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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사도신경에 생략된 ‘음부에 내려가셨음’의 의미1)
한국개신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없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이 한국개신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없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descendit ad inferna)과 영어 번역(descended to hell)에는 있다.2) 한국교회의 사도신경 중 옛 번역에는 없고, 새 번역에는 본문에는 없으나 대신 난외주에서
"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고 설명한다.
원래의 한글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있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번역한 사도신경,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문구가 있었다. 반면 1897, 1902, 1905년에 각각 번역된 감리교의 사도신경에는 없었다.3)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사도신경에는 있었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가 빠진 이유는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면서 장로교가 ‘양보’(?) 했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려면 찬송가 앞뒤에 실린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의 번역도 같아야 한다. 그런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이니 이견(異見)이 없었지만 사도신경의 경우 두 교파 간에 입장 차가 있었다. 이에 따라 장로교가 ‘양보’(?)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한글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빠져 있다.
잘못된 견해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의 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로마가톨릭의 견해
첫 번째 잘못된 견해는 로마가톨릭의 견해다. 로마가톨릭의 한 지역교회인 한국천주교회는 이 부분을 “저승에 가시어”라고 번역했다. 한국개신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가 빠져 있는 것과 달리 한국천주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한국천주교회가 더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천주교회는 “저승에 가시어”(음부에 내려가셨으며)를 자신들의 비성경적 교리인 연옥(煉獄, purgatory) 및 림보(고성소(古聖所), limbo) 교리와 연관시킨다. 그들은 성경에서 전혀 언급한 적 없는 연옥과 림보의 존재를 믿는다.
연옥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3의 장소로서, 그들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신자라 할지라도 하늘(heaven)로 갈 만한 완벽한 성인(聖人)은 극히 적어서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죽은 후 곧바로 하늘에 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자(?)들이다. 이들은 일정한 기간을 다른 곳에서 지내는데 바로 ‘연옥’이다.4) 연옥에서 영혼이 깨끗해 져야 비로소 하늘(heaven)로 가게 된다.
림보는 두 장소가 있는데, 선조 림보(Limbus Patrum)와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다.5) 선조 림보는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 영혼이 ‘구원계시의 완성’을 기다리는 장소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들이 죽음 직후에 곧바로 천국(하늘)에 가지 못하고 그 대신 ‘림보’로 갔다고 본다. 그들은 “저승에 가시어”라는 고백을 선조 림보와 연관시킨다.6)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저승, 즉 선조 림보에 가셨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로 구약의 성도들을 풀어 해방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하늘’(heaven)로 가셨다고 해석한다.7)
하지만 로마가톨릭의 견해는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선조 림보’라는 장소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오히려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민 23:10; 시 16:10-11; 73:24-25).8) 림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 2 기회설
두 번째 잘못된 견해는 제 2 기회설(Second probation)이다. 이 견해는 로마가톨릭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몇몇 개신교 교파가 주장하는 견해다.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 부활하실 때까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는 견해다.9)
앞서 살펴본 로마가톨릭의 견해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로마가톨릭은 지옥이 아닌 ‘림보’라는 중간 정도의 장소에 가신 것으로 보고, 모든 영혼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 죽었던 영혼만을 본다는 점에 있다. 반면, 제 2 기회설은 성자 하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시기 이전에 죽었던 모든 지옥의 영혼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제 2 기회설은 잘못되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다.10) 복음은 죽은 자가 아닌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전파된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 9:27; WLC 제84문답).
루터파의 견해
세 번째 잘못된 견해는 루터파의 견해다. 루터파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를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 부활하시기 전에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셨다고 본다.11) 그러면서 죽음의 세계(음부)에 가셔서 하신 일이 구약의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 가신다거나 혹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회개할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고 보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본다.12)
하지만 루터파의 견해는 잘못되었다. 성자 하나님께서 부활 전에 이미 살아나셨다는 그들의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잘못된 견해들이 나온 2가지 이유
위의 세 가지 잘못된 견해들의 공통점은 성자 하나님께서 지옥이나 그에 준하는 장소로 가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오해를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 때문이다.
첫째, 음부(陰府)로 번역된 말의 다양한 의미 때문이다.
