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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번의 이사와 세 번의 해체 그리고 남은 한 번
머지않아 2학기 동안 랭귀지 코스로 와서 머문 이 학교의 기숙사를 떠나야 한다. 나이도 있고 일자무식으로 공부를 시작한 탓에 수업을 따라가느라 늘 헐레벌떡 거리다 보니 사람들은 전혀 사귀지 못했지만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최소한으로 갖추었다. 무엇보다 이곳 기숙사에서 식사를 제공해주지 않으므로 필요할 때 마다 식사도구와 반찬 그릇 등등을 구입한 것들과 친구들이 보내준 것들이 상당하다.
처음에는 큰 물건들을 대충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귀국할 때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학기가 끝날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두고 가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몇 몇 학생들과 관리인 그리고 선생님들께 책과 옷을 제하고 난 나머지 모두를 선물로 드리기로 하였다.
어차피 나누는 것, 떠나기 직전에 드리는 것보다 미리 나누기로 하고 하나씩 둘씩 해체를 시작하였다. 해체를 시작하니 마음이 더욱 차분해지고 이곳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샘솟는다.
해체가 주는 자유와 평화가 가슴에 가득하다.
남은 기간 동안 공부에 몰입하다가 처음에 올 때 가져온 것들만 데리고 가뿐하게 돌아갈 것이다.
‘100번의 이사’라는 말은 과장이고 85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40 여 번이 넘는 이사를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집을 구하는 동안 보따리를 싸들고 보름이나 열흘 정도 게스트 룸이나 친척집에서 머문 것도 포함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을 살지 모르지만 보따리를 들고 자주 옮겨 다닐 것 같아서 ‘100번의 이사’라는 말을 감히 써보았다.
처음 서울 살이에 방을 잘못 구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머물 곳이 없어서 아는 집에 머물다가 값싼 하숙집에 들어간 것이 나의 이사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한 달을 기다렸다가 들어간 집이 가자마자 팔리게 되어서 한 달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 다음에 얻은 집의 방이 문은 있지만 창문이 없어서 자고 나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개월 만에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 다음 이사를 간 집에서는 몇 개월이 지난 후 아들이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어 방을 비워주어야 했었다. 그리고 몇 번의 짐을 싸고 푸는 이사를 거쳐서 하남시와 맞붙어 있는 서울 변두리의 ‘은퇴 여교역자의 집’에 책임자로 갔는데 거기서도 생각 밖의 이사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양관 건물이 너무 낡아서 새 집을 짓기로 결정을 하는 바람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대 살림을 정리해서 서대문 쪽으로 이사를 갔다. 서대문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서 4,5개월 머물고 이듬해 구정을 며칠 앞두고 어르신들을 모시고 새 집으로 이사를 왔다.
어르신들이 1층에 거주하고 우리는 반 지하층에 살게 되었는데 겨울에 급하게 집을 지어서 봄에 해동이 되며 건물 바닥과 벽에서 물이 스며 나오고 쏟아져 나와서 지하층이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계속 스며 나와서 살 수가 없어서 대충 가구를 정리해서 1층으로 이사를 올라왔고 솜이불과 요, 베개 등등은 그야말로 다 해체를 해야 했다. 1층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몇 개월 동안 머물렀고 수리를 마친 후에 다시 아래로 이사를 왔다.
지금까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크고 작은 이사를 한 것을 대충 헤아려 보니 삼십년 사이에 40여 번이 넘는다.
앞으로도 한 자리에 편안하게 사는 인생이 못 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내 사주팔자가 100번 이사를 다녀야할 팔자라고 해서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이 무슨 이사냐!"고 일축을 했는데
어쩌면 그의 말이 맞아 떨어져서 100번을 채울지도 모르겠다.
세 번의 살림 해체는 문자 그대로 나의 무식과 용감, 믿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의 첫 번째 살림 해체는 꿈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꿈을 꾸고 난 뒤에 그 꿈을 엄청난 메시지로 이해를 하고 외국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다국적 회사의 주재원들은 외국으로 나갈 때 회사가 살림을 그대로 옮겨주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도, 필요도 없으므로 에 변변하지 않은 살림을을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그대로 해체를 하였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각자의 여행 가방에 챙기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책과 겨울옷은 고향 집으로 보내고 장롱과 냉장고, TV, 전축, 주방용품 등등 모든 것들을 원하는 분들에게 다 주었다.
