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속신화 속의 ‘여성 영웅들’
1. 신화는 인간을 둘러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의문과 함께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에 대한 진지한 시선과 오래된 사유가 담겨져 있다. 특히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고 괴물들과 사악한 존재들을 제거하면서 위대한 과제를 성취하는 영웅들의 모험과 여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야기가 인기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의 이야기, 인도 신화의 라마야나 이야기, 북구신화 속 토르나 지그프리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영웅들의 모험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다가오는 위험을 극복하고 용기와 신념을 지닌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우리나라에는 ‘신화’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의 신화는 대부분 국가건립과 관련된 ‘건국신화’가 대부분이며, 신화의 종류도 많지 않다. 특히 ‘영웅신화’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신화 이외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유사>나 몇몇 책에서 전해오는 문자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풍부하고 매력적인 신화들이 남겨져 있으며, 그 중에는 고난을 이겨내고 주어진 과제를 성취하여 당당하게 승리하는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서양 신화 속 영웅들이 불행한 탄생 배경 속에서도 영웅적인 힘과 지혜를 발휘하여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 자극을 부여했다. 우리의 영웅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당의 노래 속에 구전으로 전달되었던 ‘무속신화’ 속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당들의 무가 속에서 살아있는 영웅들은 기록되지 않았을 뿐 일상의 민중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고 힘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영웅들은 보통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아픔을 위로하고 고통을 해결하면서 집과 마을을 지키는 신들이 되었다. 굿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듯이, 무속신화 속 영웅들도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3. 서양의 남성 영웅들도 출생과 성장의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있었으며 모험을 통해 불행한 과거를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처럼 우리의 여성 영웅들도 서양 영웅들 못지않게 강인하고 담대한 정신과 지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더구나 여성 영웅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운명의 무게가 더해졌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차별받고 소외된 존재들이었다. 무속신화 속 여성들 또한 그러했다. 무가 <바리데기> 속, 바리공주는 7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원천강 본풀이> 속 오늘이 또한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홀로 들판에서 자랐으며, <삼공본풀이> 속 ‘감은장애기’는 주체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쫓겨난다. 부모 뿐 아니라 남편과 애인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세경본풀이> 속 자청비는 인연을 맺은 문도령의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또한 집안의 하인 정수남의 욕정에 의해 위기를 맞는다. <성주풀이> 속 막막부인은 남편 황우양씨의 어리석은 내기에 의해 소진항에게 정절을 빼앗길 상황에 놓인다. 이처럼 신화 속 여성들은 남성들의 횡포와 어리석음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4. 하지만 여성들은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운명과 싸우고 사회의 왜곡된 시선에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승으로 건너가 그 곳의 수문장이었던 동수사와 결혼까지 하면서 샘물을 얻어 아버지를 치유한다. ‘오늘이’는 하늘로 간 부모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하늘에서 부모를 만난 하늘이는 하늘에 머물지 않는다. 부모와의 상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 그녀는 다시금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현실의 아픔을 치유했다. ‘막막부인’ 또한 갖가지 꾀를 내어 소진항의 요구를 거부하고 결국 남편을 다시 불러내 원래의 위치를 복원한다.
5. 특히 매력적인 인물은 ‘자청비’이다. 자청비는 여성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며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어리석은 남성을 주도하여 연애를 시작하고 인연을 맺은 이후에도 소극적인 남성 대신 비극적인 상황을 정리하고 극복하는 인물이다. 자신을 사모하며 겁탈을 시도하는 하인 정수남을 죽이지만 결국은 그와 화해하고 환생시킨 후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청비는 남성들의 허접한 욕망과 어리석음을 적절하게 상대하면서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간다. 결국 문도령과의 사랑도, 정수남에 대한 인간적 관계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지혜와 용기의 탁월한 실현을 보여준다.
6. 이러한 여성 영웅들의 활약상은 당시 여성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가장 불행한 운명이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고통을 준 자들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들을 포용하고 해원하는 한없이 큰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지혜와 용기가 병자를 고쳐주었고. 미움을 없앴으며,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들의 모습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무당들에게는 소중한 모델이 되었다. 평범하지만 용기있었던 여성 영웅들은 그렇게 무속의 신들이 된다. 부모를 위해 저승까지 다녀왔던 ‘바리’는 무당들의 신이 되어 저승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되었고, 오늘이는 세상일을 해결한 후 하늘선녀가 되어 부모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으며, 막막부인은 가정을 지키는 ‘터주신’이 되고 남편은 ‘성주신’이 되어 가정을 보호하는 중요한 신이 되었다. 지혜로웠던 자청비는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농사와 관련된 ‘세경신’이 된다.
7. 이처럼 일상의 생활을 지켜주는 신들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위대한 모험을 통해 탄생하였다. 여성영웅들은 운명에 주눅들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은 수많은 민중들, 특히 여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모습이었다. 위대한 세계를 만들어가는 서양의 남성영웅들의 서사와는 다른 일상의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소소하지만 힘겨운 삶의 편린을 극복하게 해주는 무속신화의 여성영웅들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이고 민중적이며 삶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현실의 부조리한 사회적 관계를 완전하게 바꿀 수는 없었어도, 불완전 속에서 여성의 담대한 용기를 보여주었던 신화 속 여성 영웅들의 모습은 정말로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어떤 나라의 신화보다도 흥미로운 신화의 세계인 것이다.
첫댓글 - 연약한 여성들의 삶이 더 강인하다는 사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