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복실 열사 23 주기 추모제
2015년 3월7일 오후2시 ; 전주 금상동 성당, 열사 추모
고 박복실 노동열사의 23번째 추모식이 오는 3월7일 토요일 열린다. 추모제는 천주교 소양묘지 금상동 성당에서 열린다.
추모제는 매년 열사가 돌아가신 3월 11일 전 주말에 열사가 안장된 천주교 소양묘지에서 열린다. 추모제는 열사가 천주교 신자였고 가톨릭 노동사목에서 활동하다 돌아가신 것을 기려 '추모미사'로 진행된다.
故 박복실 열사가 걸어온 길
1979년 태창메리야스 입사,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활동
1981년 태창메리야스 노동조합 위원장 당선, 전북지역 최초의 민주노조활동을 전개함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간부 7명과 함께 해고, 노조탄압 중지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9일간의 단식농성투쟁을 전개함
1983년 익산, 광전자, 원일택시, 군산 경성고무등 입사, 해고 등 무려 일곱차례의 해고.
1987년 지역 노동자선배로써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활동시작
19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
19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고 8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
1992년 3월 11일 새벽 4시 더 나은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온몸을 바쳐 살아온 박복실 동지 운명(36살)
종교
[길을찾아서] “예수도 진통제 드셨냐”며 견디던 노동열사 박복실 / 문정현
등록 : 2010.08.03 19:03 수정 : 2010.08.03 .
1982년부터 꼬박 10년 동안 전북지역 노동운동에 헌신한 박복실(왼쪽 사진 가운데)씨의 위암 투병을 격려하고자 91년 여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복실이를 위한 밤’ 행사가 열렸다. 이듬해 3월11일 36살로 숨진 박 열사를 기려 해마다 추모미사를 드려온 필자가 지난해 천주교 금상동성당에서 17주기 추모식을 집전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왼쪽)
문정현-길 위의 신부 47
전북 노동자의 집 책임신부로 나중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지도신부까지 맡게 되자 전북에서는 나를 ‘노동자의 아버지’라고들 불렀다. 그때 만난 노동자들 중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이가 박복실이다. 그는 전주 노동자의 집 책임자였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전주 중앙성당에 있던 1982년 태창메리야쓰 민주노조 탄압사건 때였다. 태창메리야쓰 노조 지부장이었던 박복실은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 말살정책에 따라 해고되자 가톨릭센터 사목국장의 방을 점거한 채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노동자의 농성을 달가워하지 않는 교구의 태도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뒤에서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 88년 익산 창인동성당으로 옮겨와 전주교구 노동자의 집 책임자가 되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박복실이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은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투사인 이철순이 창인동성당에서 노동자의 집을 처음 만들었을 때였다. 그는 의욕과 욕심이 많아 누구한테든 지려고 하지 않고 똑부러지는 젊은이였다. 키가 크고 씩씩하고 명랑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여리고 인심이 좋았다. 태창에서 해고된 뒤, 광전자·원일택시·군산경성고무 따위에 입사했지만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무려 일곱 차례나 해고되었다. 그러다 87년부터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박복실이 워낙 정의감이 많고 의욕이 많다 보니 잊지 못할 일도 많았다. 나는 노동자의 집 책임신부였지만 또한 창인동 성당의 주임신부이기도 하니 사목회 임원이나 교우들과도 어울려야 했다. 그래서 가끔 교수·회사관리자·의사 등 유지들이 모여 있을 때 초대를 받으면 노동자의 집 실무자들과 같이 갔다. 그 자리에서는 함께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게 되는데 노동자들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있어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직설적으로 쏘아대고 대들었다.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은 부를 누리기만 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컸다. 그래서 식사 자리는 늘 불편해졌고 나는 나대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박복실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고 속으론 안쓰러웠다.
그 당시 그가 세를 살고 있던 집은 연탄 아궁이를 때는 비좁은 부엌에 겨우 두 사람 정도 누울 수 있는 방 하나가 전부였다. 부엌살림이라고는 냄비 몇개, 밥 그릇 몇개뿐이고, 먹는 거라고는 늘 라면이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바깥에서 좀 나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결국 위암에 걸리고 말았다.
암 수술을 한 뒤 투병생활을 할 때는 큰 키에 몸이 바짝 말라서 보기가 안타까웠다. 그가 요양하고 있는 동안 전주교구 이병호 주교님이 병문안을 왔다. 통증으로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주교님이 진통제라도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께서도 진통제를 먹고 돌아가셨나요?” 했단다. 그 이야기를 장례미사 때 전해 듣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말은 그의 신앙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그의 투병을 돕고자 우리는 ‘복실이를 위한 밤’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몸이 아픈데도 그 자리에 참여한 그는 ‘동지가’를 부르고 노동자 만세를 외쳤다. 그때 그를 등에 업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정현 신부
박복실이 세상을 떠난 건 내가 익산 금마성당으로 옮긴 92년이었다. 장례는 전주 전동성당 구내에 있던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치렀다. 장례미사는 전주교구장이 주례를 맡아 공동미사로 드렸다. 나를 비롯해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시신을 둘러싸고 불렀던 ‘사랑’이란 노래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3일장 마지막 날에는 노동자들이 상여를 메고 부를 줄도 모르는 염가를 불렀다. 노동자들은 박복실의 마지막을 잘 보내주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가 간 뒤 한해도 빠지지 않고 추모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성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금껏 조성만 열사의 영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영정 옆에 박복실의 사진도 놓아두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복실은 선명한 사진은 한장도 없고 희뿌연 모습만 세상에 남겨놓았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