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정구(嚴鼎耇)
1605(선조 38) ~ 1670(현종 11)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황(愰)이다. 모친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이호(李浩)의 따님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소년시절부터 문예(文藝)에 재능(才能)이 뛰어나 25세 때인 1630년(인조 8)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1631년(인조 9) 가주서(假注書)를 지내고 1635년(인조 13) 예조좌랑(禮曹佐郎)과 정언(正言)을 지내고 1636년(인조 14) 병조좌랑(兵曹佐郎)과 정언(正言)을 지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남한산성(南漢山城)까지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직(司直),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수찬(修撰)을 거쳐 1639년(인조 17) 사과(司果), 겸지평(兼持平), 수찬(修撰) 등에 제수되고, 1640년(인조 18) 부교리(副校理), 교리(校理), 겸춘추관 기주관 (兼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1642년(인조 20) 1월 6일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어 1645년(영조 23) 부수찬(副修撰)으로 이배되고, 이듬해에 교리(校理)헌납(獻納), 수찬(修撰) 등을 거쳐 1647년(인조 25) 부사직(副司直), 교리(校理), 헌납(獻納), 사서(司書) 이조 좌랑(吏曹佐郎)이 되었다. 1648년(인조 26) 이조좌랑(吏曹佐郎)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郎)이 되고, 1649년(인조 27)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으면서 붕당(朋黨)이 조성되는 것을 비호(庇護)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1651년(효종 2)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재직 중 김자점(金自點)과 그 일파가 제거될 때, 평소 그와 안면이 있다 하여 극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좌의정(左議政) 한흥일(韓興一)이 과거 엄정구가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천거(薦擧)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구명(救命)을 호소하여, 충청도(忠淸道) 면천(沔川)에 부처(付處)되는 것으로 그쳤다.
1666년(현종 7) 2월 11일부터 1666년 5월 25까지 지금의 구로구를 관할하는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재임했으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오르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다.
嚴左尹墓銘
公諱鼎耇。姓嚴氏。其先本寧越人。高麗尙書僕射庇。實爲始祖。入本朝。有同知摠制有溫。摠制五世。有繕工副正曙。副正生市署直長仁達。直長生同知中樞愰。中樞娶弘文應敎李洁女。生公。公才藝夙成。姿品異等。字重叔。仁祖八年。丙科及第。補承文權知。以右史常侍上前。公禮貌甚善。上甚重愛之。丙子爲侍講司書。從上於南漢。明年。車駕還京。拜司憲持平。江都敗。廟社陷沒。公以法罪狀受命大臣。戊寅。以繡衣。廉問湖西。明年。以修撰。出爲關西都事。兵革之後。西省多事。蓋朝廷選擇遣之。二年。復以修撰召還。乞養爲義城縣令。乙酉。復入爲修撰。時有姜氏賜死事。公上全恩箚。丁亥。爲吏曹佐郞知製敎。後年。陞正郞。金自點方用事。其子鉽席父勢。驕橫無所忌。有郞僚附鉽者推薦鉽。欲引入吏曹爲郞。公執不可。判書趙絅,參判韓興一皆沮之。己丑。爲執義。吏曹判書沈詻爲時議所忌。而又有時輩之所屬望者。必欲擊去。乃代指言。某以私得某官。某以親得某官。公嘗在吏曹。備知某以某事官非私。某有某事官非親。因引避。大臣已有上疏發此論者以爲護儻。公罷執義。宋浚吉代之。時自點以罪竄。論罪人諸客。以公亦私相善於罪人。亦在竄中。左相韓興一以吏曹時沮鉽事。白上。特有減等之命。付處沔川。尋敍爲太僕正。俄改副校理。辛卯。爲同副承旨。轉至左承旨。其年加嘉善。仍行左承旨事。上寵待之殊甚。壬辰。自點旣伏誅。兩司復論己丑得罪者。公以薦引罪人爲名。在列多知此事者。不從。爭之不已。領相鄭太和,左相金堉。亦爲上力言之。公以故得免。癸巳。中樞公卒。旣三年。出爲公州。以疾歸。丁酉。奉使如燕。旣復命。爲右尹。尋加嘉義。改左尹。俄拜東都尹。己亥。上登遐。卒爲用事者所蔽。不復顯用也。後連爲錦山,富平。戊申。復爲左尹。有繼母之喪。其卒喪之年九月十九日。公卒。年六十六。上賜弔賻如儀。某月日。葬于衿川縣水東先兆之次。貞夫人豐山金氏。禮曹判書壽賢之女。無子。取族子纘爲後。纘某官。生一男五女。男慶運。女五人。皆幼。公秀而藝。中樞公好簡雅。父子爲知己。有兄早殀。繼母弟一人。中樞公老而甚愛之。嘗病疽幾危殆。公吮疽得痊。公旣貴。悉以財產。均諸兄嫂諸妹而不自取曰。吾雖微此。不至寒餓也。知遇孝廟。不隱其賢。當官任職勁切。不喜脂韋。尤長於剸煩。莅郡皆稱治。方世道大壞。讒妬乘之。坎軻而終。銘曰。世之偸。朋黨相仇。讒夫之熾。良善之棄。潝兮訾兮。心不媿矣。
