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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일 (2019. 11. 02 토) 바간 → 만달레이
< 오늘도 다행히 잊지 않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호텔 옥상에서 아침을 먹었다. 겨우 이층 옥상인데 눈 아래는 거의 정글 수준의 나무가 눈 닿는 곳까지 깔려 마음이 싱그럽다. 새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하니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그런 대로 괜찮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투명한 공기 틈으로 햇살이 빈틈없이 스며든다. >
오늘의 일정은 어제 예약해둔 택시로 쉐지곤 제디, 술레마니 퍼야, 담마양지 퍼야를 관광하는 것인데 내일이 바간을 떠나는 날이기에 오늘은 어디서건 그 유명한 바간의 일몰을 기필코 보아야 한다. 높은 퍼야에 올라 가는 것이 금지되어 우리는 정말 좋은 경관 구경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환전부터 해야 했다.
< 벽시계를 보니 8시 2분 정도가 되었네. 8시에 호텔서 출발했으니 더위를 피해 일찍도 나섰다. 옆 칠판을 보면 팔 때는 100달러(1,520짯)와 1달러(1,300짯)의 환율이 220짯 차이가 난다. 그러나 살 때는 모든 달러는 1,530짯으로 차이가 없다. 심지어 화폐가 더러우면 값을 깎기도 하니 100달러짜리는 감히 반으로 접지도 못한다. >
내일 몽유와로 가야하니 미리 버스 정류소로 가서 표를 사야 했다. 내일 아침 8시 차로 1인 6,500짯이라 한다. 환전 후 쉐지곤 제디를 향해 출발했다. 미얀마의 탑은 ‘퍼야’와 ‘제디’ 두 가지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퍼야’는 탑이 사원형식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제디’는 사리탑 형식으로 되어 있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중에서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제디 양식은 쉐지곤 제디로 바간 왕조의 시조인 아나우라타 왕이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짠지타 왕 때 완공되었다. 탑 내부에는 아나우라타 왕 때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치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기단부는 사각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는 종 모양인데 꼭대기는 우산을 씌어놓은 형상이다. 바닥에서 황금 돔까지의 탑의 높이는 98m로 상당한 규모인데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쉐’는 황금이니 탑에는 60톤의 순금이 도배되어 있다. 쉐지곤은 ‘황금 모래언덕’이라는 뜻이다.
< 붉은 간판에 ‘SHWE ZIGON ZEDI’라 적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ZEDI’도 ‘PAYA’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사자상은 우리나라 절 문 앞을 지키는 사천왕상처럼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는 듯하다. >
금빛 종모양의 제디는 스리랑카의 캔디의 불치사의 파고다를 본떠 만든 것으로 인도로부터 받은 불치를 흰 코끼리 등에 싣고 사방으로 출발해 이 코끼리들이 멈춘 곳에 각각의 불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바간의 3,822의 파고다 중 상당히 역사적 의미를 가진 파고다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 정오되기 전에 이 네 개의 자매 탑을 다 예불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쉐지곤 제디는 아나우라타(Anawrahta) 왕이 민간에서 전해지던 많은 ‘낫(Nat)’을 정리한 37명의 ‘낫’(전통의 민간 신앙으로 사람 모양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을 모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낫이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의 나타(natha)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수호자라는 의미이다. 11세기에 아나우라타 왕이 상좌불교를 도입하면서 낫 신앙을 없애고자 했지만 사람들은 몰래 낫을 모셨다. 하는 수 없이 왕은 기존의 낫들을 36낫으로 정리하고 이들을 관장하는 낫들의 왕인 타기아민(Thagyamin)을 만들었다고 한다. 타기아민은 일 년에 한 번씩 선행을 하는 사람의 이름을 금 책에 기록하고 악행을 하는 사람의 이름은 개 가죽 책에 기록한다고 한다.
오늘날 낫 신앙의 고향은 바간 남쪽에 있는 뽀빠산이다. 낫의 색깔은 빨간색과 하얀색이라서 사람들은 운전할 때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에 흰색과 빨간색의 천을 묶어서 안전 운행을 기원한다. 사람들은 이 낫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무서워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것은 그 영(靈)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빙의(憑依)되는 것을 말하는데 불교 신자들은 거짓말, 살인, 도둑질, 강간, 술이나 약물 중독 이 다섯 가지만 피하면 낫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아마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이 착한가 보다. 이번 여행 온 사람들은 모두 술을 잘 마시니 낫이 몸에 들어올 기회는 있는 셈이다.
