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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신라미술관)1
1.신라의 융성-신라(전57년-935년)는 7세기 중반 태종무열왕(재위654-661년)은 당과 외교로
정치제도와 복식을 받아들었다.통일전쟁을 시작해 백제는 660년.고구려는 668년에 멸망시
켰다. 676년 당나라도 물리쳐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문무왕(재위661-681년)은 여러 개혁
정치를 단행했다.결국 왕건(877-943년)이 세운 고려(918-1392년)에 항복하면서 신라도 멸
망하게 되었다.
2.통일전쟁의 완수-무열왕.문무왕대 통일전쟁을 완수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무렬왕은
김유신(595-673년)을 중용하며 왕권을 안정시켰다.백제는660년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
(재위641-660년)이 항복했다.백제 부흥군은 주류성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신라군에
패했다.문무왕8년(668년)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보장왕(재위642-668년)이 항복했다.
문무왕15년(675년)당나라 설인귀에게 대승을 거두었다.신라는 일통삼한을 이룩해 내었다.
문무왕 전쟁을 마무리하다-문무왕(재위661-681년)은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병부령을
역임하다가 태자가 되었다.또한 백제정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도 멸망시켰다.문무왕은 전쟁중에도 동궁을 설치하여 못도파고 화초도 심고 동물도 키워
국왕으로도 위세를 과시했다.북원소경.금관소경을 설치하고 하급관리를 늘렸으며 관리에
게 도장을 나누어주고 외사정을 두었다.
3.왕권의 강화-7세기 중반 마지막 성골인 28대 진덕여왕(재위647-654년)의 뒤를 이어 진골출신
인 29대 태종무열왕(재위654-661년)이 왕위에 오르는 시기였다.당에서 도입한 정치제도와 유
학의 확산에 왕권이 점차 강화되었다.왕직속기관인 집사부가 강화되고 화백기능은 축소되었
다.즉 귀족중심에서 왕 중심체제로 바뀌었다.9주5소경.9서당.10정의 군사조직을 왕경과 지방
에 배치했다.귀족세력 견제를 위해 녹읍은 폐지하고 봉록은 분배했다.
4.궁성과 왕궁을 정비하다-신라궁성은 월성이 중심이었다.문무왕은 월지.양궁.동궁을 새로짓고
기존의 궁궐도 수리했다.왕성의 신축도 할려고 했지만 의상대사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신문왕
(재위681-692년)은 수도를 달구벌(대구)로 옮기려 했지만 실행치 못했다.왕경과 주변을 정비
하였다.
5.지방제도를 확립하다-신라는 6세기초 주군제를 시행했다.신문왕5년(685년)전국을 9주를 설치
하고 도독을 파견했다.신라땅에 상주.양주.강주 백제땅은 웅주.전주.무주 고구려땅은 한주.삭주
명주로 나누었다.경주를 금경.대경으로 부르고 5소경 즉 중원경(충주).북원경(원주).금관경
(김해).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을 설치했다.소경에는 사신이라는 지방관을 보냈다.군사조직
은 경주(중앙군9서당).지방(10정)을 설치했다
6.국학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하다-신문왕2년(682년) 설치한 교육기관으로 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에 속했다.논어.효경.주역.문선 등을 가르치고 문학도 교육했다.나이는 15-30세.교육기간은
9년으로 유동적이었다.학문을 마치면 대나마(10관등).나마(11관등)를 주었다.진골보다 6두품 이하
의 사람이 많이 다녔다.이것도 모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7.왕권을 강화하다-신라는 골품을 중심으로 귀족적인 정치전통이 강하였다.집사부 중심의 행정체제
유교중심의 관료제도 실시로 더욱 왕권이 강화되었다.성덕왕(재위702-737년) 때가 황금기였다.
관료의 도리를 강조하고자 백관잠을 짓기도 하였다.8세기 전반부터 통일신라의 화려한 꽃을
피웠다.집사부는 최고국가행정관청으로 기밀을 담당했으며 백관잠은 성덕왕이 관리의 잘못을 경
계하고 교훈을 내리고자 지은 글을 말한다.
