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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종교,철학,사상 스크랩 서양사상 들뢰즈와 가타리: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멩이 추천 0 조회 178 08.02.08 23: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들뢰즈와 가타리: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이 진 경

  

 

 

 

 

 

들뢰즈(Gille Deleuze)는 대학에서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고,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의과대학을 나와 실험적인 정신분석을 하던 정신의학자였습니다. 들뢰즈는 니체와 스피노자, 베르그송, 에피쿠로스 등 생성을 사유하고자 했던 여러 철학자들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우선은 니체주의자였다면,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고 68년 5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맑스주의자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68년 혁명을 전후해서였다고 해요. 그 시기는 60년대를 풍미하던 구조주의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푸코나 라캉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로 ‘전향’하던 시기였지요.

 

한편 60년대는 또 소쉬르나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이 다양한 형태의 기호학으로 확장되던 시기였고, 그와 더불어 정신분석학이 각광받던 시기였습니다. 들뢰즈는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변이에 주목하고자 했던 니체주의자였기에 구조주의자가 되긴 힘들었고, 표상에서 벗어난 사유를 꿈꾸던 스피노자주의자였기에 언어학이나 기호학, 혹은 정신분석학에 빠져들기 힘들었지요.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시대를 장악하고 주도해간 사상에서 동떨어져 사유할 순 없었을 겁니다. 마치 니체주의자인 푸코가 구조주의의 영향력을 지울 수 없는 󰡔�말과 사물󰡕�이란 책을 썼던 것처럼, 들뢰즈 역시 구조주의에서 무언가를 배웠고 언어학과는 다른 방식으로지만 ‘의미의 논리’에 대해 사유하려고 했으며, 프로이트는 아니더라도 정신분석학적 연구(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를 자신의 연구에 원용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에 출판된 󰡔�의미의 논리󰡕�는 이런 양상을 아주 잘 보여주지요.

 

반면 라캉의 영향 아래 있던 정신의학자 가타리는 오히려 정신분석학의 한계와 난점에 대해 먼저 주목했었고, 구조주의적 관념에서 자유로웠다고 해요. 가타리가 나서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은 많은 말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주로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누가 말하고 누가 들었을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공동작업을 서둘렀던 것은 반대로 들뢰즈였다고 합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에 대한 가타리의 비판에 대해 적극 반기면서 빨리 출판하자고 재촉했다고 해요. 어쨌건 간에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위대한 공동저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그 두 사람의 이름으로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1975),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2󰡕�(1980), 󰡔�철학이란 무엇인가?󰡕�(1990)라는 네 권의 책이 출판됩니다.

 

하지만 철학적 지반 위에서 이들의 저작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뢰즈의 중요한 저작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차이의 철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정식화한 󰡔�차이와 반복󰡕�(1968)과, 이를 ‘사건의 철학’으로 변형시키면서 구체적인 개념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마련한 󰡔�의미의 논리󰡕�(1969)는 이후의 공동저작들 전체에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1. 차이의 철학

 

 

 

 

들뢰즈의 철학을 특징짓는 많은 명칭들이 있습니다. ‘차이의 철학’, ‘사건의 철학’, ‘탈주의 철학’, ‘유목의 철학’, ‘생성의 철학’, 혹은 ‘욕망의 정치학’, ‘분열분석학’ 등등. 이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차이의 철학’이란 명칭입니다. 사실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벼리어내고 그것을 사유의 중심적인 고리로 만들었던 사람이 들뢰즈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데리다 역시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지만, 이를 ‘지연시키다’와 결합하여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었지요. 물론 불어에서 두 단어는 같은 발음을 갖지만, 우리는 사실 충분히 변별되는 개념으로 그 개념을 이해하지요. 그래서 ‘차연’이란 말이 데리다의 개념이라면, ‘차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개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아, 그리고 지금 말하긴 어렵지만 개념의 내용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 정도만 언급해야겠군요.

 

아무튼 들뢰즈 이후 차이의 철학은 전반적인 수긍의 단계를 넘어서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사람들도 ‘차이의 철학’ 내지 ‘차이의 정치학’을 내세워 말하고 글을 써내고 있지요. 반면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라는 말만 들으면 못마땅한 얼굴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개는 헤겔 철학을 전공하거나 좋아하시는 분들이지요. 이유는,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의 철학’ 내지 ‘동일자의 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런 철학 가운데서도 가장 교묘한 상대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게 바로 헤겔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들뢰즈는 헤겔만이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을 그런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유독 헤겔 전공자들이 심하게 반발하고 못마땅해 하는 건 약간 기이한 현상이긴 합니다.

 

차이의 철학에 대한 반박은 대개 비슷비슷합니다. “헤겔 철학이 차이에 대해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헤겔 철학에서도 차이가 고려되고 있다”, 혹은 “동일성 없는 차이 개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역으로 차이 없는 동일성 개념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동일성의 철학이 대체 어디 있으며, 동일성을 포함하지 않는 차이의 철학이 대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동일성과 차이의 대립만을 본다는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잘못된 것이다.” 등등.

 

물론입니다. 동일성은 차이를 전제하며, 차이 또한 마찬가집니다. 들뢰즈 역시 동일성의 철학이 차이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거나 차이 개념을 제거한다고 할 정도로 단순한 사람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의 철학이 차이만 말하려고 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자면, 문제는 차라리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동일성에 귀속되거나 종속되는 위치, 혹은 동일성에 비해 이차적인 지위를 차이 개념에 할당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경우로 대표적인 것은 분류학에서 사용하는 ‘종차’ 개념일 겁니다(아리스토텔레스). 가령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유개념 안에서 인간을 구별짓는 종적인 차이를 ‘생각하는’이라는 규정이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이라는 유개념 안에, 유적 동일성 안에서 인간이란 개념을 포섭하는 정의지요. 분류표의 선들이 보여주듯이 종은 속에, 속은 과에, 과는 목에, 목은 강에, 강은 문에, 문은 계에 포섭되는 선들을 그릴 뿐입니다. 이 경우 차이란 유적인 동일성을 보충하고 보완하는 개념일 뿐이지요.

