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보츠와나(Botswana)의 오카방고(Okavango)에서 혹멧돼지 한마리가 길을 가다 우연히 길목을 기다리던 사자 무리에게 목덜미를 물려 운명의 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사람도 어느날 불치병을 선고 받거나 뜻밖의 치명적인 사고라도 당한다면 삶의 여정을 멈출 수 밖에 없다.
혹멧돼지가 큰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이 없음에도 처참한 죽음의 주인공이 된 것은 단지 그날 운수가 사나웠을 뿐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운명도 같은 것이 아닐까.
탄생의 축복과 기쁨이 큰 만큼 죽음의 고통은 크고 참혹한 것이 가차없는 우주의 법칙이요 냉혹한 현실이다.
사자가 임팔라의 목줄을 물고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을 포악하다 하고 살아 있는 초식동물의 내장을 뜯어 먹으며 뒤쫒고 있는 하이에나나 리카온(아프리카 들개) 무리들을 끔찍하고 잔인하다 할 수 있을까.
포식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신의 섭리요 자연의 법칙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런 삶의 과정일 뿐이다.
고개를 돌려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 인간과 동물은 그런면에서 큰 차이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인간은 먹이 사슬의 최고 포식자 위치에서 거의 모든 동물을 무차별 도살해서 먹어치운다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살육의 방법이 짐승들과 조금 다른것 이외에는.
남의 살을 뜯어 먹고 살아야 되는 서글픈 현실은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신(神)이 존재 한다면 왜 육식동물(잡식동물 포함)을 창조하여 먹고 먹히는 살벌한 세상을 만들었는지 원망스럽고 궁금할 때가 있다.
지구상에 초식동물만 있다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최소한 없지 않겠는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하게 된다.
필자는 한 때 사자는 초원의 제왕이며 최고 포식자니까 먹고 싶을때 원하는 먹이를 손쉽게 잡아 먹으면서 안락한 일생을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새끼가 자라면 자신들의 포식자가 된다는 것을 아는 하이에나나 표범 같은 다른 맹수들의 견제로 태어나서 성체가 되기까지 삼분의 일 정도만 살아 남는다고 한다.
남미에 주로 서식하는 재규어는 수영에 능숙해서 잠수하여 악어를 전리품으로 물고 나오는 일도 흔하지만 물에 익숙하지 못한 사자는 성체가 된 후에도 강에 들어갔다 악어의 공격을 받아 다리나 꼬리를 잃기도 하는등 일생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늙고 병들어 기력이 쇠하면 수십마리 떼를 지어 달려드는 하이에나나 리카온 무리들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거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생전의 환호와 기쁨이 언제 죽음의 비극과 참혹함으로 끝날 지 알 수 없는 한평생.
삶의 여정이 끝나기까지 롤러코스트(roller coaster) 같은 피할 수 없는 수많은 고비와 난관, 그리고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목숨을 건 싸움의 순간들.
짐승이든 인간이든 그 생명줄이 언제 끊어질 지 알수 없는 것이 모든 동물의 한계요 운명이지만 손등과 손바닥처럼 생사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우린 좀 더 겸허해 질 수 있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지 되새기며 생전의 축복과 기쁨을 최대한 누리고져 애쓰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살면서 맞닥뜨리는 역경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근성과 내공을 키우는데 있어서 산행은 자양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