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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1. 27.
설 연휴를 앞두고, 새해 초부터 화제가 된 빅딜 얘기를 다시 꺼내 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가 게임 개발사 액티비전블리자드(이하 블리자드)를 687억 달러(약 82조원)에 인수한 것 말입니다. 지난 18일(현지시각) 발표됐죠. 안 그래도 과열된 메타버스 시장에 기름을 부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올해 내내 빅테크와 게임 업계의 합종연횡은 물론 메타버스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요. 연초부터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셨을 당신이 설 연휴 기간에 즐길만한, 그러면서도 메타버스와 관련해 (단기적인 시장의 부침과는 별도로) 인사이트를 얻을만한 콘텐츠 11편을 추천 드립니다.
필견의 순위인 것도, 딱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MS·블리자드 빅딜 이후 가장 먼저 생각난 영화(‘프리 가이’)부터 시작해 차례로 떠오른 것들을 생각의 흐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각 콘텐츠를 떼어내 하나씩만 보면, 어떤 작품은 메타버스와 관련이 없어보일 수도 있다는 점, 1번부터 11번 작품까지 연결된 상태에서만 의미가 전달될 수도 있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고른 작품 중에는 최신작도 있지만, 오래된 작품, 이미 너무 알려졌고 대부분이 봤을 법한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작품의 경우, 이미 보신 분이라도 다시 봤을 때 의미가 다르게 새롭게 읽히는 것이 꽤 있을 겁니다. 명불허전이니까요. 안보신 분이라면, 너무 오래됐다 외면하지 마시고 한번 찾아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 영화 '프리 가이(2021)'의 한 장면. / 20세기폭스
◇ 1. 프리 가이(Free Guy·2021)-NPC(Non Player Character)가 인간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 “정해진 삶을 살 필요 없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삶을 바꾸는 거야. 미래는 당신이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MS·블리자드 빅딜을 보며 먼저 생각난 영화는 ‘프리 가이’입니다. 작년 8월 국내 개봉해 31만명을 동원했는데, 코로나 사태만 아니었어도 10배는 더 봤을 겁니다.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오락영화의 미덕이 대단합니다. 재미있고 볼거리 가득하죠. 컴퓨터그래픽도 규모와 완성도에 입이 벌어질 정도입니다.
이 영화는 오픈월드 게임에 등장하는 NPC(Non Player Character) 즉 (인간 게이머의 아바타가 아니라) 게이머의 플레이를 위한 배경 역할 캐릭터를 소재로 합니다. NPC 는 게임에서 만들어진 캐릭터이기 때문에 루틴하게 움직이죠. 이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NPC와 진짜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죠. 게임 속 가상의 인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실은 진짜 인간(관객)을 향해 “정해진 삶을 살 필요 없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삶을 바꾸는 거야. 미래는 당신이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라고 외치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오픈월드 게임을 만드는 사람, 즉 개발자에 관한 얘기도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 오픈월드 게임인 ‘프리시티’의 경우, 주인공 남녀가 개발한 ‘라이프 잇셀프’의 소스코드를 거대 게임개발사가 그대로 도용해 만든 것으로 나옵니다. 그 소스코드가 빠지면 그 게임은 무용지물이죠. 당연하지만 간과되는 사실, 세상을 바꿀 게임은 어떤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게임 개발자는 단순히 프로그램을 짜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죠. ‘프리 가이’에서 일종의 메타버스를 만든 게임 개발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를 개발자가 아니라 작가라고 생각한다. 코드는 단순한 0과1의 조합이 아니라 숨겨진 메시지다. 나는 문자 대신 0과1로 작품을 쓴다”라고요.
이것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MS가 블리자드를 82조원에 산 것은 물론 이 회사가 가진 온라인 사용자 네트워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발자 중심의 블리자드 직원 1만명의 능력을 산 것이기도 하죠. 이들이 형성한 게임 개발 조직, 개개인의 능력이 MS의 클라우드게임, 게임과 메타버스 연결 전략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델라 MS CEO는 “메타버스는 단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태어날) 많은 메타버스를 지탱하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블리자드 개발자들이 게임이 발전한 형태로서의 메타버스는 물론, 소매·기업용의 다른 메타버스 분야로 영역을 넓히는데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능력과 상상력을 겸비한 세계최고의 개발자들이니까요. VR(가상현실)이건 AR(증강현실)이건 메타버스이건, 결국은 사람이고 이야기입니다. 그 세계에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으면 메타버스 확산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메타버스가 흥하려면 일류 설계자 겸 작가가 많이 필요할텐데요. 그런 인재가 가장 많이 포진한 곳이 바로 게임 업계인 겁니다.
