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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가 되기까지
“계십니까? 신고가 들어와서 파출소에서 나왔어요?”
“우리 집 무얼 신고했는데요?”
“비밀리에 유흥주점을 한다고 합니다.”
정복을 입은 경찰 둘이 서 있다.
“민원이 접수되었으니 확인하겠습니다.”
“가정집이 유흥주점이라뇨. 일단 살펴보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답변할 증거 촬영하세요. 근거 없이 신고한 그 사람 누구냐고 확인하자고 합니다."
갑자기 전화가 뚝 끊긴다. 신고한 사람은 지금 경찰관이 올라온 것을 지켜보고 있다. 분명 주변에서 신고한 것이었으리. 바로 창문을 열고 보았다면 혹 어느 곳에서 신고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가 주택은 대부분 꼭대기 층에 주인들이 살고 있어 오가면 서로 눈인사를 하고 산다. 그런대 길 건너 노인부부가 살다 떠나고 자식이 물려받아 살고 있는 건물이 있다. 대면 한 적은 없지만 옥탑을 개조해 유흥 주점처럼 차려 놓은 건너편 건물이 문득 생각이 났다.
도둑이 제 발 절인다고 빨래를 널러 옥상을 올라가면 테이블에 앉았던 손님들이 방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볼륨도 줄어든다. 처음엔 가족들이 모여서 쉬나 했는데, 밤 12시가 넘어도 불이 지나치게 휘황찬란한 날이 일주일에 한두 번 있다. 마음 졸아 들게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길에서 맞닥뜨리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참는다.
남들은 건물주면 월세 받아 통째로 다 쓰는 것으로 알지만 일 년에 세금을 여덟 번 내서 삼분의 일은 세금으로 나가고 감가상각이 되어 주기적으로 집수리하느라 목돈이 들어가곤 한다. 이런 때 과감히 신고를 못하는 것이 누구에게 원망을 사면 어떤 식으로 보복을 당할지 두렵다. 그들이 돌아가고 청심환 한 알을 먹으며 몇 년 전 그 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한참 자고 있는데 와장창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예요?”
“쉿 조용히 해. 술주정뱅이 같아. 아까 공중전화 박스 부수는 소리가 났는데 이번에 우리 집 입구 문을 부순 것 같애.”
“112로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르는 사람들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수 있어. 가만히 있어. 위험 해.”
경희는 아침에서야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유리가 부서져 자동차 유리처럼 동그랗게 부서져 있어 삽으로 퍼 담았다. 어떻게 처리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유리라서 재활용 차가 가져갔다. 공중전화 부스도 다 부서져 있었다. 공공기물 파괴로 조사가 진행 되겠지 하고, 삼십만 원을 들여 유리를 새로 끼우고 셔터를 달아서 이중 장치를 했었다. 아파트와 다르게 관리에 손이 많이 간다.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 전혀 생기지 않을 일들이 일어나는 건물 주택이 버거움을 느낀다.
“여기 드디어 자리가 났네요? 가게 얻을 수 있어요?”
“벌써 나갔어요. 샌드위치 가게가 들어와요.”
“이집이 근방에서 집세가 제일 싸서 가게들이 바뀌지도 않고 주인이 잘해준다 해서 비면 들어오려고 했는데. 사장님도 여기 오래 계셨지요?”
“한 30년 넘었지요. 주인이 장사하는 사람 고충을 잘 알아줘요. 집세와 인건비에 허덕인다고 잔소리 안하고, 명절이면 선물주고 그 동안 한 번도 집세 안 올렸지요. 그러니 누가 나가려 하겠어요? 전화번호 적어놓고 가세요. 쉽게 나진 않을 거예요.”
“아파트 단지에도 소문이 났어요. 오래 하니 물건 좋고 양심껏 장사한다고.”
그 앞을 지나던 형부가 우연히 이 건물의 주인 인심에 대해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경희를 추겨 세운다. 제부는 몸집이 큰데 2층을 올라올 때마다 투덜거린다. 집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이층 식당에서 창고 같이 써서 다니려면 불편한데도 주인이 좀 참으면 된다며 당연한 권리도 못 챙기고, 욕심내지 않고 검소하게 사는 주인 경희가 인심을 쓰고 있는 걸 못마땅해 한다.
소공동에서 제법 큰 건물 임대업을 하는 그의 정서로 장모님 건물 관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직장을 퇴직하고 자기 건물에서 커피 집을 시작했다. 요즘은 ‘조물주 위에 건물주’란 말도 있다. 저금리 시대, 연예인이나 자영업자 등 수입이 일정하지 않을수록 고정수입이 들어오는 건물에 대한 현대인들 열망 때문이다.
