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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도 |
- 최 인 호 지음 -
2000년도에 나온 ‘상도’는 그 당시 돌풍을 몰고온 화제작이었으며, TV 연속극으로도 만들어져 사랑을 받은 걸작이다. 작가는 조선 후기 최고 부자였던 임상옥이 인삼 장사로 큰돈을 버는 과정, 몇 차례 인생의 위기를 아슬아슬하지만 꽤 엉뚱한 방식으로 헤쳐 나가는 과정, 마지막으로 상업의 도(상도)를 깨우치는 모습을 아주 멋진 글들로 잘 엮고 있다.
이 소설 중 기억하고 싶은 장면 몇 가지를 추려본다.
1. 商業之道(상업의 길)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임상옥(호가 ‘가포’임)을 위해 그린 그림의 이름이 ‘商業之道’이며 거기에 발문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상업의 길(商業之道).’
일찍이 태사공(太史公)은 <사기>에서 ‘못이 깊으면 고기가 그 곳에서 생겨나고 산이 깊으면 짐승이 그곳으로 달려가며 사람이 부유하면 인의가 부차적으로 따라온다’ 고 말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오직 부유하기 때문에 인의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부보다는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인도가 있어야만 인의(仁義)가 따라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상업의 길’이라고 부를 만하다.
가포는 평생 부를 모아 마침내 조선 팔도에서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가포는 일찍이 공자가 말하였다던 대로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義)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에 충실하여 평생 동안 인의를 중시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재물은 평등하기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 재물보다는 사람을 우선하였다.
그는 평생 황금을 벌었으나 이는 다만 채소를 가꾼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를 채소를 가꾸는 노인이라 부를 만하다. 고로 그를 상불(상업의 부처)이라 부르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즐겁고 기쁜 일이다.
임상옥 자신이 상도를 깨달으며 남긴 언어는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다.
이에 대해 임상옥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소.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나 다투지 않으며 여러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신한다. 고로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소. 재물이란 바로 물과 같은 것이오. 흐르는 물은 다투지 않소이다. 물은 일시적으로 가둘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을 따라 흐를 뿐이오. 물을 소유하려고 고여 두면 물은 생명력을 잃고 썩어버리는 것이오. 그러므로 물은 그저 흐를 뿐 가질 수는 없는 것이오.
재물도 마찬가지요. 재물은 원래 내 것과 네 것이 없소이다. 이는 물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 것과 네 것이 아닌 재물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있소이다. 내 손 안에 들어온 재물은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흐르는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면 잠시 손바닥 위에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그 물이 사라져버려 빈손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외다. 태어날 때부터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진 사람 없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추한 사람, 놓은 사람 낮은 사람은 없는 법이오.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잠깐의 현세에서 귀한 명예를 빌려 비단옷을 입은 것에 불과한 것이오. 그 비단옷을 벗어버리면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저울처럼 바른 것이오. 저울은 어떤 사람이건 있는 그대로 무게를 재고 있소.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무게로 저울은 가리키고 있는 것이오.
2. 계영배
임상옥이 상인이 되기 전 스님으로 살고 있을 때 인생의 최대 스승인 석숭스님으로부터 삶의 지혜와 함께 계영배라는 잔을 받는다. 이 잔이 임상옥의 마지막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유언도 함께 전한다.
계영배는 노자의 도덕경에 있는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석숭스님이 스님이 되기 전 우명옥이라는 도자기공으로 살던 시절에 만든 것이다. 계영배는 물이나 술을 가득 채우면 물이나 술이 한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7할 쯤 채우면 그대로 남아있는 신기한 잔이다.
노자의 도덕경 내용이다.
적당히 채워라. 어떤 그릇에 물을 채우려 할 때 지나치게 채우고자 하면 곧 넘치고 말 것이다. 또한 칼은 쓸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우면 되는 것이지 예리하게 갈고자 하면 날은 지나치게 서서 쉽게 부러지고 만다.
금은보화를 지나치게 가진 자는 남의 시기를 사게 되며, 또한 부귀해져서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상황이 어지러워져서 결국 이 모두를 탕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적당히 성공한 후에는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해서는 아니되며 적당히 때를 보아서 물러감이 바로 하늘의 도리인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낳되 소유하지 않으며, 또한 무리하지도 않고 공을 이루어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 즉 자연의 도리인 것이다.
계영배를 만든 석숭스님의 인생은 파란 만장하다. 그가 우명옥이라는 도공 시절에 각성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먼저 육체에 눈뜨는 장면이다.
우명옥은 계향의 몸에서 처음으로 육체에 눈이 떴다.
그것은 쾌락이 아니라 극락이었다. 우명옥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해 왔던 도자기의 미가 실제로 살아 있는 여인의 몸 앞에서는 한갓 무용지물임을 알았다. 도자기는 오직 불에 의해서 달구어지나, 육체는 정념에 의해서 달구어지는 것을 우명옥은 알았다. 도자기는 유약에 의해서 채색이 되지만, 육체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의해서 채색이 되는 것을 우명옥은 비로소 알았다. 도자기는 인각과 양각에 의해서 무늬가 결정되지만 육체는 사랑과 미움, 연민과 증오에 의해서 무늬가 결정되는 것을 알았다. 육체의 쾌락은 법열(法悅)이었다.