8.문화의 융성-왕릉은 당나라 능원제도를 받아들였고 평지에 사찰을 두고 금당앞에 2개의 탑을 두는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했다.석탑은 삼은사지 삼층탑과 불국사 석가탑으로 완성되었다.또한 부도와
비석도 많이 세워졌다.불교 조각도 당나라 양식을 더하여 비례가 잘맞는 독창적인 예술품을 만들
었다.공예역시 범종과 사리장엄구 등에서 높은 수준을 보였다.당외 고구려.백제의 것도 받아들여 새
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9.화장이 성행하다-통일신라시대에는 화장이 성행했다.최초의 화장은 7세기 자장율사 기록에 보인다.
문무왕(재위661-681년)도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내리면서 더욱 확산되었다.바다나 산천에 뿌리는
산골.땅에 묻은뒤 부도를 세우는 승탑.용기에 담아 땅에 묻는 화장묘 등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화장묘는 용기에 따라서 이중형과 단일형으로 구분된다.이중형 뼈항아리는 뼈를 담는 장골기.보호
하는 석관.석함.석혈.토기로 구분되었다.상류층은 도장무늬토기.연유도기가 사용되었다.
10.신라 천년역사를 마감하다-신라는 전57-935년까지 56대 992년 존속했던 나라이다.676년 한반도를
통일하고 8세기까지는 전성기를 누렸다.후반에 정쟁이 자주 일어났다.결국 9세기말 고구려.백제의
후손들이 다시 일어나 나라를 세웠다.바로 후삼국시대이다.
신라미술관(조감도)2
1실-신라의 건국과 성장.2실-황금의 나라 신라.3실-강력한 중앙집권 왕국.4실-신라의 융성과 멸망
신라미술관(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285호)3
울주 대곡리 태화강 강변 바위절벽에는 너비8m 높이2m 정도의 바위에 갖가지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고래.사슴.멧돼지 등이지만 특히 고래가 많이 표현되어 있는 바위는 찾기가 어렵다.사람들은 사냥하
거나 배를 타는 모습이 모이며 성기를 들어낸 모습도 보인다.이것으로 선사시대의 당시 사람들의 생
각과 사회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70만년전-(구석기문화)-(한반도 인류출현.뗀석기사용)-(안동 마애리.상주 신상리.대구 월성동유적)
전8000년전-2000년전(신석기문화)-(토기등장.간석기사용)-(경주 황성동.울진 후포리.울산 세죽리
김천 송죽리유적)
전2000년-1000년(청동기문화)-(청동기 문화보급.민무늬 토기사용.고인돌축조.논농사 시작)-(경주
충효동.경주 하서리.포항 초곡리.청도 진라리유적)
전400년-57년(진한)-(철기문화보급.한국식 동검등장)-(경주 조양동.경주 입실리.대구 평리동
영천 용전리유적)
(전57년)(신라건국)(101년)(월성축조)(356년)(내물왕즉위)(?-402년)(433년)(나제동맹)
(500년)(지증왕즉위)(437-514년)(502년)(우경실시 순장금지)(503년)(국호신라확정)(512년)(우산국병합)
(514년)(법흥왕즉위)(?-540년)(520년)(율령반포)(527년)(불교공인)(이차돈순교502혹은506-527년)
(532년)금관가야병합(540년)(진흥왕즉위)(534-576년)(553년)(한강유역점령)(562년)(대가야병합)
(569년)(황룡사창건)(579년)(진평왕즉위)(?-632년)(632년)(선덕여왕즉위)(?-647년)(634년)(분황사창건)
(648년)(나당동맹)(654년)(무열왕즉위)(604-661년)(645년)(황룡사목탑건립)(661년)(문무왕즉위)(626-681년)
(676년)(신라삼국통일)(679년)(월지완공)(681년)(신문왕즉위)(681년)(?-692년)(682년)(감은사창건)
(751년)(불국사창건)(771년)(성덕대왕신종완성)(828년)(장보고 청해진설치)(889년)(원종.애노의 난)
(918년)(고려건국)(927년)경순왕즉위(?-978년)(935년)(신라멸망)(936년)(고려 후삼국통일)(1170년)(무신정변)
(1270년)(삼별초대몽항쟁)(1392년)(고려멸망)(1392년)(조선건국)(1592년)(임진왜란)(1636년)(병자호란)
(1876년)(강화도조약)(1894년)(동학농민운동)
고조선(전2333년-후108년)고구려(전37-668년)백제(전18-660년)부여(후?-494년)가야(후42-562년)
신라(전57-676년)발해(698-926년)통일신라(676-935년)후백제(900-936년)후고구려(901-918년)
고려(918-1392년)조선(1392-1897년)대한제국(1897-1910년)대한민국(1945-현재)
구석기시대 유물(도구를 만들다)4
약4만년전부터 혼펠스.규질혈암(셰일).응회암같은 고운입자의 새로운 돌을
재료로 다듬어 만든 돌날(石刀)을,25000년전부터는 작은돌날(細石刀)을 사용했다.
