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부활절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단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주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변화가 먼지요, 티끌인 내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메시지는 언설로 아득하지만 그 빛을 조금이라도 만질 수 있도록 돕는 주일이면 좋겠네요. 찬란한 슬픔 뒤에 만날 주님을 고대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The Christ is Risen!)
10여년 전, 영국에서 귀국 후 양평의 한 신학대학에서 설교학을 강의할 때였다. 학기 수업이 종반으로 접어들자, 수업을 듣던 한 장로님은 조금 편안해지신 틈을 타 내게 말하였다. “교수님, 저는 사실 장로가 되어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최근에서야 믿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부활절 절기가 되면 그 기억이 새로운 것은 목회 현장에서 만나곤 하는 기독교 진리와 신앙 생활의 괴리 때문이다. 종종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는 교인의 실제 삶에 용해되기보다 그저 교리로만, 혹은 형식으로만 머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강단의 임무에 너무나 중요하다. 그 복음은 부활절, 단 한 주일에 가두어 두기에는 너무나 찬란한 복음이다. 성경이 증언하듯, 사도들의 첫 설교, 최초의 선포는 “너희는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셨다”였다.(행 3:15) 뿐만 아니라 바울이 선포한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동시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고전 15:1-19) 특히 아덴에서 설교할 때, 바울은 예수와 부활을 너무나 강력하게 전한 까닭에 사람들은 예수스라는 신과 아나스타시스(부활)라는 두 신을 전하고 있다고 혼동할 정도였다.(행 17:18) 이는 바울의 실제 설교 속에 부활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핵심적인 주제였는지를 반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사요, 설교자로 자처하는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사활을 거는 부활의 복음을 더욱 힘차게 전할 필요가 있다.
부활이 담고 있는 메시지
그렇다면 부활의 복음과 관련하여 설교자들이 전할 진리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담고 있는 신학적 광채는 십자가의 광채만큼 눈부시지만, 그것과 관련된 핵심적인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Jesus is Lord)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을 이기신 사건은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의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객관적 표징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 분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으며, 빌라도와 공회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판결과 견해를 뒤엎으셨다.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 Stott)는 이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신성모독이라는 판결을 받으셨던 예수님은 이제 부활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명명되었다.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선동죄를 선고받고 처형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나무에 달리셨으나, 예수님이 지신 저주는 그 분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인한 것이었으며,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세주이심이 입증되었다.” 곧 죽음을 부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에게 덧씌워진 인간의 모함이 모두 거짓이며, 자신이 바로 그 그리스도시라는 자신의 증언을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사건이다.
둘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구속받은 물질적 우주의 첫 열매이며, (그런 까닭에)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자, 보증이 된다. 다시 말해, 참 인간이셨던 예수의 부활 사건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로서 죽은 자들의 일어남의 첫 시작(고전 15:23)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의 장엄한 서막이다. 따라서 부활의 사건은 이 진리를 참되게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멸의 희망과 용기를 제공한다. 위대한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는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 기독교의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를 이렇게 강해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구속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죄의 결과는 그들의 영과 혼과 몸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이 타락했을 때, 몸을 포함한 모든 부분이 타락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온전해 지기 위해서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포함하는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머지않아 신체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을 경축하며 고대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교회는 오늘을 살지만 동시에 내일을 사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꽃을 응시하는 공동체이다. 그러한 신앙 공동체는 죽음에서 일으키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비굴하거나 비루한 삶이 아니라, 진리 안에 살며 진리 안에 행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야말로 부활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예배학자, 로버트 웨버(R. Webber)가 “부활의 명백한 증거는 합리적인 논증에 있지 않고 부활한 신앙 공동체 속에 있다”한 것처럼, 부활에 관한 확신에 찬 전망과 믿음은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증거가 된다. 그들은 “진리와 생명 되신 주, 이 몸을 바치옵니다”는 그들의 찬송처럼, 영광스러운 그 날을 고대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오늘을 산다.
부활의 복음을 다채롭게 전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설교자로서 부활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부활의 복음은 위대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우리의 부활절 설교는 역설적이게도 식상하며 예측가능한 설교일 수 있다. 종종 그것은 동일한 주제의 변형으로 매년 비슷비슷하거나 심지어 예화조차 재탕이 되기 쉽다. 이를 방지하고 부활절 설교에 변화와 풍부함을 가져오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의 앵글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인물의 다양한 시선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들을 검토할 때,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 장소, 분위기 등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덤에서, 예루살렘 부근에서, 다락방에서, 엠마오 도상에, 그리고 갈릴리 호숫가를 비롯한 다양한 장소에서 나타나셨다. 또한 그분을 만날 때의 사람들의 상황 또한 다양했다. 마리아는 울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으며, 도마는 의심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그 주간의 일로 마음이 혼돈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와같이 우리는 성경인물들이 마주한 다양한 삶의 시선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설교에서 다룰 수 있다.
둘째는, 다양한 책을 통한 접근이다. 우리가 신약을 면밀히 살피면,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과 나머지 서신들과 계시록을 비롯한 무려 열 여섯 권의 책에서 부활에 관하여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전반에 스며있는 보다 폭넓은 본문의 발굴을 통해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의 복음을 설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진리를 전할 것인가? 내가 들었던 가장 끔찍한 부활절 설교는 너무나 차분하고 심지어 차갑게 부활을 증거하던 설교이다. 그 부활절 설교는 내용에 관한한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나 그것을 전하는 설교자의 어조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전하는 진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은 우리의 입보다 때때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법이다. 설교학자, 토마스 롱(T. Long)은 설교자는 변호사처럼 설교할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 설교해야 한다 말했다. 실로 옳은 말이다! 참 설교는 그의 입술이 아니라 그의 심장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은 설교란 그 진리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입술을 통해 전달되는 순간 딱딱하고 차가운 빵이 되어 청중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 되지 못한다.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다가가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주제는 창세기 강해보다 훨씬 더 자주 강단에서 다뤄야 할 주제이다. 그것은 종종 몇 주간에 걸쳐 진행되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꿈의 사람 요셉, 재건의 사람 느헤미야에 관한 연속 강해보다 훨씬 더 깊이, 오래 다루어야 하는 주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이 절기가 다가오면, 필자는 그 진리의 광채에 비해 설교자로서 부활에 대한 나의 신학과 그 이해가 빈약함을 한탄하곤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해보니 신학교에서도, 세미나에서도 특별히 이 진리를 심도깊게 배우거나 연구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캔터버리 대주교였던 마이클 램지(M. Ramsey)가 일갈한 것처럼, “부활이 없는 복음은 그저 복음의 마지막 장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복음이 아니다”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우리의 신학 교육은,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의 강단은 그 어떤 주제보다 이 주제를 더욱 심도깊게 다룰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_ 손동식 박사(영국 런던신학대학 설교학 박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설교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