날을 귀하고 즐거운 날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항해를 할 때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책임이 따른 자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이것이 자유의 위험을 다루는 복음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유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길,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동에 있다. 사랑만이, 파괴적이지 않고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약하게 하는 대신 생기를 주는 방식으로 자유를 표현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고(요일4:19),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요일4:11)임을 가르친다. 사랑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사랑을 맺거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녀로 서있고 내 앞에는 형제와 자매로 서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라”- William Law -『A Serious Call to a Holy Life』).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사랑할 자유가 없다. 그가 내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고 싶거나, 나를 위해 그를 이용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자유를 잃을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자유로이 선택 받은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알고 책임 있게 대응한다. 사랑이 없다면 자유는 금세 사사기에 묘사된(“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무질서 상태로 붕괴된다.
사랑은 자유로운 행위다 일단 사랑을 실천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의 가장 가치 있는 한 가지 행위임을 알게 된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유는 안전으로 길들여지지도 않고 헛되이 낭비되지도 않는다. 사랑만이 자연스러운 피조물의 깊고 길들여지지 않은 아름다움과 미리 측량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는 합리적인 일관성과 균형 잡힌 영성과도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은 자발성과 신실함의 아름다움을 합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것은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이 아니라 성취하는 행동이다.
최고의 자유로운 행동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최고의 의도와 최고의 능력이 어디로 행해야 할지 제시해준다.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선택하신 한 사람과의 동반자 관계와 우정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정돈시킨다. 그 행동은 감정이나 상황, 편견이나 관습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우리 원수도, 무의미한 사람도, 내게 가치가 없고 유익도 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사람도, 불쾌하게 보이는 사람도 자유로이 사랑한다. 그것이 위대한 사랑의 자유다. 그것은 이 다른 사람과 함께 독특하게 나 자신이 되는 자유를 의미한다.
사랑의 심령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복종할 때 사랑할 자유는 유지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가 아니라 그저 어떤 행동을 받을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들이 있다. 바로 지시를 받을 때, 말을 들을 때, 사랑을 받을 때, 인도하심을 받을 때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유로운 행동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나 세상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과 수동성이 재탄생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자유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반응할 자유가 있다. 사물과의 풍부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행동으로 선을 공유하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자유가 있다. 이 자유로운 행동들은 향상시키고,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하고, 창조한다.
13. 창조할 자유(갈5:22-6:5)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적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창조할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쓰이지 않는 대본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창조적으로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 삶에 새로운 자질들, 새로운 실재들을 계속해서 가져다주신다. 사람들이 그들 안에서, 주위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조해 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
바울이 갈5:19-21절을 통하여 언급한 것처럼, 죄의 결과는 무질서와 혼돈을 낳는다. 그러나 창조적이며 자유롭게 사는 삶은 균형이 잡힌 삶으로 귀결된다. 갈5:22절은 세 항목으로 된 세 개의 그룹으로 되어 있다.
① 첫 번째 그룹: 인간의 자유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
“사랑”: 내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진리
“희락”: 하나님의 생명에서 내 생명으로 값없이 흘러넘치는 충만함과 활력을 발견
“화평”: 하나님은 내 경험의 불균형과 모순을 통하여 일하시며 거기에 조화를 가져다 주신다는 깨달음
②두 번째 그룹: 인격적인 성장과 관련이 있는 자유
“인내”: 서두르지 않고,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와 함께 머무르는 자유인
“자비”: 강제나 억압이나 밀어붙이지 않고, 삶을 느슨하고 여유 있게 다루는 자유인
“양선”: 선한 창조 세계로 삶을 보고 그에게 반응하는 자유인
③세 번째 그룹: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우리 자유의 여러 측면
“충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의미에 기초한 오랜 충성스런 헌신에 참여한 자유인
“온유”: 감당할 수 없는 세상에 소금과 빛과 누룩이 되는 자유인
“절제”: 우리 에너지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고 훈련할 자유인
성령께서는 자유로운 창조의 모든 행위를 위해 모든 것, 모든 은혜, 모든 수단을 제공하신다. 이 모든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믿음의 삶의 결과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성령의 선물로 창조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것이다.
