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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31. [역경의 열매] 이정한 (1-15) 동냥밥 고아원생을 美 대학교수로 이끄신 힘은?
내가 근무하는 미국 뉴저지 주립대 스탁튼(stockton)대학의 가을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풍 옷으로 바꿔 입은 나무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캠퍼스 벤치에 조용히 앉으면 상쾌한 숲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사계절의 순리와 아름다운 자연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창조섭리를 확증시키는 증거임에 분명하다. 이 '하나님의 섭리'는 57년간 살아온 나의 삶에도 고스란히 역사해 주셨다.
그러나 이 진리를 깨닫고 알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내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자리하고 있다. 참으로 오래 참으시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실 내 삶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의지와 믿음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천일 뿐이다. 그럼에도 간증 연재에 용기를 낸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세밀하게 일하심을 함께 나누길 원하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남들이 겪지 않았던 일을 많이 겪었다. 이제는 조심스럽게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털어놓으려 한다. 그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시대적 아픔에 고통당했던 한 소년이 이제 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해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귀결되길 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가난했다. 당시 복잡했던 가족사의 이유도 있었지만 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대구희망원에 맡겨져 2년 동안을 지냈다. 고아원 생활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마음 한구석에 휑하니 아픈 상처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어지는 영상이 있다.
당시 고아원 본관 건물은 시멘트로 대충 지은 듯 허름했고 듬성듬성 칠한 페인트칠도 벗겨져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에서 드세고 폭력적인 아이들 틈에서 생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그들 모두가 부모를 잃거나 버림받은, 상처 입은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상처를 다른 아이들에게 다시 상처를 줌으로써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우려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씩 코가 큰 외국인들이나 털옷을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귀부인들이 고아원을 찾아 올 때면 '땡땡땡' 종소리가 울렸다. 이때 우리는 원장 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찾아 온 손님들에게 우리를 보여주는 순서였던 것이다.
워낙 빈궁했던 때라 고아원에서도 쌀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이때 우리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동냥밥을 얻으러 나갔다. 바가지에 얻은 밥이 겨울엔 꽁꽁 얼어 고아원에서 다시 녹여 먹어야 했다. 어느 날은 아침에 먹으려고 밥을 베개 밑에 잘 숨겨 놓았는데 밤사이 다른 아이가 훔쳐 먹어 버려 슬퍼했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 짐을 들고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마 운영이 어려워 우리를 다른 고아원에 보내려 했거나 해외입양을 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우리는 대절한 합승버스 2대에 나누어 떠나려 했는데 내가 탄 버스가 고장나 잠시 지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군복을 입은 우리 집안 친척 형이 나를 극적으로 데리러 왔다.
만약 떠나버린 첫 합승버스에 내가 탔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가끔 혼자 생각해 보는 부분이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형님의 군번(31001877)을 외우고 있다. 나를 구해준 고마운 은인이기 때문이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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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57년 대구 출생, 1996년 40세에 도미, 시튼홀 대학 및 펜실베이니아대학원 졸업, 컬럼비아대학 미술교육학과 박사 과정 졸업, 필라델피아 시청 벽화작업, 미국 7회·한국 2회 개인전시회, 현 뉴저지 스탁튼대학 미술대 교수, 미국법인 3E 인베스트먼트사 대표. 저서 '뉴욕의 거지들'.
***[역경의 열매] 이정한 (2) 3修 학원서 아내와 첫 만남… 결혼후 종교전쟁을
고아원을 나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컸을 정도로 부자였다. 그야말로 난 거리에서 밥을 구걸했던 밑바닥 생활에서 상류생활까지 넘나들면서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은 비교적 평범했다. 키는 부쩍 커서 한상 맨 뒷자리가 내 차지였고 호기심과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였지만 학교생활은 착실히 했다. 공부도 꽤 잘해 부산 경남 지역에서 수재들이 간다는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나는 미술반에 들어갔다. 상당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선배들을 보니 매우 부러웠다. 그래서 미대를 가려는 선배들을 따라 야외스케치를 다니고 그림그리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보니 공부가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집에 미대에 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가 호되게 야단만 맞고 포기를 해야 했다. 고3 입시 때 서울의 명문대에 지원했다 보기 좋게 낙방했다. 당시 부산고는 서울대에 매년 150명 정도 입학했는데 공부도 안한 내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재수를 시작했다. 나름 열심히 해서 학원선생들은 내 실력이 원하는 대학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했음에도 또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오기로 삼수를 시작했다. 학원 종합반에 등록했는데 여기서 만난 첫 여자친구가 바로 아내다.
당시 그녀는 우리 반에 들어와 고교 동창과 잡담하다 내게 '시끄러우니 나가라'고 무안을 당했었다. 내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 나중에 만나 사과를 했으나 받아주지 않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삼수에도 실패하고 낙담해 고교 선배가 운영하던 미술학원에 놀러갔을 때였다. 그녀가 미대 지망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 악연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난 곧 군 입대를 해야 했고 그녀는 미대에 합격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군에서 매일 편지를 쓰며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제대를 하고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선을 보라는 독촉을 받고 있었다. 알고 보니 부산 구포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손녀딸이었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나설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순천향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때 괴테의 문학과 철학세계에 심취했던 것이 이 과를 택한 이유였다. 그 사이 여자친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없었던 디스플레이(Display)를 배운 그녀는 졸업 후 서울 롯데백화점에 특채돼 직장생활을 바로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적극적인 구혼에 나섰다. 당연히 여자친구 집안에서 극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끈기 하나는 누구나 인정해주는 나였다. 오죽하면 장인어른이 "자네 정말 거머리같이 붙어 떨어질 줄 모르네" 하시면서 고개를 저었을 정도였다.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결혼허락을 받으러 온 나를 피하는 장인을 따라 장독대까지 따라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결국 둘이 그렇게 죽고 못산다니 어쩌겠느냐며 결혼을 승낙해 주셨다.결혼식에 안 오시겠다던 장인어른도 결국 오셔서 축복해 주셨다.사실 이때 우리 집도 내가 학생인데 무슨 결혼이냐며 반대를 하는 바람에 중간에서 애를 먹어야 했다.