 

다른 하나는 차이를 대립을 통해 포착하는 것입니다(헤겔). 그리너웨이의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정부>에 보면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언제나 바로크 칸타타 풍의 노래를 보이소프라노로 부르는 소년이 나옵니다. 처음엔 여자 목소리처럼 들려서 노래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호하게 보이지요. 이 소년의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일까요, 남자 목소리일까요? 소프라노니까 여성의 목소리지요. 음색도 여성적이고. 그러나 노래하는 사람은 분명 남자니, 남자 목소리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우리는 이처럼 남성의 소리, 여성의 소리로 노래소리를 양분해서 포착합니다. “아무리 그가 남자래도 저건 여자 목소리야!” 혹은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들으면서 “저건 동물의 소리야!”라고 말하게 되지요. 사람의 소리인가 동물의 소리인가 하는 이항적 대립개념 속에서 목소리를 포착하는 거지요. 이는 사실 통상적인 남자의 목소리, 통상적인 인간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소리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우리는 어느새 그 특이한 소리를 두 가지 대립 개념 안에 가두어 포착하고 있는 겁니다. 그 두 가지 대립항 속에서 목소리에 고유한 차이는 사라지고 여자 같은 남자, 동물 같은 인간이라는 대립에 동일화되고 맙니다. 이런 점에서 대립은 차이를 ‘본질적 차이’라는 이름 아래 두 개의 항의 동일성 안에 가두고 맙니다.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하는 게 아니라, 대립적인 개념 안에 포섭되고 포획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차이를 동일성에 포섭하거나 대립에 가두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할 수 있을까? 오히려 동일성조차 차이를 통해서 해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차이의 철학이 묻는 것입니다.

 

먼저, 들뢰즈에 따를 때, 차이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차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늦가을, 단풍이 한창 익어갈 때 단풍잎들을 본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혹시 거기서 빨강색을 보시나요? 나뭇잎만큼이나 다른(different) 수많은 빨강색들을 본 적은 없나요? 어쩔 수 없이 ‘빨강색’이란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정말 수많은 색들이 있지요.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 많은 색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나뭇잎이 갖고 있는, 혹은 한 잎의 각 부분이 갖는 차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상한 변화를 보는 것이지요. 모네는 이처럼 볼 때마다 무상하게 ‘달라지는’ 수련들의 차이를 매번 다르게 포착하고 그려냈지요.

 

물론 그저 “다들 다르구나” 하는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차이를 보는 것은 어떤 것이 갖는 남다른 특이성을, 다른 통상적인 것과 구별해주는 특이성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저 단풍잎들의 남다른 특이성,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저 이파리들의 색채가 갖는 특이성 말입니다. 접시를 닦으며 노래하는 저 소년의 목소리가 갖는 특이성 말입니다. 노래마다, 구절마다 수많은 표정을 갖고 달라지는 한영애의 목소리가 갖는 특이성을 유심히 들어본 적이 있나요? 금속성의 강한 목소리에서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목소리, 장난치듯 웃음이 배어나오는 목소리, 능청스레 늘어지는 목소리 등등으로 천변만화하는 그 소리의 차이를 느껴본 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 목소리의 특이성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를 그저 ‘블루스 가수의 목소리’라는 통상적인 관념으로 포착한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달라지는(스스로 차이화하는) 차이를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목소리만은 아닙니다. 맑스의 사유가 갖는 특이성, 수많은 얼굴을 갖는 그의 사유의 강밀한 특이성, 그렇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특이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정통성’의 틀 안에 갇힌 통념화된 맑스의 명제들만을 보게 될 겁니다.

 

다른 한편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차이를 제거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보는 동일자의 사유, 나아가 차이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할 것, 혹은 수용하고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는 그런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자의 사유, 동일성의 철학은 자신이 가진, 대개는 문명이나 진리라는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척도에 맞추어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척도에 맞추어 동일화하려고 합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의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흑인들의 행동을 ‘미개한 것’, 혹은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명’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동일화하려는 서구인들의 오랜 시도들이 바로 그런 태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들, 상이한 자질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적’이라는 하나의 척도에 비추어 동일화하려는 교육체제에서도 ‘동일자의 사유’ 내지 ‘동일성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차이란 고무되고 긍정되어야 할 게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것이 되고 있지요.

 

이보다는 좀 낫지만, 그렇기에 들뢰즈가 생각하는 차이의 철학과 종종 혼동되는 ‘유사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이를 부정할 게 아니라 인정하고 용인하자고 하며, 차이에 대한 관용(톨레랑스)을 주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차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 특히 부각된 것이지만,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서구의 기독교적 비난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관용의 윤리를 주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문화적 다양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문화를 일부러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정과 용인, 심지어 관용에서조차도 사실은 차이는 반갑고 고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할 어떤 것이란 점에서 여전히 부정적인 것에 멈추어 있습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래, 네가 갖는 차이를 인정하겠다”라는 용인/관용의 논리에는 “그러니 너도 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지요. 결국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오래된 자유주의적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와 다른 자신의 차이를, 사실은 자신의 동일성을 인정하고 용인하라는 동일성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달리 차이의 철학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 안에 차이를 만드는 것, 자신을 스스로 차이화하는 것입니다.

 

‘보존’의 관념을 사용하는 ‘차이의 철학’ 역시 약간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의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령 그들 말대로 서구와 다른 이슬람 문화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선 이슬람 여성들은 계속해서 차도로를 쓰고 대학이나 공직에 진출하지 못한 채 갇혀 살아야 합니다. 전통에서 벗어난 삶을 꿈꾸는 사람 역시 보존되어야 할 전통에 갇혀 동일화된 채 살아야 합니다. 서구와 이슬람의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 안에 사는 사람에겐 강력한 동일성을 보존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귀착되는 거지요.