< 탑 주변에는 동물형상이 있는데 이것은 각각의 띠 동물을 의미한다. 미얀마의 띠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이들은 월화수목금토일의 요일별 띠를 가지게 되는데 연도와는 상관없이 월요일에 태어나면 무조건 호랑이 띠, 화요일은 사자 띠‘ 수요일은 코끼리 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자나 코끼리 띠가 없는데 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다만 이 띠로 궁합 같은 것을 보는 것은 비슷하다 할까?>
<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 같은데 전통 형식의 치마 교복과 웃옷 색깔을 분홍과 빨강으로 통일한 것이 재미있는데 붉은 옷 입은 애들과 분홍 옷을 입은 애들의 치마 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두 학년이 온 것 같다. 얼굴로 판단컨대 붉은 색 고학년이 15명이고 분홍색 저학년이 26명이니 저학년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미얀마 여성교육의 미래는 성장 중이다. >
이들을 자세히 보면 안경 쓴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경우 반 이상 렌즈나 안경을 착용하니 안경 쓸 만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 아이들이 부럽다. 그래도 등수는 있을 것이고 그에 맞게 이들은 취직하고 사회에도 진출하겠지. 하긴, 이 아이들은 가난한 미얀마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정도니까 상당한 형편의 특권층 자녀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살이 붙은 학생은 보이지만 비만이나 초고도 비만은 보이지 않으니 이게 정상적 청소년의 모습이 아닐까. 또 자외선 차단을 위해 얼굴에 바른 타나까 외는 화장한 흔적이 전혀 없으니 중학교 때 이미 성인 싸다구 칠 정도의 화장술을 익힌 우리 애들에 비하면 꾸밈없는 얼굴이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괜히 부럽다. 맨 끝에 선 이선생과 안선생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인솔교사 같이 보이는 것은 교사로서의 몸에 밴 아우라 같은 것일까.
< 근처 낭우 재래시장이 있어 장 구경하러 갔다. 특이점은 가난한 나라에서 물질을 넘어서 먹지도 못할 꽃을 많이 판다는 것이다. >
< 날씬한 여자들이 모여 있어 가보니까 비누와 화장품 파는 가게다. >
< 조금 높은 못 둑에 올라오니 멀리 뾰족탑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것이 바간의 기본 풍경이다.>
< 술래마니 퍼야 입구, 술래마니는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란 뜻이란다. >
술래마니 퍼야는 1184년에 건립된 사원으로 사원 내부의 벽화가 많은데 주로 부처님의 제자들이 설법을 듣는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안치된 부처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 통로 쪽은 거의 벽화가 그려져 이곳은 벽화가 특징인 퍼야라 할 수 있다. 통로 벽에 그려진 벽화는 18세기에 그려진 것이고,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13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떨어진 벽면이 세월을 느끼게 한다. >
< 열반에 드는 부처의 와불상이 통로에 길게 그려져 있다. >
< 우리나라 임금의 면류관(冕旒冠)을 돌려 쓴 것 같은 관을 쓰고, 얼굴이 우리와 닮아 친근하게 느껴지는 부처인데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라는 ‘술래마니’가 이 부처를 말하는 것이라면, 모자 안에 보석이 가득한 게 아닐까? >
< 설법하는 부처를 중심으로 이를 듣는 제자상이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제작 초기에는 아주 화려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색채가 바래고 퇴색되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
< 절 입구에 그림 파는 상인이 있어 이선생이 10달러로 그림을 구매했다. >
< 동남아는 어디를 가나 더위에 지친 개들이 이런 자세로 자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엎드려 자는 것은 비상시 바로 방어자세로 넘어가는 경계의 자세인데 이건 가벼운 낮잠 정도가 아닌, 완전 무방비 상태의 숙면 자세이다. >
< 담마양지 퍼야. 마치 피라미드처럼 견고해 보인다. >
담마양지 퍼야를 미얀마 사람들은 그냥 양지 퍼야라 부르는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나라뚜 왕이 그 죄를 참회하기 위해 지은 사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살해되어 미완성의 사원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알라웅시뚜(Alaungsithu)의 아들이었던 나라뚜는 왕권이 탐이 나서 아버지를 쉐구지 파야에서 살해하고 왕이 된다. 그는 그 과정에서 형, 아내까지 모두 살해했다. 담마양지 파고다는 바로 패륜적인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 나라뚜 왕이 세운 참회의 사원이다.
