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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공(空)의 의미와 그 작용>
---무(無)와 공(空)에 대한 이해---
『 ‘무(無)’와 ‘공(空)’은 신비로운 특별한 글자다.
‘없음(無)’은 수학과 현대 물리학에선 숫자 ‘0’을 의미하고,
‘공(空)’이란 변화무쌍한 ‘무(無)’를 체득한 경지이다.
그래서 ‘공(空)’을 ‘0’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空)’은 무(無)가 아니다.
그리고 ‘무(無)’는 ‘없음’만을 뜻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그릇에 든 물건을 깨끗이 들어내면 그릇은 비게 된다. 이 빈 그릇의 상태를 ‘무(無)’라고 하면 누구나
‘무(無)’를 잘 이해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無)’엔 ‘없음’ 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간단히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무(無)’라는 글자가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무(無)’는 조화를 부리기 시작한다.
‘무(無)’를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하면 이성제일주의(理性第一主義)의 철학이 나오고,
‘무(無)’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 ‘무(無)’는 현대수학의 중요한 개념이 된다.
뿐만 아니다. 텅 빈 공간의 상태를 진공(眞空)이라 부르는데,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론은 진공(眞空)이
무엇인가로 빈틈없이 차 있다고 본다. 양자론적 진공을 뜻하는 ‘무(無)’에서는 우주도 탄생할 수 있다.
이때의 ‘무(無)’는 무한대(無限大)와 유사한 개념이 된다. 극과 극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BC 6세기경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해서,
‘없는 것(無, 非存在)’과 ‘있는 것(有, 存在)’을 명확하게 정의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무(無)’란 없는 것이기에 사유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사유는 오직 ‘유(有)’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사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고 존재와 사유가 같은 것이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이성적 사유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철학의 합리주의(Rationalism)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또한 ‘무(無)’는 없는 것이기에 ‘참 존재(眞有)’는 유일실재(唯一實在)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하게 충만하고 영원불멸함을 뜻하게 된다. 이것은 유일신(唯一神)의 개념과 잘 맞는다. 이렇게 보면, 서양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단순성을 넘어 ‘없는 것(無)’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기호로 표시하면, ‘무(無)’는
또 다른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즉, ‘없음의 작용’이 작동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작용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존재의 측면에서 ‘무(無)’를 표현하면 영(0)이라는 숫자가 되고, 작용의 측면에서 표현하면 항등원(恒等元, Identity)이 된다. 항등원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어떤 정해진 종류의 연산(演算)을 하더라도 대상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수학적 원소를 가리킨다.
‘영’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오늘 날과 같이 진법(進法)에 맞추어 숫자를 자리수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덧셈과 곱셈의 항등원으로서 ‘0’과 ‘1’이 없다면 '가감승제(加減乘除)‘ ―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즉 사칙연산(四則演算)과 이와 관련된 다른 수학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수학과 물리학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론(群論, Group Theory)이라는 수학이론이 있다. 이 군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항등원, 즉 ‘무(無)’의 개념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군론이 없었다면 현대의 소립자물리학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를 분류하고 새로운 소립자를 예견하는 것은 다
군론(群論) 덕분이다. 이 세상을 한 가지 종류의 소립자와 상호작용만으로 설명하려는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도 군론(群論)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면은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역설적이고 신비스런 조화를 부리는 개념이 ‘무(無)’다. 정신적인 면까지 포함하여 신비한 ‘무(無)’의 참 모습을 그대로 체득한 것이 반야(般若)요, 이를 불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공(空)’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반야심경>에 의하면 그렇다.』 ― 김성구
※항등원(恒等元 ,Identity)---항등원이란 어떠한 연산(演算,operation)을 가해도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수학적 원소를 말한다. 가령 덧셈의 경우에는 '0'이 항등원이다. 0은 어떤 숫자에 더해도 그 숫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0을 수만 번 더해도 숫자는 그냥 그대로일 뿐이다. 또 곱셈에서는 숫자 '1'이 항등원이다. 1은 아무리 곱해도 숫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수만 번을 곱해도 수는 그냥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아무리 조작(?)을 해도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학적 원소를 '항등원'이라 한다.