 

들뢰즈에게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거나 그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차이를 만드는 것(make difference)’이고 나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이하는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나와 다른 것과 만나서 나 자신이 다른 것이 되는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을 통해 내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나와 다른 것을 반갑게 긍정할 수 있을 겁니다. 나와 다른 것은 내가 변이하여 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뜻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차이에 대한 진정한 긍정일 겁니다. 반대로 나와 동일한 것, 유사한 것에서는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에게도 있는 것이야!”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내야 할 무엇이며,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현재와 다른 모습으로 변이함으로써 생성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A에겐 있지만 B에겐 없는 어떤 성질(property--소유물!)이 아니라 A와 B가 만나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그것은 라는 감산의 형식으로 표시되는 게 아니라(인정, 보존의 논리는 바로 이런 감산의 형식으로 차이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남과 접속을 표시하는 +로, 라는 합산의 형식으로 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굳이 있고 없는 것을 비교하는 통념에 따라 표시한다면, A가 B와 만나 변이된 A'이 만들어낸 차이란 점에서 로 표시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이에 대해 자기 자신 안에 만들어낸 차이란 점에서 ‘내재적 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 역시 ‘동일성’이란 개념을, 우리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들뢰즈는 여기서 양자의 관계를 전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것을 모으곤 거기서 다시 차이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마저 특정한 제한과 ‘조작’을 통해 동일화된 차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란 개념입니다.

 

반복이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며, 실험실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풍잎을 ‘단풍잎’이라는 동일성의 형식으로 포착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풍잎들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에 따라 동일한 것으로 포착하는 거지요. 여러분이 ‘이진경’이란 이름으로 저에게서 하나의 동일성(identity)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대충 보는 사람에겐 동일하게 보이는 것에도 사실은 항상 미묘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노래할 때마다 한영애의 목소리는 다른 소리로 반복됩니다. 대충듣는 사람에게만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로 들리지요. 모네의 눈에 수련이나 루앙성당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네는 거기서 미세한 차이를 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지요. 우리 눈엔 동일하게 보이는 루앙성당을 그는 20여장의 다른 모습으로 포착하여 그려놓았습니다.

 

반복이란 사물이나 사실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대면하는 어떤 시선이나 정신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될 때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무상한 변화 속에 존재하는 한 어떤 것도 차이 없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반복은 언제나 차이의 반복일 뿐입니다. 모네의 눈 속에 수련이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듯이, 우리의 눈앞에 단풍잎은 언제나 다른 색깔,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여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반복은 차이의 다른 이름이며,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대충 보며 그 모든 반복을 유사성이나 유비, 대립이나 공통성을 통해 동일한 것으로 포착합니다. 그 결과 반복에 포함된 차이는 망실되고 반복되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표상됩니다. 좀더 나아가 그처럼 다른 것들 가운데서 공통된 것을, 변화하는 것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법칙과 영원성의 이름으로 찬양되고 고무됩니다. 철학이 불변의 실체를 추구하듯이, 종교는 이 무상한 변화로부터 벗어난 영원한 피안을 추구하고, 과학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항상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가령 실험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실험이란 어떤 현상에 관여된 수많은 변수들을 제거하여 가정된 어떤 하나의 변수만으로 제한하여, 그 변수가 바로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임을 보여주려는 방법입니다. 가령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피우지 않는 사람을 실험집단으로 나누어 그 결과를 비교합니다. 두 실험집단 간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난다면,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알다시피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담배를 피워도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담배를 안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가 어떤 신체와 만나는가, 어떤 다른 요인들과 결합되는가 등에 따라 그 결과는 매우 다양하게 달라지는 거지요. 그러나 실험은 이 모든 차이를 만드는 원인들을 제거합니다. 오직 담배와 폐암이라는 두 변수 간 관계만을 분리시켜 관찰하여 담배에는 원인, 폐암에는 결과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거지요. 원인상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동일한 결과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갈릴레이의 유명한 자유낙하 법칙도 마찬가집니다. 두 개의 물체는 질량이나 형태와 상관없이 동일한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 낙하속도는 다만 시간의 함수라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쇳덩어리와 종이가 동일한 속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공기의 저항 등이 관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편적 법칙을 얻기 위해 갈릴레이는 공기의 저항을, 아니 공기 자체를 제거해버립니다. ‘진공’이라고 가정하는 거지요. 그게 실제로 있든 없든 간에. 결과에서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제거하여 동일한 법칙으로 표시되는 동일한 결과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카오스이론 혹은 복잡계 이론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이론들은 이런 식으로 제거해버린 것들이 사실은 법칙 자체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초기조건의 사소한 차이가 아주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는 겁니다. 흔히들 ‘나비효과’라고 부르는 것이 그 중 하납니다. 생태학자들이 만든 아주 간단한 인구증가 방정식도 인구증가율이 얼마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결과를 갖게 된다는 것도 그런 사례의 하나지요. 이는 모두 초기조건의 차이, 원인에서의 사소한 차이가 결과에서의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자연과학에서도 반복은 원래 차이의 반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요컨대 동일성이란 차이로서의 반복에서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차이의 반복을 차이 없는 반복으로 변형시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의 반복과 차이 없는 반복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반복이 있는 겁니다. 이 가운데 무엇이 일차적인지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좋겠지요? 차이와 동일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놓치거나 제거함으로서, 혹은 축소하거나 추상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것이란 거지요. 이는 변화와 동일성, 변화와 불변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장 일차적인 ‘질료’로서 차이를 개념화하기 위해 들뢰즈는 ‘강밀도’로서 차이를 정의하며, 이전의 보편적 원리가 차지하던 자리를 차이의 개념에게 넘겨주기 위해 미분적인 차이의 ‘이념’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을 ‘특이성(singularity)’이란 개념으로 표시하고, 그러한 반복의 공간을 다루기 위해 특이점들의 분포로 규정되는 미분적인 ‘장(field)’의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선 접어두어야 할 듯합니다. 차이와 반복이란 개념이 이후 다른 개념들을 통해 ‘사건의 철학’이나 ‘탈주의 철학’, 혹은 ‘노마디즘’ 등으로 다르게 반복되는 것을 보는 게 더 흥미로울 테니 말입니다.

