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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만사 대부분을 자신의 잣대로 바라본다. 음식도 비슷하다. 내게 익숙한 음식은 맛있고, 때로는 신이 준 선물로 여기지만 남이 먹는 음식은 맛도 없고 이상하다고 느낀다. 대표적인 것이 옥수수다. 지금은 누구나 맛있게 먹지만 한때 옥수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남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고대 마야와 아즈텍 원주민들의 주식이었다. 그래서 마야 사람들은 옥수수를 신이 죽어 환생한 거룩한 작물로 여겼고 자신들도 신이 옥수수를 빚어 만들었다고 믿었다.
마야 신화는 16세기에 발견된 《포폴부》라는 책이 바탕이다. 마야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수많은 신들이 살았는데 제우스에 해당하는 신이 훈 후나푸다. 젊은 남성으로 옥수수를 닮았다. 깊은 산속에 살던 훈 후나푸가 어느 날 지하 세계의 신과 싸우다 전사했다. 지하의 신 시발바는 훈 후나푸의 목을 베어 죽은 나뭇가지에 꽂았는데 그러자 나무가 살아나 땅을 뚫고 나와 훈 후나푸를 닮은 열매를 맺으니 바로 옥수수다. 그래서 마야 문명에서 옥수수는 신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작물로 여겨진다.
《포폴부》에 나오는 창조의 신은 케찰코아틀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신으로 땅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니 땅이 만들어졌고 머릿속에서 산을 떠올리자 산이 생겼다. 나무와 하늘과 동물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생각한 대로 이뤄졌다.
이 신이 처음 동물을 만들었는데 이것들이 창조주인 자신을 몰라보고 시끄럽게 울부짖기만 했다. 신이 화를 내며 동물들을 모조리 숲으로 쫓아버렸다. 다음에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지만 역시 실패했다.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찬 신이 이번에는 옥수수로 인간을 창조했다.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인간을 만들었더니 말도 할 줄 알고 아이도 낳아 번식을 하는 데다 자신을 만들어준 신을 경배하는 것은 물론 신께 제물도 바칠 줄 알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옥수수 인간이 바로 인디오의 선조이자 최초의 인간이다. 마야 문명의 창조 신화를 보면 옥수수가 마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우리에게 옥수수는 주식이 아니었다. 맛있게 먹는 간식이자 군것질거리에 가까웠다. 물론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는 식량으로 먹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곡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을 때 먹던 구황 식물이었다. 그래서 남미 인디오들이 옥수수를 신이 부활한 작물이자 인간 탄생의 근원으로 본 것과 달리 우리 조상들이 옥수수를 바라보는 시각은 썩 곱지 않았다.
옥수수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한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또 약 100년이 지난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옥수수가 처음 전해졌을 때 우리 조상들은 옥수수를 배가 고플 때나 어쩔 수 없이 먹는 형편없는 작물로 인식한 것 같다.
옥수수는 숙종 때 발행된 중국어 통역서인 《역어유해》에 처음 보이는데, 옥촉(玉薥)이라는 것이 있으니 잎 사이에 뿔처럼 생긴 꾸러미가 달렸고 속에는 구슬 같은 열매가 있어 맛이 달고 먹음직스럽지만 곡식 종류는 아니라고 했다. 옥촉은 옥수수의 한자 이름이다. 그러니 숙종 무렵만 해도 옥수수는 흔한 작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널리 먹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 후기,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문집인 《완당집》에다 70세가 넘는 노인이 옥수수를 먹고 지낸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장면을 적었다. 다산 정약용 역시 좋은 순으로 곡식의 순서를 매기면서 옥수수를 열일곱 가지 작물 중 열여섯 번째로 놓았으니 결코 환영받는 작물은 아니었다.
옥수수는 사실 근대에도 인기가 없었다. 1926년 〈시대일보〉에 “평안남도 화전민들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쫓겨 다니며 옥수수와 콩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으니 군것질거리 아니면 산골짜기 가난한 화전민의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원산지인 남미의 인디오들이 자신들의 뿌리이자 신의 부활로 여긴 작물을 우리 조상들은 마지못해 먹는 작물로 보았으니 같은 옥수수라도 처한 환경과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이렇게 컸다.
#음식#역사일반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