창조성이 갖는 세상 정원
인간됨에 대한 심오한 정의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창1:2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임을 배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자기 능력에 형식적인 순종을 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르시며 그도 창조자로 만드셨다. 자유로운 창조성은 그 창조주의 위대한 부르심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인간의 창의적인 사역은 창조주의 비밀스런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베르자예프-『The Destiny of Man』
우리의 나라는 간다(갈5:24)
바울은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리 자신의 창조적인 사역으로 전이한다고 선언한다. …창조는 새로운 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비창조적인 옛일, 곧 옛 습관, 옛 반응, 옛 기대, 옛 업적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의 나라가 오기”위해서는 “우리의 나라가 가는 것”이 꼭 필요하고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자아가 더 많이 있을수록 하나님은 거기에 더 적게 계시기 때문이다. 삶의 신적이고 영원한 온전함은, 갈망과 이기심, 자아 중심적인 사고, 느낌, 소망과 행동으로 점철된 부분적이고 분리된 삶을 의도적으로 버리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Aldous Huxley-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임이 시작되다
무엇을 창조하는가? 바울은 세 가지 실례를 제시한다.
① 우리는 용서함으로 창조적으로 사는 자유를 누린다(갈6:1)
묵인은 이 세상 사람들의 잘못을 다루는 어려움을 피하는 게으름일 뿐이다. 반면, 온유한 용서는 상처 받은 사람과 지친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반항적인 사람들과 숙련되고 훈련된 상호 작용을 통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예술가의 일이다.
② 우리는 도움을 줌으로써 창조적으로 사는 자유를 누린다(갈6:2)
우리의 정체성과 구원이 그리스도의 삶으로 말미암을 때, 우리는 너무 무거운 짐 아래서 찌부려뜨려진 사람의 수준까지 낮아져서 그 사람을 높이고 그와 함께 전진해 나가는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진 사람들 속에 두는 자유를 누린다.
③ 우리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창조적으로 사는 자유를 누린다(갈6:4)
우리가 ‘자기의 짐을 지지’않고 다른 사람의 짐에 신경 쓸 때 창조성은 엄청나게 낭비된다.
이 세 가지 실례는 창조성을 향한 자극적인 행동이며, 이것들은 죄인을 용서해야 하는 매일의 사역, 상처 입은 자를 돕고, 개인적인 책임을 지는 삶에서 독창적인 은혜가 가능하다는 창조적인 깨달음을 자극하는 자극제다. …..창조는 계속된다. 세상의 거리의 들판, 가정과 시장은 문화가 아닌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창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14. 나누어줄 자유(갈6:6-10)
필요와 은사
자유는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삶이다. 이상적인 모습은 독립이 아니라 상호의존이다. 나누어주는 행위는 자유로운 삶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을 때 상호성을 인식하고, 상호 의존관계로 들어간다. 우리는 상호성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내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강점과 약점 모두를, 짐과 능력 모두를 공유하는 자유를 누린다. 가장 완벽하고 온전한 인간이신 주님도 자급자족하지 않으셨다. 마리아가 그분의 발을 씻겼고, 구레네 시몬이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지만, 약한 자 역시 강한 자를 섬긴다. 삶에서 좋은 것들을 얻을 때 우리는 점점 독립적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를 저장하기 위해 더 큰 창고를 짓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누고 돕고 주는 새로운 배출구를 찾는다.
성령에 속박됨
우리의 불완전함, 약함,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누어줄 자유를 누린다.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삶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이고, 자아 도취에 사로잡히는 일은 성령을 속박하는 일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그 자신에게 매몰된 사람이다. 자아에 사로잡히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외곽으로 몰아내고 그들에게 내 자존감을 확인해 줄 규칙을 할당한다. “내가 어떻게 보는가?”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이용 함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섬김으로써 자유를 증진시킨다. 자아 사랑, 자아의 즐거움, 자아 개선, 자아를 섬기는 삶은 결국 부패로 끝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자아에만 몰두 하는 것, 도움을 주고 받는 유기적 관계를 끊는 것은 허영이다. 그것은 부패만 양산할 뿐이다.
