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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감출 수 없는 열매와 은사
Witnessing By Fruit and Gift
모두가 증인
재판정에서 증언해 본 적이 있는가? 첫째, 증인은 사실만을 말해야하며 사실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기초로 대답해야지, 추측이나 사견 혹은 주워들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규범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라.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그건 전해 들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셨을 때 왜 그들에게 성령님이 필요한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증언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증인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보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증언은 그 사람의 능력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 유효성과 더 많은 관계가 있다. 신약 성경에서 '증언'이 수많은 영적 은사로써 열거된 적은 없다. 증언은 하나님이 그 사역을 위하여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정직하게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언을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증언이란 유능한 사람들이 아닌 회심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모든 사람은 다 증언을 한다. 예컨대, 멋진 남성으로부터 막 청혼을 받은 아가씨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프로 경기에서 우승한 것을 지켜본 아저씨도, 수능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도 모두 증언을 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알리기 마련이다. 만약 슬픈 소식이라면 어떤가? 작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감추려고 해도 몸짓이나 말투, 음성의 떨림에 그것이 배어나기 마련이다. 만약 좋은 소식이라면? 그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 하나만으로도 누군가 관심을 갖고 말을 걸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증언은 내심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나는 증언할 수 없어요. 나는 증언의 은사를 받은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알려 줄 만큼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성경의 '증인'이라는 단어는 '마르튀 martys, pptus 인데, 이 단어로부터 영어의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가 나왔다.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지 않는가? 헬라어의 '마르튀리아' martyria 는 증언의 내용을 뜻한다. 영어에서는 '위트니스' witness 한 단어가 증인과 증언을 모두 뜻한다. 모호해 보이지만 이것은 그 단어가 가진 전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증인이라는 사람과 증언이라는 내용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궁극적인 증인이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보고 들은 바를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부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나타나심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성령의 부어 주심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전적으로 굴복하는 시점이 이르렀다. 그 결과, 그들은 주인이자 구세주이신 분을 증언하고자 하는 열렬한 소망이 생겼다.
"하나의 관심사가 우뚝 솟아올랐다. 하나의 독보적인 주제가 다른 모든 주제를 집어삼켰다. 신자들의 포부는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나타내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소망, 48
하나의 관심사라고 말한 점을 주목하기 바란다. 그런데 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두 가지와 동일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증거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것이고, 또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부담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왜 신약 성경에서 대체로 성령의 나타나심이 두 가지, 곧 열매와 은사들과 동일한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없다. 이 둘은 쌍둥이와 같아서 어디든 함께하고 우리가 가는 어디에서든 따라온다.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사람은 그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사랑의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람은 잃은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 나라를 전도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이다. 종종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모범적인 삶을 살기만 하면, 다른 이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역의 의무에서 면제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품성의 열매와 사역의 은사는 둘이 함께 오거나 둘 다 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말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위선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갈 2:11~14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려면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교회에서 주장하고 있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바울은 소리쳤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1~23
그러고 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고 13절 지금 그들은 믿음으로 살고 있으며 22~24절 그들의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음 27절 을 뜻한다고 상기시켰다. 다음으로 그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율법주의와 자기의 의를 따르는 사람들과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과를 비교하였다. 갈 5:4, 5, 16, 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성령의 열매는 기적의 열매이다. 한 과실에서 아홉 가지 다른 맛이나니 말이다. 이것은 실제로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나는 사랑인데, 태양빛이 일곱 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무지개와 흡사하다. 참사랑, 기쁨, 내적 평화, 절제를 드러낼 때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작은 물방울에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비추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중요한 사항을 하나 더 지적한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는 우리가 동일한 종류의 씨, 곧 성령의 씨를 뿌릴 때에라야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타락하고 부패한 씨를 뿌린다면 성령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두렵건대, 우리 중 많은가 지속적으로 썩어질 씨를 심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불가능(갈 6:7~8)이라고 말한다."존 폴린, <성령이 오시면>, 131
어떻게 열매를 맺을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 빈약한 열매가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점을 아주 명확히 하셨다. 예수님은 이것이 시간을 요하는 과정임을 아신다. 보혜사가 오실 것을 공표하시던 그 저녁에 이것을 말씀하셨다. 곁에 성경이 있으면 요한복음 15장을 펴보라.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1, 2, 5..