벽을 따라 한 바퀴 돌다보면 벽돌과 벽돌 사이가 얼마나 정교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교함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건립 당시에 벽돌과 벽돌 사이에 바늘을 꽂아서 바늘이 들어가면 가차 없이 건축 담당자들인 노예와 관리자를 죽여 버리거나 양팔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사원 안쪽 통로를 따라 한 바퀴 돌다 보면 남쪽 한 귀퉁이에 당시에 팔을 자르던 형틀의 모형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잔인한 성품으로 악명이 높던 나라뚜 왕은 결국 3년 뒤 지금의 인도 땅인 가야 지방에 있던, 죽은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이 보낸 승려를 가장한 자객에게 살해당하여 사원 건축을 끝내지 못했다. 미얀마인들은 나라뚜 왕을 ‘칼라자 민(Kalagya Mi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도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왕’이라는 뜻이다. 결국 인과응보였던 셈이다.
< 감실 속 부처의 열반상이 평화롭게 보이지 않고 마치 자신이 저지른 부모 형제 살인의 죄책감에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쪼그려 자는 나라뚜 왕의 모습인양 왜소하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
< 부처의 가늘고 긴 눈썹 아래 길게 찢어진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라뚜 왕을 꾸짖기 위함인가, 무릎 아래 늘어뜨린 손이 유달리 크고 두껍고 길어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라뚜 왕을 구타하기 위함인가. “나라뚜여! 너의 죄를 사할 수 없노라.” >
오전 투어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시간은 10시 40분이다. 오후 일정은 일몰 보기인데 일단 퍼야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가 되었다니 운전기사가 이라와디 강에서 일몰 보기를 권한다. 나쁘지 않을 듯하여 그러기로 했다. 투어 요금으로 3만 짯을 지불하고 오후 5시경에 다시 오기로 했다. 어제와 오늘 다녀보니 운전기사가 영어도 조금 하고 친절하고 영리해 일단 의사소통이 되어 불편함이 없었다. 오전이라도 온도와 습도가 높아 움직이기만 하면 땀이 나서 씻지 않을 수 없고 또 피곤하다. 식사 때가 되어도 어디 가서 무얼 먹을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침대에 대자로 뻗어 쉬었다. 퀸 레스토랑이 가깝기도 하거니와 음식의 질이나 가격에서 마음에 쏙 들어 이 식당을 추천한 운전기사까지 칭찬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 볶음 국수와 소고기 쌀국수, 그리고 샐러드와 맥주까지 23,500짯이니 반주까지 곁들인 한 끼 식비가 4,800원이다. 사실 제일 비싼 것은 맥주다. >
일몰 때 배를 타게 되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을 한잔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맹맹하게 앉아만 있다면 어찌 풍류를 아는 사나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맥주를 구하려고 근처 슈퍼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리저리 다녀 보아도 가게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오기 무엇해 길가 진열장 안에 한 봉에 1,000짯 짜리 이름 모를 과자를 4개 사서 호텔로 돌아와 다시 휴식을 취했다. 택시가 조금 일찍 와 4시 45분경에 출발해 어제 왔던 호리병박 모양의 BU 퍼야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택시기사가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우리끼리 가면 바가지 쓸 우려가 있으니 자기가 표를 끊고 배를 주선해 주겠다고 한다. 그리하라고 하고서 가게에서 맥주 8캔과 과자를 사고 나오니 GOD FATHER란 글자가 새겨진 검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 선장이 따라 오라고 한다. 경운기 엔진을 단 작은 배는 지독한 소음과 어린 시절을 회상케 하는 매연 냄새를 흩날리며 강심을 향해 나아갔다. 이미 많은 배들이 모터를 끄고 물결에 따라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 경치도 좋고 분위기도 낭만적이나 주인공인 해를 구름이 가렸으니 진정한 일몰을 보았다고 할 수 없겠다. >
4만 짯을 주고 택시기사를 보내는데 자꾸 내일 아침 자기가 몽유와 가는 정류소에 태워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데 요금이 너무 비싸다. 게다가 아까 갓파더의 배 삯도 이놈이 중간에서 얼마 정도 잘라 먹은 느낌이 들어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는 바비큐 전문 음식점인 하모니 앞에서 내렸다. 돼지고기 꼬치와 양 꼬치, 메추리알 구이 등을 주문 후 테이크아웃 하겠다고 하니 테이크 어웨이라 다시 말한다. 오냐, 니 알아서 해라하고 안주를 가지고 와 다시 호텔에서 마시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가 동이 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정신도 동이 났는지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 아직 맥주는 3캔이 남았다. 저걸 소주와 섞어 마시다가 결국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와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
♠제 6 일 (2019. 11. 03. 일) 바간 → 몽유와
숙취가 조금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가방을 꾸렸다. 7시가 되어 옥상의 식당에 가니 미안하다는 듯이 뷔페는 안 되고 직접 조리해 제공하겠다고 한다. 몽유와 가는 차시간이 8시라서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미얀마의 조식 순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커피인데 물을 2배 정도는 부어야 할 정도로 엄청 진해서 왜 이걸 빈속에 마시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볶음밥과 스크램블, 오렌지 주스, 물 순으로 나오는데 우리 사정을 모르는 주방장을 탓할 수도 없고 대강 먹고 7시 30분에 체크아웃 후 불러준 택시로 터미널로 갔다.