 

 

 

 

2. 사건의 철학과 의미의 논리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생성, 접속, 변이로서 차이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의 논리’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의미란 통상 기호학이나 언어학에서, 혹은 언어철학에서 통상 다루거나, 그게 아니면 현상학에서 다루지요. 소쉬르는 의미란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청각영상’이라고 말한 바 있지요. 이는 의미를 어떤 기호나 기표에 대응되는 어떤 것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구조주의자들은 의미를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변경될 수 없는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다룹니다.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물질성’이란 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물론 의미는 언제나 봉합된 채 고정될 뿐이어서, 봉합된 부분이 튿어지고 다른 고정점에 정박하면 의미의 망 전체가 변하게 된다고 하지만, 이 역시 봉합된 한에서는 잠정적이나마 기표들의 직조된 망 안에 고정된 어떤 것으로 의미를 다루는 것입니다. 반면 현상학은 이런 통상적인 의미에 대해 ‘판단중지’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괄호로 묶어’,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게 무언지를 보자고 하지요. 대상을 자아와 연결하는 ‘지향성(Intention)’이 바로 그런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함으로써, 의미를 주관의 내부로 끌어들입니다.

 

들뢰즈는 의미를 주관과 대상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접속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현상학과 다르고, 사물의 어떤 상태에 대응하는 것이나 기호에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접속에 따라 생성되고 쉽사리 변이하는 것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다릅니다. 사물과 구별되는 ‘사건(event, événement)’이란 개념은 이처럼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에서 의미에 접근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크다’는 것은 사물의 상태를 표시합니다. 그는 키가 크다, 그는 손이 크다 등등. 그런데 ‘커지다’는 어떤 하나의 상태를 표시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큰 것에 대해선 커진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작은 것 역시 커지는 것과 다릅니다. 커진다는 것은 작은 상태에서 큰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상태와 큰 상태의 중간에, 두 상태의 ‘사이’에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그것은 크다’는 것은 be 동사를 써서 ‘it is big'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커진다’는 ‘it become big'이라고 해야 합니다. be 동사가 사물의 상태를 표시하는 것이라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become이란 동사를 사용합니다. 전자가 ‘임’이라면 후자는 ‘됨’을 표시하는 동사지요. 불어에서는 e^tre동사와 devenir동사를, 독일어에선 sein동사와 werden동사를 각각 사용합니다. Werden이나 devenir, becoming을 ‘생성’이라고 번역하지요. 생성이란 무에서 유나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인 겁니다.

 

이처럼 사물의 상태가 어떤 고정된 지점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생성(‘되기’)은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전자가 점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선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생성과 변이의 차원에서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만남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다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사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만남·접속에 속한 것이고, 만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물들의 만남을 통해 어떤 의미가 발생할 때, 그것을 들뢰즈는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검은 반점이 있는 둥근 공을 흔히 축구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팔리지요. 그 공이 공중을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발과 만나서 네트를 넘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그 공이 발과 네트와 연결된다면 그 공을 축구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족구공이라고 해야 맞지요. 만약 그 공이 손과 그물달린 링(바스켓)과 연결된다면 어떻습니까? 이 경우 그것은 농구공으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즉 그 공의 의미는 ‘농구공’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똑같은 하나의 공이 어떤 이웃항들과 접속되는가에 따라 공의 의미는 아주 달라집니다. 즉 다른 이웃을 만나면 다른 공이 되는 겁니다. 공의 의미는 공에 대응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공에 부착되는 것도 아닙니다. 접속하는 이웃들에 따라, 이웃관계에 따라 달라지는(become different), 혹은 변이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이웃항과 접속하면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때, 그것을 ‘사건화’된다고 하고, 이렇게 복수의 사물을 하나의 계열(series)로 연결하는 것을 ‘계열화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계열화되는 선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공 얘기로는 ‘사건’이란 개념이 납득하기 어렵지요? 좀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은 사실과 다른 사건의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뭇꾼이 사람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그저 죽은 사람의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몸의 주변에는 다른 것들이 놓여있습니다. 가슴에 꽂힌 칼, 남자의 망건, 끊어진 포승줄, 망사천을 둘러친 여자의 큰 모자 등등. 여기서 우리는 나뭇꾼처럼 질문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사물을 사건화하는 질문입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살인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던지는 질문이고 또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건화하는 사물들의 계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즉 추가적으로 계열화되어야 할 항들이 남아있는 겁니다. 모자의 주인인 여자, 칼을 꽂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선 그 사람들을 잡아다 그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먼저, 칼을 꽂은 장본인임을 자처하는 도둑 타조마루는 자신이 남자를 속이곤 여자를 겁탈하고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결투를 벌이다 그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항들을 게열화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경우 사건의 의미는 여자를 두고 벌이는 남자들의 결투가 될 겁니다.

 

그러나 불려온 여자의 말은 다릅니다. 타조마루가 겁탈하고 가버린 뒤, 자신이 남편의 포승을 끊었는데,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남편의 싸늘한 시선, 경멸과 욕설을 담은 듯한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남편을 찔러 죽였다는 겁니다. 이건 또 완전히 다른 계열화의 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선 칼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대신 싸늘한 시선이 여자의 몸을 찌르고, 그로 인해 여자의 손에 든 칼이 남자의 몸을 찌릅니다. 당연히 죽음의 의미도 달라지지요.

 

영매(靈媒)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남자의 말은 그 둘과 또 다릅니다. 겁탈당한 여자를 함께 가자고 꼬드기던 도둑 앞에서, 울던 여자가 고개를 획 돌려 자신을 겨누었다고. 남편을 두고 당신을 따라갈 순 없으니 죽이고 가자고. 그 극적인 배신 앞에서 나는 절망했노라고. 놀란 타조마루는 여자를 밟고선 “이 여자 어떻게 할까? 죽일까? 네 뜻대로 하지”라고 물었고, 그 순간 자신은 이미 그 도둑을 용서했노라고. 도둑이 포승을 풀러 온 사이 여자는 도망치고, 자신은 배신의 설움에 비통해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칼을 가슴에 꽂았노라고.