< 記言別集卷之二十三 / 丘墓文 >
엄 좌윤(嚴左尹)의 묘명(墓銘)
공은 휘는 정구(鼎耈)이고 성은 엄씨(嚴氏)이다. 그 선조는 영월(寧越) 사람이다. 고려 때의 상서 복야(尙書僕射) 비(庇)가 사실 시조(始祖)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동지 총제(同知摠制) 유온(有溫)이라는 분이 있었고, 총제의 5세에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서(曙)라는 분이 있었다. 부정이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 인달(仁達)을 낳았고, 직장이 동지중추(同知中樞) 황(愰)을 낳았고, 동지중추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이길(李洁)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공을 낳았다.
공은 재능이 숙성하였고 자품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자는 중숙(重叔)이다. 인조 8년(1630)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에 보임되었다. 우사(右史)로서 항상 상 앞에 있었는데, 공이 예모(禮貌)가 아주 좋았으므로 상이 매우 소중히 아꼈다.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남한산성에서 상을 호종하였다. 이듬해에 상이 서울로 돌아오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강도(江都)가 함락당하고 종묘와 사직이 망하자, 공은 법에 따라 수명대신(受命大臣)들의 죄를 따져 탄핵하였다.
무인년(1638)에는 암행 어사로 호서(湖西)를 탐문하였다. 이듬해에 수찬으로 있다가 나가서 관서 도사(關西都事)가 되었다. 전쟁을 겪은 뒤라 서쪽 지방에 일이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특별히 가려 뽑아 보낸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수찬으로 소환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이 되기를 원하여 의성 현령(義城縣令)이 되었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다시 들어와 수찬이 되었다. 당시에 강씨(姜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한 일이 있자 공이 은혜를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정해년(1647)에 이조 좌랑이 되었고 지제교가 되었다. 다음 해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한창 권세를 부릴 때에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제 아비의 세력을 믿고 교만 횡포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었는데, 낭료(郞僚) 가운데 어떤 이가 김식에게 빌붙어 김식을 추천하여 이조(吏曹)로 끌어들여 낭관(郞官)을 삼으려 하였다. 공이 불가함을 쟁집하였고, 판서 조경(趙絅)과 참판 한흥일(韓興一)이 모두 그 일을 저지하였다.
기축년(1649)에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조 판서 심액(沈詻)이 당시 여론에 꺼림을 받았는데, 또 당시 사람들에게 촉망을 받는 자가 있어 심액을 반드시 쳐내려고 하여 이에 당시 사람들을 대신해서 “누구는 사심에 의해 아무 벼슬을 얻었고 누구는 친하기 때문에 아무 벼슬을 얻었다.”라고 말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조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는 아무 일로 벼슬을 한 것이지 사사로움에 의한 것이 아니며 아무는 아무 일이 있어 벼슬을 한 것이지 친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잘 알았다. 이 일로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대신 중에 전에 상소하여 이런 말을 꺼냈던 자가 공을 가리켜 자기편을 비호한다고 하였으므로 공이 집의에서 파직되고, 송준길(宋浚吉)이 공을 대신하였다.