우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웨딩마치를 울렸다. 그러나 우리 앞에 엄청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연애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결혼 후에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그것은 우리 집이 아주 철저한 불교 집안인 반면 아내는 철저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본격적인 종교전쟁에 돌입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3) 절에서 찍은 사진 치워버린 아내에게 "이혼을…"
우리 집안은 본이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전통적으로 불교를 믿어왔다. 합천에 해인사가 있는 것처럼 이 지역은 불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것은 부모님이 절에 시주하는 데 뭐든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새 굿을 하기도 했고, 밤늦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반면 부산 구포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아내 가족들은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제사는 전혀 드리지 않았고 대신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러니 명절에 장인 댁에 가면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았다. 추도예배가 아주 싱겁게 끝났다. 모이는 날짜와 시간도 편한대로 정하고, 추도예배 후 식사한 뒤 모두 그냥 헤어졌다.
아내도 우리 집에 와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가족이 모여 대화를 하다 정확히 자정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제사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제사 때 입는 옷도 옛날풍 모시옷에 고깔 같은 긴 모자를 쓰는 등 격식을 다 갖추었다.
결혼 전엔 전혀 부담이 없었던 제사가 결혼 후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내 때문이었다. 제삿날에 모처럼 큰맘 먹고 부산으로 내려가면 아내는 여러 형수들과 부엌에서 요리 만드는 일까진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제사 때에는 부엌에서 아예 나오지 않았다. 신앙인으로 제사 절차를 함께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던 것이다.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겼다.
신혼 때는 종교가 달라도 서로 잘 이해하면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했고 서로 인정을 해주기로 했던 터였다. 연예시절 식사 때마다 아내가 고개 숙여 기도했지만 그 모습을 불편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후 종교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결부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따라서 명절 때나 제삿날에는 서서히 가족 친지들과 교분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나 혼자만 제사에 참석하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따라서 친지들은 예수 믿는 아내를 거침없이 공격했다. 나는 집 벽에 고등학교 선배 정치인과 등산을 하며 절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자랑스레 걸어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다른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니 내가 산에서 찍은 사진은 어디에 있어요?"
그런데 아내는 아주 점잖게 대답했다.
"미안한데요. 절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라 제가 버렸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전혀 예상치 않던 말을 꺼냈다.
"여보 이제 저와 함께 교회에 나가요. 부부가 신앙이 같아야지요. 저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당신을 위해 기도도 많이 했어요. 우리 함께 예수 믿어요. 나머진 제가 더 잘할게요."
나는 너무나 어의가 없고 화가 나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당신 상의도 없이 사진을 버려도 돼. 정신 좀 차려."
나는 아내의 뺨을 보기 좋게 한 대 때린 뒤 휭하니 밖으로 나와 버렸다. 막상 밖으로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내는 종교가 다르지만 삶은 나보다 훨씬 바르고 빈틈이 없었다. 아내로 부모로 며느리로 조금도 빠지는 부분이 없었고 직장생활까지 열심히 해 가계를 도와 온 아내였다. 이런 그녀에게 손찌검을 한 내가 매우 후회스러웠다. 종교전쟁은 이후에도 몇 번 더 벌어졌고 갈등하던 나는 결국 아내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신이 불교로 개종하던지 아니면 이혼을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요. 나도 이제 도저히 못 참겠소."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아내는 딱 한 달만 여유를 달라고 했다. 한 달 후에 대답하겠다고 했다.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도 아내를 감동시켜 개종을 시킬 계획을 차분히 세웠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4) "이혼도 불사…" 아내의 강경함에 되레 내가 개종
한 달이 지나 아내가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밝히겠다고 한 날이 돌아왔다. 나는 백화점에 가서 비싼 겨울코트 한 벌을 선물로 마련했다. 그리고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하고 집 청소도 깨끗이 했다.
난 아내가 이제 교회에 그만 나가고 불교를 믿겠다고 말할 것을 예상했다. 종교 문제만 아니면 우리는 사이가 좋았기에 아내가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이혼하겠다고 말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제 일요일이면 아내가 교회에 가지 않고 나랑 등산이나 다니며 놀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흐뭇했다.
아내가 퇴근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분위기 있게 음식까지 차려 놓은 것을 보고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난 표정만 보고도 '됐구나' 싶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선물을 풀어보며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여보. 정말 미안해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못 버려요. 제 삶에서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아요. 당신이 개종하지 않으면 이혼을 한다고 하셨는데 전 당신을 사랑하지만, 예수님은 버리지 못해요. 설령 이혼을 하더라도요."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이혼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겠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화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아내 입장이라면 저렇게까지 종교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남편을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저런 신앙을 과연 가질 수 있을까?"
아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함께 아내를 이렇게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독교라면 정말 그 속에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공부도 할 만큼 하고 모든 면에서 명철한 아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내가 오히려 개종을 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내에게 그 자리서 바로 선언했다.
"여보. 내가 졌소. 이젠 당신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겠소. 오히려 내가 예수를 믿겠소. 대신 나도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아내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후 나는 약속한 대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열심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이후 나의 신앙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주님을 앙망하는 믿음의 신자가 된 것이다.
나의 이런 놀라운 변화는 내 의지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내의 눈물어린 기도가 성령을 통해 나를 변화시킨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 달간 시간을 줄 테니 양단간 결정을 하라는 선언을 한 후부터 아내의 간증은 시작된다.
"당신이 이혼이냐 개종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비장하게 말하는데 이번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더라고요. 나는 이 한 달 동안 새벽기도회를 다니며 사생결단의 기도를 했었지요. 그때 난 당신 넥타이를 하나 제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붙잡고 기도했었지요. 하나님께서 남편을 구원시켜 달라고요. 아마 당신 넥타이에 제 눈물이 흘러들어 몇 번은 적셔졌을 거예요."
