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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갑자경장(甲子更張)
정의
1864년(고종 1) 평안도에서 시행되었던 환곡제 개정 방안.
개설
조선시대에는 일련의 개정 정책에 대해 간지(干支)를 붙여서 경장(更張)이라고 이름 붙였다. 1864년 평안도에서 환곡의 분급 없이, 그 이자인 모조(耗條)만을 결호 단위로 수취하는 방식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그 지역에서 갑자경장이라고 불렀다. 1862년 농민 항쟁 이후 환곡의 개혁이 시급하였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지역마다 일정하지 않았다. 그 중 평안도는 충청도와 함께 파환귀결(罷還歸結)의 실질적인 대책을 이어받았다. 파환귀결은 환정(還政)의 개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방안 중 하나로, 모조로 충당하던 재정을 토지에 결당 2냥씩 부과하여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갑자경장은 환곡의 부세화라는 현실적 추세를 수용하여 결호세(結戶稅)로 제도화해 가는 과정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내용]
1862년 농민 항쟁이 일어나면서 농민들이 가장 피해를 입었던 삼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그 결과 환곡을 폐지하고 환곡에서 얻는 수입을 결세로 대체하는 이른바 파환귀결이라는 정책을 마련하였으나 실시하기도 전에 다시 옛 제도를 회복한다고 선언하였다[『철종실록』 13년 윤8월 11일]. 대신 환곡의 포흠분(逋欠分)을 일부 탕감하고 환곡 운영을 고르게 하는 부분적인 개혁을 꾀하였다. 이런 가운데 환곡의 폐단이 심각하였던 충청도와 평안도는 별도의 대책이 필요하였다. 본래 평안도는 환곡의 모조를 모두 회록(會錄)하여 자체 재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1) 의정부에서 올린 보고에 의하면 평안도는 환곡의 분급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였고 이에 따라 환곡에 대한 별도의 개혁대책이 논의되었다.
평안감사홍우길(洪祐吉)은 환곡 폐단을 개혁하는 방책을 장계로 올렸는데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환곡을 정지하고 다른 명목으로 거두어 지급해 주는 급대(給代)의 방식을 제안하였다[『고종실록』 1년 7월 26일]. 급대의 방법은 토지와 호구에 각각 5두와 4두를 거두는 형태였다. 다음해 평안도 지역에 「환폐교구절목(還弊矯捄節目)」이 작성되었는데 앞서 논의된 것처럼 토지와 호구에 세를 부과하는 것과 함께 성향곡(城餉穀) 10만 석을 갖추기로 하였다. 다만 고을에 따라 수세의 양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평안도의 이러한 수취 방법은 그 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명시되어 완전히 법제화되었다. 이처럼 평안도는 환곡의 모조에 대한 부분을 토지와 호구에 부과하고 수취함으로써 영읍(營邑)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평안도의 이 같은 대책은 1862년에 삼정이정책으로 제시되었던 파환귀결의 내용을 수용한 것이다. 시행된 해가 1864년 갑자년이어서 갑자경장(甲子更張)이라고까지 일컬어졌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육전조례(六典條例)』
『공문편안(公文編案)』
『관서읍지(關西邑誌)』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거급(擧給)
정의
18세기 후반 관서 지방에서 환곡이 많아지자 진분곡을 분급하기 위하여 가호(家戶)의 등급을 나누어 강제로 나누어 준 행위.
개설
분급되는 환곡의 양은 원하는 자를 선정하여 곡물을 받을 자와 받고자 하는 곡물의 양을 헤아려 비교한 후 결정되었다. 환곡으로 대상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곡물은 창고에 남겨야 하는 유고곡(留庫穀)과 나누어 주어야 할 분급곡(分給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한편 환곡의 모곡을 회록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관청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관청은 좀 더 많은 경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환곡의 총량을 늘렸으며, 가능하면 많은 양의 곡물을 분급하려 하였다. 요컨대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곡물 중 분급곡의 비율을 늘리려 하였다.
기존의 환곡 분급 방식으로는 환곡을 고을 백성들에게 분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으로 분급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방법을 찾았다. 결국 환곡을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해당 지역에 사는 모든 호(戶)에게 강제로 환곡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거급이라 하였다. 거급은 세(稅)도 아닌 환곡을 세금의 방식과 같이 부과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운영 방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해결책을 호소하였고 중앙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 및 특징
1. 환모(還耗)의 회록
환곡은 원래 원하는 자를 대상으로 곡식의 양과 식구 수를 헤아려 몇 차례에 걸쳐 일정한 양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호와 토지를 대상으로 하면서 대상물의 규모 정도에 따라 분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도 원칙적으로 원하는 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거급과 같은 현상에는 환곡 운영의 변화가 내재해 있었다. 재정을 보충한다는 명목 하에 회록법을 도입하여 관청마다 환곡을 늘렸으며, 환곡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분류(分留) 방식의 다양화를 꾀하였다.