당시에 김자점이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하였다. 김자점의 문객(門客)들까지 논죄하여, 공도 죄인 김자점과 서로 잘 지냈다는 이유로 또한 유배할 대상에 들어 있었다. 좌의정 한흥일이, 공이 이조에 있을 때 김식이 이조에 들어오는 것을 공이 저지했던 일을 상께 아뢰었으므로 등급을 낮추라고 특별히 명하여 면천(沔川)에 부처(付處)하였다. 얼마 뒤에 태복시 정(太僕寺正)에 서용되었고 조금 있다가 부교리가 되었다.
신묘년(1651, 효종2)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좌승지로 전임되었다. 그해에 가선대부로 올랐는데 그대로 좌승지의 일을 맡아보았다. 상이 매우 특별히 총애하였다. 임진년(1652)에 김자점이 사형당하고 나서 양사(兩司)가 다시 기축년(1649)에 죄받은 자들을 탄핵하였는데, 공에 대해서는 죄인을 천거하여 끌어 주었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공격하였다. 조정에 있는 자들 중에 이 일에 대해 많이 아는 자가 그 의견에 따르지 않고 쟁집하여 마지않았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김육(金堉)도 상께 힘껏 말하여, 공이 그 덕분에 죄를 면하였다.
계사년(1653)에 중추공(中樞公)이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정유년(1657)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온 뒤에 우윤(右尹)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좌윤(左尹)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있다가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배되었다.
기해년(1659)에 상이 승하하자 끝내 권세를 쥔 자들에 의해 가려져서 다시는 드러나게 쓰이지 못하였다. 나중에 잇따라 금산(錦山)과 부평(富平)의 수령을 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에 다시 좌윤이 되었다. 계모(繼母)의 초상이 있었는데, 복상(服喪)을 마친 해 9월 19일에 공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66세였다. 상이 의식에 따라 조문과 부의를 내렸다. 아무 달 아무 날에 금천현(衿川縣) 물 동쪽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정부인(貞夫人) 풍산 김씨(豐山金氏)는 예조 판서 김수현(金壽賢)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 집안에서 찬(纘)을 데려다 후사를 삼았다. 찬은 아무 벼슬을 하였다.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낳았는데, 아들은 경운(慶運)이고 딸 다섯은 모두 어리다.
공은 남들보다 뛰어나고 재예(才藝)가 있었다. 중추공이 간결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부자(父子) 사이가 지기(知己)와 같았다. 형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계모에게서 난 아우가 하나 있었는데 중추공이 늙어서는 이 아우를 매우 사랑하였다. 한번은 이 아우가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공이 종기를 입으로 빨아 병이 나았다. 공이 벼슬이 높아진 뒤에는 재산을 모두 형수와 여러 매씨(妹氏)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자기는 하나도 차지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이 재산이 아니라도 얼거나 주리지는 않을 것이다.”하였다.
효종에게 신임을 받아 그 재능을 숨기지 않고 다 폈다. 벼슬을 하여 직무를 맡아서는 굳세고 준절하였으며 아부하는 짓을 좋아하지 않았다. 번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더욱 능력이 있었으므로 수령으로 다스린 고을마다 모두 잘 다스린다는 칭송이 있었다. 바야흐로 세상의 도의가 크게 무너져 참소와 질투가 틈을 타는 시대를 만나 불우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세태가 투박해지니 / 世之偸
파당을 지어 서로 원수가 되네 / 朋黨相仇
참소하는 자가 설쳐대고 / 讒夫之熾
선량한 사람이 버림을 받네 / 良善之棄
사람들 왁자지껄 헐뜯어도 / 潝兮訿兮
마음엔 한 점 부끄럼 없다네 / 心不媿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