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음죽과 괭이풀의 공존
海淡 조남승
하루하루의 삶이 뭘 그리 바쁜지 절후를 살펴볼 여가도 없이 철이 바뀌어 간다. 매일같이 손녀들을 돌봐주기 위해 딸네 집엘 가려고 새벽부터 설치다 보니 괜히 시간에 쫓기어 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생활이 이어져 오면서 습관적으로 주말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게 된다. 주말을 맞은 오늘도 난 여느 때와 같이 일찍 일어났다. 하지만 아내의 처소인 안방에선 아직 인기척이 없다.
아낸 칠순이 넘어서면서부터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 많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에 서두르지 않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라며 슬렁슬렁 거실로 나온다.
난 거실에서 TV를 보려다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내를 생각하여 서재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 탁상용 달력을 보았다. 계묘년 새해를 맞이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쉼 없이 돌아가는 시간을 따라 흐르는 세월 또한 참으로 빠르다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달력의 잔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양력 2월 4일인 오늘은 입춘(立春)이고, 내일은 정월대보름이다. 왠지 다른 해 보다 봄이 일찍 찾아온 느낌이 든다.
아직 바깥바람이야 쌀쌀하겠지만, 절후가 입춘이어서인지 거실에 찾아든 따사로운 햇살은 봄기운을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새봄을 그냥 맞이하는 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화분의 화초들도 샤워를 시켜주는 등, 봄맞이 청소를 해야만 봄의 생기(生氣)가 기쁜 마음으로 집안에 가득 찾아들 것 같았다.
아내가 나왔다. 아내와 난 늘 그랬던 것처럼 간편식으로 아침을 때웠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난 아내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부산을 떨면서 청소를 마치고 나서 화분의 화초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관음죽의 줄기와 잎을 다듬으며 살펴보니 화분의 한쪽 가에 괭이풀이 수북하게 자라고 있었다.
지난 늦가을 어느 날 화분을 정리해주면서 늘어져 있는 괭이풀을 모두 잘라 없애버렸다. 괭이풀은 나의 무정한 손길에 온몸을 잃고 뿌리만을 간직한 채 ‘그래 겨울잠이나 자자.’라며 햇살도 닿지 않는 거실 구석의 관음죽 화분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가고 입춘이 되자 봄이 찾아오는 걸 어찌 알아채고, 새싹이 돋아 올라 그새 한 뼘 가까이나 되도록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대나무 대신 관음죽을 키우다
관음죽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내가 화초 중에서 관음죽(觀音竹)을 좋아하는 건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성 때문이다.
성품이 곧고 반듯하여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와 지조를 굳게 지키며, 비굴하게 아부하지 않고 올곧은 삶을 사는 사람을 대쪽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나무는 그 모습만 봐도 꼿꼿한 선비를 상징하듯 아무 욕심이 없이 속을 텅 비우고, 높은 이상을 찾아 푸른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다. 또 대나무는 철이 바뀌어도 그 잎을 바꾸지 않고 사철 푸르다.
실로 대나무는 송백(松柏)과 함께 세한고절(歲寒孤節)을 지키는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비들은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며 수묵화를 즐겨 그렸다.
또한 선비의 정신을 그리며 사철 푸른 잎의 청청(靑靑)함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대나무의 기상에 대하여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산(孤山) 윤선도는 대나무를 수석송월(水石松月)과 함께 더없는 친구라 여기며 오우가(五友歌)란 시를 지었다.
고산은 오우가란 시에서 대나무에 대하여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고 읊었다.
나 또한 이러한 대나무를 아주 좋아하는지라 오래전부터 대나무를 대신하여 관음죽을 키워왔다. 여러 해가 지나자 관음죽의 순이 너무 많아져 분갈이를 해주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관음죽을 키우다 보니, 화분이 계속 늘어나게 되어 이웃에게 분가시켜주기에 이르렀다. 또 처음에 키웠 던 것은 덩치가 너무 크고 높아져 가정에서 관리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무료 주례를 봐주던 예식장으로 이주를 시켰다. 예식장의 넓은 로비에 갖다 놓고 보니 아주 제격이었다. 예식장을 찾아 관음죽을 볼 때마다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모습에 흐뭇하기만 하였다.
관음죽과 괭이풀의 동거(同居)
해를 걸러 관음죽의 분갈이를 거듭하며 키워오던 중 어느 날 화분에 물을 주다가 관음죽 사이로 아주 연약하게 생긴 괭이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분갈이용 흙에 괭이풀의 씨앗이나 뿌리가 함께 묻혀왔던 것이었다. 난 화분에 난 괭이풀을 웬 잡풀이냐며 손으로 쥐어뜯어 버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움이 돋아났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화분에 친환경 비료를 한번 주었더니, 거름발을 받아서인지 줄기가 길쭉길쭉하게 자란 괭이풀의 잎이 전보다 두 세배는 더 크고 싱싱한 모습으로 탐스럽게 웃고 있었다.