2. 진분화
환곡의 회록을 통하여 많은 기관들이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곡물을 늘리어 갔으며, 또 늘어난 곡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환곡의 진분화를 꾀하였다. 진분화란 통상(보통) 유치분과 분급분의 비율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모두 분급하는 것을 말한다. 감영을 비롯한 지방관청의 곡물들이 진분화되면서 18세기 환곡의 양은 급속도록 증가하였다. 관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환곡 중에서 진분조(盡分條)가 늘어남에 따라 환곡의 모곡은 더욱 늘어났고, 그에 따라 분급해야 할 곡물의 양도 늘어났다.
3. 강제적인 분급 방식
분급해야 할 곡물은 원래 원하는 자만을 선정하여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곡물을 보다 많이 분급하기 위해 지역 내의 모든 호를 대상으로 삼아 등급을 매기고 본인이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강제로 분급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이를 거급이라 하였다.
4. 거급의 사례
1790년(정조 14)에 관서 지방의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면응(李冕膺)이 서계(書啓)로 거급으로 인한 문제점을 보고함으로써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구성(龜城)에서 거급이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급이 크게 문제가 된 것은 1799년(정조 23)에 의주(義州)에서 환곡을 강제로 나누어 준 일 때문이었다. 기존에 환곡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부 지역에서는 호수(戶數)에 따라 대(大)·중(中)·소(小)로 구분하여 분배하는 곳도 있었으나, 의주에서는 처음에 원하는 자를 뽑아 식구 수를 계산하고 곡식을 헤아려 한 달에 3번 정도 간격을 두어 환곡을 나누어 주었으며, 대·중·소로 구분하여 등급을 달리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분곡이 많아지면서 환곡을 받기를 원하는 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호의 등급을 나누고, 등급에 따라 강제로 나누어 주는 형태로 바뀌면서 문제가 되었다.
백성들이 문제로 삼은 거급은 강제로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이에 대하여 사실을 조사한 후, 주된 원인으로 진분곡을 지목하였다. 그리고 진분곡을 줄이기 위해 진분조를 반은 남겨 두고 반은 나누어 주는 반류반분하는 방식을 논의하였다. 의주에서 곡식 중 반을 유치하고 반을 나누어 주는 것은 군향(軍餉)과 상평곡(常平穀)뿐이었으며, 기타 각 아문의 곡식은 모두 진분조였다.
의의
조선후기 환곡은 수많은 폐단들을 낳으면서 제도적인 개혁이 요청되었다. 환곡은 원하지 않는 자는 분급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급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분급 대상자로 삼았다. 이는 진휼을 목적으로 하던 환곡이 부세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세의 부과는 법적인 근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환곡은 세의 범주에 포함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세와 같이 운영됨으로써, 거급은 환곡이 부세화하는 과정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공거문(公車文)』
『서계집록(書啓輯錄)』
거말(居末)
정의
관리들의 인사 고과 최하위 등급.
내용
『경국대전』 「이전(吏典)」 포폄(褒貶) 조에 따르면, 중앙관청의 관원은 그 소속 관사의 당상관·제조 및 소속되어 있는 조(曹)의 당상관이, 지방관청의 관원은 그 도(道)의 관찰사가 매년 등급을 매겨 임금께 보고하도록 규정되었다. 관찰사는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2차례에 걸쳐 관할 고을 수령들의 치적(治積)을 살펴 중앙에 보고하였으며, 이때 성적을 살펴서 성적이 최고인 상(上)에 해당하면 최(最), 가장 낮은 점수인 하(下)에 해당하면 전(殿)이라고 하였다. 거말이란 ‘전’의 등급을 말하였다.