음부는 히브리어로는 ‘스올’이고, 헬라어로는 ‘하데스’인데, 한글성경에서는 구약에서는 거의 대부분 ‘음부’로 번역되었고 일부 ‘무덤’으로 번역되었으며, 신약에서는 모두 ‘음부’로 번역되었지만, 다양한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음부라고 번역된 말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인데 일반적으로 헬라어로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거나(행 2:27,31; 참조 시 16:10) 중간 상태 중에 있는 고통의 장소인 지옥을 가리킨다(눅 16:19-31). 히브리어로 ‘스올’은 주로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며(창 37:35; 42:38; 삼상 2:6; 왕상 2:6), 간혹 ‘무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시 141:7). 상징적으로는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문답의 근거구절인 시 18:5와 시 116:3).
정리하면, 성경에서 음부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1)죽음의 상태, 2)무덤, 3)지옥 4)지옥의 고통 등이다.13) 이에 따라 사도신경의 음부를 로마가톨릭은 지옥으로, 루터파는 죽음의 세계로, 개혁파는 지옥의 고통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
둘째, 베드로전서 3:18-22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3:18-22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다. 이 구절이 성자 하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고 가르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3:18-22는 그런 뜻이 아니다.14)
베드로전서 3:18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에 육체는 죽으셨고 영혼은 살아나셨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고, 베드로전서 3:19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와는 전혀 상관없다. 베드로전서 3장은 성자 하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것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18-22는 무슨 뜻인가? 18절 하반부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에 육체는 죽으셨고 영혼은 살아나셨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자 하나님의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니다. 성자 하나님의 죽음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것이다.15) 다시 말해 성자 하나님의 부활이 성령에 의해 일어난 영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다(cf. 롬 1:3,4; 6:10).
그리고 19절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셔서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오해될 수 있지만, 이 본문은 뒤에 나오는 베드로전서 4:6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4:6을 보면 “....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지금 현재’(본문이 말하는 시점)16) 죽은 자들에게도 이전에 그들의 살아생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뜻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에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드로전서 3:19에서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된 시점’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가 아니다. 그들이 죽기 전이다. 이에 따라 베드로전서 3:19를 재구성하면 “영으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그때에 복음을 선포하셨다”이다.
요컨대, 베드로전서 3:18-22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시고 나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게다가 베드로전서 3:18-22는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의 근거구절이 아니다.
바른 해석
그렇다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는 어떤 의미인가? 이 고백은 사도신경의 다른 문구와 달리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에 기초하지 않는다.17)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대다수는 이 부분을 비유적으로 본다.18) ‘음부’를 직접적인 장소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시 18:5)으로 본다. 그 이유는 성자 하나님께서 죽으신 뒤에 어느 장소로 가셨다는 성경말씀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음부’를 ‘지옥의 고통’으로 이해하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겪으신 성자 하나님의 영적 고뇌가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었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본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가 지옥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기보다 영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여주려는 사도신경의 강조다.
이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문답이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분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anguish과 아픔pain과 공포terror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9) 사 53:5 10) 시 18:5-6; 116:3; 마 26:38; 27:46; 히 5: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칼뱅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이 실제로 성자 하나님이 어디에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당하신 고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위와 같이 고백한다. 게다가 베드로전서 3:18-22를 근거구절로 언급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의 차이점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에 대해서는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와 베자(Theodor Beza)는 “장사되심”(행 2:24-27; 참조 시 16:10)으로 이해하고, 부르만(Peter Burman), 에임스(William Ames), 퍼킨스(William Perkins) 등은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던 것”으로 이해한다.19)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은 “음부에 내려가신 것”을 장사 되셔서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던 것으로 고백한다.20)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50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장사되셔서,1) 제 삼일까지 죽음의 권세 아래 죽은 자의 상태에 계속 계신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2) 이는 다른 말로 “그분이 음부에 내려가셨습니다he descended into hell.”라고 표현되었습니다.
1) 고전 15:3-4 2) 시 16:10; 행 2:24-27,31; 롬 6:9; 마 12:40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의 가르침은 개혁주의 신학자 다수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께서 장사되셔서 죽음의 권세 아래 죽은 자의 상태에 계신 동안 그분이 경험한 것이 곧 ‘지옥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자들 간에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다른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으니, 이 고백을 중요하게 여겼고, 음부를 실제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베드로전서 3:18-22를 이 고백에 대한 근거구절로 보지 않았고, 이 고백의 의미를 성자 하나님께서 당하신 고난으로 이해했다.