 

일단 이것만으로 우리는 하나의 시신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세 개의 상이한 계열화의 선들을 보게 됩니다. 그 계열화의 선이 달라짐에 따라 사실들은 전혀 다른 사건들이 되고, 시신의 의미, 그 죽음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시신들의 이웃항들, 그 이웃관계에 따라 그것의 의미가 달라지는 거지요.

 

사실과 사건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해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긴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아, 영화가 이걸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 나뭇꾼은 자신이 감추고 있었던 또 하나의 목격담을 다시 추가합니다. 그것은 앞의 것들과 전혀 다른 계열화의 선을 따라 사물들을 사건화합니다. 이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지요.

 

여기서 사물들의 접속, 혹은 계열화를 통해 정의되는 사건의 개념이 접속을 통해 만들어지는 차이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즉 물질성을 갖는 구조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이런 저런 변형을 가해도 변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웃하는 항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렇다고 그것을 주체가 대상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하는 것이기에 결코 주관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여자를 둘러싼 결투도, 모욕적 시선에 대한 분노도, 배신에 대한 절망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원한에 의한 살인, 유산을 노린 존속살인, 강도들의 뜻하지 않은 살인 등등. 여기서 어떤 살인이 가령 유산을 노린 살인이라고 하려면, 그에 고유한 사물들의 최소한의 계열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신은 가족이나 배우자, 혹은 친족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유산이라는 재물이 계열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열이 발견된다면, 그게 미국에서 일어나든 일본에서 일어나든, 과거에 일어난 것이든 미래에 일어날 것이든 모두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런 사건의 집합을 ‘이념적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가령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이해하게 해줄 최소한의 핵심적인 요소들의 계열화를 통해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그런 요소들의 계열화가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 사건은 ‘이러이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복되는 사건은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다른 요소들을 수반하여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독약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직접 칼을 쓰기도 하고, 힘들면 청부살인을 하기도 하고 등등. 그래서 ‘이념적 사건’에 포함되는 모든 사건은 항상 어떤 ‘차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들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요.

 

 

 

 

사건은 매우 다양한 계열화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반드시 계열화되어야 할 항들이 3개라면, 사건화의 가능성은 최대한 6개(개)가 있는 셈이지요. 그게 개라면 가지 사건이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물들은 그렇게 많은 사건, 그렇게 다양한 의미로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계열화를 지배하는 어떤 힘들 때문입니다. 가령 사진 한 장을 본다고 합니다. 거기에 죽은 시신 옆에 피묻은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우리는 그를 ‘살인자’로 간주합니다. 시신-칼-피-사람이라는 계열화가 ‘살인’이라는 사건으로 계열화하게 하는 거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온 형사가 범행에 사용된 칼을 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육점 주인이 죽은 시신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식(良識)에 따라 살인자로 즉시 계열화하여 포착합니다. 그게 ‘양식’이고 흔히 말하는 ‘상식’이지요.

 

이런 점에서 ‘양식’이나 ‘상식’이란 다양한 계열화의 가능성을 제한하여 어느 하나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양식을 불어로는 봉상스(bon sens)라고 하는데, 상스sens라는 말에는 ‘의미’와 더불어 ‘방향’이란 뜻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계열화의 ‘좋은 방향’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힘이 작동하고 있는 거지요. 그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을 통상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하는 힘이며, 다른 종류의 계열화를 가로막는 힘이지요. <라쇼몽>의 여러 계열들은 통상적인 계열화, 양식에 따른 계열화와 다른 계열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양식에 따른 계열화를 끊임없이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가령 소녀와 빵과 뜀박질을 양식에 따라 계열화하는 사람은 그것을 ‘도둑질’로 사건화하지만, 채플린은 배고픔이나 굶주림으로 사건화합니다. 시위대 앞에 있는 빨간 깃발은 시위대를 이끄는 공산주의자의 적기로 사건화되지만, 그것이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들고가는 찰리와 그 뒤에 골목길에서 나와 전진하는 시위대가 그저 우연히 접속한 것임을 아는 우리는 그를 체포하러 달려드는 경찰들을 보고 웃게 됩니다.

 

이처럼 양식에 반하는 계열화를 통해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들뢰즈는 ‘역설paradox’이라고 정의합니다. 역설이란 통념을 뜻하는 그리스어 독사doxa에 ‘반하여’(against)를 뜻하는 para를 붙여 만든 말이지요. 양식이라는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여 새로운 사건으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장치라고 말하는 거지요. 예컨대 중국의 운문선사는 “부처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에 “뒷간 똥막대기다”라고 대답합니다. 보다시피 황당한 대답이지요. 그러나 운문스님은 도를 깨친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분입니다. 깨친 사람이 진지하게 대답한 겁니다. 그는 이럼으로써 질문한 사람이 부처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종류의 통념을 단박에 날려버리고 있는 거지요. 그 모든 통념들을 날려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대답인 겁니다.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different) 의미를 만드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그리는 것, 새로운 의미, 새로운 사유가능성의 지대를 여는 것, 이게 바로 양식과 역설이란 개념을 통해서 들뢰즈가 제안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논리’예요. 이런 방식으로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건성을 강조하는 ‘사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즉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나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정착적인 것’이라면, 이처럼 새로운 사건화의 선을 통해서 주어진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창안하는 것을 ‘유목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 부르는 철학 내지 정치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3. 욕망과 배치, 혹은 탈주의 철학

 

 

 

 

68년 혁명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것은 라캉이나 푸코, 알튀세르 같은 사상가는 물론, 유럽의 좌파운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상생활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대한 전복, 욕망을 죄악시하고 억압하는 금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던 이 혁명에 대해서 공산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좌파’들은 ‘소부르주아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좌파들이 대중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거꾸로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권력의 문제로 제한된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 전반으로 권력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혁명의 관념에서 벗어나 욕망과 나란히 가는 혁명을 사유하고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접속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사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일차적인 주제는 바로 욕망과 혁명을 하나의 동일한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것을 대립시키는 이론들과 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책은 68혁명을 이론화한 것으로 평가되게 되지요.