환곡과 관련하여 『속대전』 「호전(戶典)」 창고(倉庫) 조에서는 환곡을 준봉하지 못한 자로 거말의 성적인 자는 영문결장(營門決杖)하고, 그보다 나은 거이(居二)인 경우에는 추고(推考)하며, 거삼(居三)인 경우에는 논하지 않도록 하였다. 군향(軍餉)은 이보다 조금 더 강화된 법을 적용하였다. 거말인 자는 나문(拿問)하고, 거이인 경우에는 결장(決杖)하며, 거삼(居三)인 경우에는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환자문서가 늦게 도착하게 한 수령도 거말의 예로 논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전통편』의 같은 조에서는 환자를 준봉(準捧)하지 못하여 거말에 해당한 자는 나문하게 하고, 변지(邊地)의 수령은 전과 같이 결장(決杖)하도록 하여 수령들이 환곡을 기한 내에 제대로 거둘 것을 요구하였다. 고종대에 편찬된 『대전회통』에서는 환곡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 수령에게는 더 세분된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
용례
臣於昨年陳白 令各道守令收聚穀物矣 其數將至於十餘萬石 今年可收其效 而全無賞罰 非所以勸懲 請以各道居首居末者賞罰 而恩津縣監李道善自備米至於一千一百餘石云 當別加論賞矣 上曰各道居首者陞敍 居末者越俸三等 居末中未滿十石者越五等 全未備者越七等 李道善準職除授 [『영조실록』 13년 9월 23일]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법제처, 『古法典用語集』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건량(乾糧)
정의
진휼할 때에 죽 대신 지급하는 곡식.
내용
건량을 지급하는 정도는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달랐다. 숙종대 작성된 『황정사목荒政事目)』이나 『구황사목(救荒事目)』에는 건량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걸식하면서 의탁할 곳이 없는 기민을 따로 뽑아 죽을 지급하는 규정에 따라 건량을 마련하여 10일마다 1순(巡) 혹은 연속하여 분급하도록 하였으며,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는 양반 상인(常人)을 막론하고 죽을 지급하는 예를 따라 건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다만 전토가 있고 생활할 수 있는 자에게는 주지 않았다.
숙종대 이후 한성부에서는 진휼할 때 주로 유개(流丐)들을 대상으로 건량을 지급하였다. 이들은 경기 주변 혹은 4도(都)인 강화·개성·광주(廣州)·수원 등에서 서울로 몰려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진휼하기 위해서 오부(五部)가 성 안팎에 머물고 있는 유민(流民)들의 명단을 뽑았다. 이들을 진휼하는 장소는 진휼청이 선정하였다. 그들에게 죽을 먹인 후 시골에서 온 자들에게 건량을 지급하여 각도로 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건량은 죽 대신에 제공하는 것으로, 이후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때로는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 역에 동원된 상경한 지방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용례
江原道觀察使申耆馳啓 寧越等十邑 無依遑急之民 營邑相議賙救 自去歲歲末 排巡饋粥 或給乾糧 至五月旬前畢賑 [『정조실록』 17년 5월 24일]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진휼등록(賑恤謄錄)』
『임하필기(林下筆記)』
양진석, 「17세기 후반 환곡분급방식의 형성」, 『규장각』 22, 1999.
정형지, 「숙종대 진휼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검년(儉年)
정의
곡식이 잘 여물지 않은 해.
내용
국가는 수세 및 진휼을 위하여 한 해의 농작을 풍년(豊年)·중년(中年)·흉년(凶年)으로 구분하였는데, 검년이란 흉년 수준의 단계를 말하였다. 국가는 한 해의 수확의 정도를 정하기 위하여 답험하여 조사하였다. 수령은 담당관이 답험한 곳을 조사하여 문제가 있으면 중앙에서 파견된 손실경차관(損實敬差官)에게 알려야 했다. 이때 민들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에 따라 등급을 구분한 것인데, 풍년을 제외하면 중년이나 흉년에는 국가가 곤궁한 민들을 선별하여 구제해야 했다.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진제(賑濟)하고, 중호와 하호에 해당되는 자에게는 환자를 주었다.
검년일 경우 때로는 강무(講武) 혹은 잡송(雜訟) 등을 정지하여 농민들이 농사에 전념하도록 조치를 취한다거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검년에 따른 조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1422년(세종 4)에서 1423년(세종 5) 진제 및 환자를 이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창(義倉)의 곡물을 이용하는 것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용례
豐年則雖貧乏者 或傭身或丐乞 可以資生 中年則貧乏人 爲先考其下等各戶人口實田之數 義倉米豆 撙節分給 至於儉年 貧乏人則賑濟 中下戶則給還上 其中或因災傷 或因疾病水火盜賊等事 衆所共知 飢困之人 守令親審覈實 不計其戶等第 年分豐斂 竝皆量宜分給 每月季 貧乏人幾口 還上分給米豆幾石賑濟分給幾石 某等人幾口 分給幾石 具報監司 監司啓聞 以爲恒式 [『세종실록』 28년 2월 29일]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결환(結還)
정의
사람이 아닌 토지를 기준으로 환곡을 부과하는 방식.