이 고백의 의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이 고백은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지옥의 고통과 같은데 그것을 친히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셔서 해결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더 심화시키는 표현이다(cf. 시 18:5).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기보다 영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는 육체만 아니라 영혼에도 미치는 전인적인 것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의 고통보다 더 끔찍스러운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죄책을 지시는 영적인 고통이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으로 죄와 죄책감에 대하여 엄청난 거부감을 갖고 계신 분의 영혼이 그토록 거부하던 모든 악을 짊어지셨으니 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21)
행복한 무지냐 어려운 앎이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의 해석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아예 빼버려서 로마가톨릭이나 루터파, 그 외 여러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 일종의 ‘행복한 무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예 모르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고백하여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더욱 좋다.22)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 구절이 어려우니 빼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교부들 가운데는 이 부분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이 고백에는 구원을 위해서 유용한 비밀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을 뺀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혜택을 대부분 잃어버릴 것이다.”라고 했다.23)
한국교회는 어렵거나 곤란한 내용은 아예 가르치지 않음으로 성도들을 우민화(愚民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잘 가르치지 않음으로 성경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경향이 아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성경과 신앙고백과 교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에 대한 부분 역시도 잘 알고 잘 고백해야 한다
같은 표현, 다른 고백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도신경을 동일하게 고백해도 그 고백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 내용을 로마가톨릭, 루터파 등도 고백하지만 그들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은 외형상 표현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점에서 외형이 같다고 해서 내면도 같다고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부분을 고백한다고 할 때에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백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입으로 하더라도 그 의미를 모른 채하게 될 때 그 고백은 잘못되거나 헛된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고백의 위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를 죽음 가운데 당한 고통으로 이해한다면,"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죽으셨고, 장사되셨으며”로 해야 하지 않을까? 왜 “장사되셨고” 다음에 있을까?
음부에 내려가심이 시간적으로는 죽으심과 장사되심보다 앞서지만, 영혼의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크고 완전한 의를 채우는 마지막 요소가 되므로 마지막에 배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이다.24)
1) 칼뱅은 이 주제를 Institutes, II. xvi. 8-12에서 다룬다.
개혁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으로 보고(WLC 제50문답),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높이 되심으로 본다. 그 이유는 루터파가 ‘음부 강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관련 있다. 루터파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가셔서 사탄과 어둠의 권세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본다.
2) 한국교회가 새로 번역한 사도신경의 난외주에서 밝힌 대로, 사본마다 없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이 처음 나온 사본은 주후 390년경의 아퀼레이아 양식(Aquileian Form)이다.
3) 감리교가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없었던 이유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년)가 1784년에 감리교 신조를 작성하면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4) 연옥교리는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Libreria Editrice Vaticana, Citta del Vaticano, 1994, 1997), para. 1031.
5) 림보(Limbus)란 지옥의 양쪽 가장자리(limbus)라는 뜻이다.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는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있으나 개인적 죄책은 없는 유아들이 있는 장소다. 그런데 2008년 이후에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6)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para. 632-637.
7) 이러한 해석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문병호, 『기독론: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6), 888. 일반적으로 1586년의 Robert Bellarmine이 명확히 제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승구, 『사도신경』(서울: SFC, 2004), 200.
8) 이승구, 『사도신경』, 200.
9) 이승구, 『사도신경』, 201.
10)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692-693.
11) 한국루터교 목사 최주훈이 번역한 『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서울: 복 있는 사람, 2017), p.42, n.5를 보라.
12) 이러한 견해에 따라 개혁파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루터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높이 되심의 첫 부분으로 본다.
13) Berkhof, Systematic Theology, 685-686; W. G. T. Shedd, Dogmatic Theology, Ⅱ (1889; Grand Rapids: Zondervan), 625-633. 반면, 후크마는 지옥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cf. 잠 15:14).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9), 96, 류호준 옮김, 『개혁주의 종말론』(서울: CLC, 1986, 2002), 139.
14)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중에 하나다. Edwin A. Blum, “1 Pet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241.
15) J. Ramsey Michaels, 1 Peter, WBC 49 (Waco: Word, 1988), 204.
16) NIV는 ‘지금’이라는 의미를 번역해 두었다(who are now dead).
17)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41.
18) 이렇게 보는 것은 칼뱅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다. Institutes, II. xvi. 8-12.
19)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II, 47, [394]; 문병호, 『기독론』, 885.
2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8장 제4절에서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언급은 없지만 그 대신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으나”라고 표현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과 같은 해석을 한다.
21)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 노진준 옮김, 『조직신학(중)』(서울: 은성, 1997), 97-98.
22) 이승구, 『사도신경』, 211.
23) Institutes, II. xvi. 8.
24) 문병호, 『기독론』, 885.
손재익, 『사도신경 : 12문장에 담긴 기독교신앙』(서울: 디다스코, 2017), 176-18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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