항등원이란 불교적으로 말하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즉 '무위(無爲)의 세계'를 말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 세계는 '무엇이 일어나는 세계'가 있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가 있는데,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의 세계, 후자를 '무위법(無爲法)'의 세계라 한다. 항등원은 그러니 '무위의 세계'에 해당되는 셈이다.
※군론(群論, Group theory)---군론(群論)이란 Group theory의 일본식 번역어이다. 어색한 한문체 번역이라 그냥 ‘그룹이론’ 혹은 ‘무리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군론(群論)은 군(群-무리)에 대해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수학의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며, 대칭성을 다루는 특성 탓에 물리학이나 화학분야에서도 응용된다.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통일장 이론은 자연계의 4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한 상호작용 그리고 강한 상호작용을 통합하려는 시도의 대표적인 접근 방식이다. 중력장과 전기장, 자기장 그리고 핵력장이 같은 근원을 지닌다는 물리학 이론의 한 분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힘의 종류는 4가지로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 힘들을 통일장이론을 통해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형태와 상호관계를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기술하고자 했다.
공(空)과 더불어 ‘무(無)’는 불교에서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말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공과 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공(空)’은 비었다는 말이고, ‘무(無)’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면서 철학, 물리학, 그리고 종교 등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무(無) ― 없음’은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존재 그 자체에 관련돼 있는 무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 속의 실재와 관련한 무이다.
전자, 존재 그 자체에 관련돼 있는 ‘무(無)’란 비존재(非存在)를 뜻한다. 즉, 절대적인 무(無)이다. 원칙적으로
(비존재로서의) 무는 없다. 절대적인 무는 절대적으로 없다. 절대무(絶對無), 그것은 그냥 "없음" 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것이 있다면 있는 조건들이나 특징을 들어 설명할 수 있지만 절대 없음은 글자
그대로 조건도 특징도,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절대무(絶對無)’는 개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만, 현실에서 '아무 것도 없음 ― 절대무’는 불가한 말이다. 따라서 ‘절대적 무’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계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포착할 수 없다. ‘절대적인 무’란 물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죽은 무로서, 다만 관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절대무’를 변공(邊空)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라만상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변화이지 무(無)가 아니다.
변화를 보통 ‘늘 그러함(常)이 없다’고 해서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상은 절대무가 아니다.
그리고 후자, 즉 현상 속에서의 ‘무’는 상대적(相對的) 의미의 무(無)이다. 이는 우리의 현상 세계에서 포착이 가능한 어떤 것, 그 어떠한 것이 ‘있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통한 판단이 필요하다. 여기서 판단이란 분별인데, 분별이란 다른 것과 구분하는 것이다. ‘유(有)’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면 유와 구분 되는 반대 항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음 ― 무(無)’이다. 무(無)는 이렇게 유(有)를 끌어 들여와야 설명이 가능한, 유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무와 유는 서로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예컨대 중국 당나라시대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제자들의 질문에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가 화두인 것이다. 이 화두야말로 유와 무를 따지는
상대적인 무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무(無)’자 화두는 ‘불성의 유무’에 관한 문제로 유⋅무 그 어느 답도 맞출 수 없고, 억지로 정답을 내 놓으라면 ‘부처님의 침묵[무기(無記)]’ 이외의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한 것은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글귀를 외워 알고 있는 제자에게 경책을 한 것이지, 개의 불성 유무를 답한 것이 아니다. 조주 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수행승이 유⋅무의 분별심을 일으키면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야심경>에 무(無)자와 불(不)자를 많이 쓴 것은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언표보다 부정적인 언표를 하는 것이 더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즉 설명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반야심경>은 공(空)에 입각해서 무(無)와 불(不) 자를 반복 사용해, 온갖 분별이 끊겨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지혜의 완성을 설한 경이다. 즉, 온갖 분별이 소멸된 상태에서 설한 ‘깨달음의 찬가’이다.