본문에는 단계가 있음을 알아차렸는가? 첫째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이다. 그다음으로는 열매를 맺는 단계, 더 맺는 단계 그리고 많이 맺는 단계로 이어진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조금 맺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열매를 많이 맺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열매 없는 상태에서 열매를 맺는 상태로 이끄실까? 2절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그것[그 가지)을 제거해"버리신다. 좀 혼란스러워 보이는 대목이다.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제거하신다는 말씀인가?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는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제거하다'로 번역된 원어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 단어는 포도원지기들이 땅에 늘어진 가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농부들은 축 쳐진 가지들을 들어 올려 위쪽 가지나 막대기에 묶는다. 이렇게 해 주면 늘어졌던 가지들은 햇빛과 비에 더 노출되고, 외부로 뻗은 덩굴손들이 나무가 아닌 땅으로부터 직접 양분을 빨아들이는 불필요한 일이 없어지게 된다.
하늘의 포도원지기는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으셨다. 우리가 일단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어느 정도라도 열매를 맺게 되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것이다. 주님은 어떻게 이 과업을 하시는가? 성경은 그분이 불필요한 잔가지와 싹과 잎사귀를 없애고 햇빛과수분과 공기에 가장 잘 노출되도록 여기저기 전정을 함으로 가지를 깨끗하게 손질하신다고 했다. 요 15:2 그분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 작업을 하신다. "포도원지기가 칼을 들었을 때보다 나무와 가까운 적이 없다. 나무가 지속적으로 건강하기를 바라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더욱 생각하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 <에브리원 주석 요한복음>, 71
왜 우리의 삶에 힘들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지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왜 암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가? 왜 재정 파산으로 가족이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 왜 통탄할 만한 부당함이 눈앞에서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고통과 불행의 창시자가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나은 건강을 위하여 고통 혹은 불행, 어쩌면 둘 다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바친 많은 사람이 전에 없던 장애물을 만나거나 시험과 난국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에 놀라고 좌절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위해 기도한다. 주님의 사역에 적합하게 되도록 기도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품성에 있는 모든 악함이 드러나게 되는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의문을 갖는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신다면 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이와 같은 일들이 그들에게 닥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련과 장애는 주님이 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또한 그분이 정하신 성공의 조건이다. 그분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바르게 지도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능력과 감성이 있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섭리로써 그와 같은 사람들을 각기 다른 위치와 여러 환경에 처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지금까지 알지 못한 채 감추어 있는 결함들을 그들의 품성에서 발견하게 하신다. 그분은 그들에게 이와 같은 결함들을 교정하고 주님의 사업에 적합하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고난의 불이 그들을 엄습하도록 허락하심으로 그들이 정결케 되도록 하신다” 치료, 470 471
우리에게 닥친 불편과 고통으로 인하여 주님을 비난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주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한, 그분은 우리가 더 열매를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도록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이끄시는가? 주님은 "그 안에 요 15:5 거하라고 초청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이 부분은 뭔가 다르다. 처음 두 변화의 과정, 곧 열매 없음에서 약간의 열매를 맺는 단계 그리고 약간의 열매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단계에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셨다. 일반적으로 주님은 우리가 본성적 '컴포트존' comfort zone, 다시 말해 적당히 본성과 타협하는 그 상태에서 나올 것인지 말 것인지 묻지 않으신다. 또한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해 온 우상들, 나태함, 이기심을 잘라 버릴 것인지 묻지 않으신다. 주님은 그냥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모든 영광을 비추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놀랄 정도가 되려면 “그의 안에 거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하다'라는 단어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잘 쓰는 말이 아니다. 그 뜻은 '남다', '머무르다', '오래 견디다이다. 이 문맥에서 '거하다'라는 말은 '꼭 붙들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필사적으로 그분을 꼭 붙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센 바람과 비를 맞을 때조차 포도나무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가지처럼, 우리는 인생의 폭풍이 우리를 압도할 때도 예수님을 꼭 붙들어야 한다. 전적인 연습으로만 우리는 그분 안에서 더 강하게 된다.
그러나 분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왜 '거하다'와 같은 동사를 포도나무에 자연스럽게 달려 있는 가지에 연관하여 사용하였는지 의아해한다. 정답은 생각보다 쉽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거절하고 대신 사망을 택하게 만든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예수님의 것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정작 그분 곁을 떠난다.
우리는 주님을 선택하지 않았다. 절대로!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요 15:16 사도 바울은 가지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았다고 말한다. 롬 11:17~24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에게서 나지 않았다. 야생 가지를 건강한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농부를 마음속에 그려 보라. 그다음으로 농부는 포도나무에 무엇을 할까? 베어야 한다. 상처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야생 가지를 포도나무에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뜻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함으로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입양되었다. 전적으로 그렇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요 13:1 주님에게 다른 방도는 없었다.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붙들어야 한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던 것처럼 붙들어야 한다. 창 32:26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시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것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은 주님을 떠나도록 할 것이다. 절대로 떠나지 말라. 절대로 멀어지지 말라. 가지가 포도나무와 완전히 하나가 될 때까지. 그래서 다시는 떠날 수 없게 될 때까지 주님 안에 거하라.