< 미니 밴으로 18명 정도 탈 수 있는데 택배도 겸하는지 차 지붕에 짐을 가득 싣고 가다가 중간 중간 내려 준다. 특별히 정해진 정거장이 없는지 가다가 세우는 사람이 있으면 태우고, 내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내려 차문도 열어준다. 차비도 받고 거스름돈도 내어 주고 이 모든 일을 지금 차 지붕에서 일하는 남루한 노란 러닝셔츠 입은 운전기사 혼자서 다 처리한다. >
11시 30분 몽유와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젊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지붕 위 물건 내리는 것을 받아 준다. 우리 가방을 내릴 때는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그건 가방을 내려준 후 호의에 대한 팁을 바라거나 아니면 자기 차를 타라고 강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질 급한 안선생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릴 높이면 시비가 붙고 상대방은 떼거리이니 사태가 폭력적으로 급변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서로 자기의 말로, 아니면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더 큰소리로 주장을 내세울 것이기에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툭툭이 같은 차를 권하더니 우리가 거절하니 손선생의 농짝 같은 캐리어가 들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순순히 포기했다. 우리는 일단 정류소 안 사무실로 들어가 내일 만달레이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는데 우리가 바간에서 몽유와로 올 때 4인 26,000짯을 주었는데 몽유와에서 만달레이까지는 8,000짯이라 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거리 차이가 비슷한데 요금 차이가 너무 나서 혹시 1인 8,000짯인가 해서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히 4/8,000이라 적혀 있다. 우리가 택시를 찾기 위해 큰길로 나오는데 택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토바이 뒤에 짐칸을 달아 의자를 놓아 만든 탈 것이 있어 그걸 타기로 했다. 그런데 앞에 우리에게 자기 툭툭이를 권하던 사내가 따라와 우리 캐리어를 올려주기도 하고 우리의 행선지인 “Lake view hotel”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4,000짯에 흥정해 도착하니 멋진 호텔이다.
< 호텔 시설이 5성급인데 1박에 29,700원이라니 놀랄 만한 일이다. 욕실이 따로 있는데 또 저런 거품 목욕 시설이 있는 것은 참 낭패스런 일이다. >
< 이렇게 넓은 침대에 멋진 욕조를 갖춘 방을 안선생과 같이 쓴다는 것이 낭패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 누들은 밀가루 국수를 말한다. 새우 샐러드가 맛있다. 왼쪽 닭뼈가 든 국물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져와 이건 무어냐 하니 고맙게도 “프리”라 한다. >
호텔방도 마음에 들고 커피도 한잔 마셨으니 일단 주변 식당에 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5분 정도 거리에 도로변에 붙은 우리로 보면 반지하의 식당이 있었다. 맛집인 모양으로 많은 현지인들이 식사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돼지갈비국수 2그릇과 소고기 쌀국수 2그릇, 새우 샐러드 1개, 미얀마 맥주 2병을 주문했는데 문제는 주문받는 남자 종업원이 엄청 얼빵하다는 것이다. 종이에 적지도 않고 메뉴판만 보고는 무엇을 주문한지도 모르면서 일단 우리 앞에서는 알았다는 듯 끄떡거리고 카운트에 가서는 기억에 남은 것만 전달해 돼지갈비국수만 2그릇 가지고 와서 왜 소고기 쌀국수 2그릇은 오지 않느냐고 하니 그제야 카운트 아가씨가 와서 그건 요리가 안 된다고 해 결국 돼지갈비쌀국수로 주문을 받아간다. 