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도 ‘우’도 다 같이 갈 수 있는 길―통일운동 시기
1989년 3월, 72세의 문익환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북’을 감행했다. 이때 김일성과 나눈 두 차례의 회담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화 함께 발표한 4.2남북공동성명은 통일운동의 최고의 업적이 되었고, 그후 남북 양측의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11장 참조) 한반도의 정치 지도 안에서 그는 틀림없는 ‘중립화 통일론자’였지만, 그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길을 가려 했던 게 아니라 ‘좌’도 ‘우’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꿈꾸었다. 이를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위협해온 ‘냉전 감정’이라는 위험한 심리가 제거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나의 애국단체였던 문익환가(家)
문익환을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의 가족이 언제나 하나의 ‘애국단체’처럼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족 성원들의 강제에 의해서라도 한국사의 현장을 떠나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부인 박용길 여사는 문익환이 가는 모든 길을 함께 간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숨은 공로자였고, 그의 자녀들(문호근, 문영금, 문의근, 문성근)은 투옥과 감금, 투쟁의 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였다. 특히 민중신학자인 동생 문동환과 누렸던 형제간의 우애와 경쟁의 뜨거움은 역사의 공간을 함께 갖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와 늘 정세토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그는 가족 성원들의 강제에 의해서라도 한국사의 현장을 떠나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부인 박용길 여사는 문익환이 가는 모든 길을 함께 간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숨은 공로자였고, 그의 자녀들(문호근, 문영금, 문의근, 문성근)은 투옥과 감금, 투쟁의 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였다. 특히 민중신학자인 동생 문동환과 누렸던 형제간의 우애와 경쟁의 뜨거움은 역사의 공간을 함께 갖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어머니 김신묵 여사와 늘 정세토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대한민국은 고통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장소였으며, 반드시 ‘부활’을 이루어야 할 신성한 사명의 땅이었다.
문익환과 함께 보낸 꿈과 열정의 시대, 그리고 10년!
야만적인 세계를 동화 같은 세계로 바꾸어버리는 문익환적 삶의 실체, 그것은 ‘꿈’이었다. 현실의 비어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에 대한 꿈을 확보하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진행시킨 매우 근본적인 노력의 하나였다. ‘역사’와 ‘꿈’과 ‘부활’은 문익환에게 이음동의어였다. ‘민주주의는 이루어졌어!’, ‘통일은 됐어!’, ‘나의 이름도 너의 이름도 전태일이라네!’와 같은 예언적 발언들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그는 광야의 선지자처럼 황무지의 역사에 ‘꿈’을 지폈고, 그것은 독재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가 되었다. ‘민통령(民統領)’이라는 별칭답게 그는 민중이 가슴으로 신뢰한 시대의 아버지였다.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 불행한 민족의 아들딸을 섬기고 사랑한 온갖 기억들이 전국의 젊은이과 재야인사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한국 군중언어사에서 최고의 연설로 기록될,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26명의 열사 이름을 외쳐 부른 이 연설로 그가 안내한 6월항쟁의 절정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집단적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어느 노동자가 또는 학생이 분신하거나 투신했다’는 전화만 걸려오면 한밤중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그는 숯덩이가 된 젊은이를 온몸으로 껴안았고, 피투성이가 된 주검도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분신자들을 수습하는 어머니가 유가협의 어머니들이라면 그 아버지는 문익환이었다. 분신자들이 남겨놓은 과제를 헤쳐갈 아우들이 살아남은 젊은이들이라면, 그들의 아버지 역시 문익환이었다. 철거민들이 집을 빼앗긴 자리에도 어김없이 문익환이 있었다. 허름하고 낮은 곳, 밑바닥의 사람들과 더불어 울고 춤추고 이야기하면서 한 번도 궁색한 음식을 탓하거나 밥 한 톨 남기지 않았다. 교도소 안의 ‘개털 인생’과 하급 교도관들을 치료하면서 그가 개발한 ‘경락 파스 치료법’은 어지간한 병원 하나보다 더 큰 ‘진료 보시’를 세상에 남겼다. 문익환의 사고방식 안에서는 정부에 구속당하는 것도 정부와의 대화 통로를 뚫는 영광의 초대일 뿐, 형극의 짐을 지우는 부담이 아니었다. 간수와 교도소장도 그에게는 대화의 상대일 뿐, 누구와도 ‘적’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엄숙하고 무거운 투쟁의 현장을 신명나는 환희의 장으로 바꾸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무한하게 타자를 껴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이들이 ‘불의와 싸웠다!’고 이야기할 만한 곳에 뛰어들어 그는 ‘양들을 섬겼다!’ 우리가 가진 ‘생명’과 ‘사랑’ 그 자체만을 가지고 그는 부와 명예, 그밖의 영광들을 모두 합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 우리 앞에 내놓았다.
