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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만’이란 거만하고 교만한 것으로, ‘오만’이란 행동이 거칠고 어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교만’은 남을 무시하고 자기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오만한 사람은 예의를 벗어나서 굽힐 줄 모르는 목이 꼿꼿한 사람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말을 한다.
그런데 ‘오만’의 일반적인 뜻을 신앙정신 사상 면으로 볼 때는 첫 번째는 인간 자기에 대한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 이건 완전히 불신자이고, 두 번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게 다 신앙 사상적으로 연결이 돼 있다.
그 다음에 또 보면 인간 자기의 출생목적, 그리고 재세기간의 존재목적, 그러니까 ‘내가 왜 태어났느냐’ 하는 태어난 목적, 그리고 태어났으면 사는 목적이 있는 건데 이 목적을 모르는 것, 그리고 자기에게 사건과 환경이 왜 교체되어 오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 자기의 마음을 못 다스리는 사람들, 또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사람들, 또 세상을 원망 불평하며 남만 정죄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오만한 자들이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그 자리, 그 회의에 가서 앉지를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모임에서는 무엇을 계획하고 행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곳에 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다. 망할 것을 모의하고, 망할 짓을 하고, 심판받을 짓을 왜 하겠느냐? 그러니까 왜 그런 곳에 가서 앉겠느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사건을 의논할 때 ‘앉아서 무엇을 의논하는가’ 하며 그저 별 생각 없이 가서 듣는 경우가 있는데, 기독자들이라도 이방사람들이 일반 사회적인 윤리적인 면에서 좋을 일을 하는 모임이라면 가서 앉을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도웁시다’ 할 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신앙적으로 보면 이건 일반과라.
일반과는 일반 도덕적인 행위를 말한다. 이건 일반과로서 따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사회적으나 국가적으로 대사에 속하는 거, 가령 지방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적인 어떤 일을 반대하는 그런 일에 기독교인들이 그들과 같이 모여서 의논을 할 수 있겠느냐? 주변사람들이 모여서 ‘불쌍한 사람을 도웁시다’ 한다면 이런 일에는 기독교인이라도 같이 할 수가 있겠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고,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으로 국가적인 어떤 일을 반대하는 곳에 들어가서 그 일을 같이 하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른 거다.
국가적인 일이라도 그 일이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 기독교인들이 주격이 되어서 반대를 할 때는 우리가 혹 그 일에 같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방 불신세상 사람들이 주격이 돼 있는 모임이라면 그런 곳의 소원 목적이 어떤 것이며, 그런 곳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 빤한 것인데도 그런 곳에 들어가서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예를 들면 목사님들의 모임이라고 하면 의례히 ‘하나님이 뜻을 위해서 모이겠지’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 아닌, 말하자면 사회에 반감을 품은 모임이라면 아무리 목사님들의 모임이라도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 ‘여기는 내가 앉을 곳이 아니구나’ 하고 나와야 한다.
목사님들의 모임과, 세상 사람들의 모임의 성격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왜?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그에 앞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이는 사람들의 신앙사상의 질이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모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 모임의 신앙사상이 대강 드러나는 거다. 신본주의가 모이는 곳이라면 의례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생각할 거고, 인본주의의 모임이라면 세상에 대한 어떤 종교적 사업이나 그런 면이 목적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럴 경우에 왜 거기에 가서 앉겠느냐? 그런 곳에서 어떤 의논이 형성되기 전에 그 사람들의 신앙사상이, 소원과 목적과 향방이 정해져 있는데 왜 그런 곳에 가서 앉겠느냐?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의논의 대상이 안 되는 거다. 오만한 자리란 그런 면을 말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서 주격자 주동자가 돼버린다.
구약성경의 아합 왕을 일반적으로 보면 정치를 잘하는 왕이다. 그런데 신앙사상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악인이라. 아합 왕은 신앙의 길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길이 아니다. 좁은 길, 생명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가는 왕이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면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고 백성들의 인격의 차원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아합 왕은 이방나라의 이세벨을 끌어다가 아내로 삼고 이세벨의 조종을 받았다. 그래서 이세벨이 자기 나라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끌어다가 이스라엘 안에서 주동자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냐 하면 신앙사상적으로 종교업적으로 나가는 그런 면을 말하는 거다.