신석기시대(신석기인은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5
사냥.고기잡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작살과
이음낚시를 사용해 고래.상어 등을 잡았고 조개체취.식물채집도 중요한 생계수단
이었다.농경의 시작은 큰 의미를 지닌다.괭이.낫 등의 논공구를 만드는 기술도 발
전했다.
청동기시대(농경사회로 들어서다)6
정착생활이 시작되어 큰 마을이 생겨났다.괭이.도끼 등으로 논밭을 일구며
벼.조.수수.콩.보리 등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대표농경 도구로는 반달돌칼
과 돌낫이 있다.또한 나무를 가공하는데 쓴 자귀.끌.대팻날 등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유물7
청동기시대의 대표무덤은 고인돌(支石墓)로 강력한 지도가 나타났음을 알려
준다.무덤에 넣은 청동검.큰간돌검.옥장신구와 집자리에서 발견되는 달도끼
나 별도끼 등은 지배자의 위세를 들어내는 상징품(위세품)이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15세기 무렵이다.민무늬토기.간석기.나무제품
등이 사용되었다.우리나라 고조선이 청동기 때 나타났다.신라를 건국했던 사
람들이 청동기 때 사람이었던 것이다.
경주 사라리 130호 널무덤.구어리1호 덧널무덤8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57년에 건국되었다.처음은 진한12개의 작은 나라 중의 하나로
사로국이었다.당시 고조선문화를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기록에 의하면 6촌이 힘을
합쳐 박혁거세(전57-후4년)를 왕으로 받들었으며 당시 왕의 칭호는 거서간이었다.거서간은 박혁
거세 때만 사용했으며 귀인을 뜻한다고 한다.
장신구를 걸치다9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의 위서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삼한은 금과 은이 아닌 옥을 재화와 보물로
삼아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사로국 무덤에서 나온 장신구는 모두
옥이다.사로국 초기에는 유리옥,나중엔 수정을 중심으로 마노.유리 등의 화려한 색상의 장신구
를 만들었다.옥은 모양에 따라 둥근옥.곱은옥.다면옥 등이 있다.
새모양 토기를 무덤속에 넣다10
3세기 중반 사로국을 중심으로 새모양 토기가 발견되었는데,모양은 오리모양이다.
머리에는 벼슬이 있는 것이 특징으로 형태는 주자이다.이것은 장례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위서 동이전 변진조에는 장례에 큰새의 깃털을 사용했는데,이는 죽
은이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새모양 토기 역시 죽어서
천상의 세계로 날아가고픈 당시 사람들의 바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기술로 토기를 빚다11
사로국 초기엔 민무늬토기 그후 새로운 와질토기가 만들어졌다.이것이 이사금시대의 대표적토기였다.
4세기가 가까워지자 경질토기가 등장했다.경질토기는 밀폐된 굴가마에서 1000도 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져 회청색을 띠며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정도로 매우 단단한 토기이다.
새로운 기술로 토기를 빚다12-1
새로운 기술로 토기를 빚다(큰토기)12-2
신라인 금을 사용하기 시작하다13
8세기에 편찬한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가리켜 눈부신 금과은 채색이 많은 나라 라고 했다.
금은 마립간시기(4-6세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마립간은 금관을 쓰고 금허리띠를 찼
으며 외에 반지.팔찌.목걸이.가슴걸이도 했다.4세기 중후반 경주무덤에서 목걸이.귀걸이.그
릇 등이 나온점으로 보아 4세기초부터 금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동금관(가장 오래된 금관)14
교동 한무덤에서 도굴되었다가 1972년 압수된 금관으로,작은 관태에 3개의 나뭇가지모양의
장식을 세웠다.이 장식은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산자모양의 나뭇가지와는 달리 사실적인 모
양을 하고 있다.또한 점무늬.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지금까지 발견된 6개의 신라금관(금관
총.금령총.서봉총.교동.천마총.황남대총 북분)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마립간시기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신라의 거대 무덤들은 모두 마립간이라는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의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 거대한 무덤들은 왕과 왕비.귀족들의 무덤들이다.금관은 신라의 표상이다.즉 신라는
금관의 나라이자 황금의 나라였다.