아내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때는 차라리 목숨을 거둬가고 남편을 구원시켜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이 말을 듣고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아내의 기도에 감사하게 된다.
나는 이처럼 아내에게 굴복해 예수를 믿게 됐다. 아니 아내의 기도에 성령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 주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생일을 두 번 챙긴다. 어머님의 뱃속에서 태어난 생일과 예수를 만나 거듭난 영적 생일이다. 종교전쟁에서 승리한 아내는 완패한 나에게 이 두 번의 생일을 빠짐없이 챙겨주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5) 1995년 불혹의 기도 "주님, 새 삶의 길 알려주세요"
내가 아내로 인해 신앙을 갖게 됐지만 사실 군복무 기간 중에 신앙도 없으면서 군부대 주일학교 교사를 잠시 맡았던 적이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부르신 것이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수부대에 근무했던 나는 어느 주일날, 혼자 낮잠을 자는데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흰 수염이 길게 난 서양 사람이 나타나 "정한아 일어나라. 지금 어느 때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자느냐. 저기 가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놀라서 일어나 마을로 나가 걷다 보니 꿈에서 본 곳과 똑같은 곳에 내가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 바로 앞에 교회가 있어 들어갔다. 알고 보니 영 밖 군인교회로 군종병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제대 후엔 예전의 생활로 금방 돌아갔다.
대학 3학년 때 결혼을 한 나는 잠실 주공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4학년 때 당시 충무로에 있던 '한국 후지필름'에 입사했다. 입사 3년째가 되니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마침 서울 장안동에 가죽의류 봉제공장을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나는 바로 사표를 제출하고 전혀 경험이 없는 가죽봉제 사업을 했다.
대기업 하도급을 받아 초기에는 그럭저럭 사업이 됐는데 직원들이 30대 초반 사장을 우습게 봤다. 내가 강한 스타일도 아니고 부드럽게 잘 대해 주는 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도급 일이란 게 일거리가 밀려오면 너무나 많고 없으면 그대로 손놓고 있어야 해 수지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원관리가 너무 힘들었다.
결국 2년 만에 손을 들고 재도전한 것이 시계 제조 공장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시계회사에 영업부장으로 입사했다 이를 인수한 케이스다. 대학원에 들어가 무역 쪽을 공부해 열심히 일하자 사장은 내게 동업을 제의했다. 1년 후에는 아예 회사 전체를 인수받았다. 수출이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우리 회사가 갑자기 가격이 싼 중국시계들이 밀고 들어오자 맥을 못 췄다. 이 사업 역시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회 경험이 적은 내가 의욕만 앞섰던 것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였다.
그 무렵 갑자기 정치바람이 불어 고등학교 선배인 서석재 의원을 따라 다녔다. 자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YS 실세로 나중에 총무처 장관도 지내셨다. 정치라는 것이 겉은 화려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나이로 40세가 된 1995년, 내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았지만 이뤄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직장생활도 사업도 정치도 해 보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세요. 저 정말 크리스천으로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앞길을 열어 주세요."
기도를 하면 내가 집안의 반대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미술 쪽을 더 공부하고픈 열망이 솟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왕이면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미 두 아이를 둔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동안 아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해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의 체계적인 선진교육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두 어금니를 꽉 다물고 이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반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내가 격려해주며 떠나라는 것이 아닌가.
"여보, 당신이 그토록 열망하는데 새롭게 도전해 보세요. 아이들은 제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말구요." 나는 아내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6) 美 유학전 골방서 두 달간 동양화 100여편 습작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아내의 승낙을 받은 뒤 사실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것은 "과연 내가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잘 해낼 수 있을까?"란 질문이었다.
먼저 화가로서 재능을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꼬박 2달 동안 골방에 박혀 손놓았던 그림을 그렸다. 선배들에게 어설프게 배운 기억을 살려 100여장의 동양화를 그린 것이다. 유화는 물감 값도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중국화와 한국화를 보면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삽입시켜 한지에 그리고 또 그렸다. 어설픈 작품들이지만 이 작품으로 전시회를 한 번 열고 미국으로 떠났으면 했다. 이곳저곳 갤러리를 노크했지만 모두 퇴짜였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다니던 소공동 롯데백화점 내 갤러리에 직접 전화해 주었다. 갤러리 원장은 나의 이력서와 그림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내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무명인 나를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미팅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이름난 화가도 아니고 더구나 미술을 전공하거나 공부도 하지 않은 내가 어떻게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이렇게 조마조마하던 내게 오히려 아내가 용기를 주었다. "여보 우리 기도해요.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하시니 도와주실 겁니다."
아내의 이 말은 내게 여간 큰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학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전시회까지 열도록 돕는 아내의 깊은 마음에 비하면 난 그저 철부지였다. 면담 날, 아내는 출근하기 전 아파트 문 앞에서 내 손을 꼭 잡고 힘있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 남편을 앞으로 크게 사용해 주시고 믿음의 남편으로 바꾸어 주세요!"
나는 "혹시 이웃 중에 이 기도소리를 들으면 창피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심했고 신앙도 부족했다. 그런데 이날
나는 아내와 손잡고 기도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넘어 뜨겁고 강한 그 무엇이 기도 속에서 느껴졌다. 나는 이력서와 그동안 그린 그림 원본을 몇 장 가지고 갤러리 원장을 만났다. 자료를 보는 원장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니 화가로 경험도 없으시고 수상경력이나 특별한 이력이 전혀 없군요.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롯데갤러리는 1∼2년 전에 예약이 다 돼 있고 더구나 신인작가들은 받지 않습니다." 전시 일정표를 직접 보여 주는데 빽빽한 일정에 유명 화가들 이름이 쉽게 눈에 띄었다.
"제가 4월이면 미국 유학을 갑니다. 그림 공부하러 가는데 경력을 쌓을 겸 어떻게 기회를 한번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것은 내 입장이었다. 단번에 거절을 당하고 집으로 온 나는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전시회가 가능하게 해주세요. 제겐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 기도가 그대로 응답됐다. 아는 인맥을 통해 딱 일주일 비어 있던 그 시기를 내가 차고 들어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롯데갤러리는 미술인들이라면 누구나 전시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곳이었다.
