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의 침입 조짐이 점차 높아가던 1592년 어느 날, 경상도 부산진첨사 鄭撥(정발) 장군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 젊은이가 바로 이정헌(李庭憲, 1559년~1592년)이다. 이정헌(李庭憲)은 소년시절에는 시문(詩文)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선조 24년(1591)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일행의 엇갈린 보고와 당파싸움으로 시국이 시끄럽던 차, 형 이정견(李庭堅)을 따라 붓을 던져 버리고 무과에 응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였으며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위급한 상황을 뒤늦게 깨닫고 무신들을 나눠 주요 지방에 파견하여 성벽신축․보수 등 전쟁에 대비토록 분견(分遣)하였을 때, 몸을 아끼지 않고 자원하여 남이 가기 싫어하던 일선지대인 부산진 성내 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나 말이 병이 들어 임지에 늦게 도착해서 파직당했다고 아뢰면서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는데 어찌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다.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은 그 젊은이의 기개를 높이 사 자신을 옆에서 보좌하도록 했고, 조방장(助防將)이 된 이듬해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적이 침입해 오자,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이라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그 젊은이는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해서 ❲부산진은 우리나라의 관문인데, 부산진이 없으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안전할 수 없다 釜山 我國關門 若無釜山 是無東萊 若無東萊 是無嶺南 若無嶺南 是無我國❳고 외치며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과 함께 전선(戰船)밑에 구멍을 뜷어 수장시키는 파부침선(破釜沈船)을 한 후, 백성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전을 폈으나, 화살은 동이 나고 역부족 끝에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싸움 끝에 불행 중 다행인지 사지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 정발 첨사의 부하 한 사람이 왜적의 포로로 잡혀있다 탈출하여 돌아오니, 모두가 왜놈의 끄나풀로 여기므로 잡아다가 다시 안동진관으로 호송하여 조사해 보니 부산진성 함락 경위와 정발 첨사, 이정헌 조방장등 당시 희생자들의 최후를 생생히 증언해 주므로 나중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때 희생된 이들을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이정헌의 맏아들은 겨우 열 살이요, 형인 이정견 마저 국사에 겨를이 없었기에 부산이 7년 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왜란이 평정되고 그 이듬해인 선조 32(1599) 10월에 가서야 비로소 부산현지에서 초혼제(招魂祭)를 지내주고, 이정헌의 옷과 신발을 거두어 영주시 문수면에 있는 관석산(寬石山) 기슭에 묻어 주었으며, 부산성 함락일인 4월 14일을 기일(忌日)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부산진에 첨사가 부임해 오기만하면 어쩐 일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급사하는 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다시 사람을 뽑아 부산진첨사로 내려보냈으나 부임한지 며칠만에 또다시 급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관리들이 부산진첨사 부임을 꺼리게 되어 조정에서도 하는 수 없이 옛성를 다시 쌓고 자성대로 본성을 옮기게 하고 옛 성지를 팠는데 동문못 속에서 수많은 유골이 나왔다.
마을사람들이 ❲이 해골들을 모아 자성대 밑에다 묻었더니❳이 마을 한 노인의 꿈에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서 ❲나는 영천 조방장 이정헌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정발 장군과 같이 부산진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나의 공로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려고 역대 부산진첨사의 꿈에 나타났더니 하나같이 모두가 소인이라 미처 말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기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는 바이다.❳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그 고을에 갑자기 병이 유행하여 급사자가 하루에 40여 명이나 생겼고, 이에 꿈을 꾼 노인이 이상하게 여겨 동래부사 홍명한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동래부사 홍명한(1759년~1761년 재임)은 즉시 이정헌의 공로를 자세히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이 보고를 받은 영조 임금은 이정헌을 기특하게 여겨 대신들에게 의론하게 하였고, 대신들은 이정헌이 나라를 지킬 직책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하였으므로 1742년(영조18년) 이정헌에게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을 증직하고 그의 옛 고향 뒤새 앞 큰 길에는 사당을 짓고 정려(旌閭)를 세워 후손들에게 의표(儀表)가 되게 그의 순절을 포상하고, 정공단에서 동래부사 홍명한이 ❲몸소 이곳에 와서 기치를 갖추고 군고를 울리고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크게 지내며 혼령을 위로했더니❳ 죽은지 160년이나 지나 비로소 그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무사해졌다고 한다.
역시 영조 때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편찬했던 부산진 위안제문(釜山鎭 慰安祭文)에 보면, 부사로 부임해 오자마자 영조 37년(1761) 봄 성 안의 못을 파다가 임란 때 전사한 많은 유골을 수습하여 정결한 곳에 합장했는데, 그 무렵 주위 어떤 분의 꿈에 팔척 장신의 사나이가 큰 화살 과 긴 칼을 차고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임란 때 정첨사를 도와 성을 지키다 순절한 이사맹(李司猛) 정헌인데 아직까지 찬밥 제사조차 받아 본 일이 없다.” 하므로 날을 받아 따로 못가에 정공단을 세우고 제를 지내주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은 부산 충렬사와 정공단(鄭公壇)에 첨사 정발과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어 그분들의 의로운 삶이 이제는 부산 시민들의 얼이 되어 주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맞아 항전하다 순절하였지만,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없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애통한 수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전해주려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시기념물 제10호인 정공단❲좌측 증 좌승지 이공정헌비와 우측 충장공 정발장군비❳의 조성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