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선욱현, 1968년 광주 출생. 무슨 예감에서였는지 초등학교 때부터 새 국어책을 받으면 희곡부터 찾아 읽었다. 자신이 맡고 싶은 배역을 어서 점 찍어 놓고 싶어서였다. 또 그때부터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은 빼놓지 않고 봤다. 부모님이 주무시는 어두운 방에서 4학년짜리 머슴애가 흑백 텔레비전 앞에서 자정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있는 풍경이 아직도 생생히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썼지만 좋은 평은 듣지 못했다. 선생님으로부터 늘 ‘산문적’이란 얘길 들으며 내심 “난 문학 쪽에는 소질이 없나 보다” 하고 느꼈다. 대신 그때부터 극장가를 전전하며 심취한 영화는 온통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찌감치 영화를 업으로 삼고 싶다고 결심했으나 부모는 장남을 서울로 진학시키려고 하지 않은 데다 영화연극과는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그 과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 과에 ‘영화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다는 것.
대학에 진학한 그는 곧바로 연극반에 들어갔다. 아무도 말해 주진 않았지만 “영화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극을 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런 경위로 연극반에 들어갔다가 그는 연극을 만났다. “라이브한 무대의 매력! 살아 있는 연기와 관객과의 소통에서 오는 긴장과 희열! 그 모든 것이 절 변화시켰죠.” 그러면서도 그는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와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서 영화책을 구해 나름대로 영화 공부를 했다. 연극과 영화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양손에 쥐여 있는 티켓이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을 하고, 저도 모르게 희곡을 써 보자고 덤벼들었죠. 이런 연극을 보고 싶다, 이런 대사를 해보고 싶다… 그게 희곡을 쓰게 된 첫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첫 작품이 덜컥 학교 문학상에 입선했어요. 송기숙 선생이 심사를 하셨기에 더욱 힘이 났습니다.
내친김에 또 다른 작품으로 지방지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최종심까지 올랐죠. 거기서 자신감을 얻게 되어 연기를 하면서 습작도 겸했습니다. 극작 이론과 희곡 관련 서적을 독학하면서 정말 부지런히 썼습니다. 국내외의 많은 희곡이 제 공부의 원천이 됐는데, 특히 아라발과 이강백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영향도 받은 것 같고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하고 싶은 건 영화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학을 졸업한 92년, 영화아카데미 입학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본인의 말처럼 그때 합격했더라면 희곡작가 선욱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험에 떨어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대학로의 한 극단에서 포스터를 붙이는 말단 배우가 됐다. 그러면서 희곡을 써 매해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으나 연속해 고배를 마셨다. 세 번째로 낙선한 95년 새해, 그는 단골 술집의 술상을 엎으며
“다시는 신춘문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해 2월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자신의 작품 ‘피카소 돈년 두보’를 연출함으로써 스스로 등단해 버렸다. 하지만 신춘문예에 다시 응모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주사였나 보다. 자작·연출로 대학로 신고를 마친 석 달 뒤 ‘중독자들’이란 작품으로 그는 문화일보 하계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다.
“희곡의 매력은 두 시간 안에 인생과 세계를 압축해 보여주는 ‘압축의 맛’에 있습니다. 관객은 극장에 와 있는 두 시간 동안 우리를 둘러싼 삶과 세계는 물론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통찰하게 되고, 일상 속에서 깊이 고민하지 못했던 모럴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두 가지 동력으로 글을 써 왔습니다. 하나는 모순된 세상을 살면서 제 안에서 차오르는 불만과 화(火)를 태워 글을 씁니다.
‘피카소 돈년 구보’ ‘절대사절’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이 거기에 속합니다. 반면 화가 있으니 세상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원(願)도 있겠죠. ‘고추 말리기’ ‘영종도 38킬로 남았다’가 그런 작품입니다. 앞으로는 목소리를 좀 낮추고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깨닫게 해주는 이솝 우화 같은 이야기를 써 보고 싶습니다.”
그는 등단하고부터 지금까지 20편이 넘는 작품을 썼고, 작품 발표와 실제 공연이 행복하게 비례하지 않는 연극 풍토에서 작품이 탈고되는 족족 무대에 올랐다. 등단 초기부터 본인의 작품이 공연될 때마다 연습장과 극장으로 거의 매일 출근했던 게 성공의 비법이었다. 자신의 희곡이 어떻게 배우와 연출가를 만나 변화를 겪게 되고, 관객과 만나면서는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연습장·극장·객석에서 눈·귀·마음을 열고 부지런히 관찰한 덕이다.
그는 2003년 첫 번째 희곡집 『피카소 돈년 두보』(모시는사람들 펴냄)를 냈고, 올해는 같은 출판사에서 두 번째 희곡집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을 냈다. 두 권의 희곡집에 실린 도합 12편의 작품은 부조리극 계열과 마당극 계열로 대별된다. 한 작가 속에 이질적인 두 양식이 혼재하는 것 같지만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도 않다. 민속적이고 서민적인 마당극이 그의 고향인 전라도의 우세한 연행 형식이었던 반면 전라도엔 부조리극처럼 “음험하고 비밀스럽고 판타지를 지향하는 면도 많이 있고, 반골 기질과 파괴 기질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 계열의 작품이 함께 나오는 거란다. 송승환의 ‘난타’ 이전에 가장 성공한 공연 ‘문화 상품’이 광주에서 올라온 김시라의 ‘품바’였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선욱현이 원조 품바인 김시라 선생의 제안으로 14대 품바가 되어 99년부터 3년간 450회 공연을 했다는 것. 그의 두 번째 희곡집 말미에는 그가 출연했던 연극·드라마·영화 목록이 붙어 있다.
최근까지도 영화인과 시나리오 작업을 한 그를 보면 영화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희곡집에 실린 가상의 ‘서부시대 카페’ 이야기인 ‘황야의 물고기’는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진 않았지만 매우 영화적이다. 100억원대 제작비를 들이부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성인 키치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흥미롭다. 누가 하면 잘할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선듯 “이명세 감독”이라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