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람과 한명회는 아주 절친한 사이다.
미천할 때부터 사귀어서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권람에게 젊은 여자종이 있었다. 태도와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워서 권람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이 무서워 감히 어찌 하지 못하고 한명회에게 상의하니,
한명회가 말하였다.
"거짓으로 마음의 병을 앓는 것처럼 하는 게 좋겠다."
권람이 한명희의 말처럼 했다.한명회가 밤중에 은밀하게
회화나무 꽃 삶은 물을 전해주며 온 몸에 발라 황달병에
걸린 것처럼 만들게 하였다. 며칠 후에 한명회가 병문안와서
울며 말하였다.
"내 벗은 죽겠구나. 맥박은 느리고 기운이 이렇게 약해서야
조석 간에 곧 쓰러지겠구나. 부인은 어찌 한 계집을 아껴
주인의 목숨을 살리지 않는가?"
그러자 권람의 부인이 알아차리고 드디어 길일을 택하여
종아이를 보내 남편을 살렸다.
이튿날 한명회가 다시 가니, 권람이 한다.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책략을 세워 중흥의 으뜸 공신이 되었다.
-<대동야승 해동잡록>에서-
권람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다.
권람은 남산 기슭 청학동에 살았다. 권람은 책을 지고
팔도의 명산고적을 찾아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명회와는 유람할 때 반드시 같이 다녔다.
그만큼 둘은 친한 사이였다.
그는 야심 많고 꾀 많은 한명회와 수양대군을
청학동 그의 집으로 초청해 둘을 이어줬다.
세조는 임금이 된 이후에도 이 청학동 집에 자주 둘러
그의 정자인 후조당(後凋堂)에서 놀고 그곳의 샘물을 즐겨 마셨다.
나중에 이 샘은 어정(御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집과 정자는 나중에 일제 초대통감 이토히로부미의 거처가 된다.
권람은 대학자 권근의 손자다.
그는 한명회를 끌어들이고 정사를 꾸몄던 수양대군의 좌장이었다.
그는 수양과 젊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다.
수양과 권람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은밀히 만나 거사를 모의하곤 했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단종애사>에서 수양과권람이 계유정란을 음모하는 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여보게, 자네가 나하고 맹약하려나?
나는 오직 자네를 믿으니 자네가 나를 도울라는가?“
그래도 권람은 말이 없었다.
수양대군은 다른 손으로 권람의 다른 손을 마저 잡으며
“왜 대답이 없는가? 내 인물이 부족하단 말인가?
또는 내 정성이 못 미쳐 그러함인가?“
수양의 사색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그제야 권람이 수양대군 앞에서 자리를 피하여 앉으며
“나으리께서 소인을 믿으신다면 인생이 감의기(感義氣)라니
소인이 견마지역을 다 하오리이다.“ 하였다.
소설 <단종애사>는 두 사람이 이날 밤
맹약을 시작으로 ‘계유정란’ 등 집권을 위한
구체적인 모의에 들어간 것으로 그리고 있다.
둘은 늘 상에 오른 국이 다 식어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이
머리 맞대고 모의했던 모양이다.수양대군의 하인들은 권람만 보면
"국물 식히는 서방님이 또 온다."고 수군대곤 했다고 한다.
뒤에 수양이 왕위에 오른 후 권람을 내전에 불러들여 술을 나누면서
정희왕후를 돌아보고 "이가 곧 옛날 국물 식히던 서방님이요"
라고 했다고 한다.
세조에게는 3대 권신(權臣)이 있다.
권람은 수양의 좌장이다.
수양대군에게 책사 한명회를 소개하고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세조가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운 한명회다.
장자방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세조는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한 신숙주다. 위징은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하는 충직한
신하다. 당태종은 위징이 죽자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을 잃었다.'
라고 하며 슬퍼했다.
권람 한명회, 신숙주는 단종에게는 역적이지만,
세조에게는 충직한 신하다.
권람은 죽어서 할아버지 권근 묘역에 묻혔다.
종묘 공신당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권람의 졸기다. 세조실록에서 일부 옮겼다.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람이 졸(卒)하였다.
부음이 들리니, 명하여 소선(素膳)을 올리게 하고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게 하였다.