마립간은 17대 내물임금(재위356-402년)에서 22대 지증임금이 503년 왕으로 칭호를 바꿀 때
까지 사용되었다.마립간은 으뜸을 뜻하는 마립과 왕을 뜻하는 간.칸이 합쳐진 말로 우두머리
를 뜻한다.즉 왕중의 왕이라는 뜻이다.이 때의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투구(4세기 경주 사라리)15
말머리가리개(5세기 경주 사라리)16
금관총 금관이 처음 발견되다17
1921년 경주의 중심가 노서동에서 집을 짓다가 구슬을 발견했다.일경이 우연히 보았고
그곳에서 구슬이 나왔다.그 언덕이 바로 무덤이었다.이곳에서 신라의 금관이 처음으로
나왔기에 金冠塚이라고 명명했다.묻힌이는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금귀걸이.목걸이.금
제 허리띠.금팔찌.금반지 등을 차고 있었고머리위 부장궤속에는 그릇.장식품.말갖춤
무기 등이 나왔다.처음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나중 1923년 경주에 금관고를 지어 경
주로 돌아왔다.
새로운 구조의 무덤을 만들다(대릉원)18
경주시내의 큰 무덤들은 4세기 중반-6세기 중반까지 만들어졌다.돌무지덧널무덤으로
나무를 이용해 방처럼 네모난 덧널을 만들고 그안에 주검과 부장품을 넣고 덧널 둘레
와 위에 돌무지를 쌓아올린뒤에 흙으로 덮는 구조이다.황남대총.천마총.금관총이 모두
이런 무덤이다.그중 황남대총은 높이22m로 왕.왕비.귀족의 무덤으로 안에는 신라생산
품과 외국의 물품까지 어마어마한 양이 부장되었다.
왼쪽 아래단부터 천마총.99호.101호.102호.중간단 왼쪽부터 황남대총.97호.103호.105호
세번째단 왼쪽부터 90호.92호.93호.95호.105호옆 우측(전미추왕릉) 등으로 나열되었다.
황남대총은 쌍분으로 남북120m 동서80m로 높이 남분21.9m 북분22.9m이다.남분이 먼저
만들어졌다. 남분은 5세기의 마립간.북분은 부인으로 추정된다 즉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남분은 주곽과 부곽을 따로 만들었다.주곽은 부장궤로 구성되었고
북분은 주곽만 있고 부곽은 없다.특징은 마립간(왕)이 묻힌 남분에서 금관동이 나왔고 부
인이 묻힌 북분에는 금관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무덤속의 부장품19
마립간의 부장품20
황남대총은 당시 최고의 지배자인 마립간(왕)과 그의부인(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5세기 전반-중반 때의 마립간으로는 내물(재위356-402년).실성(재위4012-417년).눌지
마립간(재위417-458년) 등이 있다.이 중 한사람이 황남대총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마립간이었다면 금관을 쓰는 것이 마땅한데 황남대총 남분에는 금동관이 발견
되어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음식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다21
마립간을 위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큰 항아리 내부에는 동물뼈
조개껍데기가 들어있었다.뼈는 소.말.바다사자.닭.꿩 등인데 그 중 닭뼈가 가장 많았다.
물고기는 참돔.졸복.다랑어 등이 나왔고 돌무지와 주곽상부에서는 토기.금제장신구.철기
청동거울 등이 나왔고 남분주곽 안쪽에서는 치아와 두개골이 나왔기에 일부 젊은 여인이
순장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형형색색의 유리구슬22
신라인은 天河石이라는 푸른돌로 옥을 만들고 규사(석영)를 녹여 유리구슬을 만들었다.
유리색은 다채롭고 상감기법도 사용했는데 특히 유리구슬안에 사람얼굴을 포함해 여러
그림을 상감한 것도 있다.이는 신라가 먼곳까지 교역을 해 서역의 영향을 받은듯 하다.
청동으로 만든 그릇23
한반도 남부는 3세기를 전후해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청동세발솥이 등장한다.
지배자들은 낙랑을 통해 청동제품을 수입했으며 특히 지배자가 제사를 주관하면서
사용한 수입품을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4-5세기에는 고구려의 문물인 세발솥.자루
솥.합.다리미 등과 같은 청동그릇을 수입하거나 만들었다.청동으로 토기형태인 긴목
항아리 등도 만들었다.마립간은 청동을 매우 귀하게 여겨서 무덤에도 묻어주었다.