▲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를 다룬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 2. 그녀(Her·2013)-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서로 사랑하는 방식... ‘프리 가이’에서 AI가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녀’에서는 인간이 AI와 사랑에 빠져
벌써 9년이 흘렀습니다만, 영화 ‘그녀’를 통해 인간이 인간보다 AI와 더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미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현실적이라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과 깊이 교류하기를 꺼리거나 싫어하는 인간은 지금도 많지만, 앞으로는 환경과 사회 변화에 의해 더 많아질지 모릅니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인공지능 ‘그녀’ 사만다(스칼릿 조핸슨)와 사랑에 빠집니다. 진짜 인간인 아내와는 별거 중인 그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녀’와 말입니다.
굳이 이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프리 가이’가 이 영화와 정반대의 로맨스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 이어 미래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기묘한 형태의 로맨스입니다. ‘프리 가이’의 AI 게임 캐릭터는 자신이 AI임을 모른 채, 실제 인간이 플레이하는 게임 속 아바타와 사랑에 빠집니다.
영화의 게임 캐릭터인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실제 인간 여성의 게임 속 캐릭터에게 “당신과 키스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뭘까요? 존재론을 초월한, 실로 기이하지만 어쩌면 새로운 로맨스의 탄생일 수도 있을 겁니다. 미래의 첫 키스는 서로가 다른 차원에서 교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 레디 플레이어 원(2018년). / IMDB
◇ 3.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2018)-“현실에서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에 ‘오아시스’를 만들었어. 나는 단지 그곳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
MS의 블리자드 인수, 메타버스, 게임산업의 가능성, ‘프리 가이’까지 언급했다면,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죠. ‘프리 가이’의 제작자들 인터뷰를 보면, 메타버스 관련 영화로 이미 유명해진 ‘레디 플레이어 원’의 아류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니스트 클라인의 2011년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 미국이 배경입니다. 메타버스인 ‘오아시스(OASIS)’가 등장하죠. 영화에서 사람들은 비루한 현실보다는 나를 멋지게 만들어주는 가상현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아시스를 창조해낸 천재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난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만들었어. 나는 단지 그곳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야.”
무슨 얘기일까요? 메타버스 즉 인간들이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를 통해 연결되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메타버스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죠. 네, 그 매개체는 게임입니다. 이미 ‘포트 나이트’나 ‘GTA’ 등에서 우리는 초보단계 메타버스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고요. ‘프리 가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도 사람들은 메타버스 내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게임에 빠져듭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격리로 전 세계 사람들의 고통이 3년째 이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코로나 19 정도가 아니라, 코로나 19보다 10배 20배 강력한 바이러스가 지구에 만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지구온난화나 공해가 훨씬 심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해 ‘오아시스’ 같은 메타버스가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즐거움과 행복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에서 머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겠죠. 사람들이 현실공간보다 메타버스에서 만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세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배경인 2045년쯤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요.
▲ 소설 '스노 크래시(1992년)'.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 아마존
◇ 4. 스노 크래시(Snow Crash·1992)- 메타버스·아바타 같은 용어가 처음 나온 소설... 수많은 컴퓨터·게임 개발자들에게 영감
“아마 전 세계 사람의 99%가 이렇지 않을까? 주변에 많은 이들이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너를 이해 못 해. 너도 그들을 이해 못 하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어쨌든 무의미한 말을 내뱉을 거야.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을 하는 거지. 거기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당장 그만두고, 기회를 찾아 사악하지만 멋진 세계로 떠나는 거야.”