이 아합 왕이 남조 유다 여호사밧 왕에게 ‘옛날에 우리 땅이었던 길르앗 라못을 다시 빼앗으러 가자’고 하니까 남조의 여호사밧 왕이 ‘북조와는 한 형제 국이니 같이 갑시다’ 하면서 그 전쟁에 동원이 돼서 싸우러 나갔다. 사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는 형제 국이다. 옛날에는 통일 이스라엘이었었는데 솔로몬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남북이 갈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때 당시로 보면 북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형제 국이라고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 때 길르앗 라못을 먹으러 갈 때 그냥 간 게 아니라 400인의 바알 선지자들의 동의를 얻고 갔다. 다시 말하면 400명의 거짓된 목사들의 안수를 받고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적 제도적인 합리화가 돼서 나간 것이다. 그 과정이 400면의 바알 선지자들은 싸우러 가라고 했고,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은 ‘가지 말라. 가면 죽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400 대 1이다. 그러니 미가야 선지자의 말이 먹히겠느냐? 한 사람의 주장을 듣겠느냐? 시드기야 선지자는 철뿔을 가지고 이리 저리 찌르면서 이긴다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합 왕은 400명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안수를 받고, 동의를 받고 주의 이름으로 합리화 시켜서 나가는 거다. 그러나 그의 속은 세상성이다.
그런데 그 전쟁에 같이 동원이 된 여호사밧 왕이 선지자에게 호되게 책망을 들었다. 왜 그런 데 가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돕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하자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취하려는 욕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보지 못하는 신앙사상이기 때문에 책망을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 속에도 자기 몸 밖의 것을 먹으려는 목적으로 예수이름으로 가는 것, 믿음으로 가는 것이 많다. 자기의 신앙의 소원 목적이 세상 것을 목적하고 나가는 것이 많다. ‘네가 그런 걸 왜 하고 그런 일을 왜 도와주느냐? 네 목숨이 두 개냐? 네 목숨이 남아돌아가거들랑 네가 그 짓을 하라’ 그런 말이다. 이게 오만한 자들이다. 우리가 신앙 사상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손잡고 일합시다’ 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데는 안 간다. 왜? 시편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 오만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그런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안 간다. 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그 일을 도와서 하겠느냐? 그래서 기독교 내의 종교적인 그룹활동을 아주 유심히 봐야 한다. 웬만하면 드러나 버린다. 그런 곳에는 갈 필요가 없다. 가면 안 된다.
쉬운 예를 든다면 ‘대한민국을 복음화 합시다’ 하는 모임이나 그런 전도행사가 있는데 이거는 종교업적주의다. 전도는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을 동원시켜서 바람을 불어넣어서 모두 뜨겁게 달궈서 ‘믿사옵니다’ 하며 ‘의싸 의싸’ 하고 나가는 그것이 전도가 아니다. 전도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행:에서 보면 성령의 감동 감화로 나가지 않더냐? 그 성령의 감동 감화성이 성경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게 된 거냐? 아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바람을 집어넣어서 ‘전도하러 갑시다’ 그런 게 아니다.
오만한 사람은 목이 꼿꼿한 사람, 한 마디로 말하면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만 세우는 목이 꼿꼿한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자리에 앉지를 않는다. 또한 그런 생각으로 나가지를 않는다. 그런 곳이 자기가 앉을 자리인 것처럼 생각을 가지고 살지를 않는다 그 말이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율법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사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지혜지식이요, 하나님의 도덕적인 말씀이요, 하나님의 능력적인 말씀이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다. 지혜지식이 무한히 나오고, 도덕성이 무한히 나오고, 능력성이 무한히 나온다. 이 말씀을 따라 살면 사람의 성질이 신령성으로 바꾸어진다. 신령한 지식으로 지혜로 바꾸어진다 그 말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있는 건데, 일반사람들은 그 바탕이 사망적인 바탕으로 돼 있다. 그러나 주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생각의 바탕은 생명적으로 돼 있다. 아예 바탕이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것으로 살아있는 이치가 들어있어서 이 말씀을 따라 살면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돼 나간다. 죽지 않을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이것이 기독자들의, 신앙자들의 생명이다. 신앙사상이 그렇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바탕은 반석이다. 바탕이 다르다. 기초가 다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사상의 바탕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사상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결국은 무너진다.
사람의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을 살려내고 영인을 성장시키는 이게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천국만큼 알게 하고, 세상을 세상만큼 알게 한다. 죄와 사망성 세상성을 알게 하여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사망권 안에 있는 것을 생명권으로 안으로 옮겨놓게 하여 영원히 존영자가 되게 하는 비결을 알게 한다. 이게 정복자다.