십 여 년의 살림을 해체하면서 그래도 손 때가 묻은 정든 물건들을 간직하고 싶었지만 정리해 놓고 갈 집이 없어서 미련 없이 떠나 보냈다. 살림을 해체하고 나자 시원섭섭하였고 한 편으로는 은근히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생각했던 일정대로 떠났으면 해체의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몇 몇문제가 발생하여 출발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어느 집에서 한 달을 머물기로 했는데 우연히 누군가의 입에서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고 우리는 그 날로 보따리를 싸서 나왔다. 그리고 어느 사무실 옆에 붙어 있는 방을 빌리게 되었고 거기서 2,3개월을 머물면서 난민의 심정이 되었다. 식수와 삼시 세끼를 먹는 문제에 날마다 직면해서 풍요 속의 빈곤의 의미를 뼈에 저리도록 느끼며 속울음을 많이 울어야 했다.
무식하고 용감하게 떠남을 결정한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북에서 남으로 가는 대장정의 이사를 하였다.
뉴델리에서 1년 반을 머물고 난 후에 남인도로 가게 되어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장장 2박 3일을 걸려서 내려갔는데 집을 주기로 한 사람이 집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당장 이삿짐을 풀 수가 없었다. '집을 마련하려면 한 달 정도 걸린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아는 분께 연락을 해서 임시로 짐을 풀 수 있는 집을 거기서 600여 Km나 떨어져 있는 첸나이에 구하였다. 첸나이에서 급하게 집을 찾은 것이 해변에 가까운 집이었다. 가까스로 이삿짐을 풀고 나서 보니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맛이 짰다. 그러나 대이동의 고통을 겪은 후라서 이삿짐을 풀수 있는 집을 빨리 찾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여 감사를 드렸다.
데칸고원의 작은 도시로 가기로 한 짐이 어처구니없게 첸나이로 오게되면서 나는 떠돌이로 사는 운명이 되었고 다양한 연고와 사연으로 이사를 다니며 나그네 설움과 고통을 톡톡히 맛보았다.
두 번째 해체는 나 자신과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였다.
수저 하나 챙기지 않고 들어와 인도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살림을 구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인도는 우리와 음식문화가 달라서인지 우리 음식에 맞는 그릇을 찾기 힘들었다. 바가지, 국자, 밥솥, 바구니, 책상과 의자는 물론이고 쇼파도 마찬가지 였다. 돈이 있어도 원하는 물건,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참 힘들어서 얼추 필요한 것을 찾는데 참으로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재원들이 물건을 판다고 하면 찾아가서 냉장고, 탁자, 도마, 쓰레받기, 빗자루, 그릇, 쟁반, 전기스탠드 등을 한 개씩 샀다. 한 번은 가까운 이웃에 사는 분이 물건을 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인도인들이 일찍 와서 좋은 물건을 다 사갔고 별로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도 내 눈에는 좋은 그릇과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서 포기를 하였다.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중고 물건을 새 물건의 두, 세배 가격에 파는 행위를 뉴델리에서 목격을 하였는데 첸나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물건을 팔면 한국에 가서 새것을 사고도 돈이 남는다고 하였다.
헌 물건을 팔아서 새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한껏 이용하는 사람들의 작은 욕심이 슬펐다.
물건을 살 생각을 접고 돌아 나오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다.
“저는 떠날 때 하나도 팔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 이웃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빨리 떠날 날이 올 줄 몰랐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일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들을 분별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의심과 불안도 극복해야 했다. 결국 많은 기도와 생각 끝에 결단을 내렸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 대로 중고 자동차를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인도 형제들과 한국인 형제에게 주었다. 그러나 한국에 가서 기초 가전제품을 살 돈이 필요하였으므로 자동차와 가전제품 일체를 받은 분에게 얼마를 생각해주라고 하였다.