1992년 미국의 SF 작가 닐 스티븐슨이 쓴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지금의 메타버스 열풍은 2020년 10월 엔비디아의 공동창업자 겸 CEO인 젠슨 황이 ‘GTC October 2020′에서 ‘스노 크래시’에 등장하는 ‘메타버스’를 언급하며, 엔비디아가 이 메타버스의 현실 버전을 만들어나갈 것임을 밝힌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이란 의미의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성한 용어로, 기존의 가상현실이 확장된 개념이죠. 소설에서는 메타버스라는 가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아바타(Avatar)’라는 가상의 신체를 빌려 활동합니다. 메타버스·아바타 같은 용어는 이 소설에 처음 쓰인 뒤 널리 펴졌습니다. ‘스노 크래시’는 수많은 컴퓨터·게임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있습니다.
당시 젠슨 황은 “이미 우리는 마인크래프트나 포트나이트 같은 게임에서 초기 단계 메타버스를 보고 있다”면서 “지금은 게임에서만 메타버스의 거주자인 게이머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콘서트와 이벤트를 위해 모이고 친구들과 교류하지만, 미래에는 메타버스가 인터넷의 뒤를 잇는 가상현실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면서 젠슨 황은 “미래의 메타버스는 현실과 아주 비슷할 것이고 ‘스노 크래시’에서처럼 인간 아바타와 AI가 그 안에서 같이 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엔비디아는 자신들 버전의 메타버스인 옴니버스(Omniverse)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협업을 위한 플랫폼으로, 가상공간이지만 실제 물리법칙을 따르도록 설계됐습니다. 이 세계는 다른 회사가 만든 가상공간과도 연결할 수 있죠. 옴니버스를 사용하면 디자이너, 예술가, 크리에이터, 심지어 AI도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 다른 세계를 하나의 세상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옴니버스에 실제 세상의 청사진을 다운로드 받아 실제와 같은 세상, 즉 ‘스노 크래시’의 메타버스와 같은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들이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접속하게 하겠다는 것일 텐데요. 엔비디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빅테크가 다 뛰어들고 있어서 앞으로의 시장 판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합니다.
▲ 기억을 삭제당하고 신체 일부를 기계로 바꾼‘인간 병기’인 영화‘공각기동대’(1995)의 주인공 쿠사나기. 이 영화는‘매트릭스’‘제5원소’‘코드명 J’ 등 할리우드 사이버펑크 영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 5.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1995)- “우리 인간들은 얼마 안 되는 기능에 예속돼 있었지. 하지만 이제 그 제약을 버리고 새로운 상부구조로 시프트할 때야”
“봐. 나는 나를 포함한 방대한 인터넷에 접속돼 있어. 접속하고 있지 않은 너에게는 단지 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들은 얼마 안 되는 기능에 예속돼 있었지. 하지만 이제 그 제약을 버리고 새로운 상부구조로 시프트할 때야.”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주인공 쿠사나기의 그 유명한 대사입니다. 전뇌(電腦·인간의 의식이 디지털화된 것)와 네트(Net·전뇌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디지털 공간)로 대표되는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은 이후 나온 SF물 뿐 아니라 관련된 개발자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켰죠. ‘공각기동대’의 전뇌는 인간의 의식 자체가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돼 디지털 공간을 흘러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상세계를 통해 인간의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개념인 메타버스와는 약간 다릅니다. 그러나 결국 디지털기술을 통해 인간의 활동영역이 비약적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는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바와 맥락이 비슷합니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혼자 상상하는 힘’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공각기동대’ 감독인 오시이 마모루를 일대일로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해준 얘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상하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아마 나보다 더 많이 한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공각기동대는 원작자(시로 마사무네)가 따로 있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손길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모든 것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읽고 보고 상상한 과정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27년 전 작품이지만, 이미 보신 분이라도 다시 음미해보신다면, 대사·장면 하나하나에서 지금의 현실과 연결돼 새로운 상상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될지도요. 작품을 안 보신 분들이 보신다면, 메타버스, 인공지능, 인간 뇌와 컴퓨터의 융합 등의 개념이 하나도 새로울 게 없다는걸 알게 되실 겁니다. 물론 공각기동대 역시 이 작품의 원작자, 그리고 원작을 근사하게 영화화한 감독이 그전까지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품에 기원을 두고 있을 테죠.
