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을 내주다 / 임정자
시댁 하면 '시' 자가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다는 친구들이 있다. 사실, 나는 친정보다 시댁이 더 따뜻했다. 친정엄마는 늘 논밭에서 일하기 바빴다. 그래서 집안일은 할머니가 맡아서 했다. 나는 엄마 젖보다는 할머니가 쌀을 물에 불러 죽을 쑤어 먹였다고 둘째 언니가 말해주었다. 시골 학교 운동회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학교로 모였다. 그런데 친정엄마는 그날도 논에서 일했다. 자식들 학비를 준비해야 했으니 비 오는 날에나 겨우 쉴 뿐이다. 한량인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가족의 생계를 엄마가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교사인 외삼촌의 모습을 보고 딸이든 아들이든 사회의 일원으로 잘살라는 바램으로 엄마는 자식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형제자매는 아버지보다 엄마를 더 믿었다.
남편의 고향은 목포다. 직장 때문에 우리는 원주에서 살았다. 시댁에 내려올 일은 일 년에 서너 번, 시부모님 생신과 명절 외에 여름 휴가철이었다. 시댁 방문은 마치 여행 같았다. 원주에서 목포까지 승용차로 편도 5시간, 오가는 동안 길에서 만나는 풍경은 보기 좋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는 음식도 맛있었다.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밥 두 그릇을 먹게 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갓 절인 김치와 바로 구운 생선, 싱싱한 꽃게로 만든 양념 꽃게장 등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주로 올라갈 때면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어 석 달 식량은 저장해 두고 먹을 정도였다. 시어머니의 따뜻한 정성은 사랑이었다.
원주에서 10년을 살고 발령받아 광주로 왔다. 원주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은 사라지고 우리는 바빴다. 남편은 신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공정에 책임자로 일하면서 퇴근이 늦었고 나는 방송통신대 편입 해 공부했다. 그러던 겨울, 중학생 딸의 졸업을 하루 앞두고 남편은 이르게 퇴근한다고 연락이 왔다. 잠깐 피부과 들러 집에 가겠노라. 통화 후 30분도 되지 않아 집에 도착했다. 남편 얼굴은 붉은 홍시처럼 익어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놀라 무슨 일이냐 묻자, 신입 교육을 하는 과정에서 기계를 만지다가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이 따끔따끔해 병원 들려 주사 맞고 왔다 했다. 약도 먹고 했으니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라 말하고 바로 침대 누웠다.
밤 열 시쯤 남편은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은 부어올랐고 눈은 더 뻘겋게 충혈되었다. 늦은 밤 안과에 갈 수 있는 곳은 대학병원 응급실뿐, 부랴부랴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는 응급의사가 없다며 직원은 어디론가 연락하더니 기다리라 말한다. 한참 있다가 5층으로 올라가라는 간호사 말에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간호사는 없고 담당 의사가 직접 안내했다. 보호자는 밖에 기다리라 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일 층 응급실 부근에 휠체어 있으니 가지고 오세요.”라고 한다. "휠체어를 왜요?" 나는 말을 흐리며 진료실 안쪽을 보았다. 두 눈을 봉합한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사는 치료를 위해 안대 했을 뿐이다. 실명된 건 아니라 말하고서 어디론가 연락했다. 직원이 휠체어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 사이 의사는 남편의 상태를 설명했다. 남편의 눈에 물이나 빛이 들어가면 안 된다며 일주일은 안대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빠른 조치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일단 응급조치해 놓았으니 이틀 후 검사 해 보자고 예약 날을 남겼다.
양쪽 눈을 안대로 봉합한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5층에서 내려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응급실 문 앞에 남편을 두고 혼자 주차장에 가야 했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주차장에 다녀올 테니 잠깐 혼자 있어야 한다. 움직이지 말라 당부하고 그 자리에 서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남편은 마치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밤 열두 시가 넘었다. 남편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의 눈이 되어주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남편의 눈이 안 좋은 상태가 된다면 내가 할 일을 생각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예상했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결론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능력을 갖추어놓아야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남편만 믿고 살았던 내가 상황이 바뀔 수 있겠다는 것을, 나 또한 남편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새기는 날이었다. 내가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조건 없이 믿었던 것처럼 남편에게 곁을 내주고 싶었다.
다음날 딸의 졸업식은 아빠의 부재 사진을 남겼다. 딸은 그때 일을 기억했다. 짜장면을 먹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남편의 눈은 수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치료가 잘 되어 일주일 만에 안대를 풀었다. 하지만 요즘도 피곤하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다. 눈에 이물질로 눈곱이 낀다든가 충혈이 되어 안과를 자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