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뜰' 그 싱그러운 봄날의 풍경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06-06 17:41:53
▲ 내 아득한 고향집을 생각나게 하는 "물안뜰" 풍경
ⓒ 유진택
차량 한 대가 “들뫼풀” 회원들을 싣고 흑석리를 향해 달려간다. 흑석리는 갑천이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강가에 들어선 마을이다. 오늘 처음 들뫼풀 모임에 입회한 탓에 회원들이 흑석리에 가서 무엇을 할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모처럼 야외에서 맞는 모임이라 상쾌한 기분만은 계속되었다. 야외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던 차가 갑천 위에 걸친 낮은 다리를 건너더니 집이 대여섯 채 밖에 되지 않는 한적한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가 바로 물안골, 흑석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물안뜰' 마당의 싱그러운 봄 풍경
낡고 허름한 쓰레트 집, 비닐하우스와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집 이름이 '물안뜰'이다. 물안뜰은 둘뫼풀 회장인 백당나무님이 얻어 놓은 집인데 들뫼풀 회원들을 위해 개방한 집이기도 하다.
▲ 마당에 핀 감자꽃이 오늘보니 너무 곱고 예쁘다
ⓒ 유진택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아주 옛날로 돌아간 듯 집은 온통 궁벽져 보였다. 마치 내 초등학교 시절, 고향집에서 만났던 풍경 그대로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물안뜰엔 문명의 냄새가 배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오직 전깃줄만 황토빛 천정에 얼키설키 얽혀있을 뿐, 마당엔 싱그러운 자연의 냄새만 가득하다. 물안뜰이란 이름도 보통 살가운게 아니다. 마음속으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잔뜩 봄물이 오른 마당의 채소들이 잎들을 나풀거릴 것처럼 싱그럽다.
햇살이 얼마나 따스한지 보라색 꽃 몇 개 터뜨린 감자꽃에 자꾸 눈길이 쏠렸다. 오늘 보니 꽃빛깔이 다른 들꽃에 견줄 만큼 참 곱고 예쁘다. 고추밭 역시 신기하다. 고추대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 맨 말목위엔 어김없이 요구르트병이나 피티명을 끼워 놓았다. 눈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란다.
▲ 고추대를 붙들어 맨 말목위엔 피티병이나 요크르트병이 끼워져 눈을 보호하고 있다
ⓒ 유진택
고추가 물이 올라 잎이 무성해지면 잘 보이지 않는 뾰족한 말목 끝에 눈이 찔릴까 염려해서란다. 붉은 물이 든 30 년 된 단풍나무는 그 아래 평상에 시원한 그늘을 깔았고 그 옆 감나무도 하얀 감꽃을 피워 문 채 봄날을 몸살나게 즐기고 있었다. 이것뿐이 아니다. 집의 한쪽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손을 뻗쳐 시커먼 굴뚝으로 기어올랐고 “근심을 푸십시오”라고 붓글씨로 문짝에 휘갈긴 화장실이 걸작이다. 아니 전형적인 뒷간이다. 도시냄새가 나는 화장실과는 달리 여기서는 뒷간으로 불러줘야 농촌냄새 풀씬 풍길 것 같다.
"근심을 푸십시오" 라는 말은 아마 먹고 살기 바빠 찌들린 마음 속 근심을 대변이나 오줌줄기로 시원하게 내 보내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이 물안뜰의 절정은 대문위에 솟구친 솟대다. 문도 없는 대문 위, 나무를 깎아 새의 형상처럼 만들어놓은 솟대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더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솟대는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나무로 새의 형상을 깎아 허공 높이 세우는 것이다.
▲ 물안뜰 주인인 백당나무님이 심었다는 담쟁이덩굴이 굴뚝을 타고 지붕으로 오르고 있다
ⓒ 유진택
그 솟대가 신기하여 한참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백당나무님이 들뫼풀 회원들에게 나눠준다며 백초효소를 주전자에 붓고 하더니 여섯병을 만들었다. 얼마전 들뫼플 회원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데 백가지 약초를 섞어 만든 효소로 건강에 아주 좋다고 알려져있다.
