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8일 친구에게 왕궁 관람을 부탁했는데, 날자를 잡아서 연락이 왔다. 다른 곳은 문제 없는데 창덕궁 후원(비원)은 시간당 100명씩 Guide가 출발 시키므로 사전 예약이 필수 였는데, 6일 전부터 예매가 가능하다. 그런데 요즘은 단풍철이어서 예약 상황이 좋지 않아서 6일전에 예매하려고 했는데 모든 시간 매진이었다. 할 수 없이 현장에서 구매하려고 8시 반(매표 시작은 9시부터)에 창덕궁 매표소에 도착했으나 이미 100명 이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12시 입장이 가능할 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구매할 수 있었다. 후원 관람을 하려면 전각 관람 매표부터 해야 한다. 오전 시간이 비어서 인근에 있는 종묘에 갔었는데 이 곳도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기다렸다가 관람했는데 Guide의 설명에 따라 이동하면 약 1시간 소요된다. 창덕궁 후원,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을 차례로 관람했다. 기회가 되면 덕수궁과 경희궁도 방문해야 겠다고 생각해 본다.
광화문
경복궁의 남쪽 출입문인데 이 사진은 찍을 수 없어서 화면 Capture한 것이다.
경복국은 조선왕조의 정궁이다. 태조 4년(1395년)에 창건하였다. 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 백악산을 등뒤로 하고, 좌우에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었다. 1592년 임진뢔란 때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념겨주었다.
흥례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
근정문, 근정전 앞에 있는 문
근정전 (국보제223호)
경복궁의 정전으로 현존하는 한국 최대 목조 건물,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국왕의 즉위식과 과거 시험 및 합격자 발표등이 이 곳에서 이루어 졌다.
근정전 내에 있는 어좌와 일월오봉도,
사정전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의 중심건물, 좌우에 만추전, 춘추전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강녕전, 왕의 침전
교태전, 왕비의 침전
경회루
왕실이 큰 연회를 배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곳으로 1867년 재건되었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은 1408년 태종 때 지은 제2의 왕궁이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 때 까지 약 270년간 조선의 정궁 역활을 했다.
진선문
창덕궁의 2번째 문인 중문이다. 진선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며,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인정문, 인정전 앞의 문
인정전 (국보제225호)
인정전은 어진 정치를 펴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8) 중건되었으며, 1808년 또 한번 화재로 소실되었고, 순조4년(1809)에 지어져 현재에 이른다.
선정전
궁궐의 편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희정당,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대조전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1917년 불에타 없어진 터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를 열어 경술 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낙선재
1847년 지어졌으며 이 곳은 고종 황제가 지낸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불이 났을 때 순종황제도 이 곳에 머물렀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황후가 1966년 이 곳에서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는 각각 1970년, 1989년 이 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덕혜옹주 역시 1962년 이 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다.
명정전 (국보제 226호)
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이었던 곳으로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1484년 성종이 선왕의 세 왕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은 모두 남향인데 이 정전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동향이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곳이며,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 이야기, 일제 강점기 때 창경원으로 격하된 이력이 있다.
통명전, 1834년 건립, 내전의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양화당, 1834년 건립,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돌아온후 인조가 쓰기도 했다.
춘당지,
내농포(內農圃)에 속한 11개의 논을 하나의 연못으로 만들었다. 내농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궁궐안에 둔 논과 뽕 밭이다.
백송(白松)
어릴 때는 초록색이 들어간 푸른빛이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흰 얼룩무늬가 많아진다. 원래 중국 베이징 부근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사신들이 귀국할 때 솔방을을 가져다 심을 것이다.
창덕궁 후원(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용정과 부용지
주합루
영화당, 이 곳에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관람지
취한정
옥류천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이 물길을 아래로 내려 뜨려 작은 폭포가 되게 하고, 이 폭포가 떨어진 곳에서 玉流川이 시작된다. 구불구불한 물길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짖는 놀이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 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연경당
효명세자가 부모인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 건립하였다. 진작례는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하였다.
종묘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395년 경복궁과 함께 완공하였고, 궁궐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계획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잡았다. 정전과 영녕전으로 구분되며,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중요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 신실 16칸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한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는다. 종묘제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 정전에서 1년에 5회, 영녕전에서 1년에 2회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하였다. 현재는 매년 5월 첬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향대청
제례에 바칠 향, 축문,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재궁,
제례에 참석하기전에 왕이 대기하는 곳, 동쪽에는 세자가 대기하는 건물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십이장복
면복은 면류관과 곤복을 통칭하는 왕이나 황제의 예복으로 구장복과 십이장복이 있다. 십이장복은 대한제국 선포우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국가 의식에 착용하였다.
정전, 신위 봉안 순서는 좌측 (서쪽)부터 아래와 같다.
1실 태조, 2실 태종, 3실 세종, 4실 세조, 5실 성종, 6실 중종, 7실 선조, 8실 , 9실 효종, 10실 현종, 11실 숙종, 12실 영조, 13실 정조, 14실 순조, 15실 문조, 16실 헌종, 17실 철종, 18실 고종, 19실 순종
중앙의 검은 색 돌로 포장된 길은 신의 길이며, 좌측(서쪽)은 왕의 길, 우측(동쪽)은 세자의 길이라고 하며, 신의 길은 밟지 말라고 Guide가 이야기 한다.
영녕전, 좌측 부터 신위는 아래와 같다. 중앙의 4신위 실은 좌우 보다 높게 되어 있는데 이 곳에 태조의 4대조 신위를 모신다.
5실 정종, 6실 문종, 7실 단종, 8실 덕종, 9실 예종, 10실 인종, 1실 목조, 2실 익조, 3실 도조, 4실 환조, 11실 명종, 12실 원종, 13실 경종, 14실 진종, 15실 장조, 16실 의민 황태자 영왕,
첫댓글 궁궐, 종묘의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