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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환경윤리)
* 하나님은 창조하신 자연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 자연은 그 자체로서 존재 목적이 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의 관리를 맡기셨다.
* 성령님은 자연 안에도 계신다.
* 자연은 인간의 타락으로 탄식하고 있다.
* 자연은 인간의 구원과 함께 회복되어야 한다.
(d) 성령님은 자연 안에도 계신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1)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욥26:13)
“하나님이 만일 그 영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29-30)
ⓐ 모든 생명은 성령의 현존을 나타낸다.
ⅰ. 하나님은 초월자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 속에 내재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영이시며 내재의 영이시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는 성령에 대해서 ‘생명의 부여자’(zoaponion)라고 고백하고 선언했다. 성령은 자기의 피조물들을 살게 하시고, 생명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그 생명을 보장 받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취하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일 그 영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
ⅱ. 따라서 모든 생명은 성령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결코 피조물의 성격을 갖는다거나 피조물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피조물 안에 있지만 언제나 구별되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환경 위기 시대에 자연 가운데 내재해 계시는 성령의 존재는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본적 기독교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 참된 영성은 모든 생명을 존중한다.
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성령이 계시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을 사랑하는 것이다.
ⅱ. 참된 영성은 ‘성령에 따라’,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나 물질세계를 무시하고 인간 내면이나 영혼의 문제만을 다루는 삶이 아니다. 세속의 삶을 외면하고 극기ㆍ절제ㆍ명상ㆍ고행 등의 수도자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영(靈)과 육(肉),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이분법은 성경적이 아니라 헬라적이다.
ⅲ. 사58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과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진정한 영성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해방과 자유와 정의와 베풂을 추구하고,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돕는 것임을 뜻한다. 이처럼 기독교의 삶은 전체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우리는 세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몰트만의 생태신학’/장신대ㆍ김도훈)
(e)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은 탄식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 19-22)
ⓐ 자연은 인간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다.
ⅰ.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재를 뿌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꽃인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를 저버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이 세상은 고통과 슬픔의 장소로 전락되고 말았다. 곧, 자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가 변질되었다. 땅은 거칠고 험해졌으며 독초를 내기 시작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유익한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는 생명력이 강한 잡초이다. 이 식물들은 처음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었으나 인간의 타락에 영향을 받아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추측된다. 엉겅퀴의 씨들을 무수하게 퍼뜨리는 우산 모양의 솜털 덩어리는 꽃으로 될 부분이 퇴화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ⅱ. 이처럼 인간의 타락은 아름다웠던 자연계조차 퇴화시켜 인간과 적대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자연계는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상실하였고, 땅은 이제 그 소산을 저절로 내지 않으며 힘들고 오랜 수고 끝에만 소산을 내는 상태로 변했다. 그 수확은 더디어졌고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되었다. 오늘날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자연적 재해들, 예컨대 지진, 태풍, 기근, 홍수 등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들은 모두 인간의 범죄로 인해 피조세계가 저주를 받은 까닭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자연 재해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 곧, ‘믿는 자’를 찾아보기 힘든 종말의 때에 가장 극심해질 것이다.
ⓑ 인간은 자연을 착취ㆍ파괴하게 되었다.
ⅰ. 인간은 타락 이래로 자연에 대한 올바른 지배권을 상실했다.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였다. 인간은 자연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마치 인간이 그것들에 대하여 자율적인 권리를 가진 것처럼 착취하였다. 인간은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대책 없이 자연을 파괴하였다.
ⅱ. 원래 자연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으며, 동시에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가함으로서 회개의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조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귀는 이미 자아 중심적 사고와 세계관으로 닫혀버렸고, 더 이상 자연의 변화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을 공존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고 소유의 개념으로 바라보았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연구하고 개발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ⅲ. 이 같은 자연관은 인간의 자아 중심적 욕망에 불을 붙였으며,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주의와 과학만능주의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 결과 오늘날 인간의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됨으로써 도리어 인류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고 의무를 외면해온 데 대한 당연한 대가이다.
(f) 자연은 인간 구원과 함께 회복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는 만유의 머리이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만유를 위함이다.
* 인간과 자연은 심판과 구원의 공동체이다.
* 하나님은 현재의 자연도 보전되기를 원하신다.