개설
17세기 후반에는 환곡을 분급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호를 단위로 분급하는 호환의 방식에서 토지를 기준으로 하는 결환과 오가통(五家統)을 기준으로 하는 통환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결환은 처음에 전세 수취구조인 8결을 기준으로 종자를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식량을 지급하거나 모곡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지역별로 환곡과 인구의 비율이 불균형하게 되었다. 인구에 비해 환곡이 많은 지역에서는 결환이 모곡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결환의 경우, 본래 토지가 없으면 환곡을 받지 않는 것인데, 모곡을 징수하기 위해 토지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에게도 환곡을 분급하고 모곡을 징수하여 폐단을 야기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내용 및 특징
환곡은 기본적으로 호(戶)를 단위로 지급되었다. 환곡을 분급하기 위해서는 환곡의 분급 대상인 환호(還戶)를 선정해야 한다. 환곡을 원하는 사람이 관청에 소지(所志)나 단자(單子)를 올리면 관청에서는 면임(面任) 혹은 이임(里任)을 불러서 자격이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였다. 환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토지가 있거나 호적에 들어 있거나 그 지역에 근거를 두고 사는 사람[有根着者]이어야 했다. 환곡을 받는 사람들은 흉년 시에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받는 진민(賑民)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토지가 없어도 생활이 가능한 작인(作人), 공상인(工商人) 및 친척이나 상전에게 의탁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환곡을 받을 수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서 토지를 매개로 환곡이 지급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1664년(현종 5) 경상도에서 8결을 기준으로 환곡을 지급한 경우가 그것이다. 8결을 단위로 환곡을 지급했던 것은 전세의 징수 체계인 ‘팔결작부(八結作夫)’제도를 활용한 것이었다. 팔결작부제는 8결의 농지를 한 단위로 해서 부(夫)를 만든 다음 각 부에 책정된 결세를 호수(戶首)로 하여금 수납하게 한 제도이다. 전세 수취제도를 환곡의 분급에 활용하고 징수할 때에도 이것을 활용하였다. 토지를 매개로 환곡을 분급한 것은 종자곡을 지급하기 위해서 출발하였지만 시기가 흐를수록 환곡 징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종자곡 이외의 환곡도 토지를 매개로 한 결환으로 지급하였다.
17세기 후반은 호조 환곡 이외에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여 환곡이 증가하는 시기였다. 환곡이 증가하면서 흉년이 들었을 때에 진휼사업도 활발해졌다. 또한 환곡의 분급뿐만이 아니라 환곡의 징수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1675년(숙종 1)에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묶은 오가통(五家統)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오가통제도 실시 이후 기존의 호에 환곡을 분급하는 호환 이외에도 오가통의 ‘통’ 단위로 환곡을 분급하는 ‘통환(統還)’이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토지를 기준으로 분급하는 결환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결환은 17세기까지도 널리 정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흉년이 들어 진휼사업을 할 때에 고을마다 환곡을 토지로 분급하면 토지가 없는 사람은 받을 수가 없다는 결점이 지적되어, 단지 종자를 지급하는 데 한정시켰다. 그러나 결환은 환곡을 거두어들이는 데 안정적이라는 점 때문에 단순히 종자를 나누어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호환이나 통환과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동안에 먹을 양식을 지급하는 것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1677년(숙종 3)에는 환곡을 토지에 따라 지급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결환을 주장한 이유는 역시 징수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결환의 방식이 점차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토지가 농작물을 생산하는 수단이고 이동성이 없어서 안정적으로 환곡을 회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8세기에는 호나 전결을 단위로 환곡을 분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변천
17세기 후반에 호 단위로 환곡을 분급하는 호환, 오가통으로 분급하는 통환, 8결 단위로 분급하는 결환이 시행되었고, 18세기에는 호환과 결환이 주로 시행되었다. 결환의 경우도 종자곡만을 분급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분급하고 있었다. 결환의 시행 목적이 환곡을 안정적으로 징수하기 위해 변화한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도 환곡은 증가하고 있었다. 18세기 초에 500만 석으로 추정되던 환곡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약 1,000만 석에 이르렀다. 환곡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났다. 환곡 징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거두어들이지 못한 환곡이 증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환곡을 지급받은 사람이 갚지 못할 경우 이웃에게 거두고 친척에게 거두는 일이 발생하였다.