1996년 2월 중순, 70여 점의 그림을 걸고 롯데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 오픈식엔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격려해 주었다. 모두들 놀라면서 "언제 이렇게 그림을 그렸느냐"고 했다. 내게 예술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전시회 인사시간에 이렇게 선언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한 뒤 반드시 한국에 돌아와 선진 한국교육의 장을 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배운 모든 것, 조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인사말을 했지만 내 말을 믿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학교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미국 가서 6개월 어학연수만이라도 잘 마치면 일단 성공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잘 하고 오세요." 그동안 난 술 잘 마시고 놀기만 좋아했으니 무리가 아니었다. 은근히 오기가 솟았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7) 어머니가 박사학위 받았던 美 시튼홀 대학으로
1996년 4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다. 나를 보내는 아내와 두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그래 반드시 공부를 마치고 당당하게 귀국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이 땅을 밟을 것이다."
비행기가 상공을 차고 올라갈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아내의 얼굴이었다. 아내는 내게 늘 기도하는 모습으로 각인돼 있었다. 특히 남편을 믿고, 항상 긍정적 언어로 밀어주고, 부족한 남편을 위해 기도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학교를 선택하는 과정에는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다. 한국동란 직후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한 어머니는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미국 뉴저지 시튼홀대학에서 '아시아 역사학'을 가르치셨다. 이런 어머니의 추천이 있어 난 간단한 영어 시험과 인터뷰를 거쳐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부에 손을 놓은 지 10여년이 지났고 영어 실력은 사업을 하느라 익힌 기초회화 정도가 다였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사실 난 학사 자격이 있고 경영학석사(MBA)를 마쳐 미국 대학원으로 바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졸업장만 따는 형식적인 공부는 의미가 없고 미국까지 힘들게 갈 필요가 없었다. 정말 실력을 쌓고 바른 학문적 성취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엉뚱하게도 미국 고등학교부터 다녀보고 싶은 생각에 미국 도착 직후 고등학교도 찾아갔었다. 그런데 내 나이를 물어보더니 너무 많아 안 된다고 거절을 당했다. 교무실을 나오는데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마흔이 된 친구가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나는 창피함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내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욕이 강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내 몫으로 가져가야 하는 부분에 너무 형식과 체면에 치우쳐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곤 한다. 겉이 화려하다고 속이 반드시 알찬 것은 아니다. 겉이 보잘것없어도 속이 알차면 이것이 더 귀한 것으로 대접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나는 이것을 학문세계에 들어와 너무나 절절히 체험했다. 결국 실력 있는 자가 인생에서 대우받고 승리하게 된다. 내면을 가꾸고 나를 세워가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더라도 껍데기만 가진 형식적인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면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 아닐 수 없다.
시튼홀대학은 170년 전통의 가톨릭 학교였다. 이곳 뉴저지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푸른 나무가 특히 많아 정원도시라고도 불린다. 뉴욕 바로 옆이라 교통도 편했다. 뉴욕 팬스테이트역에서 열차를 타면 학교가 있는 사우스오렌지역에 30분이면 도착했다.
난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급우들 중에 경산, 밀양 등 시골에서 기차 통학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가끔 그들 집에 놀러 가면 그 전원적인 풍경에 매료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사우스오렌지가 전형적인 시골풍 전원도시로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미국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조그마하고 아름다운 사우스오렌지는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난쟁이들 동네'가 연상된다. 봄이면 각양각색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엔 풀벌레 소리와 함께 녹음이 짙어간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각색의 단풍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멋진 설경을 선사했다. 사계절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는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겐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8) 첫 수업부터 영어와 전쟁… 주님은 내게 友軍을
미국 시튼홀 대학 학부에 입학해 첫 수업에 참석했다. 그런데 영어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의욕만 앞서 무모하게 도전한 결과였다. 이해를 못하는 강의는 결국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었다. 영어가 너무 어려워 차라리 수화를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런데 그 수화를 가르치는 것도 영어라니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 토플시험을 치렀지만 점수가 오르지 않았고 나는 부족한 영어를 위해 ESL과정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영어를 못해 손해 보는 일이 많았다. 학교개교기념일이나 특별행사 등엔 수업을 안 하는데, 안내를 이해 못해 나 혼자 학교에 와 바보가 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로 구걸해야 살아남는데, 이렇게 벙어리처럼 지내야 한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고 박사 학위를 딴단 말인가."
나는 영어라는 큰 벽에 막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지혜를 주셔서 빨리 영어를 익히고 교수의 강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위해서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교수들을 자주 찾아가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젊은 학생들 사이를 일부러 파고 들어가 점심을 함께 먹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롤러 브레이드를 타고 캠퍼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이 40세에 머리에 헬멧을 쓰고 무릎보호대를 찬 채 돌아다닌 내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난다.
빠른 영어습득을 위해 기도하던 내게 응답이 왔다. 유학 온 한국인 수녀님이 계셨다. 나보다 손위인데 내가 영어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하자 선뜻 자신이 수업이 없는 시간에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
"정한씨. 그 고충 내가 알아요. 내 친구도 큰 뜻을 품고 미국에 왔다가 영어가 너무 어려워 6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답니다. 영어는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예요."
이렇게 도움도 받고 좌충우돌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공부에 온 힘을 쏟았더니 조금씩 영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이해가 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영어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혼자 덩그러니 집에 와 앉아 있으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신나게 놀던 생각이 나서 모든 것을 접고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왔기에 지금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주일이면 한인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해 뜨겁게 기도하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이 무렵 만난 안토니오 트리아노 교수는 내게 잊지 못할 스승이다. 그에게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는데 참 잘 가르쳤다. 강의 내용을 100%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학생들을 관찰해 교수가 지시했거나 원하는 내용을 파악,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다.