 

사실 욕망이란 개념은 짝을 이루는 ‘힘’과 더불어 들뢰즈의 철학에서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욕망이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그것은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성분, 힘의 질을 결정하는 성분, 그게 바로 권력의지지요. 어떤 힘을 x라고 쓴다면, 욕망 내지 권력의지란 이 x에 부착된 채 그것을 방향짓는 미분적 성분 dx라고 쓸 수 있습니다. ‘미분적’이란 말 differential이 ‘차이’에서 파생된 형용사고 ‘차이적’이란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여기서 차이라는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볼 수 있을 겁니다. 차이를 ‘이념’으로 다루기 위해 들뢰즈가 사용한 개념 역시 dx였다는 것을 혹시 안다면, 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개념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힘이란 ‘할 수 있는 것(can)’이라면 의지 내지 욕망이란 ‘하려고 하는 것(will)'입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즉 힘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걸 아무 곳에나 사용하진 않습니다. 그 힘으로 그림을 그릴 건지, 글을 쓸 건지, 남을 두들겨 팰 건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이지요. 그러나 거꾸로 욕망은 힘에 의거해서 생기고 작동합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축구를 하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아주 미약한 강도를 가질 겁니다.

 

이를 이해한다면 욕망이란 모든 활동을 생산하는 추동력이며, 힘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있겠지요?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생산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둘 개념을 합쳐서 ‘욕망하는 생산(desiring 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경제적인 차원의 생산이나 소비, 분배 등을 생산하는 것도, 성적인 활동을 생산하는 것도 모두 이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말합니다. 차이는 그러한 욕망하는 생산이 어디에 어떤 강도로 투여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욕망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성욕이고, 그 성욕은 일차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성욕이며, 이로 인해 그 욕망을 거세하는 오이디푸스적 억압이 발생한다고 하지요. 그림을 그리거나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거나 ‘정치’를 하려는 모든 욕망은 이 성욕이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리비도의 사회적인 투여는 그것이 탈성욕화되고 승화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지요.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사회적 투여가 가족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혁명운동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성욕이 승화된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지요. 모든 욕망은 사회적이며, 가족적 투여에 대해 사회적 투여가 일차적이라고. 그것이 가족적 투여, 성적인 투여로 제한되게 된 것은 부르주아 가족과 결부된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다. 무의식은 고아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무의식은 사회·역사적이라고 말하는 셈이지요.

 

 

 

 

그런데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 양태로 존재하지요. 돈을 벌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등으로 말입니다. 즉 욕망 일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조건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이런저런 욕망’이, ‘어떤 욕망’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과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욕망이 발생하고 작용하게 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령 애인과 만나면 안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고 그것이 사랑의 행위를 생산하지만, 요리와 만나면 먹고 싶다는 욕망이, 진열장에 놓인 멋진 상품들과 만나면 사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합니다. 애인과 만나서 돈을 벌고 싶다고 욕망한다면, 그는 사실은 아직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아니면 자본관계 속으로 어떤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지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욕망이란 ‘나’라는 주체에 속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나와 만나는 것들에 속한다고, 정확히 말하면 나와 그것들의 관계에 속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어떤 것들과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다른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물들의 계열화를 통해 어떤 관계를 표시할 때, 이를 ‘배치(불어로는 agencement, 영어로는 arrangement)’라고 말합니다. ‘사건’을 정의하는 ‘계열화’ 개념이 여기서는 관계를 표시하는 개념으로 변형되어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배치에 속하는 것이지 ‘나’나 어떤 ‘인간’ 같은 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언제나 배치로서 존재하며, 거꾸로 배치는 언제나 욕망의 배치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화폐를 증식시키고 싶다는 ‘증식욕’은 맑스가 ‘자본의 일반적 공식’이라고 말했던 배치로 표현됩니다. 맑스는 이를 M-C-M'이라고 표시한 바 있지요(M은 화폐, C는 상품, M'=M+m). 반면 화폐와 상품의 순서만 바꾼 소생산의 배치(C-M-C')은 갖고 있는 걸 상품(C)으로 팔아서 다른 상품(C')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합니다. 한편 누구든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간다면, 그는 화폐의 증식을 욕망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성품이 착하던 사람도 이 배치 안에서는 오직 자본의 증식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례를 주변에서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처럼 배치 내지 관계는 그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특정한 욕망으로 ‘끌어들입니다’(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한다’고 표현합니다). 자본의 배치는 착한 사람이든 계산에 밝은 사람이든 증식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사랑의 배치는 쑥맥인 사람도 열정적인 구애의 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이 영토화하는 성분이 계속 작동하는 한, 그 배치는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겠지요. 배치를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 욕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특정한 양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증식 욕망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화폐에 눈이 먼 사람들로, ‘자본가’로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권력이 되어 작동합니다. 사랑에 눈 먼 사람이 ‘사랑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이 역시 사랑의 배치 안에서 사랑의 욕망이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권력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욕망이 권력을 욕망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욕망이 바로 권력이다”라는 거지요. 따라서 모든 배치가 욕망의 배치라면, 그것은 또한 모두 ‘권력의 배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배치, 권력에 의해 유지되고 지속되는 배치란 뜻이지요. 물론 욕망이 그대로 권력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욕망이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그 상태의 동일성을 지속하려는 힘이 될 때 그런 것이란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욕망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권력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권력에 대해 욕망이 일차적이라고 보며, 모든 배치는 권력의 배치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욕망이 작동하는 모든 곳, 즉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학교, 공장, 가족, 예술 등등. 권력은 그저 국가기구에 관련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결부된 모든 배치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거꾸로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포착하기 위해 이들은 이런 식으로 권력을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런저런 차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구조’ 개념과 달리, ‘배치’란 개념은 계열화되는 항들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혹은 어떤 하나를 추가하거나 빼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종류의 배치로 변환되는 것이란 점에서 매우 큰 가변성을 향해 열려 있는 개념입니다. 어떤 항이 우연적으로 나타나 기존의 계열 속의 어떤 항에 접속되는 것만으로도 배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카메라에 연속적으로 작동하는 셔터가 달리게 되었을 때, 움직임을 이미지로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배치가 출현합니다. 또 대포에 바퀴가 달리게 되었을 때, 성벽을 무력화시키고 전쟁의 전술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새로운 배치가 출현하지요.