그렇게 보면,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 얘기란 것도 실은 아주 오래된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 머릿 속에서 반복돼 온 것입니다. 물론 기술 발전에 따라 상상을 누가 현실로 만드느냐는 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시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 영화 '매트릭스'의 관련 장면.
◇ 6. 매트릭스(The Matrix·1999)-메타버스의 디스토피아적 결과물... 이에 대응하려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프로젝트와 연결해 생각해 볼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 파란 약을 복용하면, 이야기가 끝나. 침대에서 일어나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머물게 될 거야. 토끼 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줄게.”
존재론 뿐 아니라, 삶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응축한 명대사이죠. ‘매트릭스’에 나오는 매트릭스는 메타버스의 디스토피아적 결과물입니다. AI가 발전해 지구 위의 모든 인간의 능력의 합을 넘어서게 된다면, AI가 인간을 더는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는 가정. 그렇게 됐을 때 메타버스는 밝은 미래가 아니라 최악의 미래가 될 수도 있겠죠.
매트릭스에서 인간이 매트릭스의 세계 즉 메타버스로 들어가는 방법을 보면, 일론 머스크가 추진하는 뉴럴링크 프로젝트와 비슷합니다. 2016년 설립된 뉴럴링크는 이미 2020년에 지름 23mm, 두께 8mm 동전 크기의 ‘링크’라 불리는 제품을 발표했죠. 로봇수술을 통해 인간의 뇌에 연결돼 뇌와 컴퓨터의 사이의 신호 교환을 가능케 해주는 기기입니다. 우선은 척수손상 등 장애를 가진 사람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앞으로 인간이 이 제품을 통해 엔비디아가 건설하려는 최종적 형태의 메타버스(옴니버스의 최종 단계)에 연결된다면, 젠슨 황이 얘기한 것처럼 SF에서 봤던 내용이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머스크가 뉴럴링크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도 사실 ‘매트릭스’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머스크는 AI가 결국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이 AI와 융합하는 형태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 IMDB
◇ 7.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레플리컨트의 창조주 타이렐 박사, 미래 빅테크 기업가의 실제 모습일 수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이 우리의 모토”
존재론에 관한 불멸의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제조사 타이렐 코퍼레이션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SF에서 AI나 안드로이드 발전의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것은 대개 기업이죠.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복제인간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는 ‘타이렐’이라는 기업이 등장합니다. 타이렐의 창업자이자 CEO인 엘든 타이렐 박사는 복제인간의 창조주입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겉모습은 물론 감정까지 인간과 똑같은 복제인간 ‘레플리컨트’와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뒤쫓는 특수 경찰 ‘블레이드 러너’의 대립을 통해서 말입니다. 영화의 질문은 이후 다른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도 자기 회사 버전의 메타버스인 옴니버스를 통해 로봇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로봇이 옴니버스라는 가상공간에서 AI를 통한 자기학습을 반복해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단계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것이죠. 로봇이 기술적으로 계속 발전하고, 거기에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AI가 결합한다면,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이 실제 세계에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를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과 로봇의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미래에 어떤 새로운 빅테크 기업가가 타이렐 박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알리타: 배틀 엔젤'.
◇ 8. 알리타: 배틀 엔젤(Alita: Battle Angel·2018)-‘블레이드 러너’에서 던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화답
게임 속 AI, AI와 인간의 교감, 메타버스, 안드로이드 등의 얘기를 한다면, 블레이드 러너에서 질문을 던진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그 인간성이란 결국 의지와 행동에 관한 것이라 말합니다. 3년전 이맘때인 설날 연휴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제임스 캐머런이 각본·제작을 맡아 화제가 됐지만, 흥행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죠.
저는 이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 특히 지금 상황, 혹은 근미래 상황과 격렬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알리타는 10대 소녀이고 게다가 사이보그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관계하며 성장해 나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不義)에 대해, 그리고 그 불의가 아무리 크고 강하고 나를 위협한다 해도 개의치 않고 맞서 싸웁니다. 몸이 잘려나가도 싸웁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다시 새로운 몸을 부여 받아 더 격렬히 싸웁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메시지만 강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두 장면을 특히 좋아하는데요.