* 자연에 대한 올바른 지배권을 사용한다.
ⓐ 그리스도는 만유의 머리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또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10, 22-23)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5-18)
ⅰ. 그리스도는 인간과 역사에만 관련되어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의 그리스도라고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더 작은 그리스도’로 축소시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역사뿐만 아니라 전 창조, 온 피조물과도 관계를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머리이다. 몰트만은 이것을 ‘더 크신 그리스도’ 혹은 ‘우주적 그리스도’라 부른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보자이며 유지자이며 창조의 목적이다.
ⅱ. 몰트만은 그리스도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를 통하여’ 창조하셨으며, ‘그 안에서’ 보존ㆍ유지하시며, 그리고 ‘그를 향하여’ 곧 모든 것이 그를 기다리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경적ㆍ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자연의 이해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며,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의 폭력으로 상처받은 자연이 인간의 평화의 역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치유될 것을 요구한다.(‘몰트만의 생태신학’/장신대ㆍ김도훈)
ⅲ. 하지만 우리는 진화론을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이해한 몰트만의 진화신학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행위이다. 최초의 창조는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된 창조가 아니다. 최초의 창조는 더 이상의 발전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닫힌 창조가 아니고 미래를 향해 변화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열려진 창조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무(無)로부터 창조되었지만 우연적 존재라고 한다.(희망의 신학)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만유를 위함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피조물의 화해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되어진다. 그렇다면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가치를 가지며 그 나름대로 고유한 삶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구원이다.
ⅱ.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을 향한 부활의 징표요 약속임과 동시에 자연의 최종적 변화와 새 창조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의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부활의 새 창조 능력은 피조물들의 죽음을 폐기시킬 것이며, 죽음의 죽음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히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생명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이 전 창조에 임하며, 그 영은 새 창조의 영으로서 영광의 시작이다.(‘몰트만의 생태신학’/장신대ㆍ김도훈)
ⅲ.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인간을 포함하여 피조세계 전체의 구원을 위해 사역하고 계시며, 한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인간을 포함하여 피조세계 가운데 거하시면서 사역하신다. 실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신음하는 모든 피조세계를 보존하시며 고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이다.
ⅳ.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창조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범재신론(汎在神論 : 하나님은 세계와 분리되어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항상 세계 안에 존재한다)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자연의 최종적 변화인 자연의 부활을 ‘온 우주의 신격화’로 표현하는 몰트만의 주장 부분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 인간과 자연은 심판과 구원의 공동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 -2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사35:1-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사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ⅰ. 인간의 죄의 결과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자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성경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으며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고 말씀한다. 또한 성경은 인간으로 인해 피조물들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그런 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심판공동체의 관계에 있다.
ⅱ. 다른 한편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구속공동체의 관계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세상’이란 인간을 우선적으로 가리키지만 아울러 자연세계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자연도 구원을 고대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ⅲ. 이와 같이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사역이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실패로 끝날 수는 없다. 하나님은 회복의 길을 계획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 더욱 위대하고 놀라운 세상을 만드신다. 주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새 세상을 준비하고 계신다.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것이다. 새 세상은 재림의 날에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새 세상에 입주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자연계는 첫 창조 이상의 놀라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세상이 전개될 것이다(사35:1-10).
ⓓ 하나님은 현 자연도 보전되기를 원하신다.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 찌니…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25:4-5)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출23:10-11)
ⅰ.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질서이다. 하나님은 짐승과 땅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쉼을 통하여 보존되고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자연은 단순히 이용 가치에 따라 계산되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식년이 되면 땅을 쉬게 하고, 그 땅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들짐승들이 와서 남은 것을 먹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땅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를 함께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ⅱ. 성경은 영혼과 육신,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신앙과 학문, 진리와 실천, 교회와 사회를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삶을 경계한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구원과 치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질적인 치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연이 미래에 그렇게 되어질 방식을 따라 지금 자연을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고, 또한 모든 세대의 인간들이 거주해야 할 삶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현 자연에 대해서 여전히 관리책임을 부여받고 있으며, 자연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대의 과제 중 하나이다.
ⅲ. 우리는 현 세상에서 자연을 회복시키고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새 창조세계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의 세상은 현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진 신자들의 입주를 더욱 환영할 것임에 틀림없다.(쉐퍼)
ⓔ 자연에 대한 올바른 지배권을 사용한다.