트리아노 교수는 내게 "미스터 리, 걱정 말고 열심히 해. 너는 굉장히 탤런트가 있어"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자신감이 솟았고 더 열심히 했다. 그분의 한마디는 내 인생에서 자신감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트리아노 교수는 어느 날, 교실 자동 연필깎이가 고장 나자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을 위해 일일이 연필을 깎아주었다. 그 모습이 내겐 실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강의를 듣는 과목별 지도교수들은 나를 연구실로 불러 개인지도까지 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이 든 동양인 학생을 위한 배려였다.
난 교수들을 찾아갈 때마다 학교 매점에서 파는 커피를 한 잔 산 뒤, 두 잔으로 나누어 교수님께 한 잔을 갖다 드리곤 했다. 교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학생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내 행동은 이상하게 비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모두 고마워하며 '잘 마시겠다'고 했다. 자주 그러다 보니 매점직원은 내가 가면 커피를 넘칠 듯 담아주고 빈 컵까지 챙겨 주었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9) "안되면 되게 하라" 두달간 눈치워 B학점을 A로
나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트리아노 교수가 내게 B학점을 준 일이 대학 3학년 때 일어났다. 나로선 충격이었다. 당시 공부에 몰입해 모든 과목에 최선을 다했고 거의 A학점을 받았다. 유학 초 영어 때문에 절절매던 상황에 비해 놀랍게 발전한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심히 한 결과였다.
나는 이 대학을 마치고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한 대학원 한 곳에 들어가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이비리그란 미국 동부 8개 명문사립대학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다. 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버드, 펜실베이니아, 프린스턴, 예일대학이 이에 속한다. 이 대학들이 모두 담쟁이덩굴(ivy)로 덮인 건물이 많아 붙여졌다. 또 1954년부터 이 대학들이 아이비그룹 협정을 맺어 매년 미식 축구경기를 여는데 이 때문에 아이비리그라고 불리기도 한다. 모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최고 명문대학들이다.
당시 대학 학점에 B가 있으면 아이비리그 대학원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올 A'를 받겠다는 생각에 불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믿었던 트리아노 교수의 한 과목이 B가 된 것이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무조건 트리아노 교수댁에 가서 눈을 치우는 일을 시작했다. 내 숙소와 교수님 집과는 차로 5분 거리여서 눈이 오다가 멎으면 재빨리 삽을 들고 트리아노 교수 댁에 가서 열심히 눈을 치웠다. 미국은 집 앞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제도가 있다. 또 집 잔디를 안 깎아도 벌금을 내야 하는 주가 많다.
드디어 트리아노 교수가 나를 학교 연구실로 불렀다."한, 왜 우리 집에 와서 그렇게 친절하게 눈을 치우지? 이젠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해. 내가 충분히 치울 수 있거든." 나는 바로 이때라 생각하고 나의 속내를 그대로 고백했다.
"제가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터인데, 이 B학점이 있으면 진학하고 싶은 대학원에 못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저의 장래를 위해 학점을 A로 혹시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예상은 했지만 트리아노 교수는 아연질색했다. 한마디로 냉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녀석이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미국 대학에서 '인정'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공과 사가 엄격히 구분된다. 나는 평소 트리아노 교수의 모습을 잘 아는 터라 거절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섭섭하지 않았다.
나는 1970년대 말, 육군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군대구호가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였다. 나는 이러한 군 시절 경험과 구호를 미국에 와서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눈을 치웠고 트리아노 교수 부인은 나를 볼 때마다 "한, 제발 그만하라!"고 간곡하게 애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두 달이 지났을 때 트리아노 교수는 다시 자기 연구실로 오라고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벽지(Wall Paper)에 대해 A4용지 10장 정도의 리포트를 작성해 오라는 숙제를 갑자기 내주었다.
나는 도서관을 찾아 최선을 다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리포트를 본 트리아노 교수는 "A학점을 줘도 되겠다"며 점수를 변경해 주었다. 한국적 끈기,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눈이 펑펑 내리면 트리아노 교수 집을 찾아 눈을 치우곤 했다. 목적을 이뤘다고 이내 마음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너무 감사해 순수한 마음으로도 교수님을 돕고 싶었다.
트리아노 교수는 내가 대학원 입학 원서를 넣을 때, '추천서'를 정성스레 직접 써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는 내가 아이비리그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 입학한 해 가을에 갑자기 암(癌)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참 많이 슬퍼했다. 지금도 눈이 오면 트리아노 교수 내외분이 생각난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0) 기차역 밤샘 작업으로 빚어낸 '뉴욕의 거지들'
미술 공부의 기본은 드로잉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인 장면을 재빠르게 기록을 해 놓아야 나중에 멋진 그림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릴 수 있다. 드로잉은 예술뿐만 아니라 인성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모든 기초과학에 기초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창조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나는 학교 공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익숙해지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시튼홀 대학에 다니고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뉴욕스튜디오스쿨(nyss.org)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지금은 학사 자격을 주는 이 학교는 실기 중심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높은 수준의 예술학교다. 이 학교 그렘닉슨 학장은 '예술 조련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분이었다. 나는 여기서 공부하며 깊이 있는 미술의 세계에 흠뻑 빠져 지냈다.
학교에 가려면 뉴욕 34번가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려야 했다. 나는 기차통학을 하면서 기차 안에서 열심히 드로잉을 했다. 실기를 중시하는 이곳에서 공부하다 보면 밤 12시쯤 출발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다음날 첫 기차는 새벽 4시가 넘어야 한다. 이 경우 학교로 돌아와 작업실에서 계속 미술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음날 수업이 없으면 아예 밤새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드로잉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새벽 첫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훌륭한 개인 작업실이었다. 이때 잠을 자려고 역 안으로 모여드는 뉴욕의 거지들은 나의 전속 모델이었다. 역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나의 스케치북 고객이었다.