당시 인도산 도요다 중고 짚이 1,200만 원 정도 였고 나는 그것을 구입한지 8개월 만에 떠나왔으므로 그 형제에게 2백만원이나 3백만원 정도 돈을 받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오니 동생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고스란히 놓고 간 가전제품들이 있어서 그 돈을 받은 것이 내 인간의 생각이었음을 고백하며 온전히 주지 못하고 왔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어째튼 인도에 송곳 하나 남기지 않고 왔으므로 온갖 물건과 차를 관리하는 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를 하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여지와 기대 속에서 한국 생활을 치열하게 살수 있었다.
세 번째 해체는 처음에는 시간과 비용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공부와 훈련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두 번째 인도로 갈 때는 인도의 물자 부족을 알기 때문에 기초가 되는 전기밥솥, 밥그릇과 수저, 컵 등을 챙겼다. 그러나 나머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서 하나씩 구입하는 지난한 세월을 거쳐야 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살림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는 첸나이에서 700km 떨어진 농촌지역에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복지관을 세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청을 받아들여서 건물을 짓기로 하였는데 건축과정을 감독하며 관리할 한국인 일꾼이 거처할 집이 문제였다. 그 가족을 위해서 집을 전세 내고 바로 생활이 가능하도록 가구와 가전제품을 구해야 하는데 시간도 비용도 다 부족하였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내 살림 일체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집을 구하고 트럭을 세내어 이삿짐을 옮겨서 누가 오든지 간에 바로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5,6년 사이에 모은 내 살림이 한국 형제들이 머무는 집의 공동 기물이 되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기 어려운 인도에서 내 손 때가 묻은 물건들이 지금 모두의 것으로 존재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써비스를 제공하고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그 뒤로부터 인도를 다시 떠나오는 날까지 나는 살림이 없는 사람으로, 어쩔 수 없이 쎈타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마지막 남은 한 번의 해체는 죽음이 주는 해체이다. 나는 남은 한 번의 해체를 통해서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 죽음을 주는 완전한 해체를 사모하며 노욕에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 대망과 세상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살아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싶다. 감사와 감동으로, 경이와 전율로, 기대와 기도로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경계에서 산 자의 춤, 죽은 자의 춤을 유연하게 추면서 무대에서 떠날 것이다.
40 여 번의 이사와 3번의 살림 해체는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고 믿으며 거듭나게 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않는다는 사실, 왔다가 반드시 떠나게 된다는 사실은 나로하여금 인생을 관조하게 만들고 세상에 대하여 죽게 만들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성공, 세상의 능력, 세상의 자랑,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만들었다.
해체를 경험하였고 해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이며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고 아부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그대로 믿게 만들어 주었다. (고린도후서 6:10-11)
모든 물건과 물질은 올 때가 있고 갈 때가 있으며 순리에 따라 가고 오는 것이므로 올 때 감사하며 겸손히 바르게 사용하고 언제든지 떠날 때 떠나게 하고 올 때 오게 하는 것이 지혜요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하나님은 진실로 선하게 열망하는 자녀와 일꾼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며 자신을 믿고 모험하며 도전하는 일꾼들을 책임져주시고 일꾼들이 자기의 이익과 필요를 챙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손수 챙겨주심을 무시로 체험하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는 영혼을 물화시키지만 지혜로운 자는 물질로 사람의 영혼을 사며 결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자기에게 온 물질은 하나님께 잠시 위탁해 놓은 것으로 공유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누군가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임 또한 깨달았으며 내게 오는 모든 것을 공유하려는 치열한 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경험, 가난으로 풍요해지는 은혜, 고난 중에 오는 평화를 맛보게 해준 40여 번의 이사와 3번의 살림 해체는 나를 나 되게 만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다.
눈물과 고통과 한숨, 그 많은 고뇌와 좌절의 젊은 날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바닥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감사와 경이, 기다림과 기대로 살았던 날들의 기억이 참으로 신선하고 지금도 나에게 새로운 영감과 감동을 준다.
해체의 비움은 아름답다!
불안과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으나 해체는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이끈다.
해체를 통해서 경험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섬세하고 놀랍고 신비한 손길에 지금도 가슴에 벅차다.
2017.11.22.수
우담 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