* ‘하나님ㆍ인간ㆍ자연’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진다.
* 자연의 적절한 이용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 자연은 다스림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 환경파괴를 막는 데 교회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가. ‘하나님ㆍ인간ㆍ자연’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진다.
ⅰ. 자연 파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또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다. 인간은 자기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둘 때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이용ㆍ지배ㆍ착취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 자연관이라든가 혹은 생태중심주의 자연관 모두 올바른 자연관은 아니다.
ⅱ.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 가운데서 특특한 지위를 부여하셨으며, 한편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각각 자기에게 맞는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 곧 ‘하나님-인간-자연’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아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또한 자연에 대한 군주적 태도를 버리고 청지기적 역할로 돌아가는 것이다.
ⅲ. 이와 같은 질서회복이 바로 타락한 인성 회복의 핵심이며,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 구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따라서 성경적 인성 회복을 추구하는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 중심’의 인간이 됨과 동시에 ‘파괴된 자연환경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회생시켜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아름답고 조화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곧,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돌보시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짐과 동시에, 나아가서 자연의 위기 및 보존에 관한 일들을 신앙생활의 주된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나.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연을 존중한다고 자연의 적절한 이용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ⅰ. 쉐퍼는 “우리는 밥을 짓기 위해 혹은 가족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나무를 베어 불을 지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나무를 베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집에서 개미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개미 역시 자연 속의 그 올바른 자리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길을 걷다가 개미를 본다면 그것들이 밟혀 죽지 않도록 발을 조심해야 한다”며, “교회는 인간과 그 자신의 문제, 인간과 인간의 문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치료하는 실험공장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없이는 세상이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ⅱ. 한편 요릭 슈피겔은 “자연환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착취하는 태도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생태계 보전의 이름으로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극단주의도 수용될 수 없다. 성장 없는 경제는 인류의 대부분을 비참한 생활 가운데 살아가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이자 최대의 국책사업이라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8.2.1 착공되어 1970.7.7, 2년 5개월 만에 428km에 달하는 전 구간이 완공됐다. 경부고속도로는 다소간에 국토 파괴가 불가피했지만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지역 개발을 선도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ⅲ. 최근 ‘댐 건설’에 대한 일부 환경단체들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세계적으로 제한되었던 댐 건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세계 민물보전 활동책임자인 데이비드 티크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댐들이 건설될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환경적 충격을 최소화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인식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온난화는 일부 지역에는 집중 호우를, 다른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을 초래하는 등 물 관리를 어렵게 한다. 탄자니아 수자원국장은 “탄자니아의 경제성장률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 강우량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물 저장 능력이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ⅳ.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존중하되 때에 따라서는 자연을 올바르게 이용하는 모습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을 지배하되 사물들을 그 가치대로 대하며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다. 자연은 다스림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연을 신격화하여 경배하고 있다. 특정한 자연물 앞에서 기원(祈願)을 하는가 하면, 또는 자연ㆍ인간을 신과 동일시하는 철학과 종교를 따르고 있다. 그 까닭은, 첫째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상실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창조질서의 파괴로 인해 만물이 인간에게 순순히 복종치 않게 되었으며, 셋째는 인간이 도리어 자연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 환경파괴를 막는 데 교회의 역할은 한정적이다.
환경윤리의 사회적 주체는 기업과 시민사회, 그리고 정부이다.
(가) 기업
ⅰ. 기업은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현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환경윤리의 구현 주체이다. 기업은 환경의 자정 능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다한 오염 물질을 배출하여 공기, 물, 땅을 더럽히는 일이 다반사다. 이로써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습(逆襲)은 시작된다. 이제부터라도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지상목표로 내세우기보다는 ‘환경 경영’을, 곧 경영 목표를 환경친화적인 방향으로 보완ㆍ수정해야 한다.