 

이처럼 어떤 새로운 항의 추가나 제거, 대체함으로써, 혹은 순서의 변경 등을 통해 기존의 배치를 다른 것으로 변환시키는 지점을 ‘탈영토화의 첨점’이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배치에서 ‘벗어나는’(‘탈영토화하는’) 지점, 가장 빨리 벗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물론 변환된 새로운 배치는 하나의 배치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힘을 갖지만, 동시에 또 다른 배치로 변환될 수 있는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배치는 ‘영토성’과 더불어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욕망과 혁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란 기존의 관계를 전복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를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사용하면, 기존에 주어진 배치를 전복하여 다른 배치로 변환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기존의 배치를 유지하는 욕망, 기존의 배치에 길든 욕망을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배치, 새로운 욕망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를 ‘탈주선’을 그린다고도 말합니다. 탈주란 기존의 배치 안에서 정해진 것, 고정된 것, 강제되는 것에서 ‘벗어나 달리는 것’이고, 기존의 지배적인 가치나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탈주란 세상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기존의 세계로부터 ‘도망치게’(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욕망은 배치로서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의 배치에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흐름이며, 이 흐름은 주어진 배치가 만들어놓은 벽이나 선분(segment)들에 갇히지만 차면 흘러넘치며 다른 배치를 향한 탈영토화 운동을 야기합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일차적으로 탈주적인 흐름이라고 하지요. 이들이 말하는 욕망의 이론을 종종 ‘탈주의 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섭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 그것을 바꾸어버리고 주어진 벽을 벗어나 탈영토화 운동을 야기하는 탈주적인 욕망의 흐름은 혁명의 개념과 쉽게 연결됩니다. 혁명이 기존의 세계, 기존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탈주적인 욕망의 흐름에 의해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혁명이란 욕망이고 욕망된 것이기에 가능한 거라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의무로써 혁명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욕망이 발동하여 작동하게 고무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 진정 강력한 힘을 갖고 추동하게 만드는 방법이란 거지요.

 

예를 들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이란 자본주의적 욕망의 억압이라는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순 없으며, 그와 다른 욕망이 생성되어 작동하는 긍정적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코뮨주의적 욕망이 발동하여 작동할 수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기존의 관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은 이런 긍정적 과정이 없다면 폐허만을 남기는 부정에 머물고 말지요. 심지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관계나 배치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긍정적 욕망의 촉발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의 억압이라는 것에 머물렀을 때, 또 다른 금욕주의적 체제를 만들었을 때, 그것이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면당하게 된다는 것을 붕괴한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는 잘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4. 노마디즘

 

 

 

 

정착민은 정해진 한 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붙박히지 않고 여러 곳을 이동하여 사는 사람들이지요. 노마디즘, 혹은 유목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스타일, 하나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영토화 운동 속에서 사는 방식을 말합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야, 저건 나의 전공영역(영토!)가 아니니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 하는 식의 태도는 하나의 영토에 머물러 살아가는 전형적인 정착민의 태도지요. 반 고호처럼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토 안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거기서조차 인상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스타일을 변형시켜 사용하지요. 인상주의자들의 점묘적인 터치는 이제 색채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대신에 힘차게 운동하는 표현적인 선이 됩니다. 그것은 심지어 새로 도착한 영토에도 머물지 않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낸 것에도 머물지 않고 또 다른 탈영토화 운동을 향해, 자기와 다른 것들과 만나면서 자신을 이전의 자신과 다른 것으로 만드는(차이를 만드는!) 운동을 향해 열려 있을 때, 노마디즘이라는 말은 충분한 타당성을 갖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마디즘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거나 거기에 자리잡는 태도(재영토화)가 아니라, 머물고 있는 게 어느 영토든 간에 항상 떠날 수 있는 태도(탈영토화)를 말합니다. 즉 그것은 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에 의해 정의됩니다. 재영토화하기 위해 탈영토화하는 게 아니라, 탈영토화의 운동 안에서 잠정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점과 선의 관계로 구별합니다. 사실 정착민도 이동하며, 유목민도 멈추기 때문에, 이동이나 탈영토화를 유목민에 대응시키고, 정지나 재영토화를 정착민에 대응시키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정착민은 예컨대 이사를 가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처럼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이동합니다. 유목민 역시 사막의 대상들처럼 오아시스를 찾아서 이동하지만 그것은 오아시스에 머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건 다만 이동하는 궤적 가운데 통과하는 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사가거나 출장가는 사람이 목적지를 바꿀 수는 없지요. 이동이 선을 그리고, 멈추는 곳이 점으로 표시됨을 안다면, 정착민의 경우에는 선이 점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유목민은 점이 선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활동을 조직하는 방식에서도 양자는 구별됩니다. 정착민은 영토적으로 조직됩니다. 땅을 소유하거나 땅에 긴박되는 방식으로 정착민은 조직되지요. 가령 중세의 농민들은 토지에 매여 있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아,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영주들도, 호족들도 영토를 기반으로 자신의 ‘식솔들’을 조직하며, 영토적으로 구별되지요. 그러나 유목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동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이기에, 영토를 할당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사람이나 동물의 이동의 흐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뚝을 박고 드나들 수 없는 벽이나 울타리를 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목민이었던 북미 ‘인디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울타리를 치는 유럽의 이주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유목민 역시 활동이 조직되어야 하기에, 개체들을 집합적 단위로 묶는 조직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영토적 조직방식 대신 번호적 조직방식을 사용합니다. 10개의 가구를 묶어서 10호대로 만들고 아무 숫자나 하나 부여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9소대니 5중대니 하듯이. 그런 10호대 10개를 묶어서 100호대를 만들고, 다시 아무 숫자나 부여하고, 그걸 다시 10개 묶어 1000호대를 만들어 아무 숫자나 부여하지요. 군대에서 3대대, 4사단 등으로 묶듯이 말입니다.

