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불이문(十不二門)
《십불이문(十不二門)》은 《법화현의(法華玄義)》에 나오는 10가지 불이문(不二門)을 천태종을 중흥시키고
묘락대사(妙樂大師)라고도 불리는 당(唐)의 담연(湛然: 711∼782, 天台宗 6祖)이 해설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다소 막연히 알고 있던 이 ‘불이(不二)’의 개념이 오랜 전부터 명쾌히 정의되어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아래에 인용해본다.
아울러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 동안 말로만 들었던 ‘법화경(法華經)’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이 천태종에서는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특별히 중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법화경이 대승불교경전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영겁(永劫)에 걸친 초월적 존재,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 모든 중생(衆生)이 깨달음을 열 수 있는 대도(一乘)를 보이기 위함이며,
따라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밝힌 까닭이라고 한다.
다만 석가모니가 30세에 깨달은 뒤 42년간 방편(方便)을 설(說)하다가 열반 8년前에 기존 설법을 모두 부정하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이 법화경이라는 이유로 다른 불경을 배척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① 색심불이(色心不二) : 육체와 정신(心)이 일체이며 불이(一體不二)라는 것을 말한다. 흔히 혼이 없는 육신이라고 말을 하는데 영혼도 육신을 통하여 발(發)하고 육신 또한 영혼이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식(識)은 체(體)를 통하여 외부로 발산된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는 차이가 난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사실은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② 내외불이(內外不二) : 내면의 정신세계와 그것에 의해 파악되는 외계(外界)의 사물사상(事物事象)이 일체라는 것을 말한다.
외부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이라는 것이다.
밖의 세상이 소란스러우면 내면의 세계 또한 소란스럽다. 좋은 것을 보면 기쁘고 나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③ 수성불이(修性不二) : 인간의 생명(生命)에 본래 본성(本性)으로서 갖추어지는 것과 불도수행(佛道修行)으로 얻어지는
성분(性分)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善)과 악(惡)은 원래 나의 생명 속에 갖추어져 있다.
악보다 선을 많이 나타나도록 수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본성과 수행성이 다를 수가 없으며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④ 인과불이(因果不二) : 아직은 열려(開)있지 않고, 나타나지(顯) 않아 인(因)의 단계에 있는 중생의 불성(佛性)과 이미
과(果)로 체현(體現)되어 있는 부처의 불성이 불이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생명에 갖추어진 불종(佛種)은 수행으로 나타나서
불과(佛果)를 이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인이 선하면 결과도 선하고 원인이 악하면 결과도 악하다는 근본을 가르친 것이다.
⑤ 염정불이(染淨不二) : 번뇌(煩惱)에 물든 중생의 생명과 청정(淸淨)한 깨달음에 감싸여 있는 부처의 생명이 불이라는 것이다.
번뇌를 어떻게 보리(菩提)로 승화시키느냐가 수행이다. 염법(染法)은 번뇌, 업, 고에 의해서 오염된 무명(無明)의 법을 말하며
정법(淨法)은 청정한 법성(法性)을 가리킨다. 무명과 법성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말한다.
⑥ 의정불이(依正不二) :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는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보는 환경세계를 말하며 정보는 자기주체 즉 생명활동의 주체를 말한다. 불법에서는 의보가 탁하면 중생의 정보 또한 탁해진다고 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환경파괴가 심각한 수준이다. 지구의 환경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파괴되어 갖은 질병이 만연하게 되고 불치의 병이 나타난다. 환경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몸도 점점 나빠지게 되므로 의보가 잘못되면 인간도 잘못되게 되는 불법사상이다.
⑦ 자타불이(自他不二) : 부처와 보살(自)과 중생(他)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계(法界)의 중생은 각기 경계(境界)가 다르고 자타의 차별이 있어도 자도 타도 같이 일념(一念)의 마음에 같이 있으므로 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도 보살도 중생도 같은 수평의 생명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⑧ 삼업불이(三業不二) :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그리고 사고(思考),감정(感情) 등의 정신적인 영위(營爲)를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이 삼업(三業)은 나누기 어렵고 분별하기도 어려워 일체라는 것이지만 신, 구, 의 삼업은 각각 나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난다. 순간에 어떤 생각이나 물체를 받아들일 때 마음으로 입으로 몸으로 각각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받아들여 동시에 표현된다.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따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삼업이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쁜 것을 받아들일 때에도 마찬가지의 이치이기 때문에 삼업이 각각이 아니라 불이라는 것이다.
⑨ 권실불이(權實不二) : 부처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시로 설한 가르침(權)과 부처가 깨달은 진실(實)이 불이라는 것이다. 권교(權敎)의 가르침이나 실교(實敎)의 가르침이나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중생을 성불로 인도하는 권실의 경 또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이다. 낮은 가르침이나 높은 가르침이나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나타나는 것이지 권경이나 실경이 좋다 나쁘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경(經)으로 다툼을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⑩ 수윤불이(受潤不二) : 중생은 인연에 의해 가지가지의 경애의 삶을 받는 것이다. 중생의 본성으로는 부처와 불이이기 때문에
부처가 살고 있는 경애인 적광토(寂光土)에 태어나서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중생의 경애의 삶과 불계
(佛界)의 경애와는 불이라는 것이다. 중생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부처의 경애로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