미국이 선진국이지만 여전히 뉴욕에는 집 없는 거지들이 많다. 특히 역 주변에는 많은 거지들이 살고 있다. 열차를 놓친 내 모습도 작업하느라 흘린 땀과 목탄과 물감으로 온 몸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주변의 거지들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 없을 만큼 누추했다. 그들도 나를 보며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뉴욕커들도 나를 보며 '동양인 노숙자'로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루는 내가 '중국인 거지'라 생각했는지 같은 중국인이 빵과 음료수를 조용히 건네주고 갔다. 나는 화내지 않았고, 그것을 받아 맛있게 먹었다. 역에서 졸다 일어나 보면 거지들이 옆에서 나와 같이 자고 있었다. 의자에서 잠을 자다 보면 역 승무원들이 밖으로 나가라고 쫓아내기도 했다.
한번은 기차 안에서 표를 검사하는 차장이 내 남루한 겉모습만 보고 기차에서 내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즉시 학생증을 꺼내 보여 위기를 모면했다. 이 34번가 펜실베이니아 역 대합실에 근무하는 제인이란 이름의 흑인 여자 경찰관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대합실에서 자는 나를 깨우다 처음 만났다. 내가 그녀를 스케치한 작품을 선물하자 아주 좋아하면서 친해졌다. 자신의 딸도 그림을 전공했으면 한다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주면서 이곳은 아주 위험하니 무슨 일이 혹시 일어나면 즉시 자기에게 연락하라는 친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의 말이 기억난다.
"미스터 리, 내가 25년간 뉴욕 경찰 생활을 했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그림을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멋있게 잘 그리고 또 그렇게 쉽게 나눠주나요. 당신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어요."
나는 그녀에게 바로 그 이유가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면서 그녀를 전도하지 못한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역에서 또 열차 안에서 그린 드로잉 작품만으로 2010년 '뉴욕의 거지들'이란 드로잉 저서를 한국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학교를 오가며 울고 웃었던 뉴욕의 시간들, 이 뉴욕 거지들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스케치북에 담겨 귀중한 추억, 잊지 못할 뉴욕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1) "정한, 네 그림을 찾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는 시튼홀 대학을 졸업하며 두 가지 기록을 세웠다. 그것은 동양인으로 대학 역사상 처음 전체 수석 졸업했다는 것과 시튼홀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졸업생이 아이비리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 미술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과목 A학점(4.0)에 최고 명예 졸업상도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 가면서도 '학장 장학금'을 받았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수업 자체가 불가능했던 지각 유학생이 수석 졸업을 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다. 나는 혼자 학교 운동장을 질주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공부에만 집중하느라 한국 학생들을 만나도 아예 말을 걸지 않았다. 한국 학생들은 후일 내가 북한에서 온 유학생으로 오해했다고 했다. 공부가 힘들어 숱한 위기를 만났으나 그때마다 아내의 눈물어린 기도가 떠올라 마음을 돌이키곤 했다.
난 1학년 때부터 아이비리그 대학원을 가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했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초인적인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신다. 이 무렵 아내와 자녀들도 미국으로 모두 건너와 함께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 댁에 신세를 지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은 필라델피아에 있어 통학을 하지 못하니 기숙사에 들어갔다. 이 학교를 택한 것은 도서관 시설이 어느 대학보다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는 나머지 시간은 작업실에 박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어느 날, 미국 중년 부인 두 사람이 내 작업실을 찾아와 그림 4점을 꽤 비싼 값에 구입해 갔다. 알고 보니 '맥도날드'에서 필라델피아 지역 젊은 화가들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내 작품이 선택된 것이었다. 대학원 작업실에서 그린 내 작품들을 평가하는 교수들의 질책은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한, 자네 것을 찾아! 남의 것을 카피하지 마라." "이 정도론 넌 화가가 될 수 없어. 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해."
예술가는 구도자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 나는 '웃음과 기쁨'을 내 그림의 주 소재로 잡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그림에 항상 웃음과 재치, 풍자를 담았다. 예술은 만국 언어다, 국경을 초월해 평화를 전달해 주는 중요한 메신저다. 이 그림에 영성과 말씀이 담기면 그것은 작품을 떠나 은혜를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선교의 도구가 된다.
나는 이 무렵 믿음의 아내를 주시고, 연단을 거쳐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유를 깨닫게 됐다. 화가와 교육자로 부르심은 관람객과 제자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믿음의 전령사가 되라는 사명임을 말이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해외 선교에도 참여하게 하셨다. 특히 남미 페루 선교에 큰 비전을 주시고 계속 큰 사역을 준비시켜 주심에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페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9년 내가 출석하던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가 여름 페루 단기선교를 다녀와 시작됐다. 다녀온 멤버 중 나와 매우 친한 동갑내기 집사(피터 한)가 있었다. 그는 주일이면 대학 기숙사에 있던 나를 찾아와 교회까지 친절히 태워다주곤 했다. 그런데 단기선교를 다녀온 그가 갑자기 페루 선교사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난 페루가 좋아요. 아마존 정글 선교사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 같아요. 정글에 들어가니 내 집에 들어온 것처럼 포근했어요." 그는 이미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집사는 선교를 위해 한방침술 공부를 하더니 결국 목사 안수를 받고 페루 선교사가 되어 현지로 떠났다. 나도 페루에 대해 많은 자료들을 뽑아 그에게 제공했고 도울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침술 공부를 할 때 내가 침을 맞아주는 '실습용 몸'이 되어 주었는데 집에 돌아와 내 몸에서 아직 뽑지 않은 침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2) 한국 13배 '페루 복음화와 개발' 새 소명을 받다
페루로 간 피터 한 선교사는 고정 후원자가 없어 현지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도 재정이 어려운 상태라 선교비를 많이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미국에 다니러 온 한 집사의 얼굴을 보면 햇빛에 그을려 거의 흑인이었다. 건장한 체구였는데 허리띠 구멍이 3개 정도 줄어 날씬하게 변해 있었다. 아마존에서 물린 모기 때문에 피부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래도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고 감사가 넘쳤다.
