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여(중리)문중>
부산 항일 학생 의거와 지역 항일 운동의 주역 문인갑 선생
반여 중리마을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 중리 문중 장남
부산 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 말 전시 체제 하에서 일어 난 대규모 학생 투쟁 운동이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전시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급기야 조선 학생들의 군사 전력 증강으로 이어졌다.
1940년 11월23일 부산 마산 진주 인근 지역 학생들을 소집하여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대회를 개최하였다. 참가 학교는 조선인학교 동래중학(현 동래고), 부산2상(현 개성고, 구 부산상고), 진주농업, 진중중학과 일본인학교 부산중학, 부산1상, 마산중학이었다. 제2회 대회에서는 일본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편파적인 운영과 심판으로 부산중학을 우승 시켜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폐회식 때 분노한 학생들은 일장기 하강식 때 일본국가 대신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운동장 밖으로 나와 정렬한 뒤 황성옛터,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타령, 쾌지나칭칭 등 우리 민요를 부르며 “조선독립만세”, “일본놈을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절규하며 항의하고 영주터널 오른편에 위치한 심판장 노다이의 관사로 몰려가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일련의 사건이 종료된 뒤 동래중과 부산2상의 학생 200명이 검거되었다. 이 중 옥중고문으로 2명(김선갑, 김명수)는 순국하였고 14명은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학교에서는 총 83명을 처벌 하였다.
이 일로 반여동 중리마을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 반여 중리 문중 장남으로 동래고보 4년(1940.11.21~) 문인갑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학처분을 받았다.
이 후 1942년 졸업한 동창과 재학생과 뜻을 같이하여 조선청년독립당에 가담, 대다수 당원들의 졸업과 동시에 행동범위를 넓혔으며 모든 당원은 각처로 침투하여 활약하게 되고 각지의 항일 비밀결사 <자일회, 순국당> 등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44년 8월1일 양증모의 집에서 조선청년독립당은 일군 탄약고를 폭파하고 구포 철교에서 일본 군용열차를 폭파하기로 결의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는 일군에 지원 입대하여 연함군에 투항한 후 중국에서 재결합하기로 했다. 그러나 순국당의 백모와 관련한 사실이 압수된 일기장을 통해 밝혀지면서 체포되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을 받으며 옥중생활을 하다 해방과 더불어 풀려 났다.
그 후 문인갑 선생은 오랜 교직생활을 하였으며 부산사대부고 교장을 역임하다 정년 퇴임하였다. 2008년 숙환으로 별세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