발바닥으로 되살려낸 문익환의 전모, 평전문학의 금자탑
문익환은 ‘역사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쓰는 것’이라고 했을 만큼 제도화된 역사 속에서 늘 묻히고 소멸되는 ‘발바닥’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온갖 무용담의 파편 속에 어슴푸레 짐작되던 문익환이란 인물이 피와 살을 가진 실체로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 데에는 이 책의 저자 김형수가 5년 동안 ‘발바닥’으로 기록한 노고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99년 처음 시작된 이 원고는, 5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은 방대한 자료 수집, 문 목사의 방북 당시 기록을 찾아보기 위한 수차례의 방북과 또 몇 차례의 개고를 거듭케 했다. 가족을 비롯해 문익환이 살아 생전 관계했던 인물들을 모두 인터뷰했고, 방대한 저작물은 물론 옥중에서 남긴 편지나 잡글까지 그러모아 ‘문익환’이라는 실체를 부조(浮彫)해갔다. 이렇게 하여 우리 앞에 놓이게 된 이 책은 한 사람의 일대기에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우리가 살아왔던 저 20세기라는 한 시대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한 인물과 더불어 그가 짊어진 시대의 사상 철학 역사가 어우러진, 한국 평전문학의 일획이 그어진 것이다.
광야에서 예비한 선지자의 삶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20세기는 1918년에 시작되었다”고 쓴 바 있다. 1917년 10월에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9개월간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이 국가적 위상을 확보한 이래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종전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다. 문익환은 이 불행한 세기의 원년(1918년)에 태어났다. 두 진영이 벌이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적 활극의 무대가 된 한반도에서 문익환이 자신의 뜻을 펼쳐간 경로는 오래 준비된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지거니와, 어느 동화책의 주인공 같은 목회자가 ‘20세기라는 무자비한 괴물’과 벌인, 처절한 악전고투였다.
이 책의 저자는 문익환의 “정서적 조국은 고구려였으며,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다고 쓰고 있다. 문익환은 만주에서 유?소년기, 일본과 미국에서 청년기, 남한에서 장년 이후를 살았다. 거주지를 옮긴 것만도 열여덟 번.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활동을 펼쳐간 문익환의 뿌리는 광대무변한 북만주 벌판에 닿아 있다. 할아버지 세대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명동촌에 터를 잡은 이래, 문익환은 1946년 29세에 남한으로 걸어서 내려올 때까지 그곳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며 독립정신을 체화해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유학중이었던 문익환은 유엔군에 자원하여 정경모와 함께 유엔측 대표의 정전회담을 통역했다. 협상 의제에 오른 한국전쟁의 온갖 신물나는 디테일들은 낱낱이 그들의 입술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눈앞에서 ‘분단’이 확정되는 것을 가장 먼저 목격해야 했기에, 그의 좌절과 상처는 그만큼 깊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한국인이 읽을 수 있는 성서를 위하여―성서번역 시기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하는 한편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구약학을 강의했다. 그리고 1958년 신구교가 함께 하는 성서 공동번역의 책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공식 직함은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 그가 내세운 두 가지 원칙은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과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 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었다. 성서 번역을 통해 문익환은 세 가지 경험을 얻었다. 신교와 구교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 신학적인 편견이 걷히는 경험,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이 그것이었다. 한글성서가 이룬 변화는, 공공집회에서의 남녀 동참, 인간평등사상 고취, 반상동석(班常同席), 민주적 회의법의 훈련, 한글전용 문화의 정착, 새 음악운동에 공헌한 찬송의 보급 등 실로 눈부셨다. 훗날, 암울한 시대의 절망감에서 문익환을 건져준 힘 또한 이 시기에 학습한 ‘신의 옛 약속’(구약)이었다.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민주화운동 시기
그를 성서 밖의 세상 속으로 이끌어낸 결정적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껴안고 불타버린 사건은 문익환에게 자신이 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뼈아프게 되새기게 했다. 전태일이 받아든 ‘생’의 ‘명’은 ‘죽음’이었고, 문익환에게 그 죽음은 ‘죽임’을 파괴하는 ‘부활’의 길이었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1976년, 그의 나이 58세 때 ‘3?1민주구국선언’을 시발로 문익환이 줄기차게 달려온 행보는 민주화운동의 집약사라 할 수 있다. 문익환은 1978년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한 일로 두번째 수감되었고, 1980년 쿠데타 세력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내란예비음모죄’로 재구속되었다. 1984년, 계훈제, 백기완, 장기표 등과 함께 민주통일국민회의를 결성하고 그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에 취임했다. 1985년 서울대?계명대 등에서 한 강연이 빌미가 되어 선동죄라는 명목으로 지명수배되었을 때에는 자진 출두하여 재판을 받았다. 1989년 방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다시 구속되었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 속에서 강경대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의 활동으로 고령임에도 다시 수감된다. 그는 1976년 첫번째 수감으로부터 1994년 1월 18일 가석방 상태로 마석공원에 묻힐 때까지 햇수로는 19년, 달수로는 215개월, 날수로 6,529일 중에서 달수로 102개월, 날수로는 3,102일 동안만 감옥 밖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문익환에 대한 모든 기억은 그 100여 개월 동안의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