ⅱ.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묶음포장을 위한 ‘2차 포장재’는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반들반들한 플라스틱 재질의 ‘예쁜’ 포장지가 쓰이는 곳은 드물다. 묶음포장은 재고부담을 덜어주고 판매가 많지 않은 재고물량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유통업체들은 이런 묶음포장 제품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제품을 저렴하게 판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유통ㆍ제조업체 간 지나친 경쟁과 이윤추구가 결국 환경파괴를 불러오고 있다. 포장재 사용을 최소화하고, 포장재도 친환경적인 것으로 개발ㆍ사용하는 일은 기업의 윤리 문제다.
(나) 시민사회
시민사회는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동을 감시하고 환경보전에 관한 홍보물을 만들어 환경교육을 시키고 환경보전과 관련된 행사를 개최한다. 또한 소비 축소와 고통 분담 실천운동을 전개한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로 하여금 전체 사회를 위한 환경윤리 경영을 하도록 강제하는 조직을 만든다. 그밖에 친환경제품을 선호하고, 2차 포장 상품 등 환경오염제품을 혐오하는 시민의식도 중요하다.
(다) 정부
ⅰ. 정부는 환경 보호법을 만들고 법을 어기는 사람을 처벌한다. 또한 세금부과, 세금감면, 보조금 지급 등으로 기업을 규제할 수 있다. 대규모 공사는 사전에 환경 영향 평가를 철저히 하고 환경보호를 위한 홍보를 지속적으로 한다. 화려한 간판은 규제하고, 가로등도 빛을 감응해 자동으로 꺼지는 스위치를 달거나 태양전지를 사용하는 등의 가시적 조처를 취함으로 국가의 분위기를 친환경적으로 조성해나가야 한다. 좋은 숲을 더욱 많이 조성하고, 학교에서는 지속적인 환경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는 환경윤리의 유도 주체라 할 수 있다.
ⅱ. 호주는 백열전구 판매를 점차 금지시켜, 슈퍼마켓에서 백열전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유럽연합(EU)은 모든 백열전구의 판매를 금지하고, 형광등이나 할로겐 등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로써 매년 1100만 가구의 사용 에너지가 절감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500만 톤가량 감소된다고 한다.(‘현대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요릭 슈피겔의 환경윤리’/이혁배)
(라) 교회
ⅰ. 교회는 기업과 산업현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다만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와 선도적인 연구 등을 통해서 선지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ⅱ. 또한 교회는 지역 주민을 위한 직ㆍ간접적인 생활지도를 함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교회의 재활용센터 운영, 환경상품 판매, 환경시설의 운영을 통한 지역 봉사, 환경교육, 그밖에 여러 가지 형태의 활동을 통해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올바로 이끌 수 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등은 녹색교회 만들기 운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녹화사업을 주도하자는 운동을 펴고 있다.
ⅲ. 한편 2007년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하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피해지역에 도착하여 기름 제거작업과 함께 무료급식 등의 봉사를 하였다.
b. 범신론적 자연관과 기독교 자연관의 비교
(a) 범신론적 자연관
ⓐ 주장
ⅰ. 초월적 하나님을 부인한다.
ⅱ.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인한다.
ⅲ. 존재하는 모든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생명에의 외경을 강조한다.
ⓑ 문제점
ⅰ. 자연과 인간의 통일성에 대한 해답은 주지만, 세상의 다양한 개체에 대한 존재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ⅱ. 인간을 비인격적이고 저급한 위치로 끌어내린다. 인간을 버러지나 초목과 같은 존재로 비하시킴으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상실케 한다.
ⅲ. 자연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비참하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무너지면 자연에 대한 존중도 사라진다.
ⅳ. 인간의 권리와 다른 생명체의 권리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 그 갈등을 해결할 길이 없다. 곧, 자연이 인간에게 혜택이 아닌 해(害)를 주는 측면에 대한 해결이 부재하다. 예컨대 쥐로 인해 페스트가 전염되거나 또는 쥐나 소가 인간에게 필요한 양식을 먹어치우는 상황에 대한 해답이 없다.
ⅴ. 범신론적 자연관은 비합리적 요소가 많으므로 환경보호를 위한 적절한 철학적 근거가 될 수 없다.
(b) 왜곡된 기독교 자연관
ⅰ. 인간의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잘못 해석하여 자연을 파괴해도 되는 권세로 생각한다. 이 같은 왜곡은 기독교를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게 만든다.