평상위에서 맛본 그 옛날의 풍성한 추억
막걸리 한잔 하자며 상을 차리는 백당나무님의 손길이 분주하다. 안 그래도 술이 당겼는데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서 마시는 술맛은 보나마나 기가 찰 듯하다. 후라이팬위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삼겹살, 잔뜩 봄물 오른 무공해 채소, 이것이 바로 진수성찬이다. 풍성하게 잘 차린 음식이 아닌 소박하지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것이 진수성찬이다. 쭉 둘러앉은 들뫼풀 회원들 역시 얼굴이 환해졌다.
풀꽃이름으로 대신한 회원들의 이름만 들어도 싱그럽다. 억새님, 떡갈나무님, 진달래님, 백당나무님, 아, 나도 멋진 꽃 이름 한개쯤 가져 보고 싶다. 하늘매발톱이 어떨까. 그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고 한다.
▲ 문도 없는 대문위에 높게 세워 놓은 솟대가 이채롭다
ⓒ 유진택
어느 정도 들뫼풀에 관심을 가졌을 때 회장님인 백당나무님과 상의해서 멋진 이름 지어주겠다고 한다. 오늘의 이 성찬이 부러운지 걸핏하면 감꽃이 톡톡 떨어졌다. 단풍나무에서 웬 감꽃일까. 위를 올려다보았더니 단풍나무위로 겹쳐진 묵은 감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급했던지 꽃받침과 함께 통째로 떨어졌다. 감꽃만 살짝 빠져 나와야 하는데 꽃받침과 함께 통채로 떨어지는 것은 필시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감나무가지가 찢어지도록 오밀조밀 매달린 감들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서로 떨어지려고 시합을 벌이는지도 모르겠다.
지글거리는 삼겹살에도 톡, 막걸리 잔에도 톡, 한참 시간이 지나자 평상위엔 물론 그 옆 마당까지 하얀 감꽃이 수북이 굴러다녔다. 뒷간에 근심을 풀고 오다가 문이 열려진 방을 살짝 들여다봤다. 천장의 서까래가 황토흙위로 불쑥불쑥 드러난 방안은 볼수록 특이하다. 백당나무님의 예술적 안목이 기발하다. 벽 한가운데 대형태극기가 걸려있고 그 옆으로 쟁기와 호롱, 솟대도 장식품으로 걸려있다. 그 흔한 테레비젼 한 대 없다. 오직 문명과는 담을 쌓았을 정도로 캐캐 묵은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 삼겹살과 막걸리, 그리고 안주로 내놓은 채소들이 한상 가득하다
ⓒ 유진택
그놈의 막걸리는 쉽게 배를 부르게 했다. 백당나무님이 채소를 몇 주먹 뜯어 비닐봉지에 넣어주는 걸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보다. 채소와 쑥갓이 한 봉지 가득하다. 물안뜰에 참 잘 왔다 싶었다. 이게 어딘가. 농약 한 번 치지 않는 무공해채소를 아무데서나 얻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물로 받은 무공해 채소와 백초효소 한 병
들뫼풀 회원답게 녹색체험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려고 삽을 메고 갑천너머 야산으로 돼지감자를 캐로 갔으나 그냥 돌아왔다.
▲ 마당에서 잔뜩 봄물이 올라 자라고 있는 온갖 채소들
ⓒ 유진택
아직 살이 오르지 않아 맘에 차지 않았다. 안그래도 울퉁불퉁 못생긴 돼지감자가 살아 오르지 않아 더 보잘것 없다. 가을까지 기다려야만 한단다. 그러나 돼지감자를 캐지 못했으면 어떤가. 오고가며 마주친 들꽃에 기분도 한껏 달아올랐고 물안뜰 주인인 백당나무님이 뜯어준 채소와 백초효소만 봐도 배가 부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채소가 잔뜩한 비닐봉지와 백초효소가 너무 사랑스러워 살짝 껴않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