베트남 사파 식당에서도 그랬지만 이쪽은 남자들이 대개 여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가격은 착해서 23,500짯 밖에 안 한다. 기다리는 동안 오늘 스케줄에 대해 안선생이 이야기를 했는데 역시 퍼야 구경이라서 퍼야라면 신물이 날 지경인데다가 날씨도 더워 모두 부정적 반응을 보여 시원한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방에 돌아와 손발을 씻고 낮잠 한 숨 자고 저녁 6시에 일어나 호텔 내 식당에서 돼지고기 누들, 닭 누들 죽 2개에 오징어 튀김 맥주 2병을 주문하고 이리저리 보는데 작고 앙증스럽게 생긴 집쥐가 내일 뷔페를 차릴 큰 그릇 뒤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호텔 바로 바깥이 논밭이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좋은 호텔 이미지에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웬 일인지 오늘은 밤에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사실 가지고 온 소주도 떨어졌고 맥주를 사러 주변을 다녀봤지만 가게를 못 찾아 빈손으로 와 정 마시고 싶으면 호텔 식당에서 마셔야 했다. 그래서 모두 참기로 했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제 7 일 (2019. 11. 04. 월) 몽유와 → 만달레이
< 그래도 버스가 크니까 앞좌석과의 거리가 있어 발을 뻗을 수 있다. >
5시 45분에 일어나 씻고 가방을 꾸린 후 조식 뷔페로 식사 후 8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리셉션에서 만들레이 가는 정류장에 갈 콜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몇 만 짯을 요구한다. ‘이 아가씨가 뭔가 잘못 들었구나.’해서 다시 몽유와에서 만달레이로 가는 버스터미널로 갈 콜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아가씨는 우리가 호텔에서 바로 만달레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5천 짯을 주고 몽유와 정류장에 도착하니 엄청난 고물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어제 밴을 탄 것에 비하면 숨쉬기가 그래도 편할 것 같다.
버스는 9시가 좀 넘어 출발했는데 자리가 한산하더니 이곳저곳을 다니며 군데군데 사람을 태워 결국 통로에 보조의자까지 놓을 정도가 되었다. 시가지를 돌 때는 갑갑한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을 달릴 때는 제법 속도까지 높여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상쾌하기까지 했다. 중간에 과자와 음식을 파는 상점에 도착하니 식사하는 사람도 있고 군것질거리를 사는 사람도 있다.
< 미얀마는 길 가에도 이런 천을 두른 항아리에 물을 담아 두는데 길 가는 사람이 목이 마르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도 보시(普施)의 한 방법이지 싶다. 하긴 사람만 목이 마를까, 아래에 물 버리는 곳을 이용하는 손님도 있다. >
< 날씨는 오지게 맑고 우리의 여행도 멋지게 전개되던 찰나, 버스 하부에서 뭔가 쇠뭉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허우대만 멀쩡한 사내 같은 버스는 고장이 나 서고 말았다. >
< 옆의 승객들의 태평한 모습과 달리, 시원한 그늘에 보조의자까지 가져와 앉아 있지만 표정을 보면 불만에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
운전기사는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늘에 와 서 있고 버스에 있던 3사람이나 되는 조수 중 한 사람이 버스 아래 기어들어가 긴 쇠뭉치를 꺼내는데, 동력 전달축이 빠진 것 같다. 자기들의 부속을 이것저것 내어 보더니 한 명이 동력 축을 보자기에 말아서 다른 차를 타고 가버리고 부속이 든 망태기 같은 것을 들고 두 사람도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타고 가버렸다. 지나가는 차들이 잠간씩 세워 왜 그러냐고 묻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처럼 다른 차를 태워주는 등의 다른 조치는 없다.
