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순원의 바우길 통신 4] 심스테파노길 - 이 길을 걸으면, ‘황홀한 신경질’을 참을 수 없다
바우길은 전 구간의 80%가 그늘… 대관령 고원의 서풍 아니면 솔바람 해풍 불어
요즘 참 덥지요. 바다와 계곡이 절로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말로는 모두 한반도가, 그 중에서도 남쪽 땅은 아열대지대로 진입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여름 날씨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관령에서부터 동해바다로 이어지는 바우길은 그다지 덥지 않습니다.
서울에는 바람 한점 없어도 대관령 고원엔 서풍이 늘 불어 풍력발전기를 돌립니다. 게다가 바우길은 전 구간 80%의 그늘길을 자랑합니다. 바닷가로 난 길에도 온통 해송숲이고, 거기엔 또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옵니다.
▲ 안개가 자우룩하게 낀, 여름날의 골아우 가는 숲속 길.
바우길 3구간 종착지인 명주군왕릉은 대관령 아래 아주 깊이 숨어 있는 곳 같은 느낌을 줍니다. 강릉에 왕릉이 있다는 것, 좀 뜻밖이지요.
명주군왕릉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5대손이자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의 묘입니다. 선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가 가장 강력한 왕위계승자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실제 왕위는 김경신에게 넘어갑니다. 김주원을 새 왕으로 모시려 했으나 때마침 내린 큰비로 알천이 넘쳐 김주원은 강을 건너지 못하자 모두들 이걸 하늘의 뜻이라고 여겨 김경신(원성왕)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김주원이 강릉으로 자진해서 물러나니 새 왕이 그를 명주군왕에 봉하고 명주, 양양, 삼척, 울진을 식읍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하늘의 뜻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승자의 기록이지요. 알천은 그렇게 큰 강도 아니고 아무리 비가 많이 왔다 해도 왕위계승자가 그걸 못 건너 왕이 바뀌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역사의 이면으로 보면 그때 치열했던 태종무열왕계와 내물왕계 사이의 정권투쟁에서 밀린 것이죠. 왕권투쟁에서 밀린 김주원은 멀찍이 강릉으로 피하고, 새 왕은 그를 달래기 위해 명주군왕의 작위와 식읍을 내렸습니다. 김주원은 다시 왕권투쟁을 벌이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김헌창과 손자 김범문은 대를 이어 정권투쟁(반란)을 벌이는데, 아들과 손자 모두 실패하고 합니다.
심스테파노를 알게 된 순간의 놀라움
왕릉엔 두 기의 무덤이 있습니다. 보통 부부묘는 옆으로 나란히 쓰는데, 이 군왕릉은 아래위로 나란히 연결된 두 개의 묘 가운데 위쪽에 있는 것이 부인의 묘이고, 아래의 것이 김주원의 묘입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신라는 세 명의 여왕을 낸 왕조입니다. 저 무덤 하나로도 당시 남성과 평등했던 여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 바우길 4구간으로든 10구간으로든 길을 걷기 전 길옆에 있는 왕릉을 꼭 둘러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 (위)골아우로 넘어가는 길의 바우길 탐방객들. 곳곳마다 리본을 매달아두었으므로 초행자라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아래)심스테파노길 도중의 바위에는 이렇게 길 표식을 해두었다.
경주의 많고도 많은 왕릉에 더러 비석은 있어도 거기에 문인석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명주군왕릉은 아주 오랜 세월 김주원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조선시대 그의 후손이 지금 자리에서 찾아낸 다음 새로 조선시대 식으로 석물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신라시대의 것이고, 무덤 주위의 석물은 조선시대의 것입니다.
심스테파노길은 이곳 명주군왕릉에서 무일동과 골아우(심스테파노 마을)를 거쳐 우리나라 유일의 촌장마을까지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오래 살던 곳 가까이 있어도 모르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이기호 대장과 함께 바우길을 탐사하며 새로 알게 된 ‘심스테파노 마을’이 저에겐 그러했습니다.
작년 가을 코스를 탐사하던 중에 산속에서 한순간 시간이 멎은 듯 너무도 깊고 너무도 아늑한, 그야말로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 신비한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고향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데 저도 처음 그 마을을 가보았습니다.
“이야, 이렇게 깊은 산속에도 동네가 있네요.”
이기호 대장도 그렇게 말할 만큼 아주 신비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동네도 아니고, 좌우지간 기분이 묘했습니다. 어린 시절 ‘골아우’ 얘기는 참 많이 들었습니다. 또 학교에 골아우에서 다니는 아이들 몇이 있었지만, 어른이 되도록 그곳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길을 탐사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그곳 장소의 신비함에 이끌려 강릉 근방 지리에 대한 이런 저런 자료를 뒤지던 중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말 병인교난(1866-1878년) 때 심스테파노라는 천주학자가 이곳 골아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방관아의 포졸들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포도청 포졸들에게 잡혀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정말 놀라운 자료였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이 시기의 천주교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거의 마을마다 성지지요. 그러나 강원도는 원주와 횡성 동쪽으로는 그런 성지가 없습니다. 아마 그것은 태백산맥 동쪽으로는 천주교의 전파가 그만큼 늦었다는 뜻일 텐데, 이기호 대장과 함께 바우길 코스를 탐사하며 심스테파노라는 천주교 신자가 숨어살다가 잡혀간 마을을 찾아내고 직접 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찾은 자료엔 그가 청송심씨 사람이며 삼척부사를 지낸 정대무(정약용의 손자)의 사위라는 설이 있지만 그것까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출신이 확실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곳에서 한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기둥 같은 믿음 아래 순교했다는 사실이지요.
