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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닭 장수. 1900년. 조선사람들은 항상 모자를 썼다.
닭장수가 갓을 쓰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미국 헌팅턴도서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이 쓴 <목민심서>는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묘지에 관한 송사는 이제 폐해만 있는 풍속이 되었다. 구타와 살인 사건의 절반이 이로 인해 일어난다. 남의 묘지를 파버리는 변고를 저지르는 행위를 효행이라고 생각한다. … (중략) …
장사를 지내고 나면 자리가 나쁘다고 세 번, 네 번 개장하는 동안에 묘자리를 두고 송사가 생겨 마침내는 원수가 되고 마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권력자들이 남의 묘를 강제로 빼앗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마찬가지로 <목민심서>의 내용이다.
"참의 홍혼(1541~1593)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후궁의 친족이 권세를 업고 함부로 고을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묘를 썼다. 홍혼이 법에 따라 (후궁 친족의) 묘를 파내버리자, 관찰사가 이를 듣고 놀라고 주위에서 모두 몸을 떨었다."
묘터를 놓고 종종 살인도 벌어졌다. 정조의 형사판례집 <심리록>에 따르면, 1794(정조 18) 경북 경산의 박사읍사는 은삼손과 무덤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발로 음낭을 차서 죽여버렸다. 당시에는 사대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묘지를 넓게 차지하려고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법으로 평민들은 분묘 사이에 간격을 둘 수 없도록 금지했다. 묘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보니 분쟁이 잦을 수 밖에 없다. 박사읍사는 어머니 묘소가 은삼손의 조상 묘에 의해 머리가 눌리고 청룡이 침범 받고 있다면서 묘지 이장을 요구하다가 결국은 살인까지 저질렀다. 정조는 "범행이 사납고 간특하다"며 엄중 처벌을 지시했다.
TV사극을 보면 조선시대 죄수들은 목에 '나무 칼'을 주로 차고 있다. 중국의 형벌제도에 따른 것으로 죄의 경중에 따라 칼의 무게도 달랐다. 칼은 죄수의 행동을 제약하고 고통을 배가하기 위해 씌웠다. 그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했다.
<목민심서>는
"나무 칼을 목에 씌우는 법은 후세에 생긴 것이고 선왕의 법은 아니다. 나무 칼은 옥졸을 위한 것이다. 칼을 씌워 놓으면 쳐다볼 수도, 굽어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한 시각도 사람이 견딜 수 없다. 죽이면 죽일지 언정 나무 칼을 씌우는 일은 옳지 않다"고 썼다.
사진2. 북한산 대서문. 1900년대초.
오늘날 수풀이 무성한 북한산과 달리 나무가 거의 없다. 조선중기 온돌이 널리 확산되면서 무분별한 벌목으로 대부분의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형벌제도가 엄격했지만 사람사는 세상이라 무뢰배들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조선말 궁중에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 지규식의 <하재일기>는 타이르는 노인에게 행패를 부린 불량배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어젯밤 이웃 서시운의 집에서 무뢰한 불량소년들이 북을 치며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광릉 소년 두서너 명도 와서 함께 놀았다. 이웃에 사는 노인이 국상(신정왕후 기년상)을 만나 국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소란을 피우고 더 시끄럽게 떠들었다. 통탄할 노릇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불량배들이 밤중에 노인 집으로 몰려가서 몽둥이로 문짝을 부수고 욕지거리를 엄청나게 쏟아냈다. 괴이하고 밉살스럽다." 노소의 구분도 뚜렸했던 시대여서 매우 낯설다.
고전은 생소한 생활상도 들려준다. 우리 조상들은 학문을 중시했지만 책도 귀하게 여겼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학파의 스승 이익(1681∼1763)의 대표저술 <성호사설>은 우리 책을 오히려 일본에서 구입해 찍어야 하는 상황을 개탄한다.
<성호사설>에 의하면, 송나라 학자 진순의 <성리자의(性理字義)>와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이상국집(李相國集)>도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일본에서 구해다가 간행했다.
일본은 법이 엄해서 우리나라 서적이 일본 곳곳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는 데 반해 일본의 책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인쇄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성호사설>은 "일본에서 찍은 책판의 문자는 자획이 정연하여 우리나라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놀라움을 표시한다.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식사를 할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여러 모자 중 갓이 여러가지 문제를 초래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저술한 <앙엽기>의 한 대목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 (중략) …
지금의 갓은 허술하게 만들어져 갓모자(윗부분)와 갓양태(차양)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서 서로 빠져버린다. 역관들이 연경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면 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모자만 쓰고 가니 중국 사람이야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비웃는데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 (중략) …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은 이미 고려 때도 있었다. 송나라 사람으로 1123년(고려 인종 1) 고려에 사신을 왔던 서긍의 저술한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를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했다.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대나무 모자를 만들어 썼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진가를 인정받는 난방 시스템이 있다. 바로 온돌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이 온돌에 의한 폐해가 적잖았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1732∼1809)의 <청성잡기>에 따르면, 인조 때 도성의 내사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임금이 대책을 고심했다.
김자점(1588~1651)의 건의로 도성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도록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로 확산됐다. 갑자기 온 나라로 퍼져나간 온돌의 영향으로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버려서 장작과 숯이 갈수록 부족해졌다.
성대중은 "내가 일본에 가보니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했다. 나 역시도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난 자가 없으니 이는 습관들이기 나름"이라며 온돌무용론을 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8.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절반은 묘지다툼이 원인 [낯선조선3]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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