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9일 오전 10시. 光州시 東구 錦南로 1가 상무관 앞은 행인마저 뜸한 채 을씨년스런 분위 기였다. 며칠전 인산인해를 이뤘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길 건너 도청 앞에 는 착검한 계엄군과 탱크가 상무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바로 상무관에서 관(棺)들이 들려나와 청소차에 마구 실렸다. 유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상무관 안에는 폭도라는 오명이 싫어서인지 야음을 틈타 유해를 빼내 비어있는 자리도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전 11시 10개관씩을 포개어 실은 청소차들이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려 光州시 雲亭동 시립공원묘지에 다다랐다. 묘지에는 이미 1백여개의 구덩이가 빨간 황토흙을 내뱉은 채 주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작업은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구덩이 사이가 비좁은데다 흙더미들 때 문에 제수상은 엄두도 낼 수없었다. 장례식때 공원묘지는 엄격히 통제됐다. 光州시가 사망자 1명당 유족 5명만을 참석하도록 제한했고 유가족이 장운동사무소까지 가면 시에서 공원묘지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유족들은 가슴이 터져버릴 심정이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폭도아들을 둔 사람, 폭도 딸, 폭도 아버지]라고 내몰림을 당할 것만같아 남의 눈에 띌새라 빨리 매장이 끝났으면 하는 심정인 사람도 있었다.
이날의 장례식은 마치 진짜 폭도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처럼 숨조차 제 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극도의 공포와 불안속에서 극히 간소하게 치러졌다. 오후5시께나 끝난 장례식에는 모두 1백26기의 유해가 묻혔다.
세계적 민주의 성지로 다시 깨어난 望月동 5·18묘역의 탄생 순간이었다. 5·18희생자가 묻힌 곳은 엄밀히 말해 光州시 北구 雲亭동 산 46 광주시 립공원묘지 제3묘역 1천여평의 땅이었다. 1976년 光州시가 조성한 光州시 공원묘지의 한 묘역에 불과했다.
현재 이곳 3묘역에는 5·18과 관련 당시사망자 1백17기(무연고 11기), 부상후 사망 또는 구속자 사망자 1기등 모두 1백31기를 비롯 87년이후 시 국관련자 32명등 1백63기가 묻혀있다. 또 일반 분묘 3백5기를 합쳐 모두 4 백68기가 있다.
5·18 望月묘지는 실제로는 잘못된 이름이다. 그럼에도 이곳 묘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그동안 애칭된 까닭의 정설은 없다. 다만 묘지에 가려 면 望月삼거리를 지나가야 하고 정확히 운정·수곡동 묘지라고 부를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望月이라는 이름자의 정서가 묘지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곳 묘지의 넋들 가운데 11기는 지금도 무명으로 남아있다. 묘비의 앞면에 무명열사의 묘, 뒷면에 광주여 무등산이여 민주의 활화산이 여라고 똑같이 쓰여있다.
그 무명의 묘 왼쪽편에 님이여 어디 계시옵니까 고이 잠드소서라는 현수막이 있고, 게시판에 행방불명자 23명의 영정이 붙어 있다. 오른편에는 5·18광주민중항쟁 상이유족회에서 만들어 놓은 게시판에 또다시 54명의 영령이 도열해 있다.
望月은 한참동안을 피탄압의 땅으로 지내와야했다. 5共땐 이 곳에 갔 다하면 죄인취급을 받았는가 하면 망자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이 땅에서 맘놓고 제사 한번 지내지 못하고 노상 최루탄과 함께하는 제삿날이 되곤했 다.
1981년 5월 18일 오전 이곳 묘역에서는 시민·학생등 5백여명이 모인 가운 데 5·18광주민중항쟁 1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미국은 光州사태의 책임 을 지고 물러가야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낭독하였으며 시위대와 함께 시 내로 진출하려다 경찰의 저지를 받고 다수가 연행됐다.
이날 추모제를 주도했던 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鄭水萬씨는 체포된뒤 국가보안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이듬해 2월 만기 출소했다.
1983년 들어 망월동 공동묘지의 성역화를 우려한 5共은 이 지역 상공인들 로 구성된 全南지역 개발협의회등을 동원, 묘지의 분산 이장계획을 은밀히 진행했다. 이른바 5共 정권의 대표적 과오로 꼽히는 이장공작이었다.
그해 3월4일 5共은 최초로 1기를 이장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항하여 유족 30여명은 3월6일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여 광주의거 진상규명과 아울러 묘 이장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4월 18일에는 묘를 이장하면 1천만원의 위로금과 50만원의 이장비를 받는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5월18일 제3주기 위령제를 개최하고 6월13일에는 추모기도회를 거행하였으며 유족회 명의의 호소문을 낭독, 배포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것을 구실삼아 유족들에게 이장을 조건으로 지급하 기로 했던 위로금 1천만원의 지급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일부 소극적 인 유족들을 부추김으로써 내부 분열을 기도했다.
당국의 이러한 부추김에 넘어간 유족 12명이 당시 유족회 회장이던 전계량의 직장과 집으로 폭행과 협박을 가했다. 1984년 4월1일까지 당국의 이장공작으로 이장된 묘가 총 26기로 늘어났다. 이 해 11월 이러한 당국의 시도는 많은 사회단체에 의해 저지, 중단됐다.
5共이 끝날 때까지 망월동 묘지와 그 유족을 둘러싼 이같은 숨박꼭질이 끝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집요하고 교묘한 공작·탄압에도 불구하 고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더불어 망월동 묘지는 민주화 성지로 전국의 학생·시민들로부터 참배와 숭모·새로운 민주화운동의 결의의 장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망월묘지의 성역화사업은 본격화됐다. 이 해 대통령의 5·13특별담화를 통해 5·18묘역 성역화사업이 확정됐다. 그러나 성역화사업은 5·18희생자 묘역 위치선정을 놓고 난항을 거듭했 다. 위치선정문제는 일부 유가족측이 상무대이전을 강력히 요구하며 한때 농성을 벌이는 등 반발도 거셌다.
결국 5·18묘역은 93년 光州시 北구 雲亭동 산 34 일대로 최종 확정됐다. 현재의 묘역 옆에 위치한 새 묘역은 94년11월 사업이 시작돼 97년4월 완공 될 예정이다.
총 5만7백50평 규모에 조성될 5·18묘역 성역화사업은 3천평규모의 묘지 조성과 함께
▲위령탑및 참배단 1식 ▲유영봉안소 2백평 ▲기념관 2백50평 ▲체험공간외 5종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이미 묘역진입로 확장공사가 완료됐고 1996년 10월 현재 묘역 토목기반공사와 건축시설 공사발주가 67%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