 

이는 몽골인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영토 단위로 편성되어 그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달리 군대는 탈영토화 운동이 중요합니다. 적을 공격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머물던 영토를 벗어나 움직이는 운동이기에, 지역적 조직 같은 영토적 조직으론 그에 걸맞는 조직을 만들 수 없습니다. 탈영토화 운동을 하면서도 집합적 움직임을 역동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조직방식이 필요한 거지요.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이 이런 이유에서 채택된 겁니다. 경찰이 정착적인 조직이라면, 군대는 유목적인 조직인 거지요. 물론 국가장치라는 정착적인 장치에 의해 포섭되고 이용되는 유목적인 조직이지만 말입니다.

 

정착민과 유목민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구별됩니다. 가령 유목민의 궤적은 정해진 경로를 가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옆으로 벗어나면서 가고, 사정에 따라 가지 않던 길로 가기도 하며, 그래서 예정과 다른 엉뚱한 곳에 이르기도 합니다. 평면 위의 물이 어느 방향으로나 흘러갈 수 있듯이, 미리 정해진 하나의 길이 없습니다. 물이 막히면 돌아가듯이,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삶의 흐름, 사람의 흐름이 흘러가는 대로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목민의 움직임은 흐름과 같습니다.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는 소용돌이 같은 흐름. 유목민의 과학이 흐름을 다루는 유체역학인 것은 이런 이유에섭니다.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갈 수 있는 공간, 이것이 바로 유목민의 공간이지요. 이를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정착민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든, 수해를 막기 위해서든 아무 곳으로나 흘러가는 흐름을, 범람하는 물의 흐름을 그대로 방치하지 못합니다. 홈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 그 홈을 따라서만 흘러가게 합니다. 사람들의 흐름이나 삶의 흐름 역시 동일합니다. 흐름의 반복적 행로가 만든 길에 만족하지 못하여, 길에다 돌을 깔고 테두리를 세워 도로로 만들지요. 울타리를 치고 홈을 파서 정해진 시점과 종점을 잇는 홈을 파고, 그 홈에 따라서만 사람들이나 삶이 흘러가게 만듭니다. 막히면 그대로 고이고 멈추고 마는 도시의 도로들이 그렇지요. 시위대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경찰의 역할, 사고의 흐름을 정해진 ‘도로’로 제한하는 학자들의 역할, 삶의 흐름을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제한하고 포섭하는 자본가들의 역할, 이 모두가 흐름의 범람을 막기 위해 홈을 파는 정착적인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홈 패인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유목은 떠돌면서 사는 방랑이나 방황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서 길 떠나는” 슈베르트의 나그네는 어디를 가도 실연의 상처를 잊지 못한 채 방랑하지요. 형수가 되어버린 애인을 잊지 못해 칼 하나 들고 강호를 넘나들고 사막을 돌아다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여자가 있는 곳에 매여 있는 <동사서독>의 구양봉은 떠돌고 방랑할 때조차 어디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유목민이 아닙니다. 상처에 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욕망의 흐름이 그 상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유목민이 아닙니다. 상처만은 아닙니다. 파우스트를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순간과도, 혹은 명예와 부, 사랑으로 빛나던 찬란한 영화의 순간과도 언제든지 이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없이는 유목민이 될 수 없습니다.

 

유목민을 다 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주민과 혼동해선 곤란합니다. 오히려 유목민은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이 된 곳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령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이후 불모가 된 맑스주의를 떠나서 다른 이념이나 ‘주의’로 이주하는 것과, 그 불모가 된 땅에 달라붙어 새로운 사유를 시도하며 다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창안하는 것이 극히 다른 것임은 잘 알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이주민과 유목민의 차이지요. 유목민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명제를 제시하지요.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역설적 개념 역시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가치의 창안, 새로운 삶의 방식의 창조, 그것을 통해서 낡은 가치를 뒤집고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것, 그게 바로 노마디즘의 요체입니다. 그것은 낡은 가치에 대한 ‘전쟁’이고,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것은 니체 말대로 ‘포연 없는 전쟁’이지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탈주선을 그리려는 욕망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러면서도 낡은 가치, 기존의 세계에 대한 혐오의 정염만을 키워가게 될 때, 그것은 그저 화약냄새로 가득찬 ‘나쁜 전쟁’으로 전환되고 말지만 말입니다. 이 경우 필경 탈주선은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탈주선을 그리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게 되고 마는 거지요. 노마디즘의 긍정적 태도는 극단적 부정의 절망적 색깔로 변색되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탈주선이 일차적이라고, 혹은 탈주적인 욕망이 일차적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탈주란 낡은 것의 파괴와 부정(낡은 것, 권력 다음에 오는 이차적인 것이란 의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긍정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낡은 것의 부정이나 파괴는 그러한 긍정의 결과 뒤따라 나오는 거지요.

 

 

 

 

반복하자면, 노마디즘에서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즉 새로운 차이를 만드는 것이고,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운 변이를 향해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를 긍정하라고 요구하는 차이의 철학에 잇닿아 있다는 걸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특정한 양상의 계열화가 반복될 때 배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 역시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배치라는 개념이 언제나 탈영토화의 첨점이라는 차이화의 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반복이 ‘구조’와 달리 차이에 대해 열려 있고 차이의 개념이 작동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의 철학, 탈주의 철학, 노마디즘 등은 모두 그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이 다른 양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들이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차이의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중요한 차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의 반복’이며 ‘차이화하는 반복’임을 덧붙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로시난테(bluechi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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