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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거룩하라
레위기 19:1-4
성경에는 거룩이란 단어가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 ‘카도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신약성경에는 헬라어 ‘하기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교적으로 완벽한 삶을 떠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좀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말씀하실 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며 살기를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99편의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만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거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5절에서는 공의로우신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9절에서는 우리 삶에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새 찬송가를 보면, 하나님의 거룩을 찬송하는 곡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전반부에 부른 찬송가 8장에서는 어떻게 찬양하고 있었습니까?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님 성 삼위일체 우리 주로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속성이 바로 거룩입니다.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 백성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백성 된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고 계시지만,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요구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물론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요구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구별됨을 통해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성스러운 상태나, 성스러운 행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아주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사람들은 그 인간 됨이나 그 삶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들임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남다른 노력과 수련으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성스러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룩은 이와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거룩이라는 단어는 ‘카도쉬’(Kadosh)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약 120회 정도 사용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는 하기오스라는 단어로 확장되어 약 230회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바울의 주치의였던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분리되다.’ ‘구별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룩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삶이 ‘도덕적이다.’ ‘성스럽다’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위해 ‘분리시켜 놓은 것’ ‘구별해 놓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앞의 6일은 속된 날이고, 안식일은 다른 날과 아주 다른 특별히 날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의 6일이나 안식일은 모두 다 같은 날이지만, 하나님이 제7일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날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그날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함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구별해 놓은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워져 있는 그 장소가 거룩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져 있는 이 장소는 교회도 될 수 있고, 학원도 될 수 있고, 사무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거룩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장소로 구별됨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 예식을 할 때 쓰는 기구를 성찬 기라고 하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을 성구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성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구별해 놓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룩한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룩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룩 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룩을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물건이 그 자체로 성스러울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룩은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물건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게 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거룩’이라는 말이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2: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 일곱째 날은 처음부터 특별한 날은 아니었습니다.
이날은 이전에 있었던 날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이 특별한 날이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날을 선택하시고 구별하셔서, 다른 날과는 달리 일을 하지 않고, 안식하게 하심으로, 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신 것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7일은 거룩한 날이 되고 복된 날이 된 것입니다.
이 점은 출애굽기 3:5 절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말씀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는 특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호렙산 주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장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특별한 장소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장소를 택하시고 구별하사 특별한 장소가 되게 하신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장소에서 모세를 만나셨고 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장소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별함’ 그 자체가 ‘거룩함’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구별함과 거룩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구별함과 거룩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구별함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오늘 점심 식사 때 쓰려고 어떤 그릇을 선택하여 두는 것이 바로 구별함입니다. 이렇게 구별하였다고 그 그릇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그릇은 구별하기 이전이나 구별한 후에나 똑같은 그릇입니다.
그러면 거룩함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점심 식사에 쓰려고 구별해 둔 그 그릇들은 그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그릇에 무엇을 담아 사용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그릇에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다른 반찬을 담으면 반찬 그릇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닙니다. 그 그릇에 담겨 있는 내용물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보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바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안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써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언제나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로 구별된 우리들이 가장 우선 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비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이 소재 되고, 깨끗하게 비워진 우리 마음속에 거룩하신 성령이 임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함에 이르는 첫 시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구별하심이 우리가 거룩에 이르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아담의 후손 된 사람 중에는 원래부터 거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범죄 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우리를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구별해 주시고, 우리 안에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거룩은 세상과 구별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 거룩을 경험함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1917년 출판된 [거룩한 것](Das Heilige)라는 책에서 ‘누미노제’(Numinose)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누미노제란” 신비한 경험이나, 거룩한 존재 앞에서 “거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날도 이전처럼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전의 여느 날과 달랐습니다.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인의 두려움과 공포가 그 마음에 밀려들어 왔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도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베드로는 여느 날처럼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허탕을 친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아침에는 고기가 잡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고기들은 깊은 곳이 아닌 수초 사이로 들어가서 먹이를 찾는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베드로의 마음에 무엇이 밀려들어 왔겠습니까?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기쁨이 밀려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에 갈릴리 바다의 고기들까지 순종하였던 놀라운 능력이 담겨 있는 예수님을 향한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잡은 고기를 정리하고 손질하여 파는 일을 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사야와 베드로의 경험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성도들이 되려면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이런 경험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그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그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하였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록 모두가 서로 다르게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하였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똑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을 경험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두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저도 이런 경험은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하늘에서 빛이 제 가슴에 내려꽂히는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였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의 절망적인 두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든지, 예배 중에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든지, 기도 중에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든지, 무슨 방법을 통해서라도 꼭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이 경험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거룩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 속에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살아가는 삶 속에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셋째, 말씀에 순종하여 살므로 거룩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에 그 신앙이 기초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능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 사람들은 거룩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거룩을 이루어 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거룩에 이르는 적극적인 방법을, 4절에서는 거룩에 이르는 소극적인 방법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먼저는 거룩을 이루어 가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레위기 19:3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거룩을 이루어 가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한자의 ‘거룩할 성’(聖)자는, 중국 간체자로 그 의미를 풀어 보면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귀 이’(耳)자와 ‘입 구’(口)자가 위에 나란히 있고, 그 아래에 ‘곧은줄기 정’(壬)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성자를 풀어서 설명해 보면, ‘듣고 말하는 것이 곧은 줄기처럼 올바른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으면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기적에 대해서만 듣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삶에서는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은 나타나는데 거룩한 삶은 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들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단에게 미혹되어 따라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천지의 이만희가 우리나라 과천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신천신지(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라고 하여도 아멘! 하며 믿고 따라가고, 인간 이만희가 자신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여도 믿고 따라갑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교주 안상홍이 죽고 그 부인 장길자가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해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 들은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을 올바르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경우를 보면 어떤 분들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누리게 되는 이 세상의 복에 강조점을 두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들까요? 세상에서 복 받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입니다. 이런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는 되어도 거룩한 교회는 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해지려는 성도들은 곧은줄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두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 실천적인 삶이 없는 성도들은 거룩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거룩을 이루어 가는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레위기 19:4절입니다.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메시지는 “너희 자신을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한 성도로 세워 주셨으니, 이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악 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가 아닙니까?