"편한 미국 생활을 마다하고 페루로 떠나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저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현실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고 평안을 허락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한 선교사 아내는 미국에 남아 네일숍에서 일해 번 돈을 남편에게 보냈다. 그로 인해 아마존 밀림지역 뽀르빌 마을에 첫 교회가 세워졌다. 배로 건축자재를 일일이 날라야 하는 번거로움 속에서도 교회가 창립된 것은 기적이었다.
나도 페루 선교 현장을 찾아가 볼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한 집사의 고생하는 모습과 원주민들의 비참한 삶에 눈물이 나왔다. 기도하는 가운데 페루의 정치인들, 지도자들과 교제하며 이 나라를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다. 페루는 우리나라의 13배 면적을 가졌고 석유 천연가스 등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아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나는 단순히 선교만 하는 차원을 넘어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일어서게 만든다면 이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개척자가 되자고 한 선교사와 다짐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셨던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 땅이었던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를 주고 사 엄청난 지하자원을 얻는 것을 예로 들었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한 선교사를 앞세워 페루 현지 정치인들과 폭넓은 교분을 쌓았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페루 선교의 큰 꿈을 준비했다. 우리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2010년 10월 페루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우리와 친밀히 교분을 쌓아 왔던 페루 친구들 대부분이 시장(市長)에 당선된 것이다. 한 집사의 사역지 로레또 주(州)에서는 주지사와 시장 4명이 당선되었다.
나는 회사 운영 및 무역 경험을 살려 후배 변호사를 통해 미국 법인 회사를 바로 설립했다. 회사명은 '3E Investment, inc'로 정했다. 3E는 교육(Education), 환경(Environment), 자원(Energy)의 약칭이다. 이 3개 이슈가 앞으로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되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가 없는 추수감사절 연휴를 택해 페루 친구들의 주시사 및 시장 당선 축하를 하러 방문했다. 로레또 주만 해도 남한 면적의 4배가 넘었다.
나와 한 선교사는 이끼또스 시장과 시청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6개 시와 차례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MOU 체결 후에는 호텔 콘퍼런스룸에서 약 70명의 내외신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한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단 한순간에 작품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지사와 시장들이 모두 친구이다 보니 내가 각 시(市)에 가지 않고 한자리에 와서 행사를 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3E사는 지금 무한한 페루의 자원들을 세계 굴지 회사들과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도맡고 있다.
아울러 페루 지역 투자를 요즘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페루 로레또 주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뒤를 잇는 제2의 도시가 되리라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행되는 모든 목적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페루 복음화'다. 하나님이 복음의 황무지 페루의 영혼들을 사랑하시기에 부족한 나를 보내셔서 이렇게 기초 작업을 맡기신 것이라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3) 내가 그린 ‘한국 풍경’ 벽화… 필라델피아 명물로
2001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MFA(Master of Fine Art) 과정을 졸업한 뒤 대학 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수많은 대학교에 채용을 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인터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고 유색인종이란 보이지 않는 편견이 작용했다.대학교수란 직업은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던 중에 필라델피아 시(市) 전속 벽화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추천서를 ‘필라델피아 시청 벽화팀’으로 보냈다. 한 달이 지난 뒤 시청 벽화 디렉터 제인 골드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활동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그녀는 내 그림을 보자마자 “오우 굿”이라고 외치더니 즉시 같이 작업하자고 제의했다.
필라델피아지역 벽화 역사는 1984년부터 시작된다. 거리 벽들이 낙서로 시작돼 벽화로 발전되었고 벽화투어가 생길 만큼 유명해졌다. 필라델피아에는 3000개 이상의 벽화가 있고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도 찾아온다. 특히 제인 골드가 벽화 담당자로 부임한 이후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녀의 안목과 열정이 시를 벽화투어 도시로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벽화를 그린 장소는 필라델피아 북쪽의 앤더슨 센터였다. 나는 중학생들에게 벽화 그리는 기초 그림을 지도하면서 벽화를 같이 그리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중학생은 20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자유분방한 이민 2세 문제학생들이었다. 단 5분도 집중하지 않고 들락날락하면서 내 정신을 빼놓았다.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난 최고 문제학생 5명에게 아낀 점심값을 털어 ‘스파이더 맨’ 영화구경을 시켜주었다.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해 섬길 때 상대는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벽화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사소한 배려가 열매를 거둔 것이다.
훗날 내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박사를 하면서 ‘벽화를 통한 다민족 교육’을 깊이 연구하게 된 동기도 이들이 부여해준 셈이다. 1차 작업을 잘 마치자 새로운 프로젝트가 다시 주어졌다. 이곳 여름 날씨는 섭씨 37도가 보통이다. 그런데 이 여름에 다시 변두리 벽화작업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이 무렵 나는 향수병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한국 풍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싶었다. 한국의 화폭을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옮겨보고 싶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아름다운 한국 사진을 보여주며 허락을 받았다.
난 고등학교 때 수업을 빠지면서 선배들과 그림을 그렸던 ‘부산 성지곡 수원지’를 마음속에서 되살렸다. 맑게 흐르던 개울가 풍경들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그리고 기초 그림으로 재현해냈다. 내 벽화 파트너도 나의 설명을 듣고 아주 좋다고 해 의기가 투합됐다.
무더운 날씨라 육체적으론 힘들었지만 여름 두 달간을 ‘부산 성지곡’을 상상하며 행복하게 보냈다. 이때 그린 벽화 사이즈는 건물 3층 높이의 대형이었다. 벽화가 거의 완성된 어느 날, 교회에서 가깝게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구경을 오셨는데 높은 곳에서 작업하는 나를 향해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집사님! 참새들이 집사님이 그린 나무에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죽었어요!”