일체의 법이 모두 공(空)하다는 이치를 설하면서, 보살이 이 이치를 관(觀)하면 일체 고액(苦厄)을 멸하고, 열반을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함을 설명하기 위해 ‘무(無)’와 ‘불(不)’를 거듭 쓴 것이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에서도 위와 같이 ‘무’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 다만 <반야심경>에서는 상대적(相對的) 의미의 무(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는 죽은 것이 아니다. 상대적 무로서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무(無)’라는 부정 속에는 강한 긍정이 숨어 있다.
<반야심경>에서 ‘무’의 철학 속에는 (부처님 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그것은 연기(緣起)의 법칙과 연결돼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똑같은 이치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공(空)의 이치이며,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가 자꾸 쌓이고, 공덕을 지으면 지을수록 복덕을 누리는
이유가 바로 공과 연기의 법칙 때문이다. 그래서 공은 연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없다(無)가도 있게(有) 되며, 있다(有)가도 없어지게(無) 되는 이유도 존재의 실상이 공이며, 그래서 연기의 법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의 ‘무(無)’가 바로 상대적인 무인 것이다. ‘절대 무’는 없다가도 있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현상은 연기의 측면에서 생성, 변화, 발전,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따리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이해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다.
그리고 말을 바꾸어서,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깨달은바 진리는 중도(中道)라고 선언하시니 이것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한다. 이 중도야말로 불교의 처음이자 중간이자 끝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깊은 반야를 행할 때 오온(五蘊)이 다 공함을 봄으로써 일체고(一切苦)를 떠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오온이 다 공한 것이 곧 중도이다. 그리하여 제법이 공이라 해서 다시 한 번 중도를 말하고,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했다.
※중도를 노래한 <중론(中論)>의 ‘귀경게’가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임을 상기하시라.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말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은 진제(眞諦)의 세계, 실상(實相)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생과 멸, 깨끗함과 더러움, 늘어나는 것과 줄어듦이 다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공(空) 중에는 「무색수상행식(無色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이라 했다. 즉, 실상의 세계, 진리의 셰계인 공에서는 「무색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인 것이다. 공(진리의 세계) 중에는 색수상행식[五蘊]도 안이비설신의[六根]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는 있다. 실상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는 없지만 현실세계에는 이런 것들이 다 있다.
이것을 공과 연관시켜 보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했다. 공 중에는 고집멸도도 없다는 말이다. 공 중에는 도(道)도 없다. 실상이니까, 진리의 세계에 들었으니 도가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공 중에는 도가 없다는 것은 진리의 세계라서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에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는 고집멸도가 다 있다. 그래서 사바세계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심경>에서 오온에서부터 일체가 없다(無)고 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없다 ― 무’라는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그래서 무… 무의 연속이다. 그런데 무… 무의 연속은 공을 설명하기 위해 무(無)의 연속을 시설한 것이고, 기실 그 뜻은 이 경전의 이름이 <반야심경>이듯이 반야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오온과 그 오온을 세분한 <반야심경>에서 지적하듯 모든 것은 아주 없다는 말은 변공(邊空-절대 무)을 이르는 말이다. ‘없음’이라는 것은 진리인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공과 반야의 양변으로 나누어 방편으로 체(體)의 관점인 변공을 가설하고 그 가운데 ‘절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에 있어서는 변공(절대 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가 없는 변공이라면 그냥 ‘무(無)’라고 하고, 더 이상 여러 무를 시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변공(邊空)---실재하지 않지만 설명을 위해 가설한 방편 공을 말한다. 공 가운데는 일체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뭔가가 있다면 공일 수가 없다. 공 가운데 없다는 무(無)는 절대적인 없음을 말한다. 오온과 그 오온을 세분한,
<반야심경>에서 지적하듯 모든 것은 아주 없다는 절대 무, 이것을 변공(邊空)이라고 한다.
