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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한양 천도는 무학대사 작품? 그는 단지 ‘거들었을 뿐’
무학의 ‘한양 천도 3부작 설화’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조선일보
입력 202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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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 이후 청와대를 찾는 관람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청와대 관람 역시 일종의 ‘고궁’ 개념인데, 겨울에 누가 그렇게 고궁을 많이 찾겠습니까. 게다가 당초 그곳을 열었을 무렵의 호기심이 지속될 리 없는데다, 적극적인 추가 개방과 스토리텔링이 없는 한, 관람 열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최근엔 그곳에서 삽질 한 번 하지 않은 지표조사를 수행한 결과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물론 청와대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목소리 뒤에는 청와대 건물을 철거하고 그곳을 아예 경복궁 후원으로 복원하자는 복고주의적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이 되면서 태릉의 옛 선수촌을 ‘20세기에 무질서하게 들어선 시설’로 보는 의견이 나올 무렵 저는 조선일보 지면에 이런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21/2013092102582.html).
“과연 조상이 만들어 놓은 왕릉만이 문화재인가? 지난 40여년 동안 대한민국을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인력의 산실이었으며, 숱한 선수들의 꿈과 땀이 서려 있는 태릉선수촌은 흔적 없이 ‘제거’해도 되는 존재인가?” 좋든 싫든, 긍정하든 부정하든, 1948년부터 2022년까지 청와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대한민국의 역사 역시 지워져서는 안될 존재라는 말입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중부 지방에 많은 눈이 내린 2022년 12월 2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를 찾은 관람객들이 눈 쌓인 청와대 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스1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중부 지방에 많은 눈이 내린 2022년 12월 2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를 찾은 관람객들이 눈 쌓인 청와대 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스1
그런데 ‘청와대에서 나온 고려시대 기와’라는 얘기는 뭘까요?
그건 청와대 자리가 고려의 남경(南京) 궁궐터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의 도읍지는 지금의 개성인 개경(開京)이었고, 서울 경(京)자가 붙은 곳이 세 군데 더 있었습니다. 평양을 서경(西京), 경주를 동경(東京), 그리고 지금의 서울 한강 북쪽을 남경으로 삼았습니다. 개경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들이자 임금이 지방을 순행할 때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고려사’에 1068년(문종 22년) 남경에 신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도선기’ 같은 옛 기록에 의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신궁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남산과 북악산 사이 어디쯤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죠.
조선 시대 '경복궁 후원'의 역사를 품은 청와대 권역에서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조선 시대 '경복궁 후원'의 역사를 품은 청와대 권역에서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30여 년이 지나 15대 왕 숙종 때는 남경 천도 계획까지 세우고 1104년(숙종 9년) 남경 궁궐을 완성합니다. 이 궁궐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옵니다. ‘경복궁 북쪽.’ 바로 지금의 청와대 자리죠. 남경 천도는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궁궐은 고려 말까지도 계속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치 백제 말의 익산처럼 고려 중기 ‘미완의 수도’였던 서울은 1392년 왕조가 조선으로 바뀐 뒤 전면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역사적인 한양 천도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과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지금까지도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 되게 한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많은 분들은 여기서 이런 대답을 하겠죠. “그거 무학대사 아니야?!”
법명이 자초(自超)로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 역할을 했던 그 인물. 바로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입니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한양을 골랐다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는 고색창연한 이야기는 과연 정말일까요?
이제 흔히 알려져 있는 무학대사의 ‘한양 천도 설화’ 세 편을 되새겨보고 그 진위를 판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희한하게도 이 이야기 세 편은 상·중·하편처럼 계속 이어지는 3부작이기도 합니다.
① 왕십리에서 십리만 더 가면 서울?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곳을 다니던 무학대사는 마침내 한강 북쪽 어느 지점에서 ‘여기가 좋겠구나!’ 생각하며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어디에선가 소를 끌고 가던 노인(소에 타고 있었다거나 노인이 아니라 동자였다는 식으로 얘기마다 조금씩 달라짐)이 갑자기 “이런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외쳤다. 깜짝 놀란 무학대사는 고개를 숙여(그 자리에서 바싹 엎드렸다는 버전도 있음)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노인은 “여기서 10리만 더 가시오”라고만 말한 뒤 훌쩍 사라졌다(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허, 십리만 더 가면 될 것을…’이라 중얼거리며 표표히 노을 속으로 멀어져갔다는 얘기도 있음). 그래서 그곳을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를 더해 ‘왕십리’라 부르게 됐다.>
어떤 설화에서는 아예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팠는데 ‘왕십리’라고 새겨진 돌이 나와 경악했고 그건 신라 말 도선대사가 파놓은 것이더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왕십리’가 된 게 아니라, 아쉽게도 고려시대에 이미 왕십리의 지명은 발음이 같은 ‘왕심리(往深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중에 왕십리 얘기가 덧붙여지면서 지명도 ‘왕십리’로 바뀌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죠.