성령의 은사들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사하는 것과 우리가 어떤 나무에 속하는지 알려 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것은 '증인'이라는 동전의 한 면과 같다. 다른 한 면은 "하나님의 나라의 촉진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4개의 주요 장, 곧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14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은 성령의 선물을 열거하고 그에 관해 가르친다. 성령의 선물에 관한 추가적인 언급은 고린도전서 13장 3, 7, 32~34절, 에베소서 3장 1, 7절에서 찾을 수 있다. 각각의 언급에서 성령의 열매의 기초가 되는 뿌리, 곧 사랑이 은사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을 열거한 후, 로마 사람들에게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했다. 롬 12:6~9 결국 이것들이 은혜의 은사들, 사랑의 선물들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은사들에 관해 가르치는 중에 사랑을 주제로 한 장을 할애하였다. 은사들이 주어졌다가 사라지더라도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결코 폐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는다. 고전 13:8, 13
사도는 은사를 받은 자들, 이를 테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에 관해 더욱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이런 선물들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성도를 이끌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함" 엡 4:13 을 반사하는 영적인 성숙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엡 4:14 될 것이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 엡 4:15, 바른성경 하게 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15절, 새번역 다다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라고 촉구했다. 그전에 그의 권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8절
이미 언급했듯이 성령의 선물들은 은혜 카리스마타 의 선물들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오지만 성령님이 나누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는 은사들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엡 4:7~8 그러나 이 땅에서 그런 권리를 행사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11 그러므로 선물들은 은혜와 성령에 따라 주어진다. 은혜와 성령이라는 두 원천이 하나님의 섭리로 마르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분하다. 고후 12:9 침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성령을 "한량없이" 요 3:34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영적 은사의 다양한 목적
신약 성경은 또한 영적 은사의 다양한 목적을 가르친다. 교회의 연합과 영적 성숙을 위하여, 롬 12:3~5, 9~16; 고전 12:4~7; 12:31~14:40; 엡4:13~16 교회의 사역을 받들기 위하여. 엡 4:11~1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벧전 4:10~11 몇몇 사람은 교회의 연합과 몸의 영적 성장이 영적은사의 주요 목적이라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만약 교회인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우리의 자원이나 기관 혹은 확실한 교리들을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아 가족과 이웃, 친구와 모르는 사람까지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런 사랑은 이 땅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때로 영적 은사 세미나에 참석해서 어떤 특정한 은사들을 강조하여 그런 은사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느라 시간을 보낸다. 물품 목록을 나열하듯 영적 은사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구조적으로 더 큰 그림을 볼 수 없게 한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임재 하시면 우리는 충만에 이르게 되며, 그분은 다양한 증거 혹은 선물들을 쏟아 부으신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이 은사들의 방대한 목록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각각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의도되어 있다.
어느 날 아침 어린 소녀와 할머니가 교회에 출석했다. 소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다. 단지 듣고만 있었다. 소녀는 할머니의 소매를 당기며 물었다.
"할머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얘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단다."
소녀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에 즉답을 요하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목사님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크다고 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귀여운 것.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단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크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요,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몸 밖으로 보여야 하지 않아요?"
그렇다. 하나님이 보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한 당신의 경험이 실제적이고 참되다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증인'이다. 이것이 드러난 열매와 은사들을 통하여,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 약속[성령의 약속은 그들[초대 교회]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약속을 백성 앞에서 좀처럼 제시하지 않고, [성령의] 영접을 교회 안에서 말하는 이가 드물다. 이토록 중요한 주제에 관해 침묵한 결과, 영적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이 이토록 풍성하게 주어졌는데도,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목사, 174
예수님을 닮은 삶과 사역
1921년, 데이비드와 스베아 플러드 David Flood, Svea Flood 선교사 부부는 두 살된 아들과 함께 스웨덴에서 아프리카의 오지 콩고 공화국으로 갔다. 당시에는 벨기에령 콩고 Belgian Congo 로 불리는 곳이었다.
그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젊은 에릭슨 부부를 만났고, 그들 넷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였다. 수많은 헌신을 하던 그들은 선교 본부를 떠나 복음을 들고 외딴 지역으로 가라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다. 은돌레라 N'dolera 마을에 도착했을 때 부족의 신들을 노엽게 할까 봐 두려웠던 추장은 그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두 부부는 마을에서 8백 미터쯤 떨어진 비탈에 진흙으로 움막을 지었다. 그들은 영적으로 어떤 돌파구가 열리기를 기도했으나 아무런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만날 방법이 없었으나 한 꼬마가 유일한 접촉점이었다. 그 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그들에게 닭과 계란을 팔도록 허락을 받았다. 스베아 플러드는 고작 1미터 40센티밖에되지 않는 키가 작은 여성이었다.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아프리카사람이 이 소년이라면 그를 예수님께 인도하겠다고 결심했다.