마립간을 지킨 칼과 창24
무덤에는 쇠로만든 무기류.농공구류 등을 넣었는데 모두 마립간을 위한 것이었다.
주곽에는 장식큰칼 넣었는데 손잡이와 칼집은 금.은.귀금속으로 장식되었다.부곽
에는 무기류.농공구류.경제력을 나타내는 덩이쇠 등을 넣었다.무기류(큰칼.쇠창
쇠화살촉)농공구류(삽날.쇠스랑).덩이쇠는 10의 배수단위로 묶어서 최소1330개를
넣었다.
전쟁으로 이웃나라들을 아우르다-삼국사기 이사금시기에 사로국의 이웃인 읍즙
벌국(안강).압독국(경산).감문국(김천)공격해서 병합한 기록들이 나왔다.
그 당시 철제무기들을 만들었고 전투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감옷도 만들었다.
금제관모 꾸미개.금동관모25
붉은색 천 관모는 전시 연출을 위해 제작한 것이며 당시의 색깔과 모양이 다를 수 있다.
신라의 황금문화26
일본서기(8세기)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의 나라로 기록했다.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에 대해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했으며,밥그릇
도 금으로 사용한다고 기록했다.황금문화는 5세기-6세기 전반까지 약150년간 전성
시기였다.지배층은 금관을 비롯해 허리띠.귀걸이.팔찌.반지.목걸이.장식대도 등에도
금을 사용했다.황금은 모두 왕족.귀족들의 권위를 과시했다.
금드리개 장식(금관에 드리개를 달았다)27
위에서부터 중심고리.노는고리.연결금구.샛장식.드림(제일 아랫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고리아래에 샛장식과 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샛장식은 동일한 장식을 여러개
만들고 끝에는 곡옥으로 드림을 만들었다.
상감유리구슬(보634호).유리잔28
상감유리구슬은 5세기의 것으로 경주 미추왕릉 C지구 4호무덤에서 발굴되었고
유리잔은 6세기의 것으로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것이다.
유리그릇은 지중해연안과 사산조페르시아에서 만들어져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9세기에는 또한 이슬람인들이 신라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괘릉
흥덕왕릉의 석상이 이국적인 용모이다.
장식 보검29
5세기의 것으로 계림로 14호무덤에서 발굴된 것으로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바닥 중간에서 나왔다.원래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었지만 썩어 없어졌다.
14호 무덤에서 발굴된 장식보검은 카자흐스탄의 보로보 유적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하다.
천마총을 발굴하다30
1973년 천마총을 발굴했다.봉분지름(47m).높이(13m)로 봉분 윗부분을 약7m정도 걷어내니
지름(23m).높이(6m)의 돌무지가 나왔다.그아래 덧널에 부장궤에 금관.금귀걸이.가슴걸이
허리띠.장식대 등을 착용한 채로 묻혀있엇다.부장궤에서 말다래(장니)가 나왔는데 그중에
흰말이 그려져 있었다.1500년전의 그림을 기념해서 천마총으로 불렀다.
큰무덤에는 금귀걸이가 나왔는데,이것은 당시 상류층의 신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다.
고리에 굵기에 따라 굵은고리 귀걸이.가는고리 귀걸이 등으로 나누었다.작은 금알갱이를 붙
이는 누금기술도 발달하였다.위에서부터 중심고리.노는고리.연결금구.샛장식.드림으로 구성
되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318호)31
이 비는 재물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을 담고있다.과거 모단벌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진상을 조사하여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향후 재론을 못하게 하였다.501년 지증왕 2년의 일이다.
가장 오래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보다 2년 앞선 것이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264호)32
지증왕 4년(503년) 진이마촌에 사는 절거리.미추.사신지 등이 재물을 둘러싸고 다툰 소송에
대한 평결을 담고 있다.지도로 갈문왕 등 7명의 왕은 선대 2왕의 교시를 증거로 하여 진이마
촌의 어떤 재물을 절거리의 소유라고 결정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242호)33
법흥왕 11년(524년)에 건립된 이 비는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죄를 지은
거벌모라 남미지촌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배자들에게는 곤장60대와 100대씩 때릴것을 판결한 것이다.