첫 번째는 거구의 악당 사이보그가 작은 강아지를 죽인 뒤에 알리타마저 죽이려 하자, 분노한 알리타가 죽은 강아지의 피를 두 눈 아래에 묻혀 일자로 긋고 악당을 향해 달려나가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영화 종반부에 알리타가 슬픔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기 위해 거대 악과 맞서겠다 각오하면서, 자신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방울을 자신이 꺼내든 칼로 공중에서 두 조각 내는 장면입니다. 조금은 겉멋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영화적 쾌감이 하늘로 뻗어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SF에서 수없이 해온 질문을 반복해 보겠습니다. 알리타는 인간일까요?
제 대답은 ‘그렇다, 그리고 누구보다 더 인간이다’입니다. 결국 인간성이란 인간이라는 개체의 문제가 아니라, 선(善)을 지향하고 내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의지와 행동 그 자체일 테니까요.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싱귤래리티(기술적 변곡점)’가 온다면, 결국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할 겁니다. ‘알리타’는 그때 우리가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 HBO '웨스트월드:인공지능의 역습'
◇ 9. 웨스트월드(West World·2020)-안드로이드는 인간의 거울, 만물의 영장이 가진 탐욕·폭력성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 통해 보여줘
미국 유료 케이블 채널 HBO가 ‘왕좌의 게임’에 이어 내놓은 블록버스터 드라마입니다. 천재과학자 포드(앤서니 홉킨스) 박사가 창조한 체험형 테마파크 ‘웨스트 월드’가 무대입니다. 서부 개척시대가 재현된 거리에서 인간과 구분이 어려운 안드로이드가 호스트로서 게스트인 인간에게 봉사합니다. 1박당 4만 달러 입장료를 낸 손님은 자신의 욕망대로 폭력과 섹스 혹은 살인까지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호스트는 개별적으로 시나리오가 프로그래밍돼 있어 역할이 끝나면 기억이 리셋됩니다. 하지만 몇명의 호스트가 자아에 눈을 뜨고, 프로그램에 없는 비정상적 행동을 일으키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쥬라기공원’의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 감독·각본·제작,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웨스트월드(1973년)’가 원안이지만, 드라마 ‘웨스트월드’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담았습니다. 인공지능의 진화를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현대적인 테마를 다루면서도, 실은 만물의 영장이 가진 탐욕과 폭력성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의 안드로이드를 통해 거울처럼 보여줍니다. 2016년 시즌1, 2018년 시즌2에 이어 2020년에 시즌3까지 나왔고요. 올해에 시즌 4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미래 모빌리티와 도시에 대한 묘사도 일품입니다. 영화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이점을 눈여겨보셔도 매우 흥미로울 겁니다.
▲ '지구 최후의 밤'의 한 장면.
◇ 10. 지구 최후의 밤(Long Day’s Journey Into Night·2018)-시(時)를 쓰는 마음으로 AI를 다루는 개발자를 기대하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카일리로 돌아온 남자 뤄홍우. 과거에 만났던 여인 완치원의 흔적을 발견하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던 그녀와 함께한 여름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찾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중국의 신예 감독 비간의 2번째 작품인 ‘지구 최후의 밤’ 줄거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탕웨이가 1인 2역의 여주인공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설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앞서 설명한 영화의 경우 부득이하게 스포일러를 일부 말씀드린게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전부 얘기해도 여러분이 영화 보실 때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겁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플롯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앞의 절반과 뒤 절반이 나뉘어 있는데요. 굳이 해석하자면, 1부는 주인공 기억을 재조합(설명이 전혀 친절하지 않습니다)한 것, 2부는 주인공의 꿈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부는 2D로, 2부는 3D에 원테이크로(처럼 보이도록) 찍었습니다. 이 영화의 3D가 특이한 것은 3D 촬영을 활용한 방식 때문입니다. 보통의 3D 영화는 대상이나 동작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하기 위해 3D를 활용합니다. 칼과 창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죠. 반면에 이 영화의 3D는 화면의 깊은 공간으로 빠져드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입니다. 독창적일 뿐 아니라, 왜 3D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주제의식·내용과 멋지게 연결한 사례입니다.