이 사람은 또한 모든 관계성을 바로 갖게 한다. 대신관계, 즉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바로 알게 한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대한 자아관계를 바로 알게 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다. 내가 내 마음을 알지? 천만의 말씀이다. 눈이 어두워서 사람을 볼 줄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 모르는 거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생명 길로 가는지 사망 길로 가는지를 아느냐?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당신은 지금 어느 사상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느냐? 전혀 모른다. 감도 못 잡는다. 사망 길로 가고 있고 죄의 종으로 되어 있는데도 자기는 ‘내 마음대로 산다. 내 자유로 산다’ 하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아관계를 바로 알게 하고, 대인관계를 바로 알게 한다. 그리고 자기와 사건과의 관계인 물질관계를 바로 알게 한다. 관계성을 바로 갖게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관계를 죽었다 깨어나도 전혀 모른다. 믿는 사람이라도 안 가르쳐 주면 모르는 거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모른다면 모른 채로 예수 믿고 밥만 먹고 살다가 가는 거다. 이건 짐승과 같은 거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하고, 천국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용하게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법을 지키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나고, 생명법을 어기면 자기의 신앙생명이 죽는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여 주여’ 하면서도 이 이치를 몰라서 생명법을 어기면서 예수를 믿으니 수십 년을 믿고 충성봉사를 해도 깨닫는 것은 하나도 못 자라난다. 이유가 그렇게 돼 있다. 왜 신앙 믿음이 못 자라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이치를 모르느냐? 왜 성경을 모르느냐? 그 이유는 법을 어기며 믿고 있다 그 말이다.
우리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도 이걸 알아야 하는데 모르고 있다. 무조건 예수 믿고, 무조건 부르짖고 하는 이건 이치가 될 수가 없다. 성경말씀은 이치다.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다. 혼잡 혼동 혼성된 하나님이 아니다. 질서정연한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버스를 탈 때 질서정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는 신앙사상적인 면에서 모든 관계성적인 면에서 질서정연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신사냐?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에 촌놈이 많다. 촌사람을 촌놈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라 이건 숙맥이라는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촌놈만 있는 게 아니라 무당도 참 많다. 그러니 정신이 없는 거다. 무당 자기가 알기는 뭘 아느냐? 자기가 지옥에 간다는 걸 아느냐? 그러니 정신이 없고 소란스럽고 혼란한 곳이 교회 안이다.
부흥집회를 하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정신 사상이 정립이 돼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교회마다 집회를 한 번씩 하면 어째서 무당 식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이 나오느냐? 정신이 없다. 그런 게 교회가 아니다. 바른 교훈이라면 모든 관계성에서 정립이 돼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통이 아주 깨끗해지고 명철해진다.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기면 인격 면이 죽고, 생명법을 어기면 신앙생명이 죽고,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면 이룰구원이 잘 이뤄진다. 관계성이 잘 돼 나간다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법을 어기면 자연목숨이 죽고, 자연법을 지키면 사람이 생활면에서 많은 혜택을 받는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야로’ 하는 게 낮에도 교회에 가고 밤에도 교회에서 살고, 맨날 그런다는 의미가 아니다. ‘묵상’은 성경구절을 암송한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새김질을 말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구원도리가 율법에는 무한히 들어있다. 이 구원도리를 깨닫는 사람이 복된 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서도 일반적인 세상지식을 많이 연구를 하고 습득을 한 자는 자기의 꾀대로 그 지식을 가지고 생활면에 혜택을 누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빈부의 격차가 나온다. 영광의 격차가 나온다. 안고의 격차가 나오고, 강약의 격차가 나오고, 활동의 격차가 나오고, 누림의 격차, 실력의 격차, 지식의 격차가 많이 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서도 영적인 진리지식도 마찬가지로 격차가 나고 있다.
성경에 보면 구약 솔로몬 때 에디오피아의 시바여왕이 이스라엘에 유명한 지혜의 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보물을 가지고 왔다. 와서 보니 계단만 보고도 깜짝 놀랐다. 그걸 보고 시바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한 말이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놀랍다. 당신의 나라의 종들, 신하들, 당신의 백성들이 참 복되다’ 라고 했다. 흘러내려오는 얘기로는 그 때 당시 시바여왕이 솔로몬의 씨를 받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씨만 받아가서는 안 되겠기에 행:에 간다게 내시가 와서 복음을 받아갔다. 그래서 에디오피아에는 기독교가 지금도 있다.