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환곡 징수를 완료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이런 방법은 한 사람이 환곡을 납부하지 못하면 그 이웃이나 친척까지 파산하는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18세기 후반에 결환을 실시하는 이유로 이웃과 친척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결환은 토지를 매개로 하므로 토지가 없는 사람은 환곡을 받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결환이 전세 납부 조직을 활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납부 책임자가 농간을 부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가난한 백성이 많은 환곡을 받는 경우가 있었고, 전혀 환곡을 받지 않고도 나중에 갚아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일부 지역에서는 결환으로 폐단이 심각하였다. 이서들은 연말에 징수하지 못한 환곡을 구환(舊還)의 명목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다음해 봄에 원래 환곡이라고 하면서 다시 매 결당 환곡을 분배하여 모곡의 이익을 취하였다. 구환이라고 하면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의 환곡 상황은 징수하지 못하는 환곡이 크게 늘어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의의
결환은 8결을 단위로 토지에 분급하는 환곡이다. 본래 결환을 시행한 의도는 흉년이 들었을 때에 종자곡을 분급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분급과 징수를 전세 수취체제인 팔결작부제를 활용했기 때문에 환곡을 안정적으로 징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8세기에는 결환이 호환과 함께 대표적인 환곡을 분급하는 방편이 되었다. 조선후기 부세제도의 특징이 토지로 부세가 집중되는 것인데, 환곡에서의 결환도 환곡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토지를 매개로 분급과 징수를 한 것이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硏究)」, 『한국사론』 21 , 1989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공진(公賑)
정의
중앙 아문에서 운영하는 환곡으로 시행하는 진휼.
개설
농업 생산이 사회의 근간이었던 조선에서는 홍수나 가뭄 등으로 인한 기근이 항상 발생하였다.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진휼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잦은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따라 진휼에 소요되는 곡식이 재정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에서는 기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재정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기근 정도에 따라 국가의 개입 여부를 판단하여 진휼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진휼을 모두 3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중앙 아문의 환곡을 활용하여 국가가 직접 시행하는 공진(公賑), 지방 수령이 마련하여 비축한 자비곡(自備穀)이나 개인 소유의 곡식을 활용하는 사진(私賑), 기민의 수가 극히 적어서 곡식이 거의 들지 않는 구급(救急)이었다. 기근이 발생한 지역을 3종류로 분류하여 각각의 방식대로 진휼을 시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공진읍(公賑邑)은 기근의 정도가 심한 지역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는 잦은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의 대책 마련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조대 후반부터는 이전 시기의 축적된 진휼 경험을 바탕으로 진휼정책을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조대 초반에 이르면 진휼방식을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진휼에 관련된 각종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일성록』 등의 관찬 기록에서도 진휼을 기록할 때 일정한 법식을 갖추게 되었다.
정조대에 기근 지역을 공진·사진·구급으로 분류하게 된 경위와 목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국가의 재정 운영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진휼은 일반적인 환곡의 분급과는 달리 무상 분급이 원칙이었고, 따라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따라서 기근이 심한 지역에만 국가가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는 지방 재정 등을 활용한 진휼을 시행하도록 제도화한 것이었다.
기근 지역을 공진·사진·구급으로 분류하여 진휼을 시행한 최초의 기록은 1778년(정조 2) 경기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 4도에 대한 진휼이었다[『정조실록』 2년 5월 5일]. 이를 통해 볼 때, 공진읍을 선정하는 조치는 정조 즉위 이후 바로 시행되었다.
내용
정조대 정비된 공진의 구체적 시행 내용은 『만기요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공진읍을 지정하였고, 지정된 읍에서는 감사와 수령의 지휘 아래 진휼을 시행하였다. 공진을 마치면 해당 내용을 기록하여 장계(狀啓)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진휼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수령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공진에는 중앙 아문의 환곡이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 소속의 상진곡(常賑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빈번한 진휼의 시행으로 인하여 상진곡의 양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비변사 소속의 환곡이 공진에 전용(轉用)되기도 하였다.
진휼곡의 분급은 10일 간격으로 월 3회 시행하였는데, 장년 남성에게는 쌀 5되, 장년·노년 여성에게는 4되, 기타의 경우에는 3되씩을 지급하였다. 곡물 외에도 죽이나 소금, 장, 미역 등을 분급하였는데 이런 물품들은 정해진 항식을 두지 않았다.