줄기 하나에 하트모양의 잎이 세 개씩 매달려있는 괭이풀의 모습이 새삼 사랑스러워 보였다. 난 그동안 ‘사계사랑초’라 불리는 예쁜 괭이풀을 잡초라 여기면서 쥐어뜯어 버렸던 죄책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난 합장을 하고선 괭이풀에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라고 사과를 하면서 물을 주었다. 그랬더니 괭이풀은 나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색의 예쁜 꽃으로 나에게 오히려 감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어릴 적 장독대 주변에 난 괭이밥풀은 노란 꽃을 피웠었는데, 관음죽의 화분에 나있는 괭이풀은 자주색 꽃을 피워 더 예쁘고 고상해보였다.
인터넷에서 괭이풀의 꽃말을 찾아보니 ‘천사, 빛나는 마음,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실같이 가는 줄기에 하트모양의 잎을 세 개씩이나 매달고 있는 사랑이 가득한 괭이풀과 ‘행운’이란 꽃말을 가진 관음죽과의 동거가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았다.
관음죽이 키 크다고 뻐기면서 제 발밑에 자라고 있는 괭이풀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았고 못살게 굴지도 않았다. 괭이풀 역시 관음죽을 올려다보며 기죽거나 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쁜 꽃을 피워 화분을 더욱 조화롭게 꾸며주었다.
관음죽과 괭이풀은 좁은 공간의 화분에서 각각의 특성을 그대로 과시하면서도 아웅다웅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오순도순 잘살아가고 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공자의 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만 같다.
저리 예쁘고 사랑스런 괭이풀을 몇 년 동안이나 쥐어뜯으며 못살게 괴롭혔다니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너무나 미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매년 겨울을 맞을 때만 딱 한 번씩 정리를 해주며, 관음죽이 화분의 주인이고 괭이풀이 객이 아닌 공동의 주인으로서 공생공존(共生共存)할 수 있도록 보살피며 키워왔다.
이 세상 사람들도 서로가 시기하고 질투하여 미워하고 욕지거리하며 싸우지 말고, 관음죽과 괭이풀처럼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가 사랑과 덕을 베풀면서 화목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다.
관음죽의 꽃말인 행운이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남의 행복을 위해 많은 사랑을 베풀어 그 덕이 쌓였을 때 찾아오는 것이고, 그러한 덕(德)은 바로 인(仁)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트모양의 잎을 가진 괭이풀의 꽃말인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란 말 역시 인(仁)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꽃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괭이풀과 관음죽은 사랑의 어진 마음인 인(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서로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도 인간의 본성인 인(仁)을 저버리지 않고 가슴에 사랑이 가득할 때만이 이웃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 수 있고, 자신에게 밀려오는 외로움의 물결과 쓰라린 아픔을 이겨내며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화초와 잡초의 구분은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과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들을 한다. 그래서인지 법학박사인 이채 시인은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란 시에서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 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라고 하였다.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 역시 노년유정(老年有情)이란 심서(心書)에 이채 시인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내용의 글을 남겼다. 따라서 다산선생의 노년유정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번역본만 접해 보았지, 원문을 찾지 못하여 읽기 편한 이채 시인의 시를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시(漢詩)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어서 원문이 없이 번역본만 소개하는 것은 외람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화초 같은 인(仁)의 본질
시인은 잡초와 꽃은 밉게 보느냐 곱게 보느냐에 달렸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농작물을 해치는 잡초와 같은 사람과, 사랑의 향기로 벌 나비를 부르는 화초와 같은 사람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의 5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중에 제일 으뜸은 바로 인(仁)이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덕목인 인(仁)을 바탕으로 온화한 인품을 가지고 덕(德)을 펼치며 바른 삶을 살아감으로써 국가사회에 선(善)한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는 분명 화초와 같이 향기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무엇이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중심적 사고에 매몰되어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깨달을 줄 모르고, 오로지 세상의 모든 것을 생트집 잡아 비판이나 하면서 모든 책임은 타인과 국가에 있다고 목청을 높여 국가 사회적으로 화합과 발전에 아주 나쁜 악(惡)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잡초와 같은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잡초와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사람으로서 타고난 기본인성인 인(仁)의 정신이 결핍된 것이다. 여기서 인(仁)은 사람인(人) 자와 두 이(二) 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즉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서로가 사랑하는 친애(親愛)의 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의 본질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효(孝)에 대하여 말하였듯이 다 각각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논어에서 공자가 인(仁)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과 제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仁)이란, 중용에서 인자인야(仁者人也)라고 말했듯이 인간다운 것이다. 따라서 효제(孝悌)는 인간다움의 근본이니 인(仁)을 실천하는 기본인 것이고, 인(仁)은 곧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己所不慾/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仁愛人/인애인).
