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그림 읽어 주는 여자 / 신영미

[햇살]

그림 읽어 주는 여자 / 신영미

한젬마의 『그림 읽어 주는 여자』는 그림을 좋아하는 나를 한눈에 사로잡았다. 특히 신현림의 ‘키스, 키스, 키스!’ 중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는 오랜 시간 홈페이지 제목으로 쓰였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림이라 소개했다. 휘파람을 부는 입술에서 꽃들이 가득 뿜어져 나온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꽃 향기가 전해져 온다.

내게 미술 부전공 자격증이 있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 우연한 기회에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생들 중에는 도서벽지의 작은 학교에 가면 겸임을 해야 하는 음악 교사들이 많았고 나처럼 순수하게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교사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이도 있었다. 수묵화를 배울 때는 교수님이 한국화를 해 보라거나 조각을 하면 조각을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거기서는 보통이었다. 덕분에 수채화를 배우러 학원을 두어 달 다녔다. 선 그리기부터 공부하니 정말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이젤을 들고 꽃들이 가득한 들판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소풍을 꿈꾸기도 했다.

여러 종류의 미술 수업을 들었는데 실습하는 시간뿐 아니라 서양화를 소개하는 이론 수업도 맛깔난 교수님의 이야기에 눈과 귀가 모두 즐거웠다. 화가들의 이야기는 그림을 그리게 된 필연성을 느끼게 했다. 생활고나 사랑, 연인들이 그림에 투영되었다. 미술관에 가면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것도 좋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다. 설명을 듣고 나면 그림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미술 전공자들이 경험하는 누드 그리기가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이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한 적이 있는데 학생들에게는 누드 모델이 중요 부위를 가렸다고 했다. 여자 모델이 먼저 들어왔다. 한겨울이어서 부츠에 털코트를 걸쳤고 난로를 벗어날 때는 조금 추워했다. 나는 부전공 연수에서 누드 모델이 등장할 줄은 생각도 못 했고 더구나 남교사들도 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우리 앞에 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교사들은 모델의 몸매가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았다. 남교사들은 그 전 수업에서는 틈틈이 담배를 피우고 커피도 마셨는데 이 시간만큼은 쉬는 시간도 없이 몇 장을 그려 댔다. 천재 남 교사의 스케치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유두에만 칠한 붉은색으로 그림에 생기가 돌았고 인체가 아름답게 느껴지게 했다. 

드디어 남자 모델이 들어왔다. 탄탄한 근육에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청년을 보자 여교사들의 눈이 반짝였다. 모델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여인들 얼굴이 붉어졌다. 이젤의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몸의 각도가 달랐다. 정면에 위치한 여교사가 중요 부위를 적나라하게 그려서 공분을 샀다. 대부분은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비워 두었다. 내 이젤 위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굳이 내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보이는 각도에서만 그렸다.

이날 이후 교사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회만 되면 이디피에스(EDPS)가 난무했다. 당시 음담패설을 그렇게 불렀다. 풍경화를 그리러 소쇄원에 간다든지, 교수님의 화실에 들러 수업을 할 때는 버스를 타야 한다. 여교사 반장은 특히 이야기꾼이었다. 마이크를 잡으면 버스가 웃음소리로 넘쳐났다. 훗날 모임을 만들어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첩에 이야기를 적어 와 들려줄 정도의 열의도 있었다. 남 교수님이 버스에 타도 굴하지 않았다. 남 교사의 수는 적었고 누구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남 교수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이크를 놓지 않는 여인들은 마치 짓궂은 여고생 마냥 즐거워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모임을 만들어 미술관 여행을 다녔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해초들이 무성한 베란다 ‘카사 밀라’, 해골 모양의 베란다와 뼈들의 연결 기둥 ‘카사 바트요’, ‘구엘 공원’의 도마뱀 분수와 인체공학적이고 색색의 타일로 된 벤치, 파도 모양과 나뭇가지들이 뻗어 있는 산책로.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자 가우디의 최후 걸작인 ‘사그라나 파밀리아 성당’을 돌아봤다. 특히 이곳은 옥수수 모양의 4개의 탑, 기하학적 문양의 천장과 기둥,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천재 건축가 아니 예술가 가우디는 모두 자연에서 가져왔다. 나뭇가지, 잎, 꽃, 열매, 동물, 파도 등 세밀하게 관찰한 형태와 직선, 원, 도형들의 기하학적 설계로 세련된 디자인을 연출했다. 그리고 자연의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컴퓨터가 없던 그 시대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을 어떻게 구상했을지 놀랍다.

작년에 수채화를 시작해 보려고 붓을 들었다. 미술 교사의 재능 기부로 한 장을 그렸다. 다시 여유가 되면 이젤과 스케치북을 들고 들판에 나가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