선으로 수확하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 그것은 열린 마음으로 책임 있게 사는 삶, 곧 상호성의 삶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것, 곧 사랑, 구원, 치유, 돌보심을 경험하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돌보라고 가르친다. 돌봄은 가장 위대한 일이다. 돌봄이 가장 중요하다”-폰 휘겔-)
나누어주는 행위는 삶의 토양에 심겨진 씨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확실히 나타날 것이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결단은 씨다. 태도도, 행동도, 기도도, 생각도 모두 씨다. 이 모든 것이 수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심는 일과 수확하는 일 사이에는 긴 시간의 어둠과 무명 시절과 침묵이 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경작하고, 김을 매고, 양분을 공급하고, 다른 씨를 심는 일이 진행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그 과업은 끝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상도 없는 것 같고 충분한 평가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주는 일은 지치는 일이다. 그런데 왜 계속해야 하는가? 추수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누어주는 자유를 누리려면 끈질기고 신실하고 꾸준한 믿음과 소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관대한 삶을 살고자, 가치 있고 극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나누어 주는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는 저 먼 장소나 극한 상황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바울은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는 것은, 다른 대륙에 있는 이들에게 긍휼을 전한다는 핑계로 무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역의 90%를 열 두 명의 유대인에게 국한시키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로운 삶의 깊은 비밀은, 자아를 중심에 둔 두려움에서 해방될 때, 우리 자신의 능력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15. 죽을 자유(갈6:11-18)
십자가로 영화롭게 함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결정론과 필연의 이 세상, 우리가 원하고 계획된 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생물학, 경제학, 심리학과 종교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거기에 참여하셨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평결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나 그 복종은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선택한 결과였다. “악이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 악으로 그것에 보복하고, 반응하고, 되돌려주고, 그래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악을 흡수하고 그것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면, 악은 힘을 잃는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악을 다룬 방식이 이러했다고 본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 지치지 않는 순종으로 그들의 공격을 계속 흡수하는 것이다”. -John A.T. Robinson- 『The Body』
바울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죽음을 영광스러워 한다.(“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그가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 매일의 실존 세계로 들어 오셨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곳, 우리의 선한 의도와 악한 충동이 서로 우위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곳, 희망과 절망이 분투하는 곳,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는 곳, 모든 것이 추함과 부정으로 끝나는 곳, 삶이 공평하지 않은 곳, 모든 일이 최선의 결과를 낳지 않는 곳이다.
자유와 삶을 노래하다
바울은 그 자신의 삶의 의미가 십자가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십자가를 영광스러워 한다. 그는 어려움에 빠져 있었을 때, 믿음의 도전이나 모순에 사로잡혔을 때, 파선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모욕당했을 때 자유를 경험했다. 그는 이 자유로운 삶의 근원을 십자가에 둔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한”십자가에 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우리는 죽을 자유를 얻기 위해 풀려난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죽음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 유익한 일이다. 삶으로서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고,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는 법을 안다면, 그렇게 죽는다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고침 받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용된다”. 하나님은 즉시 이 새로운 길, 즉 부활을 행하신다.
죽을 자유는 자유의 절정이다 (“한 알의 밀이….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내가 더 이상 내 삶을 보호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더 이상 내 삶을 정당화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믿음으로 살아 갈 자유를 누린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 매일의 삶을 집어 삼키는 사소한 근심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삶을 인격적이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과제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유
죽을 자유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의 궁극적인 표현이신 부활에 참여할 자유를 누린다. 부활은 우리의 흔해빠진 일상적인 삶의 예외가 아니라 약속되고 확실한 결론이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일로 귀결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으로 지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부활은 우리 가운데,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다.
피 묻은 진리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우리 사회는 두 접근법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지하게 도덕적 이상과 책임을 추구하며 자신들의 프로그램에서 다른 이들을 참여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할례자들). 그리고 그들의 우선순위는 다른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임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무할례자들). 이 둘은 둘 다 자유를 주장한다. 문화는 이 둘 사이의 경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바울은 이 두 대안을 거부했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어 보이지만, 둘 다 죽음을 다루기를 거부하는 면에서는 똑같다. 그들은 죽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삶을 붙든다. 무할례자들은 덧없는 날들에서 나와 행복을 붙잡을 때 필사적이다. 할례자들은 타락한 사회의 혼란에서 의미를 보존하는데 필사적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필사적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다 알고 너무도 신뢰하기에 죽을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한 쪽은 강박적이고 걱정스러운 도덕적인 사람들이고, 다른 한 쪽은 미쳐 날뛰며 망상에 사로잡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완고한 도덕주의, 유머가 없는 행복, 둘 다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자유로이 살고자 한다면,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필요하다. 당신이나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필요하다.
니체는 “내게 모든 진리는 피 묻은 진리이다 “라고 말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노라”라고 말했다. 우리는 직면해야만 하는 십자가 죽음이 있다. 삶으로 살아내야 할 자유가 있다. 누려야 할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은 이후 세대들에게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룬 자유로운 삶의 표시인 ‘스티그마타(stigmata)’로 여겨졌다.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자유를 누리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유로운 삶 전체에 스펙트럼을 열어 주셨다. 십자가 복음 뒤에는 부활이 따른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부활은 위대하고 경이롭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또한 십자가 죽음의 불가피한 결과다. 부활에 참여함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자유로운 삶(가볍게 여행하는 삶)이 가능하다. 부활은 우리도 자유로이 그분과 함께 거하고 서로 함께 거할 수 있도록 자유로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분이 자유로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이 살 수 있도록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