그리고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마음(推己及人/추기급인)이며, 소아적인 사리사욕의 이기심을 버리고 대아(大我)로 돌아가 예를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고(克己復禮/극기복례), 마음의 중심에 거짓이 없이 참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용서하는(忠恕/충서)것이 바로 인(仁)인 것이다.
한마디로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길이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과 사람이 가야 할 길이 곧 인(仁)이다. 이 인(仁)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예(禮)이고 의(義)인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이라 하여 그 유명한 ‘인인심야(仁人心也) 의인로야(義人路也).’란 말을 하였다. 그러니 불인(不仁)이면, 불인(不人)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화초 같은 사람은 인(仁)을 실천하는 의로운 사람이고, 잡초 같은 사람은 인(仁)을 실천하지 않는 자이니 어찌 진정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터를 자리 잡은 괭이풀
들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끼풀의 잎이 그냥 둥근 모양인 반면, 괭이풀의 잎은 예쁜 하트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괭이풀과 토끼풀은 둘 다 세 잎 풀이다. 그래서 괭이풀을 보면 토끼풀이 떠오른다.
올해는 계묘년이니 토끼띠의 해이다. 날쌘 토끼는 귀엽고 민첩하며 영리한 동물이다. 토끼와 관련하여 판소리 중에 수궁가(별주부전)가 있는가 하면, 교토삼굴(狡兔三窟)이라 하여 세 개의 굴을 파놓고 은신하면서 갑자기 닥칠 위난에 대비할 줄 아는 꾀 많은 토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왔다.
토끼의 해에 토끼와 관련된 교토삼굴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안보와 국방은 물론,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여, 안정과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 성실히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종합적인 정책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도록 국민 모두가 지혜와 역량을 한데 모아 적극 협조하여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반목하며 다투지 말고 상생하는 마음으로 토끼들처럼 오순도순 다 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서로 간에 으르렁대며 내뱉는 잡스러운 소리들이 사라지고 웃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한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괭이풀을 요리조리 살피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관음죽과 한터 살이를 하는 것도 괜찮긴 하겠지만, 마침 안성맞춤의 빈 화분이 하나 있으니 분가를 시켜 터다운 터를 잡고 더욱 무성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관음죽의 뿌리가 화분 전체에 꽉 차 있는 지라, 그 틈새에 끼어있는 연약한 괭이풀의 뿌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떠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음먹은 일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궁리 끝에 윗사람이 손해를 보더라도 아랫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손상익하(損上益下)의 정신에 따라 우선 전지가위로 관음죽의 뿌리를 잘라내어 공간을 확보하였다.
그리곤 숟가락을 이용하여 마치 심마니들이 산삼을 캘 때처럼 조심스럽게 괭이풀의 뿌리를 성공적으로 채취해냈다.
채취한 괭이풀을 조그만 화분에 정성껏 옮겨 심고 물을 주면서 마음속으로 뿌리를 잘 잡아 무성하게 자라주기를 서원했다.
아울러 괭이풀을 위해 뿌리가 많이 상했으면서도 찡그리지 않고 애써 생기 있는 사랑의 미소로 괭이풀을 바라보는 관음죽에게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물을 주었다.
너그러운 관음죽처럼 6학년에 올라가는 토끼띠인 우리 큰 손녀도 올해 입학하는 어린 동생을 학교에 잘 데리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마도 잘할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동생이 지나친 떼를 써도 항상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잘 보살펴주었으니 말이다.
새봄의 햇살이 스며드는 입춘(立春)날 낯선 터에 새로이 자리를 잡은 괭이풀을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바라보면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나지막이 읊어주었다.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게 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 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난 괭이풀과 애정 어린 눈 맞춤을 하면서 ‘풀꽃’이란 시에 이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몇 마디 더 속삭여주었다.
‘실같이 가는 줄기에
하트모양의 잎 세 개씩
밤엔 고이 접어 잠든 천사가 되고
아침엔 활짝 피어 사랑을 부르는 사계사랑초!
새 화분에 뿌리 잘 내려
생생한 모습으로 소담하고 예쁘게 자라
여름날 자줏빛 꽃으로 해맑게 미소 지어주렴
그날의 영광을 위해 힘내! 나도 기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