이차돈 순교비(異次頓殉敎碑)(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출토)34
고구려.백제는 370년대 불교가 공인되었고 신라는 법흥왕(514-540년)15년(528년)에 불교를
공인했다.이차돈(502또는 506-527년)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
에 사인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난 박염촉의 순교가 묘사되어 있다.박염촉과 이차돈은 같은
사람이다.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의 머리는 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
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헌덕왕(재위809-826년)9년(817년)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삼국유사에 보면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라고 했다
이 내용은 흥인군신각 김생서 원화첩에 관련 내용이 실려있다.
신라 불교를 받아들이다-처음 국가의 대표적인 종교가 없었다.그래서 왕실은 귀족과 백성에게
부처의 신앙을 강조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루고 더불어 왕과 왕족을 신격화 하고자 하였다.
처음엔 보수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528년 법흥왕(재위514-540년)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했다.534년 법흥왕은 신성시하던 천경림숲을 걷어내고 최초의 사찰인 흥륜
사를 짓기 시작했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다(6세기중엽)35
법흥왕(재위514-540년)이 불교를 도입하면서부터 장례가 간소화되었고 왕릉도 나지막한
구릉에 만들어졌다.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의 크기가 작아졌고 부장품의 양도 줄었다.
순장을 금지하고 흙인형으로 대신했다.무덤구조는 출입시설이 달린 돌방무덤으로 바뀌었
고 추가장이 가능해져 나중에 죽은 가족들도 같은 무덤에 묻힐 수가 있었다.
황룡사37
진흥왕 553년(14년)에 월성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황룡사를 지었다.
착공한지 17년이 지난 569년에 완공하였으며 574년에 금당에 본존불로 거대한 금동장륙존상을 모셨다.
황룡사는 나라를 지키는 대가람으로 왕이 100명의 고승을 모셔 법회를 열어서 설법을 듣던 장소였다.19
76년 발굴을 시작해서 4만여점의 문화재를 발굴했다.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다-528년 법흥왕(재위514-540년)이 불교를 공인한뒤 진흥왕(540-576년)과 선
덕여왕((재위632-647년)은 왕경 안에 큰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왔다.544년 진흥왕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
를 10년만에 완공했다.553년 황룡사를 짓기 시작하여 566년 완공했다.574년에는 장육존상아라는 큰 불상을
만들었다.선덕여왕은 황룡사옆에 향기나는 절이라는 분황사를 지었다.643년에는 황룡사9층목탑 건설도
추진했다.
황룡사에 9층목탑을 건설하여 대왕의 꿈을 담다-643년 당의 유학후 자장법사는 선덕여왕(재위632-647년)
에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 했다.이 탑을 세우면 고구려와 백제가 항복하고 주변 9나라가 와서
조공을 할 것이며 여왕의 앞길이 편안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왕은 백제에 요청해 아비지를 불러왔고 김용춘
에게 장인을 이끌어 돕게 했다.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던 탑으로 높이가 80여m에 이르렀다.6차례에 고치고
보강해서 고려시대까지 남았으나 1238년 원나라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골품으로 신분질서를 정하다38
왕과 왕족은 골(骨)의 신분이 지방에서 올라온 수장은 두(頭)의 신분이 되었다.골품제는
법흥왕(재위514-540년)에 이르러 17관등제로 되었다.혼인은 같은 신분끼리하는 것이 원
칙이었다.신분에 따라 관직의 등급이 제한되었으며 옷색깔.집크기 등도 달랐다.신라 최고
신분인 골은 나라의 주요한 직책을 독점했으며 또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일통삼한(삼국통일)의 초석39
지증왕(재위500-514년)과 법흥왕(재위514-540년)이 중앙집권토대를 다졌고 진흥왕(재위540-576년)은
영토를 넓혔다.551년 연호를 나라를 연다는 開國으로 바꾸고 한강유역을 공격하고 고구려10개군을 차지
했다.진흥왕은 단양 적성에 비를 세워 신라를 돕다가 사망한 촌락민을 위로했다.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화랑도를 개편해 인재를 양성했다.또한 서해안 당황성을 통해 중국과 외교도 강화 했다.그래서 일통삼한
의 초석을 마련했다.555년 下州(창녕)를 설치하였고,그후 6년뒤 직접 기념비도 세웠고 또한 568년 크게
번창한다는 뜻의 太昌으로 연호를 바꾸었다.영토확장을 자축하고자 巡狩에 나섰다.
대가야를 정벌하다-신라는 한강을 되찾으려는 백제 성왕((재위523-554년)의 공격을 받았다. 이 때에는
대가야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신라와 백제는 관산성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때 성왕을 사
로잡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그후 8년뒤 562년 진흥왕(재위540-576년)은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그후 신라는 영남지역 모두를 차지하게 되었다.