천주교 신자의 합동묘지 또한 우연히 골아우 마을에
제가 찾은 기록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이쪽으로 기록에 밝은 소설교실의 한 제자에게 강릉지역 순교자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이 다른 데는 없는지 좀 알아봐달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제자는 <박순집 증언록>에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했습니다. 박순집은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해 순교자들의 유해발굴에 큰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의 증언록은 박해의 피바람이 지난 후인 1888년에 작성되었는데,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
심스테파노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에 살았다. 무진년(1868년) 오월 단옷날에 동네 사람들이 정자에 모여 그를 함께 놀자고 청했다. 그래서 이안토니오와 함께 그들이 노는 자리에 갔는데 그 자리에 서울 포교 앞잡이로 다니는 자가 여러 교졸을 데리고 와서 저 사람이 안토니오라고 일렀다. 포교가 안토니오가 누구냐고 묻자 심스테파노가 나서서 내가 안토니오라고 하니 포졸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그를 결박하려 했다. 심스테파노가 다시 나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갈 사람이 아니다, 내 집으로 돌아가서 동네사람에게 진 빚을 갚은 다음 잡아가라고 한 후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마을에 진 빚들을 모두 갚고 포청에 잡혀갔다.
▲ (좌)심스테파노길의 시작 지점인 명주군왕릉의 가을 풍경. (우)겨울 심스테파노길 중간 마을의 당나무 아래를 지나는 탐방객들.
포청에 잡혀가서도 그는 활달했다. 어느 날 유직(옥의 죄인을 다루는 사람)이 스테파노가 오늘밤엔 틀림없이 울 것(심한 고문으로)이라고 했는데 반대로 스테파노가 심한 고문을 받고도 여러 무리 가운데 가장 활달한 모습으로 희희낙락 웃고 지내니 그를 다시 불러내 치사케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사십구세였다. 증언록엔 ‘굴아위’라고 나와 있고, 실제 마을 이름은 ‘골아우’여서 혹시 다른 동네가 아닐까, 강릉 부근의 마을 이름들을 샅샅이 뒤져봤습니다. 골아우든 굴아위든 비슷한 지명은 거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언록에 심스테파노는 ‘골아우’로 몸을 피해 오기 전엔 먼저 ‘주무’라는 마을에 살았다는데 이 마을 역시 굴아우로부터 8km쯤 떨어져 있는 ‘즈므마을’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묘한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강릉지역 천주교 신자 합동묘지가 바로 심스테파노가 숨어살다가 잡혀간 ‘골아우’ 마을에 생깁니다. 심스테파노 기록에 따라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처럼 강릉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아늑하고 땅값 헐한 곳으로 정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명주군왕릉에서 ‘골아우’를 지나 우추리에 있는 송양초등학교까지 이르는 길을 ‘심스테파노의 길’로 이름지었습니다.
인터넷시대에까지 조선시대 향약 전통 이어져오는 우추리 마을
그런 심스테파노 마을에서 아리랑고개 같은 언덕을 내려오면 우추리 마을(위촌)이 나타나는데, 이 마을 역시 아주 특이합니다. 바로 제가 태어난 동네이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촌장제’를 운영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마을엔 440년의 역사를 가진 ‘대동계’가 있습니다. 이 대동계의 가장 큰어른이 바로 촌장님이신데, 해마다 설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촌장님께 합동세배를 올립니다.
▲ 위촌전통문화전승관. 매년 정월 초하룻날이면 마을 촌장께 주민 모두가 세배를 드리는 곳이다.
21세기 인터넷시대에까지 조선시대 향약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을 유교적으로 예속시키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키는 향약의 전통을 따라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가 이 마을 대동계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설날에 고향에 돌아가면 서울에서 입던 평상복을 벗고 한복차림의 두루마기와 도포를 입고 갓과 유건을 쓰고 지냅니다. 물론 촌장님께 올리는 합동세배에도 꼬박꼬박 참석합니다. 여기에 사진을 전부 실을 수는 없고 제 블로그(http://blog. daum.net/lsw8399/?t__nil_login=myblog)에 오면 이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전통이란 그렇습니다. 모르면 사람들은 일단 낡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안엔 우리가 아무리 오래 세월이 지나도 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명주군왕릉에서부터 우추리(위촌) 촌장마을까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유교적 전통까지, 또 그런 유교적 전통으로 억압한 서학에 대한 압박까지, 길을 걸으며 지난 역사를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적자면 총거리 11km에 이르는 심스테파노길 전체가 울울창창한 소나무길입니다. 만약 서울의 기온이 섭씨 30도라면 이곳 숲속은 아무리 더운 날도 섭씨 25도를 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때로 한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기호 탐사대장의 농담을 빌리면 시작부터 끝까지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한여름의 햇볕을 가리고, 숲속에 들어선 지 30분이면 만성 비염환자의 코까지 뻥 뚫어버리는 솔향기 때문에 너무도 황홀해 막 신경질이 나려고 한답니다. 바우길 탐사단원들은 그 즐거움을 ‘황홀한 신경질’이라고 부릅니다.
첫댓글 자료 잘 보았습니다. 바우길의 소중한 자료로 남아지겠지요...
자료 잘 읽었습니다. 드디어 내일 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