이 모든 일들이 우리 삶 속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이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5 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신이 상징하는 것은 이제까지 모세가 살아온 삶입니다. 모세는 신을 신고 40년 동안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살아왔고, 또 40년 동안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양치기 목자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까지 살아온 그런 삶을 다 벗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런 세상 적인 삶과 구별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근자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거룩한 삶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부 목회자들은 각종 스캔들에 휘말려 매스컴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를 통해 이야기한다면 한 마디로 그 발에서 신을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군 된 사람들을 거룩하게 구별시켜 주셨는데, 정작 그 일군들이 살아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과 기름이 합쳐질 수 없듯이 성도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참으로 음란한 세대가 되어 있습니다.
소설과 영화와 신문과 그림과 웹툰과 만화와 동영상 등등을 통해 음란이 부추겨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본능을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본능이 자극을 받으면 누구에게서나 음욕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죄악 된 삶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못 날게 할 수 없으나, 머리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악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때때로 일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지만, 그 악이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여 죄에 빠지는 것은 우리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성적인 음란과 부패로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간음을 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들의 경계가 된다고 고린도 전서 10장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 10:11)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는 하루 동안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하루에 새로 태어나는 9,077명의 아기 중에서 1.282명이 사생아라고 합니다. 하루에 5,962쌍이 결혼을 하는 반면 1,986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하루에 2,740명의 아이들이 집을 나가고 하루에 1,240명의 십대 소녀들이 임신을 하고 하루 6,949명의 십대들이 성병에 감염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더러워지고, 추해지고, 음란해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음란의 극치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동성애입니다. 이제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범세계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법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국회 차원에서 이 일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의사를 표현하는 제도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을 담아 그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사한 투표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신중한 마음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동성애 합법화를 입법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는 것을 보면 진중하게 그 주권을 행사하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만 이런 사람들에게 표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성도들까지도 이런 입법을 시도하는 개인과 정당에 표를 주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요즘에는 정부가 교회를 폐쇄할 수 있게 하는 교회 폐쇄법이 입법 예고 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교회의 재산이 국고로 편입되도록 하는 법까지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이단적인 교회에만 적용되겠습니까?
결국에는 국가정책과 방향을 비판하는 교회들에도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는 성도들은 그것이 우리 교회의 일, 내 일이 아니라고 무덤덤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도 노회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총회 차원에서 교단 적으로 대응 방향을 설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남녀가 짝을 지어 이룬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누리고 살라고 주신 성이 타락으로 왜곡되고, 동성애로 외곡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종말의 때가 되면 노아의 때와 같이 되고 롯의 때와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런 종말적인 시대 속에서도 노아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종말이 가까이 이른 이 시대 속에서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변치 않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을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서, 주어진 삶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고, 죄악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도 세속의 더러운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이 별로 구별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이제 성도들은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넘기는 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cts 방송을 틀다가 보니,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유명한 목사님이 버젖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그분의 설교를 듣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 믿음과 삶의 괴리가 너무 커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5)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편 24: 3- 4)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백성 삼아주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알고, 거듭난 하늘 백성답게 세상과 구별된 삶, 그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갈수록 악해져 가고 있고, 교회도 이런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저희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저희는 하늘나라 백성다운 거룩함을 소유하고 살아가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통해 작은 등불이라도 밝히 밝혀서,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세상 안에서, 조그마한 빛이라고 비추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