일찍이 한명회와 망형교(忘形交)를 하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라 자처하고, 가인(家人)의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며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남아는 창[矛]을 드날리고 말을 달려서 변경 사이에서 공을 세우고
마땅히 만 권의 서적을 읽어서 불후(不朽)의 이름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처음에 권제가 첩(妾)에게 고혹하고 적처(嫡妻)를 소홀히 하므로
권람이 울면서 간(諫)하였더니, 권제가 때리려 하였으므로,
권람이 드디어 집을 작별하고 떠나 한명회와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경치가 좋은 곳을 모두 찾아보았다.권남이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병을 치료할 뜻이 있으니, 임금이 어찰(御扎)을 내려 말하기를,
“경이 나의 뜻과 서로 통하여 덕을 합하였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하늘이 실로 생역(生役)의 대임(大任)을 맡기었으니,
내가 경의 마음을 사랑함이 없고 경도 나의 마음을 사랑함이 없거나,
종사(宗社)의 공업으로써 말하더라도 경이 털끝만큼의 사사로움이 있었고
내가 털끝만큼의 욕심이 있었다면, 물불을 무릅쓰고 몸과 처자를 잊고서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드디어 화란(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오늘날에 있어, 경은 진실로 공업(功業)의 주인이니, 나는 매양 경이 병이 있어
다른 이들과 같이 자주 만나지 못함이 회포가 되었는데, 이제 경의 임천(林泉)의
뜻을 보니, 놀라고 탄식함을 그치지 못하겠다. 경은 어찌 천임(天任)을
면하려 하는가?” 하고, 얼마 있다가 우찬성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편전에 나아가, 세자를 어루만지며 군신(羣臣)에게 이르기를,
“이는 나의 보배이다.”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전하의 보배일 뿐만 아니라, 바로 국가의 보배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용상에서 내려와 사례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곧 안마(鞍馬)를 내려 주고,
우의정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만년에 미쳐 병 때문에 집에 나갔는데, 권남이 산업을 경영함에 자못 부지런하여,
일찍이 남산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제도(制度)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또 호사스러운
종이 방종하여 사족(士族)의 신분을 능가하니 참찬(參贊) 이승손(李承孫)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데에 이르렀어도 권람이 죄주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런 것을 기롱하였다.
시호(諡號)를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니,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을 익(翼)이라 하고,
능히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을 평(平)이라 한다.
권람에게는 딸이 있었다.
사위를 택하는 데 남이가 이에 응하니,
권람이 복자(卜者)에게 일러 남이의 사주를 보게 하였다.
남이의 사주를 본 복자는 "이 사람은 반드시 요절할 것이니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권람은 다시 자기 딸의 사주도 보게 하였다.
복자는 "따님은 그 명(命)이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겠으나
두 사람이 혼인을 하면 마땅히 복을 누릴 것이며 남이도
따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했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상이 남달랐고 담력이 뛰어났던 비범한 인물이었다.
당시 권람은 계유정란 때의 정난공신 1등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좌의정의 지위까지 오른 최고의 세도가였다. 그에게는 딸이 넷이었고
위로 세 딸은 시집을 가고 열여섯 살인 막내딸의 사윗감을 물색 중이었다.
하루는 정승인 한명회가 생일음식을 보내왔는데 막내딸이 그 음식 중에서
홍시를 먹고는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밖에서 하인이 들어오더니 문밖에 어떤 도령이 와서 돌아가신
아씨를 살려낼 수 있다고 한다고 전하였다.
권람은 반신반의 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어오게 했다.
들어 온 도령을 보니 체격이 좋고 인물이 잘 생긴 청년이었다.
이 도령이 딸의 방으로 들어가니 죽었던 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도령이 방에서 나오니 딸은 다시 죽는 것이었다.
권람은 도령에게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고
도령은 벽사축귀(사악함을 막고 귀신을 물리치는 것)하는 약을
지어오라고 이르고 죽은 딸의 몸을 손으로 주무르고는 지어
온 약을 먹여 살려냈다고 한다.
이 도령이 바로 남이였다.
권람은 부인과 의논한 끝에 죽었던 딸을 살려낸 은인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주를 보는 사람을 불러
남이의 사주를 보게 하니 신랑이 소년등과하여 병조판서까지 하겠으나
28세에는 죄를 뒤집어쓰고 옥사를 할 팔자라고 했다.
이어 신부의 사주를 보더니 어서 택일을 하고 혼례를 치르라고 했다.
신부의 수명이 신랑보다 짧기 때문에 생전에 남편 덕에
온갖 호강을 다 하다고 또한 팔자에 아들이 없으니 남편이
옥사를 해도 뒷걱정이 없으니 이 아니 좋으냐고 얘기한다.
권람은 어쨌든 죽다 살아난 딸이니 그것만도 감사히 여기고
남이와 결혼을 시킨다. 과연 그 예언대로 권람의 딸은 남이보다
2년 먼저 죽고 남이는 병조판서까지 지내고 28세에 역모의 혐의를
받고 옥사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