ⅱ. 세상은 심판 받을 것이므로 자연보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천상적인 것, 곧 영혼 구원과 천국 가는 것만을 중요시 한다. 이 같은 사고는 마치 인간의 육체가 죽을 몸이므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병들어도 치료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같다. 우리는 죽을 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면 치료받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세상도 비록 심판 받을 것이지만 자연보호는 하나님의 뜻이다.
(c) 성경적 자연관
ⅰ. 성경의 자연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창조이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우주 만물은 본래 창조된 모습대로, 각기 제 위치에서 존재할 가치와 권리가 있다.
ⅱ. ‘무에서의 창조’는 세계와 하나님을 구별함과 동시에 세계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세계를 인간의 소유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논리는 비약이다. 쉐퍼는 “자연이 우연에 의해 생겼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물들의 참된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한 사물의 가치는 자율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열등하게 보는 것은 곧 그것을 만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ⅲ.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상통하며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료 피조물로서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 한편 플라톤주의는 물질을 열등한 것으로 본다. 창조론은 영혼과 물질을 대립시키는 플라톤적 이원론을 배격한다.
ⅳ.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곧 인격체로 창조 받았기에 자연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을 대리하는 관리권을 부여받았다.
ⅵ. 하나님은 모든 생물들에게도 인간에게 하신 것처럼 복을 주시고 생육ㆍ번성ㆍ충만을 명하셨다.
ⅶ.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분이 만드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고유한 특성과 아름다움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
ⅷ. 성경의 ‘다스리라’는 명령은 ‘섬기라’ 혹은 ‘지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모든 사물에 대해 높은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
ⅸ. 인간과 짐승의 식물(食物)은 본래 식물(植物)로 명(命) 받았다. 이는 모든 생명은 보호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ⅹ. 처음 인간은 동물들을 관찰하고 일일이 적당한 이름을 붙일 정도로 모든 동물 종을 사랑하였다.
ⅺ. 인간은 자연을 이용할 수 있지만 자연을 무가치한 것처럼 마구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연을 이윤과 실용적 측면에서만 보는 것은 죄악이다.
ⅻ. 현재의 자연은 없어지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이다.(쉐퍼의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 참조)
c. 환경윤리의 실생활화
(a) ‘더’에서 ‘덜’로의 의식 전환을 한다.
ⅰ.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행되는 환경파괴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물론 세상은 옛날과 비교하여 부해지고 편리해지고 부분적ㆍ현상적으로는 대단히 좋아졌지만,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하나뿐인 녹색 지구별의 파괴와 생명 위기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 가치로 보면 오히려 퇴보이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형제이다. 우리는 자연과 투쟁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예외 없이 지구와 운명을 함께 한다.
ⅱ. 우리는 지금이라도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지금까지와는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삶이며, ‘더’에서 ‘덜’로의 전환이다. 지금까지 인류 문화는 늘 ‘더’를 추구해 왔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더’의 욕망이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 ‘더’의 중심에는 ‘이기(利己)의 나’만 있다. 이 ‘더’에 대한 욕망이 죄를 낳고 죽음의 문화를 만들었다. ‘더’ 소유하기 위해 영토를 넓히는 전쟁을 일으켰으며,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더’의 욕심은 아편과 같은 소비문화를 부추겼다.
ⅲ. 지구는 모든 사람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지만 단 한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에도 불충분하다.(간디) 갈퀴로 자연을 다 긁어버리면 자연은 그 대가를 반드시 요구할 것이다.(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지금 당장 대오 각성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이상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
ⅳ. 진실은 아주 불편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보다 아주 조금씩이나마 더 불편한 삶을 감수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3사람 이상 모여야 성냥불 하나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살림살이는 충분하다. ‘더’는 사치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욕구를 줄이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 아이들의 행복을 갉아먹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지속 가능성’의 개념이다. 이제 소비가 미덕이며 경제발전의 척도인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우리 시대의 위기는 종교까지도 ‘더’의 늪에 빠졌다는 것이다.