날마다 스베아는 그 아이에게 예수님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말라리아가 선교사 식구들을 차례로 덮쳤다. 에릭슨 가족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며 선교 본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데이비드와 스베아 부부는 은돌레라 마을근처에 홀로 남아사역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스베아는 하필 원시적인 아프리카의 한복판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아이를 출산했고 부부는 아이나 Aina 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분만하느라 기력을 탕진한데다 말라리아로 이미 쇠약해진 상태여서 17일 후, 스베아는 죽었다.
데이비드의 마음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대충 땅을 파고 갓 스물일곱이 된 아내를 거기에 묻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선교 본부로 갔다.
그는 딸을 에릭슨 가족에게 부탁하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스웨덴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망쳤어요." 8개월 후, 에릭슨 부부는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며칠 사이로 둘 다 죽었다. 그때 그의 어린 딸은 미국인 선교사에게 보내졌고, 그들은 스웨덴식 이름 대신 '애기' Aggie 라고 이름을 고쳐 불렀고, 3살 되던 해 미국으로 데려갔다.
그들 모두가 바라던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는데, 일이 잘못되어도 이렇게 많이 잘못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종인 스베아를 통하여 일하고 계셨다. 그가 낳은 딸 '애기'는 미국의 사우스 다코타 South Dakota 에서 성장했다. 아가씨가 되었고, 젊은 목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는 훗날 기독교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어느 날, 스웨덴의 종교 잡지 한 권이 그녀의 우편함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누가 이 잡지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연히 그녀는 스웨덴어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사진 한 장에 관심이 쏠렸다. 그 사진에는 원시적인 배경을 뒤로하고 하얀 십자가가 세워진 무덤이 있었는데 그 십자가에는 '스베아 플러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곧장 차에 올라타고 대학으로 갔다. 그 기사를 해석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교직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재촉했다. 그 강사는 오래전 은돌레라에서 있었던 선교사들의 이야기와 '애기'의 젊은 엄마가 거기서 죽었다는 것, 아프리카 부족의 소년과 접촉했던 일 그리고 그 지역에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주었다.
몇 년 후, 애기와 남편은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선교 대회에 참석하였다가 콩고 공화국의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 나라의 교회 총책임자가 자기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말해 주었다. 애기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고가 끝난 뒤에 그에게 물었다. 데이비드와 스베아 플러드에 대하여 들어 본적이 있느냐고. 그 지도자가 들려 준 말로 인하여 그녀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 분이 바로 스베아 플러드 여사이십니다." 웃으며 말했다. "애기,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께 먹을 것을 전했던 소년이 바로 접니다" 스베아 플러드가 보여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과 그녀의 진지한 소망은 그 소년에게 축복이 되어 잊혀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는 예수님을 개인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였다. 그가 성장한 후에 그는 추장을 설득하여 마을에 학교를 세우게 했다. 그는 학생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였고,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를 예수님에게 인도하였다. 그리고 결국 추장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오늘날, 그 마을 한곳에만 600명의 기독교인이 살고 있고, 그 나라에는 10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 짐 심발라와 딘 메릴 〈신선한능력〉, 115
예수님을 닮은 삶과 예수님을 닮은 사역, 이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이다. 그 후에야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사역을 하는 이유이다. 바로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말이다. 세상은 의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요 16:7~8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이 장에서 다룬 '증인'이란 무엇인가?
2. '증인'과 '순교자'는 어떤 식으로 상호 영향을 미치는가?
3. 성령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두 가지는 무엇인가? 왜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가?
4. 요한복음 15장에서 '제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유에서 가지를 '제하는' 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가?
5. 하나님이 포도원의 농부라면 얼마나 친밀한 느낌이 드는가? 당신의 경험을 말하고 나누라.
6.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가 많은 과실을 맺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도록 하시는가? '거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7. 은사들이 은혜와 성령의 무한한 근원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선물의 종류나 숫자와 관련하여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 성령의 은사들이 지닌 다양한 목적은 무엇인가? 왜 교회의 가장 주된 목적이 연합이라고 생각하는가?
9. 왜 영적 은사의 목록들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가? 각 사람이 어떤 은사들을 가져야 하는지 찾아보는 것과 관련하여 정말로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0. 스베아 플러드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