위와 같은 규정이 공진에서 기본적으로 시행되는 원진(元賑)이라면, 이와 별도로 국왕이 하사한 물품을 분급하는 별진(別賑)이 시행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8년 1월 14일]. 별진은 왕이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정책으로 활용되었는데, 숙종대부터 관례화되었다. 별진으로 왕은 왕실의 진상품·내탕전 등을 내려 주거나 혹은 지방 감영·수영, 수령의 자비곡(自備穀) 등이 활용되었다.
변천
정조대 정비된 진휼정책은 이후 조선의 공식적인 진휼대책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환곡 운영이 점차 재정 보용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운영상에서도 갖은 폐단이 노출되었다. 이에 따라 환곡을 활용하는 국가의 진휼정책 역시 원활히 기능하기 어려워졌고, 중앙 아문의 곡식을 활용하는 공진 역시 위축되어 갔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만기요람(萬機要覽)』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공채(公債)
정의
일반인이 여러 형태로 국가에 진 빚.
개설
공채는 조세(租稅)를 미납하거나, 환곡(還穀)을 지급받고 원곡(元穀) 및 모곡(耗穀)을 갚지 않거나,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감당하지 못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는 국가에 대한 채무를 말한다[『성종실록』 1년 9월 1일]. 이 중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환곡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채였다. 국가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있거나,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질 경우에는 몇 년 이상 묵은 공채를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공채는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였지만, 가장 흔한 경우는 환곡을 받고 이를 갚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채는 국가가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고, 농업 생산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국가가 적극적인 식리(殖利) 활동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데 공채가 활용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4년 10월 15일]. 모곡의 징수를 통해 국가 재원을 마련하였던 조선후기 환곡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 왕실 재정을 관리하였던 내수사에서도 공채를 통해 식리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청나라 사행(使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공채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내용
공채의 이율은 기본적으로 원곡의 1/10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보다 높은 이율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세조대 군자곡을 대여해 주고 그에 대한 이자 수익으로 4/10를 취한 경우도 있었고, 영조대 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개성부에서 공채의 이자로 2/10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환곡의 모곡 징수는 원칙적으로 1/10이었다.
영조대에는 공채·사채에 대한 이식율을 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돈 1냥에 대한 1개월의 이자가 2푼을 넘지 못하였으며, 10개월에 이르러 2전(錢)이 되면 여기에서 더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곡식 10두(斗)에 대한 1개월의 이자는 5승(升)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10개월에 이르러 5두를 채우면 더 이상 이자를 부과하지 않고, 비록 10년이 지나더라도 더 받지 못하게 하였다. 공채에서는 전(錢)·곡(穀)의 이자가 모두 10분의 1에 그쳤다[『영조실록』 3년 11월 11일].
한편 국가에서는 환곡을 갚지 못한 것 등으로 인한 공채를 지속적으로 탕감해 주었는데, 이는 생산 기반이 미약한 백성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함이었다. 조선후기 문란한 환곡제 운영으로 인하여 많은 민폐가 발생하자,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공채 탕감 조치도 빈번하였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원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아 국가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이에 『경국대전』에는 삽입되지 않았던 공채 상환 규정이 『속대전』과 『대전회통』에서는 조문화되어 정비되었다.
참고문헌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관여곡(官餘穀)
정의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정해진 액수보다 많이 거두어들인 곡식.
내용
환곡의 징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정행위의 하나로 평안도 창성부에서 발생하였다. 창성부에서는 환곡을 받아들인 다음에 그 받아들인 것을 다시 말질하여 남는 것을 관에서 가져다 쓰고 있었다. 이런 행위가 가능하였던 이유는 환곡을 징수할 때에 규정된 액수보다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속대전』에서도 전세를 징수할 때에 뒤에 축날 것을 예상하여 1섬에 3~4되씩 더 받는 것을 가승(加升)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외에도 말질을 할 때에 평미레를 사용하지 않고 용기에 수북이 담아 징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추가 징수를 하고 있었다. 민인에게 환곡 징수를 끝낸 다음 관에서 다시 말질을 하여 징수한 액수를 채우고 남는 액수를 지방관아의 비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감관(監官)과 담당 아전들이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이 발생하여 추가 징수한 액수가 100여 섬이나 되기도 하였다.