손과장은 땅콩 봉지를 가져와 까먹기 시작하니 아마 장기전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안선생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지나가던 밴을 물색해 1인 1,500짯으로 흥정해 캐리어를 다시 옮겨 싣고 출발했다. 나는 고장 난 곳이 만달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정류소까지 도착하는데 거의 1시간이 걸렸다. 그러면 고장 난 부속을 들고 간 사람이 만달레이에 도착하는데 1시간, 새 부속 가지고 버스로 가는데 1시간, 고치는데 30분이라고 하고 다시 버스가 출발해 만달레이에 오는데 1시간 걸린다면 적어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란 생각에 안선생이 오늘 밴을 섭외한 건 매우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시 4천 짯을 주고 아줌마가 운전하는 화물차 택시를 타고 숙소인 펄 호텔에 도착했다. 만달레이에 머무는 사흘 동안의 숙소인데 만달레이 성에 가깝고 시내 중심부라고 예약했는데 이상하게 좀 후지다. >
리셉션에서 체크인 하는데 예약한 트윈 룸 2개 대신 오늘만 4인실에서 잘 수 없느냐면서 숙박비를 할인해 주겠단다. 방 두 개에 59.4 달러인데 4인실 하나에 35달러로 할인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우리 돈으로 28,000원 정도 절약하게 되었으니 완전 개이득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거의 점심때를 넘겼기에 호텔 리셉션 아가씨에게 근처에 잘하는 식당을 추천하라니까 뭐라고 종이에 친절히 적어주어 출발을 했는데 이 역시 여행에서의 참교훈을 얻을 기회가 되었다. 한 블록을 가고 다시 한 블록을 가고, 다시 한 블록을 가고 어디가 목적지인지 모를 길을 계속 가다 보니 더워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모두 지쳐갈 즈음 길 건너 있는 추천한 집을 찾았는데 출입문이 없는 지역 맛집이었다. 문이 없다는 것은 에어컨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 형편이 식당의 조리 열기까지 감당할 여유가 없었기에 오다가 본 중화 식당으로 가자고 단호히 주장했다.
중화 식당의 문을 연 순간, 손님 뼈를 냉동하려는 작정으로 틀어 둔 건지 에어컨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식당은 메뉴가 없고 손님이 음식재료를 보고 주문하는 식이라 눈물을 머금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내려오니 또 다른 중화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주인은 우리의 땀에 절인 몰골을 보더니 에어컨과 선풍기를 최대한 가동해 우리를 최단시간에 인간 꼴로 만들려 애썼다. 어젯밤 못 마신 술을 보충하는 의미로 53°의 이과두주 1병와 미얀마 맥주 2병을 시키고 마파두부와 돼지족발을 안주로 시켰다.
오늘의 실수를 되짚어 생각하건대, 흔히 리셉션에서 식당 추천을 받는 경우에 3가지의 맹점이 있다. 첫째가 리셉션 아가씨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입맛을 알 턱이 없이 자기 나라 사람들이 많이 가는 식당을 추천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둘째는 거리에 대한 감각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도 어릴 때는 몇 ㎞ 걷는 건 예사로 생각했는데 여기 사람들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자기들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니 노쇠한 우리로 볼 때는 상당히 먼 거리를 예사로 가까운 듯 이야기 하는 것이다. 셋째,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방향 감각과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는데다가 서로 간에 언어소통마저 원활치 못하니 설명을 듣고 식당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가장 좋은 방법은 “트리플”이나 “위시빈”의 추천 맛집에서 그림과 가격, 그리고 위치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고 다음이 구글 지도에서 맛집을 선택해 정보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트리플”이나 “위시빈”이 좋긴 한데 유명하거나큰 도시가 아니면 정보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 배가 고파 그리고 국수를 각자 한 그릇씩 시켰더니 국수 양이 엄청나게 많아 거의 ⅔를 남기고 말았다. 결국 족발은 포장해 가져 왔지만 입에 맞지 않아 안 먹어 버리고 말았다. >
< 호텔에서 50m 떨어진 곳에 “Aeon Orange”란 슈퍼가 있어 여러 가지 안주와 요구르트, 위스키와 맥주를 사왔는데 가장 비싼 “Mac Arthur’s Blended Scotch Whisky 700ml짜리가 9,400짯이니 7,500원 정도밖에 안 한다. 저녁 식사 겸 술 한 잔했는데 장난이 심한 손과장은 이대용 선생 술잔에 몰래 위스키를 계속 추가하는데 이 선생은 이를 모르고 거의 위스키를 물마시듯 마시고 있다. 안 선생도 어느 듯 취해서 술잔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자신의 술잔이 비었음을 알리고 있다. 사진에서 별 이유 없이 미소를 짓고 있으면 취한 것이라 보면 된다. >
♠제 8 일 (2019. 11. 05. 화) 만달레이 시내 투어
< 아침은 뷔페였는데 주방에 일하는 요리사들이 어른은 없고 전부 청소년 정도의 애들이라 음식 솜씨가 별로 칭찬할 정도가 아니다. 겨우 흉내 내는 정도에서 끝나버린 솜씨다. >