(b)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
ⅰ. 마조리 램은 그의 책 ‘2분간의 녹색운동’에서 우리가 마음먹고 2분만 투자하면 환경파수꾼이 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녹색운동 또는 환경운동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ⅱ.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로는 “칫솔질을 하는 동안 수도꼭지 잠그기, 빨래는 세탁기 하나 분량이 될 때까지 모았다 하기, 충전 가능한 건전지 사용하기,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고 열기, 서류의 복사량 줄이기, 종이는 양면을 다 쓸 때까지 사용하기, 출입문 안쪽에 '마지막 나갈 때는 불을 끄세요'라고 써 붙이기, 자기 커피잔 갖고 다니기, 새 것을 사기 전에 낡은 물건 살펴보기, 버리려고 했던 물건의 재사용을 생각하기, 환경과 친한 선물하기” 등이 있다.
(c) 육식 위주의 식습관을 바꾼다.
ⅰ. 연간 고기 섭취량이 미국 120㎏, 일본 45㎏, 한국 34㎏(40년 전의 6배)라고 한다. 동물성 위주의 식사법은 자원의 낭비와 자연파괴, 그리고 질병 등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파운드의 소고기를 생산하는데 2,500갈론의 물(한 가족의 1달 사용량)과 화석연료 2만 칼로리(가축 사료용 농산물 생산용)와 곡류 16파운드(고기 1인분 생산에 곡류 10인분 소모)가 소비된다고 하며, 사료용 작물인 옥수수와 흰콩은 다른 어떤 작물보다 심하게 표토 유실을 초래한다고 한다. 가축이 먹은 사료 가운데 살과 근육으로 가는 건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의 영양소는 가축이 움직이고 체온 덥히고 배설하면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가축에게 사료를 먹여 키운 후 가축의 고기를 먹는 건 영양분의 큰 낭비다. 효율이 너무 나쁘다.(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 참조)
ⅱ.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가축(家畜)이 지구 온실효과 기체 방출량의 18%를 내놓는다(자동차ㆍ기차ㆍ비행기ㆍ배가 13%). 가축이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산림 벌채와 가축 배설물이다. 산림 벌채로 나무가 사라지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없게 되고, 나무를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방출된다. 또한 소의 위장에서 방출되는 메탄가스는 지구 기온을 올리는 효과가 이산화탄소의 21배나 된다. 소는 곡물과 목초를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하루에 200ℓ의 메탄가스 방귀를 뀐다.
(d) 백열전구를 추방한다.
미(美)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이래 지난 120여 년 간 저가로 많은 가정에서 애용됐다. 그러나 빛을 내는 과정에서 열로 낭비되는 에너지가 많아 환경에는 적으로 인식된다. 백열전구는 전기에너지 가운데 95%를 열로 내보내고 5%만 빛을 내는데 쓰인다. 같은 밝기의 형광등에 비해 전력 소모량은 다섯 배에 달한다. 곧, 백열전구를 밝히려면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고, 전기 생산을 위한 화석연료 연소과정에서 많은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전 세계에서 백열전구 사용으로 인해 배출되는 온실가스 량은 자동차 배기가스량의 70% 수준이라고 한다.
(e) 산행(山行)할 때에는 산을 자연 그대로 보호하려는 자세로 임한다.
나무와 꽃을 꺾지 않기, 산채와 화초를 채취하지 않기, 벼랑이나 바위에 낙서하지 않기, 비누ㆍ치약ㆍ세제 등을 사용하지 않기, 계곡물에 목욕하지 않기, 식사 후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기, 과일껍질 등 오물은 싸서 하산 후 쓰레기통에 버리기, 캠핑하는 경우엔 쌀뜨물ㆍ기름기ㆍ채소 등을 계곡물에 떠내려 보내지 않기 등을 실천한다. ‘야호’ 등의 고함소리도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면 금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큰 소리에 야생동물들이 겁먹고 시달리며 삶의 보금자리를 위협받는다.
(f) 흡연자들은 담배꽁초 처분에 유념해야 한다.
한 맥주회사가 매일 거둬들이는 빈맥주병 500만 개를 살펴봤더니 25만 개에서 담배꽁초가 나왔다고 한다. 2.5톤 트럭 한 대를 꽉 채울 양이다. 꽁초를 꺼내고 안을 씻어내는 비용만 하루 200만원이 넘게 든다. 미국 시민단체 ‘해양 지킴이’가 88개국 해변을 청소해 보니 꽁초가 130만 톤(18%)으로 쓰레기 중 제일 많았다. 호주 시드니는 거리에 쓰레기통 수천 개를 만들어 비치해 놓았지만 그래도 한 해 540만 개비씩 꽁초가 쏟아져 시드니 항(港)을 더럽힌다고 한다.