인간 자기가 어느 지식을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삼느냐에 따라 자기의 가치와 판단과 평가성이 달라진다. 이방 불신자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을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삼고 이 지식으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있고, 기독자들은 진리지식, 생명의 지식이 자기 속에 들어있어서 이 지식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판단을 해야 한다. 거기에 따라서 완전히 판단과 평가성이 달라진다.
안 믿는 일반 사회적인 지식으로 판단 평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변질되고 불타지는 시간과, 사상과, 목적에 속한 것으로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지식을 가진 기독자들은 그 지식이 하나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같기 때문에 그 판단 평가성은 영원에 내려진다.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배움이 굉장히 중요한 거다. ‘성도들에게 어느 지식을 주격적인 지식으로 넣어주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다. 인도자들이 이걸 알아야 한다. 무조건 ‘예수 믿고 구하라. 그러면 만사형통이 될 거다’ 하는 것은 무당집에서나 될 일이다. 이런 게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 모든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면 자기의 주격적 지식은 진리지식이라야 확실한 거다. 이게 믿음의 지식이다. 이 지식에서 자기의 가치판단 평가성이 나오는 것은 정확한 거다. 그렇지 않고 엉뚱한 것을 배워 와서 신앙이란답시고 말을 하게 되면 이건 완전히 세상적 종교적인 업적에 내려지게 된다. 덩어리 큰 거, 부피 큰 거, 종교적인 행사 이런 걸 잘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갖다 붙이게 된다. 이건 믿음이 아니다. 이건 자유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자기의 주격적 지식이 어느 지식이냐? 세상적 땅의 사상과, 영원한 궁극적 신령세계의 사상은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결과성이 나게 된다.
자기의 주격적 지식이 하늘의 것이냐, 땅의 것이냐?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하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땅의 지식을 가지고,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면 이것은 하나의 수양 식으로, 하나의 종교인으로 믿는 것이다. 이 차원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심판밖에 안 된다.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속에 땅의 수입을 보고자 하나의 종교 지식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신앙인이 아니다. 이건 성도가 아니라 하나의 교인에 불과한 거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야’란 일반적으로 낮과 밤을 말한다. ‘시도 때도 없이 항상’ 그런 의미다. ‘너는 밤낮없이 쉬지 않고 일만 하느냐? 그러다가는 네 몸이 병든다. 너는 시도 때도 없이 밤낮 놀기만 하느냐?’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세상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돈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어떤 사업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등등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시는 ‘낮’이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환경이 밝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일이 잘 풀려서 살기가 좋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밤’이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환경이 어둡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살기가 어렵고 고통을 받거나 환난 핍박을 받는 환경을 말한다.
환경이 좋다고 해서 그만 그 환경에 휘말려서, 푹 빠져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환경이 나쁘면 그만 그 나쁜 환경에 빠져서 죽겠다고 하며 세상을 원망하고 남 원망하느라고 헤어 나오지 못하고 환경의 노예가 되고 환경이 소산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좋은 환경이 오면 막 웃다가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울상이 되는 사람은 환경의 소산이다.
돈을 많이 벌 때는 기분이 좋아서 천 년 만 년 평화로울 것 같다가도 뭐가 일이 조금 안 되면 집에 들어와서 마누라를 두들겨 패고,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며 자식들을 두들겨 패는 사람은 환경의 소산이다. 이 사람은 환경에 놀고 있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렵던 부요든 그걸 잘 다스려 나가며 그 때마다 사람이 잘 만들어져 나간다면 이게 얼마나 좋으냐?
자기 주위의 환경은 자기가 그 환경을 만들 수도 있고, 내가 원치 않는 환경이 올 수도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 면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환경을 주시던, 마귀가 어떤 사건을 들고 와서 자기에게 시험을 하던 상관이 없이, 가난이 오던 부자가 되던 상관없이 그 마음이 그런 것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는 것은 부요든 가난이던, 환난이던 핍박이던, 잘 사는 시대이던 못 사는 시대이던 상관이 없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그 때마다 관계성을 잘 지어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이냐? 진짜 사람이다. 멋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환난 핍박 때도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 상황도 아닌데 살짝만 어려워도 ‘나 죽네. 나 죽네’ 한다면 이게 뭐냐? 또 사건이 와서 살짝 때리면 제가 제 바람이 자빠져서 기절초풍을 한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가령 부모가 그런다면 그의 자식도 마찬가지다. 사건이 오기 전에, 얻어맞기 전에 ‘날 살리라’고 하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