용례
昌城府官餘穀名色 自是謬例 捧糴之後 隨其所捧多少斗量 所餘自官取用 故監色濫捧之弊 自不能禁斷 而科外名色之朝家申飭 不啻嚴明 而看作常事 所捧多至百餘石 極爲可駭 故嚴關永罷 [『정조실록』 1년 10월 4일]
관포(官逋)
정의
지방관이 지방행정 운영 과정에서 창고 보유곡을 사용하면서 발생한 곡물의 부족 액수.
내용
전세나 대동 혹은 환곡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기근·충재(蟲災) 등 여러 이유로 징수하지 못하는 액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전이 운영 과정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이포(吏逋), 민간에서 납부하지 못한 것을 민포(民逋)라 하고 지방관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관포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전세나 환곡을 징수하여 창고에 보관한 곡물을 지방관이 중앙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돌려쓰고 채워 넣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전세나 대동과 같이 중앙에 상납하는 곡물보다는 지역에 비축하는 환곡이 주로 지방 경비로 이용되었다. 지방관이 관청에서 필요한 공사(公私)의 경비를 미리 환곡에서 지급하고는 가을에 가서 그 수효를 환곡의 분급 대장에 함께 올려서 받아들이곤 하였는데, 이 액수를 제대로 징수하지 못하여 장부상의 액수로만 남는 허류(虛留)가 되었을 때에 관포가 발생하였다. 이런 방법을 조정에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국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었고, 관포가 수천 석에서 만여 석에 달하는 지역도 있었다. 관포와 이포는 모두 행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엄히 조사해 받아 내도록 지시하였지만, 아전에게만 철저히 징수하고 지방관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용례
備邊司以全羅監司徐鼎修狀啓 覆奏曰 其一 珍島郡穀簿虛留事也 一邑虛留 至於三千八百餘石之多 而所謂官逋 尤極驚駭 [『정조실록』 20년 1월 5일]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향(管餉)
정의
평안도에서 군량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던 곡식.
개설
관향은 17세기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군량이었다.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어 가자 관향은 점차 평안도 지역의 다양한 재정 수요를 충당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주로 군수(軍需)나 사행(使行)에 대한 접대비로 쓰였다[『인조실록』 27년 3월 17일]. 관향을 관리하는 관향사(館餉使)는 평안감사가 겸직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5년 7월 9일]. 또한 관향의 보관·관리를 위하여 관향고(管餉庫)를 두었으며, 환곡을 운영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23년(인조 1) 후금의 위협이 본격화되자, 이에 대비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관향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지역의 관향사는 곧 혁파되었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수령 중 한 사람이 관향사를 맡도록 하였다[『인조실록』 1년 4월 21일]. 1637년(인조 15)부터는 평안감사가 관향사를 예겸(例兼)하도록 하였다. 관향사는 평안도 지역의 전세 및 공물수미(貢物收米)를 바탕으로 관향을 마련하고, 이를 환곡 등의 방식으로 운영함으로써 규모를 늘려갔다.
내용
관향의 설립 목적은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두 차례 호란을 겪고 난 이후 관향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심양관(瀋陽館)에 머무는 기간 동안 심양관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관향으로 충당하였다. 심양관에는 세자를 비롯하여 많은 조선인이 체류하고 있었으나, 청나라에서는 그 비용을 충분히 지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심양관에서는 각종 비용을 조선에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조선은 관향을 통해 재원을 충당해 주도록 하였다[『인조실록』 21년 9월 1일].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입국하는 사신 일행에 대한 접대비 역시 관향에서 지출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평안도와 황해도, 경기 북부는 본래 사신 일행을 위한 비용 지출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부담을 평안도 관향을 통해 해결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로 들어갈 때 드는 비용의 일부 역시 관향곡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 외에도 각종 군수 비용도 관향곡으로 해결하였다.
관향곡은 평안도의 전세 및 공물수미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를 관서(關西) 지역의 고을에 환곡으로 분급하고 이자에 해당하는 모곡(耗穀)을 거두었다. 환곡 분급 시에는 전체 양의 절반만 분급하고, 절반은 창고에 남겨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향곡을 관리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관향고를 설치하였다.
변천
관향곡은 본래 평안도 지역의 재정이었으나, 중앙 재정 기구였던 호조(戶曹)의 요구에 따라 중앙 재정으로 전용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본래 평안도 지역은 군량을 비축하기 위해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자체적으로 사용하고 비축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평안도 지역의 생산력이 증가하고, 평안도가 대외 무역의 창구로 발전하면서 그 세입 규모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서도 평안도 재정을 중앙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호조와 평안감사 사이에 재정을 둘러싼 알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권내현, 『조선 후기 평안도 재정 연구』, 지식산업사, 2004.