거듭 말하지만, 공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무를 시설했지만 기실 그 뜻은 이 경전의 이름 <반야심경>처럼 반야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반야 역시도 진리 중도의 한 변(邊)이다. 만약 그 체(體)가 공이 아니면 그 작용인 반야가 연기하지 못해서 원만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실 알고 보면 제행이 무상한 그것이, 그 체가 공하고 그 작용이 원만한 것이다.
제법에 있어서 그 체가 공한 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그 작용의 반야가 원만한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중생이 그에 집착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되고 만다.
불교가 중국으로 도입되는 초기에는 반야 계통의 경전들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 반야계통의 경전들은
공사상을 핵심으로 한다. 이 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노장(老莊) 계통의 현학(玄學) 개념을 이용한
격의불교(格義佛敎)에서는 공(空)을 무(無)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서역에서 온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은 중국인의 잘못된 무(無)와 공관(空觀)에 대한 관념적 사고를 불교 가치로 뒤바꾸기 위해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명했다. 구마라습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비유비무의 중도로 공(空)을 설명해 그 의미를 밝혔다.
특히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僧肇, 384~414)가 노장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노장계통에서는 본체에 해당하는 무와 현상에 해당하는 유를 구분하면서 본체인 무에 치중해 공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승조는 이러한 노장계통의 논리는 참된 것이 아니고, 유와 무의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인 비유비무(非有非無)가 참된 공임을 설파했다. 그리하여 차츰 중국에 공의 개념이 정착해 무와 구분하게 됐다.
공(空)과 무(無)는 다르다.
중생들은 견해에 집착하고, 그 견해의 가장 큰 두 줄기는 있다(有)와 없다(無)이다. 중생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의 특징은 있다와 없다, 이 두 가지에 박혀 있는 것이다. 공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이 곧 불교적 지혜이며, 공이 곧 깨달음의 근본 핵심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곧 공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공을 들으면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여긴다. 깨달음이 없어 공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공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공(空)은 비었다,
무(無)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공은 비유비무로서 유무를 초월하는 데에 있다.
‘공(空)’이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비유비무(非有非無)다. 유(有-生)도 아니고 무(無-滅)도 아닌 것이 공이다.
즉, ‘영원히 실재한다(有)’는 생각이나 ‘실재하지 않는다(無)’는 생각을 초월한 곳에 공(空)이 있다.
대승불교 궁극의 이치로서 공은 비유비무이다. ‘있다’ ‘없다’ 양변의 초월, 유ㆍ무 일체의
한정적인 관념의 돌파, 즉 초월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물질적 현상이든 정신적 현상이든 여러 가지 존재가 서로 인(因)과 연(緣)이 돼 일시적으로
가합(假合)된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이다.
공은 상대개념인가 절대개념인가?
상대개념도 절대개념도 아니다.
공은 어디까지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연기(緣起)일 뿐이다.
상대개념과 상의상관성은 전혀 다른 말이다.
불교에서 공(空)이나 무(無)는 고정된 관념을 두지 않고 생각이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정해서 집착하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므로 융통성이 없다.
그곳에는 진보도 발전도 없다. 변하면서 자유자재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고정된 생각'은 나의 편견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나 너의 일부분만을 볼 뿐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융합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증오와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주장에만 빠지기 쉬워 다른 이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바로 이것이 공(空)과 무아(無我)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편견에 빠진 자기중심주의이다.
<반야심경>에서 ‘공’이나 ‘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은 한곳으로 치우침이 없는 곳에서 주장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것을 언어적인 표현으로 <반야심경>이 말하기를, 없는 곳에서 물질과 생각이 있고, 없는 곳에서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몸뚱이가 있고, 뜻이 있노라고[無眼耳鼻舌身意], 그러므로 알라,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이 있고 소리가 있고 향기가 있고 맛이 있고 감촉이 있고 진리가 있다[無色聲香味觸法].
