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헐리우드는 1943년 4월에 일어난 바르샤바 게토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에 선전했다. 비무장 상태인 유대인 게토를 독일군이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살아남은 유대인은 강제수용소의 가스실로 끌고가 살해했다는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가 이런 식으로 선전하는 대표작이다. 실화를 가장한 사기극인 위의 영화에서 유대인 감독들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탑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바르샤바 봉기 기념탑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본 세계인들은 유대인의 선전을 사실로 믿었다. 어쩌면 브란트 수상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런 제스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따진다면 브란트 수상이 사죄할 일은 아니었다.
유대인의 선전과는 달리 독일군이 유대인의 무장봉기를 진압한 것이 이 사건의 실상이다. 전쟁 중인 독일이 무장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전투원의 피해가 컸던 것을 이유로 독일군을 탓할 수도 없다. 유대인 전투원들이 제복을 입지 않아서 비전투원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군복을 입지 않고 전투행위에 나서면 빨치산이나 폭도로 간주되어 국제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무장도 빈약한 유대인들의 결사 항전은 용기라기보다 광기에 가까웠다. 태평양전쟁에서 막다른 처지에 몰린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하고 집단 자살이나 다름없는 만세돌격을 감행한 것과 흡사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폴란드의 유대인은 1931년에 2,732,600명이었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로 110만 정도의 유대인이 독일 치하로 들어왔다. 독일은 안보상의 이유로 유대인을 게토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독일의 적이라고 선언한 유대인을 적국 시민으로 간주하여 전쟁 중 구금한 것은 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국과 캐나다도 태평양전쟁 기간에 자국 내 일본계 시민을 강제수용소에 수감했다. 독일이 전쟁 초기에 유대인을 게토에 수용하고 1942년 7월 이후 강제수용소에 수감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바르샤바 게토에 유대인 40만이 수용되었고 나머지는 폴란드 주요 도시에 설치된 게토에 분산 수용되었다. 게토는 유대인 자치 기구에 의해 운영되었고 치안도 자체적으로 유대인 경찰이 담당했다. 독일은 게토 안에서만 쓸 수 있는 화폐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게토의 목적이 유대인을 비좁은 공간으로 몰아넣어 굶겨죽이는 것이었다고 선전한다.
1942년 친위대 총감 히믈러는 노동인력 확보를 위해 게토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1942년 7월부터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은 유대인 경찰의 통솔 아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게토의 극렬분자들은 독일이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학살한다는 연합군의 선전을 믿었다. 그들은 강제수용소로의 이송은 도착 즉시 가스실 행이라며 동족들을 반란에 끌어들였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폴란드 지하저항군과 폴란드 공산당의 지원 아래 수개월 동안 소총과 권총, 수류탄 등의 무기를 밀반입하며 봉기를 준비했다.
7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바르샤바 게토에 남아 있던 1943년 4월 18일 최초의 총격이 일어났고 19일부터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이 반란 진압을 위해 게토에 진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주간에 걸친 전투로 독일군 사상자는 101명에 그쳤으나 유대인 반군 및 민간인 사상자는 1만 2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사상자가 많았던 이유는 강제수용소 이송은 죽음을 뜻한다는 맹신으로 진압군의 투항 권고를 거부하고 불타는 건물에서 옥쇄했기 때문이다. 5월 중순 저항군 핵심 세력이 제압되자 5만 6천명의 유대인이 투항했다. 이들은 트레블린카 등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군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
가장 유명한 이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선전되었다.
체포된 저항군
여자 저항군
압송되는 유대인
- 영화 피아니스트 -
총살
폐허로 변한 바르샤바 게토
- 영화 쉰들러 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