오늘은 시월 보름.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 터의 안녕을 비는 고사를 할머니 때부터 해왔는데, 엄마도 그 풍습에 따라 고사를 준비했다. 우선 조왕님께 고사를 지낸다.
시월상달 보름날이면 엄마의 친정에서는 마을 어귀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고, 한웅천왕을 맞이하는 제물을 차려 놓고 마을 어른들이 풍물을 돌며 집집마다 액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한다. 팥떡을 시루 째하여 장독대에도 놓고 방 부엌 등에다 놓고 빌은 후 동네에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다른 집들도 고사떡이라 가져와서 채반에 팥떡이 수북이 쌓였는데, 지금이야 터에 고사 지내는 집이 몇 집이나 되겠냐며 사라지는 미풍양속을 안타까워하신다. 당시 팥떡이라도 집집마다 다른 맛을 지니고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고 회상 하신다.
이제 일층 뒤울안에다 고사 상을 차린다. 삼겹살 생고기를 여기에 올린다.
“집수리하고 인사드립니다. 임차인들 다 돈 벌게 하고 장사 잘하게 해주세요. 이 터는 쌀과 소금이 수북수북 쌓이고 보물이 그득한 터라던데 절대 팔지 말고 잘 간직하게 도와주세요.”
“네. 엄마 저희도 이 터 팔지 않고 잘 이어갈게요. 퇴직하면 여기에 사무실을 내고 싶어요.”
“매사에 조심해라. 임차인들이 잘 돼야 너희가 편한 거라 주차장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바로 집 뒤에 들어오더니 집안에 앞뒤로 볕이 어찌나 잘 드는지 환해져서 좋다. 가끔 터에 고사 지내는 것도 임차인 사업 잘되게 비는 거다. 세상사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매사에 정성된 마음을 갖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고사가 끝나고 막걸리를 사방에 뿌리라하여 현관 앞에 뿌리니 막걸리가 한길로 주르륵 흘러간다. 행인이 냄새를 피운다며 째려보고 간다. 여기 상가 건물들이 많지만 개업할 때 돼지머리 올리며 고사를 지내는 정도다. 엄마는 곱게 보지 않는 이 미풍양속에 대해 민서의 태도를 강요한다.
이 건물을 살 당시인 88월드컵이 열리던 해엔 아파트 값이 무척 오르고 인기가 높았다. 융자 끼고 사서, 이자 원금을 갚고 나면 좀 더 넓은 평수로 이사하면서 재산이 증식되고는 하여 사는 맛도 나고, 부동산 투자로 재미 볼 때였다.
경희도 당연히 그런 식으로 넓고 쾌적한 아파트로 가려했는데 남편 태현이 이제 퇴직하고 고정수입도 없는데, 관리비도 부담되니, 매월 세가 나오는 상가주택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장충동에서 식당을 오래 하신 시부모님도 내 집에서 세받으며 사는 게 평생소원이었다.
주택 두 채를 나란히 사서 두 집을 연결해 살았는데, 너희 집과 합치면 상가주택을 살 수 있다고 적극 권했다. 며느리인 경희는 시부모와 합치는 게 부담이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이 상황에서 직장에 다니며 두 집 살림하기는 힘들었고, 한 예언이 가슴 속에서 맴돌았다.
아빠 태현의 주변을 맴돌던 김춘배가 정년퇴직을 하고 위축되어 있는 그를 찾아왔다.
“영동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몇 개 없는 거 알지요? 휴게소를 하려는데 자금도 부족하고 인허가에 막혀 있어서 같이 하자고 왔습니다.”
“세상 퇴물이 된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알아보니, 이 인허가는 태현 씨라야 따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서서 결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믿음직하고 선량한 얼굴로 다가왔고, 자존감이 낮아져 우울해 있는 그의 급소를 공격하며 다가왔다. 아빠는 이제야 그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며 오만하게 승낙을 했다. 퇴직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란 말도 아는 그가 정작 그에게 붙은 사기꾼은 못 알아보았다.
이미 인허가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고 건설 과정에서 구속된 사람도 있었다. 주변에서 퇴직금을 날린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그런 놈한테 속나 어이가 없다. 사기꾼은 진짜 사기꾼 같이 생기지 않은 얼굴로 찾아온다고 말했었는데 당하려니 순식간에 큰 상처를 입었다. 퇴직금을 되찾으러 몇 번인가 갔다가 어깨가 쳐져 돌아온 그를 보더니, 민서는 아빠 이제 그 돈 포기해요. 돈 잃고 건강까지 잃는다고 말렸다.