나는 농담으로 알고 내려가 보니 진짜 세 마리의 참새가 죽어 있었다. 벽화 속 나무를 보고 날아오다 벽에 부딪친 것이 분명했다.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던 화가 솔거의 ‘노송 벽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벽화가 완성된 후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이 무척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운전하다가도 그림을 보고 가족들이 모두 내려 벽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요즘도 이곳은 필라델피아 벽화투어 중 방문객들이 찾는 유명 코스 가운데 하나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4) 아시아계 최초 美 상원의원 신호범씨를 양아버지로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아시아계 최초로 미국 상원의원이 된 정치인이 있다. 미국의 워싱턴주 신호범(Paull Shin) 의원이다. 그는 18세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돼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동양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와이대학, 메릴랜드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94년 상원의원이 됐고 2006년 선거에서는 미국 정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무투표로 당선돼 정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인들은 신 의원의 정계 진출에 큰 자긍심을 갖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분은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한인교회를 돌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많은 교포, 이민 성도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주고 계셨다. 나는 그분의 간증을 한인교회에서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거리의 소년으로 떠돌다 한국을 떠났던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숱한 세월을 이겨냈다. 이제 교수를 거쳐 정치인으로 우뚝 선 그의 삶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큰 존경심이 우러러 나왔다.
나는 그분을 멘토 삼고자 양아버지로 삼길 원했다. 나의 정성과 헌신에 감복하셨는지 승낙해 주셔서 이제 가족들까지 친하게 지내며 전화안부를 묻는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아버지는 79세지만 여전히 미국 내 입양자녀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 그 위치에 비행기 좌석은 항상 3등석을 타셨다. 국민의 세금을 아껴야 한다는 지론에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기도하면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오히려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나는 양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감을 가득 충전 받는다. 생김이 비슷해 진짜 숨겨놓은 아들로 오해도 받지만 ‘대기만성형’이란 점에선 우린 너무나 닮았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자리를 찾으려다 실패한 나는 공부를 더 하기로 해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이 역시 명문대라 쉽지 않은 입학과정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다. 이곳의 공부와 과제도 엄청났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나는 뉴욕에 가면 미국 최고의 부동산 부호 도널드 트럼프의 빌딩을 쳐다보며 기도한다. “주님, 도널드 트럼프에게 큰 경제적 부를 허락하신 것처럼 저도 미술교육의 세계적인 교육자로 성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2008년,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논문시험이 통과되자 주님이 선물을 주셨다. 뉴저지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스탁튼 대학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갑자기 온 것이다. 공부하면서 각 대학 조건들을 잘 살펴서 서류전형에 맞추어 교수지원서를 종종 보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필라델피아에서 그리 멀지 않는 위치였고 아주 조용하고 운치 있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인터뷰를 통과한 나는 이 학교에서 비주얼 아트(Visual Arts)를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오랜 대학생활에서 아쉽게 느꼈던 부분들을 학생들에게 채워주는 교수가 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스탁튼 대학에서 내 수업은 매우 인기가 높다. 다른 대학교에서도 강의 요청이 들어와 가끔 나가며 매우 즐거운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항상 꿈과 용기,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특유의 열정과 정성에 모든 학생들이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올해 초 꽤 오랜만에 한국에 다니러 와 가장 실망한 게 있다. 그것은 아직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이 벌써 꿈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한탄하며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청년들에게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격려해 주고 싶다. 현실이 막막하고 답답하더라도 꿈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과감하게 도전해 보라고 말이다. 높이 나는 새가 먹이를 더 많이 발견하는 것처럼 도전을 해야 결과가 있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이정한 (15·끝) “주님 함께 하시기에 내 꿈·비전은 늘 진행형”
1996년부터 공부를 시작한 나는 2008년에서야 공부가 끝났다. 햇수로 무려 13년간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동안 받은 미국 졸업장이 4개다. 시튼홀대학 학사 졸업을 시작으로 뉴욕스튜디오스쿨에서 받은 수료증과 펜실베이니아대학 미술석사,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졸업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이제 스탁튼대학 교수로, 화가로, 페루를 개발하는 3E 회사 대표로 활발히 뛰고 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곳 미국 생활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어느 주에 가나 한인들이 있고 직업도 천차만별이다. 모두들 치열하게 열심히 살며 2세들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대단하다. 내가 못 먹고 못 쓰더라도 자녀들은 제대로 공부시켜 성공하도록 하겠다는 의욕이 강하다.
이제 이민 1.5세, 2세들이 서서히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법조인들, 대학 총장, 정치가가 나오기도 하는데 아직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한국인 대학교수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보람 있고 긍지도 느낀다. 항상 내 모습이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매사 행동을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개개인의 인격 형성이란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그 사람만의 개성이자 성격의 종합체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쉽게 판단하거나 자신의 잣대로 저울질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수업을 시작할 때나 마칠 때 항상 감사기도를 드린다.
“주님께서는 제게 가르치는 직업을 주셨습니다. 남에게 겸손할 줄 아는 좀 더 성숙한 삶을 살게 도와 주옵소서. 매사에 감사하게 하시고 이웃을 섬기는 나눔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도 한때 내가 이룬 것이 자랑스러워 남에게 이것을 드러내고 우쭐댄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 말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란 말씀을 읽고 난 뒤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후 나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겸손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왔다. 주변에서도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되도록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하면 무리가 없다. 그러나 가끔 못난 습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아직은 있다.
문화의 습성은 자라면서 같이 성장해야 자연스러워진다. 좋은 습관이나 훌륭한 개성도 아주 어릴 때부터 자라나야 훌륭한 인품으로 완성된다. 여기에서 꼭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성경 말씀이다. 즉 하나님 말씀이 우리 속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면 훗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고 기쁜 일들이 넘친다.
은혜의 응답들은 각기 다르겠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기적을 직접 체험하면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권면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100% 믿고 행하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역사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아내에게 감사와 함께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이기적이었던 나를 품고 눈물의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통로를 열어준 아내다. 부족한 남편을 항상 가정의 머리로 세워주며 오랜 기간 인내했던 아내다. 이런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결국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깊이 감사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든 ‘이제부터 시작이다’란 생각을 항상 갖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나의 비전과 꿈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미국을 넘어 페루와 전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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