그러므로 보는 세계나 듣는 세계나 냄새 맞는 세계나 맛보는 세계나 느끼는 세계들이 모두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본래 더러워질 것이 없는 청정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空)하다는 것이 텅 비었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공한 것이 또한 따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루어야 할 도가 따로 있고, 닦아야 할 도가 따로 있고, 부처의 성품이 따로 있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따로 있다면 절대로 공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은 증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니까.또한 어떤 사람들은 공하다는 것이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것(절대 무)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 것도 없다면 생각을 일으키는 놈은 누구며, 도를 닦는 놈은 누구며, 깨우쳐 증득하는 놈은 또 누구란 말인가.
번뇌도 없으니 업을 받을 놈도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 또한 공견(空見)에 잘못 떨어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을 완전히 떠나버려야 하며,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마치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고 물소리가 물에 젖지 않듯이 그 작용이 현현하게 나타나므로 그 주체를 공한 성품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부처님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업식(業識)에 머물러 살기 때문에 진리를 다 깨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를 던져 펄펄 살아 움직이는 ‘무(無)’자로
업식(業識)에 머물러 사는 중생에게 경책을 한 것이다.
공한 성품 가운데는 당연히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공한 성품이 없다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나타날 수도 없음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본래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착각해서 괴로움이 생긴다.
하나의 우유 컵이 작은 것일까? 큰 것일까? 작다는 것은 큰 것을 비교해서 작은 것이 되고, 큰 것은 작은 것을
비교해서 큰 것이 된다. 비교 하지 않았을 때, 그 컵은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다. 무겁다 가볍다,
새것이다 헌 것이다, 길다 짧다, 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다.
본래의 우유 컵은 작은 것도 큰 것도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헌 것도 새것도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무아(無我) - 공(空)」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나 선과 악이 본래
정해진 요소는 없다. 옷을 입고 사느냐, 벗고 사느냐도 그 나라 문화에 따라 벗고 살기도 하고 입고 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태평양 열대지방 섬에는 옷을 벗고 사는 부족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다. 또 목욕탕에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다. 앉고 눕고 잠자고 서 있는 것도 다 그러하다.
때와 장소에 연관돼 필요에 따라 구성된다. 모든 것이 연기된다는 말이다.
자야 될 시간에 잠을 자지 않으면 그는 잘못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아(我-나)’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저하게 따져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달라이라마 존자를 세계인들이 존경하지만 중국에서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존경한다, 미워한다’에도 그 실체는 없다.
모든 것에는 인연이라는 연기로 일어나는 것이지 실체는 공한 것이라 본래는 없다.
한때 과학에서는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기본적인 입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것을 소립자(素粒子)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분자를 소립자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원자를 소립자라고 했다. 그러나 원자도 쪼개지며, 그것을 구성하는 중성자, 양성자 이런 것도 쪼개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현대과학은 소립자는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소립자가 정말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니 그것이 중도(中道)요,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서 법신인 것이다. 이처럼 물리학의 극점인 소립자가 바로 비유비무의 법신(法身)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양자물리학의 최종 귀결접이 바로 불법으로 귀의하고 만다. 그래서 심지어 양자과학(量子科學)이 아니라 공성과학(空性科學)이라 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만물은 있음에서 생겨나지만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 이처럼 무(無)의 의미, ― 동북아의 대승불교사상에서 말하는 무(無)는 ‘절대 무(無)’가 아니고 ‘무한한 잠재성’으로서의 무, 다시 말하면 ‘잠재적 복수성(virtual multiplicity)’으로서의 무(無)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空)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을 완전히 떠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연기(緣起)일 뿐으로서,
고정된 관념을 두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움직일 수 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