화랑 사다함은 진흥왕(재위540-576년)이 이사부로 하여금 대가야를 공격할 때 전쟁에 나가기를 원했다.
나이가 어려 허락을 하지 않았으나 계속 요청하자 귀당 비장에 임명하였다.그 따라 나선 낭도들도 많았
다.처음 전단량으로 처들어 갔다.대가야는 마침내 항복하였다.공으로 포로 300명을 주었으나 모두 풀어
주었다.땅도 주었으나 사양하면서 불모지만 겨우 받았다.사다함은 당시 무관랑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했는데 그가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만에 죽었으니 나이가 그 때 겨우 17세였다.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편)
화랑도를 육성하여 나라의 기틀을 삼다-진흥왕은 화랑도를 만들었다.화랑도는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졌
다.진골출신의 귀족자제가 화랑이 되고 수백 수천의 낭도를 거느렸다.그는 심신단련과 학문을 배우고 익
혔다.원광법사는 귀산貴山.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쳤다.이것은 화랑의 덕목으로 임신서기석에
새겨진 두 청년의 다짐속에 잘 나타나 있다.나중에 화랑은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삼국통일에 기여했다.
고선사 서당화상비40
불교의 대중화와 교리발전에 힘을 쓴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이다.
高仙寺는 원효가 말년에 머문 절이고 誓幢은 원효대사의 어릴 때 이름이다.
대사의 손자 薛仲嶪은 779-780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뒤 할아버지를 추
모하기 위하여 당시 권력자인 金彦昇의 후원을 받아 이 비를 건립했다.비의
건립연대는 애장왕(재위800-808년)대로 추정된다.원효대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원효대사 진영41
14-16세기 일본 교토(경도) 고산사(高山寺)에 소장된 복제품이다.
첨성대42
첨성대는 높이(9.17m).밑지름(4.93m).윗지름(2.85m)로 360개의 돌로 모두31단을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위는 상방하원의 형태이다.첨성대는 선덕여왕(재위632-647년) 때 만든 것으
로 무슨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문무왕비편(통일신라 682년 혹은 687년.경주 동부동)43
조선후기 이계 홍양호와 추사 김정희의 문집에 문무왕비편이 발견됨이 기록되어 있다.
탑본이 처으이 금석학자 유희해에게 전해져 해동금석원에 수록되었다.하단은 1961년
상단은 2009년 동부동에서 다시 발견되었다.비석의 받침돌은 낭산 사천왕사지의 것으
로 추정된다.
사자상(통일신라 경주교동)44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위엄을 나타낸다.처음 어디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발견된 곳이 교동이기 때문에 신라 궁성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촌양교
월정교터에서도 사자상이 발견되었다.
구정동 남쪽 구릉 말단에 돌방무덤이 하나 있다.왕으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모서리에
사각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 서역의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새김으로 조각
되어 있다.무인은 왕의 무덤을 지키는 모습이다.
모서리기둥(우주석)(9-10세기.구정동)45
권력은 왕릉에서 나온다(성덕왕릉-사28호.흥덕왕릉-사30호)46
경순왕 초상화(1904년 崇惠殿 기탁)47
이 초상화는 1904년 화승 이진춘이
해인사본을 본떠 그린 것이다.부분적으로 불화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고운 최치원을 추모하다48
숲 사이에 갓과 신을 벗어놓고 아득히 떠났으니
(林間冠履去茫茫)
누가 알랴 유선이 본디 죽지 않았음을
(誰識儒仙本不亡)
흐르는 물로 산을 에워싸리라 읊은 시는 먼 옛날 일이나
(流水籠山吟已遠)
바람과 구름이 아직껏 독서당을 보살피네
(風雲猶護讀書堂)
(정극인의 불우헌집에서)
서악동 돌방무덤의 신장상49
앞뒤로 신장상이 새겨져 있는데,신체비율이 조화롭고 의복과 지물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기와편50
좌측아래 마로관명 암키와.우측아래 수성명 수키와.송악명 암키와 등이다.
(2018.05.23)
첫댓글 디녀 감
이제 날짜를 넣었구나 수고가 많네. 우리 문화재가 아름답고 우수한데 이를 잘 보관하지 못한 점이 아쉽도다. 일제 강점기 전란 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