할아버지는 한 술 더 떠 그런 놈들은 귀찮게 쫓아다니면 무슨 짓을 할 줄 모른다며 포기하라고 했다. 이젠 퇴직금도 거의 날리고, 가족들의 신뢰도 져버렸을 때, 할아버지가 서울 집을 잡혀 만든 자금을 주었다. 그를 외면한 세상을 피해 이젠 쉬겠다고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섰다. 기왕 강원도 길 위에서 제2의 인생을 찾으려 했으니 공기 좋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가족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건설 현장을 따라 지방으로 해외로 돌아다녔는데 제발 식구들 하고 같이 살며 여행이나 다니지, 서울토박이가 산촌 생활을 어찌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렸다. 그러다 ‘오대산장’이 월정사와 상원사 중간 야영장의 매점으로 나온 것을 알았다.
성수기에는 텐트가 천여 개씩 쳐지고 그들을 상대로 전 주인은 떼돈을 벌었다고 시작하면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다니는 절 신도들 중 꽤 있었다. 아빠는 자세하게 얘기해야 또 반대에 부딪힐 것 같아 다 해놓고 식구들을 불렀다.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미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여름 캠핑이 시작되자 가족들이 도와주었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오대산의 포근함이 IMF를 겪으며 일어났던 수많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캠핑 성수기와 장마가 겹치게 마련이어서 운영해보니 역시 큰 소득은 없었다. 가족들과 공기 좋은 산속에서 즐기고, 지인들이 사업 시작했다고 찾아와 같이 어울리는 정도로 위로를 삼으며 가을 단풍철까지 보냈다. 겨울은 비수기로 춥고 한산한 그곳에서 눈 치우느라 고역을 치르며 지내고 있었다.
월드컵 전 해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경희는 오대산장을 운영하며 고생하는 남편 밥을 해주러 민서와 갔다. 샤브샤브를 해먹으려고 준비를 했는데, 경희를 태워오느라 집을 비운 동안 가게를 보아주던 여인이 사모님 오셨냐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회사 사모님인데, 내일 동대산 정상에서 천신 제를 지내러 오셨다고 했다. 샤브샤브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
“1500고지 동대산을 무슨 수로 올라가나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샤브샤브를 맛있게 먹은 것은 처음이에요.”
“밥 한 끼 같이 한 것을 가지고 뭘 그러셔요.”
“밥값은 해야지요. 그 동안 사장님이 동피 골 관리하느라 고생했다며, 내년 오월에 상가주택으로 문서를 바꾸니 잘 받으래요. 아는 사람에게서 사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비싼데 돈 없어서 못 사요.”
태현은 지금 빚이 얼마인데 상가주택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에겐 우연히 말해주는 예시가 여러 번 있었고, 그 말들이 운명을 안내하는 빛 같았다. 이번에도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간 엄마는 연말 모임마다 이 얘기를 재미삼아 하고 다녔다.
“아는 사람한테 산다니까 뭐 팔 거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
“그런 말을 진짜 믿는 것은 아니지?”
모두들 웃어넘겼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되어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주택 두 채를 연결해 아이들이 오가고, 주말엔 서로 음식을 만들어 같이 먹으며, 노후엔 이 방법이 최고라며 살았는데 그렇게 되니 선생을 하는 엄마가 두 집을 다니며 살림을 하여야해서 개학하기 전에 무슨 대책이 강구되어야 했다.
아빠는 어떤 영감이 있었는지 사람 왕래가 많은 사당동에 상가주택을 사자고 했다.할아버지랑 집을 보라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집은 턱없이 돈이 모자랐고 물건도 많지 않았다. 다행히 방배동 집 둘 중 태현 네가 길가로 난 집이라 6미터 4미터 코너 집으로 두 채를 묶어서 내놓았더니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삼일 만에 나왔다.
아빠는 그동안 본 집을 이야기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오대산장을 종업원에게 맡겨놓고 서울로 올라와 할아버지랑 보러 다녔다. 계약을 하였다고 연락이 왔다. 엄마와 집을 보러가니 길은 시끄럽고, 상가주택은 지은 지 32년이 되어 다 쓰러져갔다. 지금까지 재산증식을 잘해 주택 2채를 갖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린 이제 망했네. 다 쓰러져가는 이 집에서 어떻게 일곱 식구가 산다고 이런 집을 샀어.”
“이 집 주인네 자식들이 박사가 셋이 나왔다니까 할아버지가 무조건 사라고 하셨어. 너희들도 잘 될 거야.”