(g) 생활습관을 ‘기후 친화적’으로 바꾼다.
ⅰ. 데이브 리는 그의 책 ‘너무 더운 지구’에서 미국의 한 가족이 연간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39톤으로, 가정은 이산화탄소 배출 창고라고 한다. 만약 가족이 생활습관을 ‘기후 친화적’으로 바꾼다면 배출량의 60%는 줄일 수 있다고 한다.
ⅱ. 예컨대 집안 보일러 온수탱크를 감싸주면 연간 0.5톤을, 조명을 에너지 절약형으로 바꾸면 1톤을 줄일 수 있다. 한 달에 스테이크 두 개만 덜 먹어도 3분의 1톤의 온실가스가 준다. 고기를 만들려면 같은 영양가를 가진 작물을 기르는데 필요한 땅보다 7배 많은 땅이 필요하고, 소 한 마리가 트림으로 내뿜는 메탄이 하루 200ℓ나 된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20배 강력한 온실가스다.
ⅲ. 우리는 환경운동을 위해서 반드시 거창한 연구나 결단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약간의 관심만 기울이면 ‘녹색사고’ 혹은 ‘녹색운동’의 습관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간에 알고는 있지만 소홀하기 쉬운 일들을 유념한다면 낭비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피할 수 있다. 환경보호란 우리의 작은 참여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h) ‘2007년 한국교회 환경주일 공동자료집’에 나오는 서약의 내용.
ⅰ. 쓰지 않는 가전기는 플러그를 꼭 빼놓겠습니다.
(플러그를 뽑거나 대기전력 차단용 멀티맵만 설치하고 사용해도 가정의 전체 소비전력의 11%나 준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 홈네트워크 시스템이 확산되면 2020년경이면 가정 소비전력의 25%를 대기전력이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ⅱ. 냉난방은 적절하게 하겠습니다.
ⅲ. 에너지 효율제품을 선택하겠습니다.
ⅳ. 수도꼭지를 꼭 잠그고, 물을 받아서 사용하겠습니다.
(물을 적게 쓰면 그만큼 CO₂도 준다. 수돗물을 만들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전력이 많이 쓰인다. 절수 수도꼭지나 샤워기를 이용하면 1년에 160kg의 CO₂를 줄일 수 있다.)
ⅴ.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겠습니다.
(2km만 차를 안타도 1년에 600kg의 CO₂를 줄일 수 있다.)
ⅵ. 공회전을 없앨 뿐 아니라 승용차를 덜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습니다.
(자동차 1,600만 시대. 한 달에 한 주일 이상은 ‘차 없는 주일’로 지킨다. 가급적 걸어서 교회에 오되, 어려우면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노약자나, 거동 불편한 사람을 위한 차량운행만 한다.)
ⅶ. 환경상품을 사용하고, 포장을 줄이겠습니다.
(고효율등급의 제품 및 환경마크 부착제품을 구입한다. 전구를 형광등으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1년에 68kg의 CO₂가 준다)
ⅷ. 나무를 많이 심고 돌보겠습니다.
(나무 한 그루는 하루 4kg, 연간 1톤의 CO₂를 흡수한다. 한 사람이 배출한 CO₂를 줄이려면 살아 있는 동안 978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
ⅸ. 우리 쌀과 농산물을 먹겠습니다.
(수송연료를 줄일 수 있고, 논과 밭은 2조원에 해당하는 대기를 정화한다. 생명농법으로 지어진 ‘생명의 쌀’을 먹으면 몸과 마음, 영혼은 물론 지구가 되살아난다.)
ⅹ.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다른 이에게 알려 함께 하겠습니다.
(아나바나 장터를 열거나 교회에 초록가게를 둔다.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내놓고,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물건 중 내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면 새로운 물건을 생산할 때 사용되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ⅺ.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하늘에 무지개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인생 시작됐을 때 그랬고
어른이 되서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은 것만 못하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살아가는 나날이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시는 자연에 대해 늘 깨어 있는 아이 같은 마음, 무지개를 보고 뛰는 가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의 소중함과 행복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