8시 30분에서 11시까지 3만 짯에 택시를 대절해 투어에 나섰다. 우선 만달레이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미얀마 3대 불교성지로 꼽히는, 금불상으로 유명한 마하무니 사원에 들렀는데 입장료가 5,000짯이다. 우선 공공건물에 들어섰으니 깨끗한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이 슬기로운 여행자의 자세이다. 건물은 온통 금빛과 대리석 기둥으로 화려한 편으로 그 중앙에 거대한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 초기에 방글라데시에서 조성된 것인데, 우여곡절 끝에 1785년에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지금의 마하무니 사원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 좌측이 매표소이고 입구는 공사 중인데 입구를 보고 그저 수수한 사원 정도로 생각했다. >
< 금박을 들고 입장해 자신의 소원을 빌고 정성껏 금박을 붙이는 신자들. 불상은 높이가 3.8m로 황금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이는데, 이건 미얀마 사람들은 불상에 참배하면서 최대의 공덕은 불상에 금을 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박'을 붙인 것이다. 소원을 빌기 위해 금박을 조금씩 바르고 붙이다 보니 본래의 부처상에서 벗어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렇게 붙인 금박의 두께만도 15cm이고 무게는 무려 12톤이라고 한다. >
이 글을 쓰는 시점, 즉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금값이 오른 시점(2020.2.15)에 국제 금값 시세가 1g에 60542.56원이라 하니 이 부처가 입고 있는 12,000,000g을 60542.56원으로 곱하면 726,510,720,000원이다. 아라비아 숫자에 약한 사람을 위해 우리말로 읽어 드리면, 칠천이백육십오억 천칠십이 만원이다. 내가 소수점 이하 0.56도 포함한 것은 그것 만해도 672만원이기 때문이다. 금박을 부칠 신자만 부처 옆에 난 입구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줄을 서 있으니 저 부처는 언젠가는 금박으로 1조 원을 입을 것이다. 가난한 미얀마가 만약 한국처럼 IMF를 당한다면 부처들이 자발적으로 금모우기 운동을 펼치면 되겠다. 하긴 부처만이 아니라 바위도 금박을 입힌 것이 있으니 부처의 허락만 받으면 되겠다. 아니면 부처에게 잠시 빌리던지.
< 투덕투덕 금을 처바른 금불상보다 나는 살짝 볼륨감이 느껴지는 이 아가씨가 훨씬 좋다. >
< 박물관 한 구석에 맹인 점술가가 있어 손금을 만져 운명을 알려주고 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로 보아 제법 용한 모양이다. >
< 운전기사가 마하간다용 짜웅(대중공양의식)이 10시 15분에 시작하니 그 시간에 맞추려고 우리를 또 다른 사원으로 안내했는데 큰 부처 앞 코끼리 상이 귀엽다. >
< 중간에 운전기사가 영어로 무어라 하는데 무슨 말인가 했더니 목공예하는 곳에 들러 구경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시간이 남아 시간 조절용으로 들렀는데 솜씨가 매우 교(巧)하고 정밀(情密)하다. >
흔히 생각하기로는 열대지방이라 나무들이 무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야자나무의 경우, 물론 야자의 종류는 2,600조이나 되어 모든 것이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단단해 수저, 효자손으로도 쓰이고, 티크나무는 뛰어난 내구력으로 인해 인도와 미얀마에서는 잘 보존된 티크재로 된 보(堡)가 종종 수세기가 지난 건축물에서 발견되며, 티크는 궁전과 사원에서 1,000년 이상이나 계속 써왔다. 나무둘레가 약 2m인 티크나무는 최소 100년 이상 된 것이며 종종 2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티크는 미얀마가 세계 공급량의 대부분을 생산한다고 하니 훌륭한 목재를 가진 미얀마인이 목공예에 발군(拔群)의 실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1850년에 만들어진 타웅타만(Taungthamn) 호수를 가로지르는 1.2㎞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목조다리로 당시 이마라뿌라의 시장이었던 우베인이 잉아 왕궁을 짓다 남은 티크나무로 다리를 세웠다. 일몰 경치로 유명한 곳인데 우린 너무 일찍 가서 별 감흥이 없었다. >
< ‘마하간다용 짜웅’은 ‘아마라뿌라’에 있는 사원 이름으로 1,500명 정도의 승려가 수행하고 공부하는 미얀마 최대의 수도원이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매일 10시 15분에 시작하는 대중공양(供養)의식 때문이다. 모든 승려가 맨발에 두 줄로 서서 천천히 걸어가 공양을 받는 모습이 매우 엄숙하기 때문에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린다. >
공양의식을 마치고 세워둔 택시로 돌아와 호텔로 왔다. 이번 택시기사도 젊고 영어도 통해서 오후 4시에 석장경(石藏經)으로 유명한 쿠도더 퍼야에 갈 때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때는 이미 잠심 시간이 되었기에 어디로 갈까 하다가 덥기도 하고 귀찮아서 호텔 9층 식당에서 국수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우리가 점심을 주문하니 깜짝 놀란다. 그만큼 점심 먹으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역시 별 맛이 없다.