“아빠 정말 너무해. 주택을 정리하면 아파트로 가야지.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위치가 좋잖아. 너무 낡아서 자리는 좋은데 새로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고 리모델링을 하려면 위험해보여 안 나갔대. 내가 평생 건설 회사를 다녔는데 전문가들과 상의해 제대로 해 놓을게.”
아빠는 너무 속상해 밥도 안 먹고 우는 식구들을 그렇게 위로했다. 이번에도 또 사기를 당했다고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예언도 있었고 실추한 권위를 되살리고 싶었다. 다음 날 태현은 공사과장을 하다 건축을 하는 후배와 회사의 안전진단 반을 불러 보이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집 그냥 리모델링하면 위험한데. H빔 12개 박고 층마다 철판 깔아놓으면 튼튼하게 고칠 수 있어.”
“자리는 정말 좋지? 정 사장이 설계 맡겨서 잘해 줘. 백여 명이 침을 흘리다 못 산 것을 우리 건설 밥 평생 먹은 실력으로 해 보자.”
“더블 역세권에 오천 세대의 아파트 통로라 위치는 따봉인데, 공사하려면 애 좀 먹겠어요. 더구나 여긴 인도없이 차와 뒤엉켜 위험하니 주로 새벽에 일을 해야겠네요.”
“이 지역 국회의원 공약이 인도를 만들어주는 거였어. 건물 앞을 잘라 인도 5평을 주면 1억 보상을 받는대. 보태서 잘 고치면 소송 중인 이 도로 상인들도 너에게 고쳐 달라 할 거야.”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았다. 집값이 모자라 융자를 빼서 잔금을 줘야하는데 한 테이블에 매도자 매수자를 앉혀놓고 사인을 그 자리에서 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전 같으면 어디서 꿔서 사고 융자 나오면 갚느라고 곤욕을 치르는데,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척척 문제가 해결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해 상가주택을 중도금을 안 넣고 계약금과 잔금만 넣어 계약했다. 돈을 다 지불해야 고치고 들어갈 수 있는데 돈이 안 맞았다. 팔고 온 방배동 집엔 16채의 다가구를 지어서 노후대책을 하겠다고 설계가 나왔다.
아빠가 두 집을 나란히 살 때도 그런 계획이었는데 자금이 없어 못했던 일을 그는 거뜬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집을 산 그에게 잔금을 미리 달라고 해서 집 비울 때까지 이자를 주는 조건으로 상가주택 잔금을 치르고 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부자의 광에서 인심이 난다고, 여유 있는 사람이 너그러워 이자를 드리니 잘 살라하며 완공되고 서로 왕래를 하며 지냈다.
이제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양쪽 집 세입자를 내보내고 공사를 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가주택 꼭대기엔 사업이 망해 여기에 살고 있는 세입자가 보아둔 연립을 사게, 이주비 천만 원을 주지 않으면 못나가겠다고 못을 박았다. 세입자가 안 나가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같이 설득하러 갔던 경희는 태현을 달랬다.
“전부터 어려운 사람들 장학금 잘 주던데. 고시 공부하는 명문대 아들에게 장학금 준다고 생각하고 진행해. 다른 데서 더욱 아낄게.”
구청에서 나와 톱으로 자르듯 건물 앞을 자르고 1억을 주었다. 아파트와 지하철을 잇는 진입로 상가주민들이 다 보러 왔다. 장 사장은 현수막을 걸고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꼭대기 두 층엔 7식구가 살 집을 만들었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공사 기간이 촉박해 살림집만 다 수리를 하고, 바깥엔 공사 가람막이 펄럭이는 데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 아무 사고 없이 공사가 끝나 다행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생의 꿈을 이룬 게 좋으신지 매일 주전자에 마실 것을 들고 다녀와서 혀를 흘끔 내밀었다가 닫으며 공사 진행사항을 얘기했다.
놀라운 것은 민서도 힘을 줄 때는 혀를 물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북한에 끌려가신 큰할아버지가 똑 같이 했다며 한 번도 본적 없는 모습을 어떻게 따라하는지 유전은 무서운 것이라 했다. 그녀는 그 말이 싫어 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안 하려 해도 힘을 줄 땐 이미 혀를 물고 있었다.
민서가 천막 속에서 책가방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본 아파트 친구들에게 들켜 놀림을 받았다. 대학 학보사 편집국장인 언니는 이사하느라 냉장고를 바꾸자 사무실에 놓겠다하여 용달로 싣고 가며 이사한 걸 제일 행복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