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Taste Geschmack 味觉
취미는 첫째, 전문적인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유희이고 둘째, 아름다움을 판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첫 번째 취미(hobby)는 여가를 재미있게 보내기 위하여 선택한 놀이다. 취미의 어원은 작은 말인 당나귀라는 뜻의 중세 영어 hoby, hobyn이다. 그러니까 전문적인 승마를 위하여 큰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작은 나귀를 타는 유희라는 뜻이다. 두 번째 취미(Taste, Geschmack)는 미각에서 유래한 미적인 감각이자 일종의 취향이다. Taste의 어원은 ‘접촉하다’인 라틴어 taxāre이고 Geschmack의 어원은 ‘맛, 향기’를 의미하는 고대 독일어 smakkuz다. 그러니까 취미는 좋아하는 맛의 취향이라는 뜻이다. 분명한 것은 취미는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좋은 것인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취미판단은 개인적인 것인가, 집단적인 것인가?
로마시대의 속담에 ‘취미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다(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취미는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의 기호(嗜好)이므로 논할 수도 없고 논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가령 매운 맛의 파스타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면서 감정에 관한 특수한 기호다.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개인적인 취미는 성립할 뿐 아니라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서 취미는 주관적이다. 그런데 우표수집, 카드놀이 등은 개인의 취미를 넘어서는 집단의 취미다. 물론 어떤 사람이 개인적 취향에 따라 우표 수집을 취미로 삼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 역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우표 수집을 취미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개인적 취향의 집합은 보편과 객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취미는 객관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인의 특수한 취미는 집단의 보편적 취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칸트는 주관적 보편성(subjektive allgemeinheit)이라고 명명했다. 그렇다면 왜 취미가 생겼을까?
취미는 기쁘고 즐거운 느낌이다. 그래서 취미를 즐기면 만족하고 행복하다. 한편 취미는 일종의 유희다. 취미는 생존과 생산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만족과 쾌감을 위한 유희다. 가령, 전쟁터의 기마병에게 말 타는 것은 목숨 건 전투이므로 즐겁지 않다. 그러나 평화로운 초원의 청년에게 말 타는 것은 즐거운 유희다. 전자는 목숨 건 노동이고 후자는 즐거운 취미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말 타고 전쟁하지 않는다. 초원에서 말 타기도 어렵다. 그래서 말 타기는, 18세기에는 취미였지만 21세기에는 취미가 아니다. 이처럼 취미는 시대, 지역, 직업, 민족, 계급, 종교, 성별 등 삶의 조건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지역의 취미는 다른 지역에서 혐오일 수 있다. 그래서 시대취미, 민족취미, 지역취미, 계급취미와 같은 개념이 생겼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취미는 주체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취미가 널리 퍼지면 유행이 된다. 유행(trend)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행동, 양식, 사상, 감성이 널리 퍼지는 것이다. 유행에도 판단과 선택이 작용하지만 유행은 취미보다는 약하다. 하여간 취미, 취향, 유행에는 판단과 감각이 작용하여 성립하는 것은 분명하다. 원래 취미의 기원인 미각(味覺)은 신경계(nervous system)의 감각작용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뇌의 전기 작용에 따라서 쾌와 불쾌를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취미를 (쾌와 불쾌를 기준으로 하는) 미적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에는 이성적 판단, 도덕적 판단, 미적 판단이 있다. 이것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으로 정리했다. 이 세 판단 중에서 취미는 (감성적인) 미적 판단에 속한다. 가령 ‘나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 좋다’는 판단은 감성적이고 미적인 판단이다. 여기에 논리나 이성이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을 칸트는 무관심성으로 설명한다.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 無關心性)은 다른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 대상 자체만 판단해야 한다는 칸트의 미학 개념이다. 그런데 무관심성은 대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대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만약 파가니니(Nicoló Paganini)의 작품을 연주하여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개입하면 그것은 취미가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취미는 개인적인 것이면서 보편적인 것이다. 취미가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각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파가니니의 작품을 좋아한다. 공통감은 인식주체인 나와 타자가 서로 인정해야 성립한다. 이 상호주관성(Intersubjektivität, Intersubjectivity)은 개인들의 주관적 인식에서 공유하는 공통부분이다. 개인이 가진 주관성이 모이면 인정하고 인정받는 공통감각이 성립한다. 취미의 상호주관성은 미적 취향의 필연성(Notwendigkeit)을 가능케 한다. (김승환)
*참고문헌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21, p.318.
*참조 <감각충동[실러]>, <공통감[칸트]>, <무관심성[칸트]>, <미적 상태>, <미학교육[실러]>, <미학국가[실러]>, <유희충동>, <초월[칸트]>, <초월적 가상[칸트]>, <필연⦁우연>, <호모루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