< 세계에서 가장 큰 책이 있다는 쿠도더 퍼야. 이곳에 1860년에 만들기 시작해 총 729개의 불경이 대리석의 돌판에 쓰여 있고 돌판 하나하나마다 흰 탑이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729개의 탑이 있다는 말과 같다. 스리랑카의 ‘하타다게’ 사원에서도 ‘스톤 북’이라 해서 엄청나게 큰 돌 책을 보았지만 그건 크기는 하되 큰 돌 하나에 글씨를 새긴 것에 불과하고 이건 쪽수로 밀어붙이는데 이길 만한 불경이 없다.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을 잠시 떠올렸으나 규모에서나 쪽수에는 당할 재간이 없다. >
<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고 끝은 보이되, 참 멀다. >
< 탑 안에 이런 석비로 만든 불교 경전 비문(뜨리삐따까)을 새겨 두었는데 높이가 같지 않으나 대강 1m는 넘는다. >
부처 사후 각기 달리 해석되는 경전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제 5차 경전 집결이 1859년에 쿠도더에서 열렸는데 그 때 채택된 경전 내용을 민돈왕의 명령에 따라 만든 것이 쿠도더 퍼야의 석장경이다. 미얀마 사람들의 석장경 사랑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옆에 산다무니 퍼야에 가니 또 하얀 첨탑 안에 석장경이 여러 개씩 들어 있었다. 미얀마 사람들의 불심에 익숙해진 탓일까 이젠 거의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몇 개인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1,774개의 대리석판이 있단다.
< 중앙의 부처를 모신 퍼야를 중심으로 사방이 이런 첨탑을 만들어 바늘방석 같이 보인다. 부처를 모시고 불경을 품은 이곳을 바늘방석 같다고 표현한 것은 내가 최초가 될 것이다. >
저녁 무렵에 가까워져 대절한 택시로 만달레이 힐 입구에 올라갔다.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정상에 도착하니 1인 1천짯을 받는다. 이곳이 제일 높은 곳이라 만달레이 전체의 전경이 다 보인다. 평탄한 지형에 강까지 흐르니 정말 축복받은 땅이라 하겠다.
<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은 숲으로 덮여 있고 흐르는 강이 가까이, 그리고 멀리도 보인다. 오늘 수고한 택시 기사에게 투어비로 25,000 짯을 주었다. >
< 만달레이 서쪽 문 근처에 있는 “Golden duck” 레스토랑에 도착해 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오리구이를 시키고 마늘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과연 이름값을 한다고 오리구이 맛이 대단하다. >
식사로 마늘 볶음밥을 각 1개씩 주문하려니 주문 받는 사람이 큰 것 하나만 주문하라고 권한다. 과연 큰 것 하나를 주문했는데 4사람이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사진의 그림은 숟가락이 아니라 큰 밥주걱이고 접시 크기는 지름이 30cm 이상이다. 식사량이 민족에 따라 다른데 요즘의 우린 아주 소량을 먹는 편에 속하는 민족인지라 잘못하면 음식을 남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의 습관대로 인원수에 맞추어 한 번에 모든 음식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동남아나 중국의 경우 대개 양이 예상보다 엄청나게 많아 본의 아니게 음식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두 번 정도 나누어 주문하는 편이 좋다. 또 분단국가라서 그런지 음식 주문도 한 가지로 통일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음식이 맛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완전 음식물 쓰레기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되니 가급적 다른 음식을 시켜 미연의 사건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맛있는 음식이야말로 여행의 큰 즐거움인데 그걸 고민거리로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말이다.
날도 저물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질 때쯤 양주 남은 것 반 병 남은 것을 마신 손과장은 알딸딸한 상태가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 밤에 마실 음료를 이온 마트에서 구매했다. 호텔 리셉션에서 11월 7일 만달레이에서 인레호수가 있는 낭쉐로 가는 미니밴 차표를 1인 15,000짯에 구매했다. 고물 버스로 고장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기에 디럭스 버스를 탈 예정이었으나 인레호수 축제 관계로 미니밴 외에 넓은 좋은 차량이 없다는 것이다. 한 잔 더 마신 후 우리 방에 와 잠자리에 들었다.
< 3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