사실 이런 식으로 전국 지명에는 세월이 갈수록 그 유래나 뜻풀이가 점점 덧붙여지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 영월의 지명 ‘소나기재’는 1911년 총독부가 낸 ‘조선지지자료’에서 ‘소내기재’이며 그 뜻은 ‘금출치(金出峙)’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쇠가 나오는 고개라는 뜻이죠. 그런데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아주 새로운 뜻풀이가 나왔습니다. ‘푸른 소나무가 가득한 고개여서 솔안이재였고 후에 소나기재가 됐다’ ‘단종 임금이 유배를 가다 이 고개를 넘는데 하늘도 서러워 돌연 소나기를 내렸다’…
서울 성동구 무학봉근린공원의 무학대사 관련 조형물.
서울 성동구 무학봉근린공원의 무학대사 관련 조형물.
아마도 왕십리 전설이 무학대사와 결부된 것은 마침 인근에 ‘무학봉’이라는 산이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왕십리의 무학대사 이야기는 공식 역사서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나중에 만들어진 설화로 보는 게 온당합니다.
② 도선대사가 세워 놓은 북한산 비석?
<노인(또는 동자)의 말에 따라 10리를 더 간 무학대사는 이 산 저 산을 다니다 어느 산봉우리에 올랐는데 산 위에 우뚝 세워진 웬 낡은 비석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 글씨를 읽어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로 올 것이다.’ 그건 신라 말 도선대사가 파놓은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무학대사는 글자를 지워 버리고 산에서 내려왔더니 비로소 도읍을 정하기 좋은 곳이 바로 거기 있어서 그곳에 한양 도성을 짓게 됐다. 그 봉우리는 북한산 비봉이었다.>
이 무척 그럴듯한 얘기는 19세기 초에 이미 진위가 밝혀졌습니다. 1816년(순조 16년) 추사 김정희가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라는 걸 고증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죠. 북한산 봉우리에 우뚝 서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띈 비석이지만, 세월이 흘러 글자가 비바람에 깎인 탓에 잘 보이지 않게 돼 ‘몰자비(沒字碑·글자 없는 비석)’로 잘못 알려졌고, 이처럼 나중에 글자 없는 사연까지 창작되는 일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③ 궁궐 방향을 잘못 잡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양 궁궐터를 잡은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 즉 집터 뒷산으로 잡고 궁궐을 동향으로 지으려 했다. 그런데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이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고 남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반대해서 논쟁 끝에 결국 정도전의 말을 따라 경복궁을 짓게 됐다. 무학대사는 “이렇게 하면 200년 뒤에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라며 걱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과연 조선 개국(1392년) 꼭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알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는 설화일 뿐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건국과 임진왜란 사이 꼭 200년의 시차를 깨달은 누군가가 지어낸 얘기로 봐야 합니다. 임진왜란이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인지 원인을 찾으려다 보니 ‘그때 무학대사 얘기를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됐다’는 이야기가 유행했으리라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풍수를 따르지 않아 경복궁이 흉지(凶地)가 됐고 전란을 맞게 됐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전근대적 사고입니다. 임진왜란의 진짜 원인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무지했고 국방과 외교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는데도 진짜 반성은 하지 않고 집을 잘못 지었다는 타령만 했던 것입니다.
정작 현대의 풍수 전문가들은 ‘같은 땅이라도 관점에 따라 길지도 흉지도 될 수 있고, 풍수는 국가 흥망과 인과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도로 유연하게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는데도, 여전히 풍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거나 풍수를 정쟁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KBS 드라마 '용의 눈물'의 무학대사(박병호).
KBS 드라마 '용의 눈물'의 무학대사(박병호).