우명옥은 육체를 통해 도자기가 어째서 그처럼 불에 의해서 완성되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은 계영배를 만드는 자세다.
우명옥이 이제 추구하고 있던 것은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상이며, 최고의 순백색을 지닌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태를 가진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 그릇들은 다만 그릇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천하의 갑번자기라 할지라도 그 속에 물을 담으면 뚝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 속에 약을 담으면 약탕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값싼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보화를 넣으면 이는 진기가 되는 것이며, 값싼 오지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향약을 담으면 향기가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명기는 그 그릇의 모양새나 빛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명기가 담는 내용에 따라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하의 명작이나 예술 또한 그 아름다움과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와 그림이 그 아름다움을 통해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는 내용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명옥은 고통을 통해 인생이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나고 죽는 것도 아니며, 오고 가는 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본시 그러한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명옥은 각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명옥은 이제 아름다운 형태나 빛깔을 가진 그릇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 헛된 욕망의 유한성을 경계하는 그릇,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3. 애욕
임상옥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송이라는 여인을 사랑하면서 애욕의 늪에 빠지지만 이를 헤쳐 나온다. 멋진 대사들이다.
부처님 말씀이다.
…모든 중생들에게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갖가지 애정과 탐심과 음욕이 있기 때문에 생사가 윤회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음욕으로 인해 각자의 성품과 생명을 타고나는 것이니 유회의 근원이 애욕임을 명심하여라.
음욕이 애정을 일으켜 생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음욕은 사랑에서 오고, 생명은 음욕 때문에 생기는데 중생이 또다시 생명을 사랑하여 드디어 음욕을 의지하니 음욕을 사랑함은 원인이 되고 생명을 사랑함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임상옥은 피를 토하듯 천지사방으로 피어난 진달래와 철쭉꽃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부처의 말처럼 애욕을 끊는 일이다. 그리하여 애욕을 끊음으로써 마음의 흙탕물은 깨끗이 가라앉고 죽고 사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내가 애욕을 끊음은 오로지 나를 위한 길만은 아닌 것이다. 진실로 송이를 위하는 길은 내가 스스로 그녀의 곁을 떠남으로써 송이를 애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주는 길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도(成道)의 길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러므로 사랑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사랑은 미움의 근본이 된다.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모든 구속과 걱정이 없다.”
“가까이 사귄 사람끼리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연정에서 근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욕은 그 빛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한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이 흐뜨려 놓는다. 관능적인 애욕에는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이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이다. 그것은 송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때 송이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는 바람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 것이다.
4. 세한도, 기타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에 대한 멋진 해설이다.
본시 ‘세한도’는 <논어>의 종지에 따른 소식의 ‘삼청도’가 비롯이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는 송죽의 상청과 매란의 오한을 받들은 의취다. 곧 군자는 역경에서도 그 절조를 지킴에 비긴 표백인 것이다.
완당의 ‘세한도’는 완당의 작품 ‘부작난도’에서 화제로 썼던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의 회심작이다. 천지가 백설로 덮인 납작한 토담집 안팎에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진 단출한 꾸임새이나, 고고한 구도와 노건한 선화와 고졸한 격조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도가 스며 정이 넘실거린다. 이는 높깊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 난 대수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 물론 소나무는 의표의 상징이요, 토담집은 적거의 실상이요 혈창은 고고의 숨통이다.
안의 노송은 자기의 표상이니 아름드리 밑그루의 대담한 용사는 치뻗다가 갈라진 안산한 일지와 좋은 대비가 된다. 그 꿈틀거리는 용사, 창창한 침엽, 자못 의연한 기상으로 해서 사뭇 안간힘이 시퍼렇다. 모진 풍설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조절하는 완당의 자존이 도사렸다.
한편 밖에 나란한 소나무는 그 앉힘으로부터가 오롯하다. 물론 권세와 이해를 초월한 문객의 나툼이다. 싫으면 뱉고 달면 삼키는 세파와는 진작에 담을 싼 꿋꿋한 자세인 것이다. 이 중의 하나가 이상적임에 분명하다….
- 기타 -
․ 이 여인은 이러한 곳에 있을 여인이 아닌 것이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모든 나무와 작은 풀들 그리고 하찮은 돌멩이 하나도 있어야 할 제자리에 놓여 있기 마련인 것이다. 하물며 작은 돌 하나도 그리하거늘 하늘 아래 인간이야 일러 무삼하겠는가.
․ “개성에 사는 상인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가 있나이다. 한번 맞춰 보시겠습니까. 앞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뒤는 대머리인 것이 무엇이나이까.”
“앞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뒤통수는 대머리인 것은 바로 기회이나이다. 무슨 일이든 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인 기회는 자주 오지 않나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세 번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고들 말하나이다. 기회는 찾아올 때 그 머리카락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하나이다. 기회는 앞에만 머리카락이 있어 왔을 때 잡아 붙들어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스쳐 지나간 기회는 이미 그 뒤통수가 대머리여서 붙잡으려 하여도 붙잡을 머리카락이 없는 법이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