국내 개봉 당시엔 아쉽게도 2부의 3D를 2D로 상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 발매된 블루레이 역시 2부의 3D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이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역시 3D 지원은 불가능합니다. 2D에서 3D로 전환되는 시점의 극적 쾌감을 맛보고 싶다면, 현재로선 3D를 지원하는 수입판 블루레이를 입수해 보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물론 3D 효과 없이 봐도 영화를 음미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지만 말입니다.
MS의 블리자드 인수에서 든 생각이 중국인(이긴 하지만 한족은 아닙니다) 감독의 영화로까지 이어진 이유는 이 영화가 시인(詩人)의 마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비간은 영화감독·각본가이기 전에 시인입니다. 이 영화는 시(詩)에서 영감을 받아 플롯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영화의 어떤 장면은 한 편의 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감독은 자신의 시와 영화를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지에 대해 실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간이 만드는 영화는 AI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인간만의 고유함과도 연결됩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중국 변방의 젊은 감독 머릿속에서 나온 영화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 보시면 어떨까요? 참고로 영화가 그리 친절하진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분노를 유발할 수도 있으니 관람에 주의 바랍니다.
▲ 아마존 프라임 드라마 '높은 성의 남자'.
◇ 11. 높은 성의 남자(The Man in the High Castle·2019)-일어난 결과에만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과 다양한 관점이 미래 예측에도 도움 줄 수 있어
경영이든 기술 개발이든 미래에 대한 탐구이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엔 유연한 사고력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과정에 어떤 선택지가 존재했고 어떤 결단이 내려졌는지를 냉정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때 중요한 것도 ‘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입니다.
‘높은 성의 남자’는 필립 K. 딕의 동명 소설(1962)’을 아마존 프라임 전용 드라마로 만든 것입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4개 시즌이 나왔습니다. 유료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 가입자 한정이지만, 아마존 프라임 1개월 무료체험 서비스를 통해 감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소설은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의 원작으로도 유명합니다.
2차대전에서 추축국이 승리한 이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동부와 서부를 분할 점령한 1962년 미국이 무대입니다. 레지스탕스, 이중 스파이, 병세가 악화되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계자를 둘러싼 음모 등의 군상극이 연합국의 승리를 거둔 내용을 담은 필름의 수수께끼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뉴욕 지하철의 차량 좌석을 욱일기와 나치 독일 문양으로 장식하는 등의 과감한 대체역사식 설정인데, 이른바 ‘국뽕’이 일체 배제돼 있습니다. 불경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스스로 만들고 즐기는 미국인들의 생각의 깊이와 다양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가 다르게 흘렀다는 것을 전제로 한 대체역사 장르는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왔는데요. 이미 대체역사 관련 유명 게임도 있긴 하지만, 메타버스가 게임에서 더 발전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흥미를 끌 만한 장르이기도 합니다.
‘높은 성 위의 남자’의 한국 버전으로는, 작가 복거일이 1987년 발표한 소설 ‘비명을 찾아서’가 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조선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부상만을 입히고 실패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일본 내 온건파 거두였던 이토가 실제와 달리 1925년까지 살면서 일본의 대외 정책이 실제 역사보다 온건하게 변하게 됩니다. 일본은 1940년대 미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해 동북아를 장악하고, 2차대전에서도 미·영에 우호적인 중립 노선을 지켜 번영합니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당한 이후의 ‘내지화 정책’에 따라 1940년대 말까지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잃게 됩니다. 1987년 현재, 5000만 조선인은 일본 제국의 신민인 동시에 2등 국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높은 성의 남자’나 ‘비명을 찾아서’의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과정에 어떤 선택지가 존재했고 어떤 결단이 내려졌는지 냉정히 분석하는 일은 언제나 유용하다는 것을 알려주죠. 과거 뿐 아니라 미래를 생각할 때도 관점을 다양하게 바꿔보는 유연함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아는 것만이 진실이고 정의라 여기고 다양한 생각과 상상력을 배격할 것인지, 아니면 여러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 음미해 볼 것인지 말입니다.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