그럼 한양 천도 과정에서 무학대사의 진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왕조실록 중 한양 천도와 무학대사가 연관돼 등장한 기록은 딱 한 번, 1394년(태조 3년) 8월 13일의 기록입니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산세를 관망하던 중 “여기(한양)가 어떠냐?”며 천도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조운하는 배가 통해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라며 분위기를 한양 쪽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고 나서 이른바 ‘답정너’ 식으로 무학대사에게 어떤지 물어보자, 이미 태조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무학대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하소서.”
……뭐야, 이게 다라고?
예, 한양 천도와 관련된 기록에서 무학대사의 역할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몇 년 동안의 천도 조사 끝에 결론을 내리고 밀어붙인 사람은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한마디로 ‘무학은 거들 뿐’.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그동안 태조 이성계는 여러 신하들을 동원해 계룡산과 무악 등 새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조사시켰고 계룡산(지금의 계룡시)에는 기초공사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1394년 8월 무악과 한양을 돌아보는 답사 여행을 한 끝에 한양으로 수도를 정했고, 이 자리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초빙해 ‘거드는 말’을 한마디 하게 했던 것이죠. 이에 무학대사는 찬성하긴 했지만 본인이 최종 책임을 지는 것을 어딘가 부담스러워하는 인상까지 보였습니다.
무학대사가 저 발언을 했을 시점에 태조는 이미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위에 보이는 말, 즉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에 진짜 답이 있었던 것입니다. 국토의 중앙이라는 입지 조건에 더해 드넓은 한강이 있어 조운의 소통이 원활했던 것이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왕권과 조정의 정치력이 물길을 통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중앙집권적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한양은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더구나 아주 신도시가 아니라 이미 고려 때 남경으로 한 차례 개발됐으니, 교통망 같은 인프라가 상당히 갖춰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본 한강의 야경, /박상훈 기자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본 한강의 야경, /박상훈 기자
한 마디 거들었을 뿐인 무학대사의 역할이 왕십리와 북한산을 거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려다 좌절됐다는 이야기까지 발전한 것은, 무학대사를 ‘조선의 도선대사’로 만들어 한양 천도를 신비화하고 국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일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한강 하구가 휴전선에 포함되고 곳곳에 세워진 댐들로 인해 조선 초 ‘물길의 중심’이었던 이점은 희미해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철도와 도로로 사통팔달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이라는 이점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설사 또 어느 정치인이 나와 엉뚱한 천도 논의를 하더라도 이 거대한 인프라를 바꿔놓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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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진
2023.02.03 12:28:03
개경에는 고려를 추종하는 세력들로 가득했기때문에.. 조선은 천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후보지로 꼽을 수 있는 곳은 평양, 철원, 한양, 수원 정도 일텐데.. 이중에서 전국에서 세곡이 올라올 수 있는 요충지로서 한양을 능가하는 곳은 사실상 없다.
답글작성
9
0
나홀로가네
2023.02.03 22:10:56
조선 실록 세조편에는 풍수지리로 궁궐터를 잡았다는 세간의 풍문은 모두 거짓이다. 세조 자신이 신하들 앞에서 풍수지리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서 고려시대에 선행했던 풍수에 관한 모든 서책을 찾아서 불태워 버리 라고 명한다. 세조부터 풍수는 백성을 혹세 무민하는 미심이다 라고 선언한다. 이미15세기에 풍수를 미신이라고 밝힌 세조대왕이 있ㄴ.ㄴ가 하면 20세기 첨단 과학시대에 김대중이는 대통령에 떨어진 것이 조상묘를 잘못 썼다는 지관말에 현옥되어서 조상묘를 파헤처 이관하는 무지목매한 해괴힌 미신행태를 보인 바 있다. 그러고도 자칭 독실한 기독교신자라고? 한심한 김대중이 보인 행태를 보고 따라하 거나 아직도 풍수를 맹신하는 자들이 우글데고 있으니..
답글작성
5
0
난지광
2023.02.03 11:59:59
승려가 중대한 국가 정책에 개입했으니 요즘 관점으로는 국정 농단이 아닌가?...단순히 결정권자에게 의견을 말했다면 면피가 되려나?...아니 소를 타고 지나가던 노인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발언했나?...권력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의견도 말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
답글작성
2
5
구운몽
2023.02.05 09:52:12
하품나는 소리????????????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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