구급(救急)
정의
당장 구제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하기 힘든 황급한 상태의 굶주린 기민을 뽑아 긴급 구제하는 것.
개설
조선후기의 진휼정책은 17세기 후반 이후 죽을 지급하는 것에서 건량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환곡을 통한 비축 곡물의 증가가 원인이었다. 또 기민에게 무상으로 지급하는 곡물의 양을 남녀와 나이를 구별하여 차등 있게 지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16세에서 50세에 이르는 남자에게는 1일당 쌀 5홉을 기준으로 10일 치를 한 달에 3회 지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1일당 쌀 3홉·4홉의 지급 양이 규정되었다. 이러한 진휼 규정을 진식(賑式)이라고 하였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소요되는 곡물의 양을 좀 더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진휼에 소요되는 곡물을 국가 보유 곡물인 공곡(公穀)에서 사용하면 공진(公賑)이라고 하고,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을 사용하면 사진(私賑), 진휼한 사람이 적어서 공곡을 사용하지 않으면 구급이라고 하였다.
구급은 매월 10일 간격으로 3회의 무상 분급을 실시하는 진식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구급은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사진과 같았으나, 단지 신속함에서 차이가 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들어서는 사진을 할 경우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으며, 구급을 할 때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왕조 정부가 재정 형편상 공진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사진과 구급의 시행에 공곡의 일부를 보조한 것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부황이 든 기민은 다음 해에 진휼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로 구급을 시행하여 목숨을 겨우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진휼사업이 예정된 고을뿐만 아니라, 공진이나 사진을 시행하지 않는 고을이라도 긴급조치가 필요할 경우에는 연말이나 연초에 구급을 시행하였다.
내용 및 변천
구급은 일정한 원칙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흉년이 심한 경우에는 12월에도 시작할 수 있고, 1회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공진처럼 몇 차례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진식의 규정처럼 나이와 성별에 따라 10일 치 쌀 3·4·5승을 지급한 것도 아니었다.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의 양을 적당히 지급하였다. 기민의 수가 많으면 감영에서 곡물을 지급하여 구급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본읍구급과 구별하여 영문구급(營門救急)이라고 하였다.
진휼이 끝나고 지방관을 포상할 때에는 원칙적으로 공진읍의 지방관만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사진읍의 지방관도 표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원칙적으로 공진을 시행할 경우에만 중앙관아의 곡물을 사용하도록 한 이유는 진휼에 사용하는 국가의 비축 곡물을 가능하면 줄이려는 의도였다. 사진이나 구급을 시행할 때에 사용되는 곡물은 지방관이 독자적으로 마련하여야 하였다. 그러므로 흉년이 들면 지방관은 자비곡을 마련하고, 부민들이 스스로 곡물을 바칠 수 있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조선왕조 정부는 진휼의 규정을 세분함으로써 많은 곡물을 절약하는 한편, 지방 수령에게 진휼을 독려할 수 있었고, 진휼을 시행하는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전후시기에 비하여 자연재해의 강도가 심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활발한 진휼을 시행할 수 있었다. 정조대에 진휼 행정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기반은 정책적으로 진휼의 규정을 세분화하여 지방 수령의 책임을 강조하고 영조대에 마련한 비축 곡물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의의
17세기 후반 이후 환곡의 증가로 인해 흉년에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는 진휼사업이 활발할 수 있었다. 흉년이 든 다음 해 1월부터는 국가에서 보유하는 곡물을 사용하여 월 3회 기민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는 공진, 수령이 마련한 곡물로 월 3회 무상으로 분급하는 사진, 그리고 수령이 마련한 곡물로 진식 규정을 따르지 않고 형편에 따라 지급하는 구급을 시행하였다. 19세기에는 구급을 할 때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왕조 정부가 재정 형편상 공진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다만 사진과 구급을 시행할 때에 국가 보유 곡물을 일부 보조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목민심서(牧民心書)』
『사정고(四政考)』
『호남진기록(湖南賑飢錄)』
『진휼등록(賑恤謄錄)』
문용식, 「18세기 후반 진휼사업과 진자 확보책」, 『사총』 44 , 1995.
정형지, 「숙종대 진휼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정형지, 「조선후기 진휼정책 연구-18세기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