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의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
1. 막스 베버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고 있던 독일 정치에 대한 베버의 염려와 대안 제시의 필요성에 의해 탄생했다. 베버는 당시 독일 정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첫째, 의회의 무기력함, 둘째, 훈련된 전문 관료층의 지배, 셋째, 정치적 이념 정당의 주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정치의 현실적 측면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직업적인 정치가의 자질과 실천을 중심으로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2. 베버는 민주주의가 결코 인민의 뜻과 의지가 있는 그대로 실현되는 체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 선발에 있는 것이다’라는 냉정한 진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본질은 분산되어 있던 행정수단과 강권력을 국가가 독점하는 체제이다. 정치는 이렇게 국가에 의해 독점된 권력을 배분하고 행사하고 관리하는과정에 대한 고민이다. 여기에서 행정의 권한과 국가기구가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근대국가는 절대국가을 거쳐 차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의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어떤 국가이든 핵심은 실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인들의 자질이 중요할 뿐 아니라 정치인들을 지원하는 추종자들의 성격도 중요하다. 근대의 정치는 지도자와 추종자들의 협력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3. 베버는 영국의 의회민주주의와 미국의 정당민주주의를 독일의 정치체제와 비교 분석한 후, 효과적인 정치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것은 의회의 지원과 정당조직의 관료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카리스마적’ 성격을 지닌 지도자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지도자의 정당성은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확립되는 데, 이러한 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문적 관료들의 뒷받침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관료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통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추종자들도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협력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국가의 다양한 직책을 추종자들에게 배분하는 과정이 핵심일 수도 있는 것이다.
4. 결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치 지도자이다. 근대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명사들이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 정치가들이다. 정치가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은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인 판단능력이다. 베버는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불모의 흥분상태’로 비판하며 ‘열정’을 대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결과에 대한 책임과 연관지었다. 책임을 고려하지 않는 열정은 단지 모험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균형적 판단에 대해서는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지었다. 이것은 감정을 통제하면서 상황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다.
5. 정치가들은 정치가 반드시 도덕적 원리가 적용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선에서 선이, 악에서 악이’라는 도덕적 원리는 정치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일 뿐이다. 정치에는 수많은 악마적 상황이 작동하면서 혼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정치가들이 단지 자신의 신념에 철두철미하게 집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위험을 야기시킨다. 신념은 때론 위대한 성취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지만, 대부분의 경우 치명적인 위험을 발생시킨다. 전쟁의 와중 속에서 절대적 평화를 지켰던 평화주의자들은 결국 수많은 희생만을 치렀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버는 정치가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한다.
6. 베버는 신념윤리에 몰두한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거나 과제에 실패했을 때 그 책임을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세상이나 다른 사람 또는 신에게 돌린다고 비판한다. 자신의 신념이 지녔을 위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책임윤리에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평균적인 결함을 고려한다. “그는 인간의 선의와 완전함을 전제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나의 행위에 책임이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책임윤리를 가진 사람들은 행위에 따른 결과에 주목한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과 어긋날지라도 치명적인 결과가 예상된다면 다른 선택을 한다. 베버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구체제의 폭력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폭력’이라는 똑같은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한 것이다.
7. 현실의 정치는 비관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궁극적인 도덕적 원리가 작동되거나 매력적인 신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정치적 신념은 어느 순간 상투적인 레토릭에 불과해진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 정치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정치가들에게는 신념윤리와 함께 책임윤리를 강조한 것이다. 분명 신념윤리가 없이 정치를 시작할 수는 없다. 정치의 실제적 모습이 권력을 획득하고 이익을 배분하는 과정일지라도 그러한 과정을 좀더 도덕적으로 실현하려는 열정과 신념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출발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실적 정치 속에서 더 요구되는 것은 ‘책임윤리’이다. 책임윤리는 판단과 행위에 대한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정치는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인 것이다.
첫댓글 - 책임과 윤리를 찾을 수 없는 세계는 어떻게 해야???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