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元曉)의 사상은 한마디로 ‘화쟁’(和諍)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통일신라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화쟁’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변증법’과 겹쳐지기도 하고, ‘화쟁’이 어떻게 ‘통합’을 가능하게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화쟁론은 온갖 쟁(諍)을 화해시키는 논리, 곧 쟁(諍)을 화(和)한다는 논리입니다. 화쟁의 화(和)와 쟁(諍)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죠. 그래서 화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화쟁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전호근, 24-25)
화쟁이란 것이 말은 하기 쉽지만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또 상대를 포용해야 됩니다. 포용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면 원효의 화쟁론은 의미가 없어요. 대립을 넘어서 상위의 가치를 지향하는 게 화쟁이니까요.(전호근, 27)
‘화와 쟁’은 상반되고 대립되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의 논리가 겹쳐진다.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리를 찾는 방법’이라는 변증법과 겹쳐진다.
화쟁이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포용하고 넘어서야 한다’, ‘상위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지양’(止揚, Aufheben)이라는 변증법의 논리가 겹쳐진다.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는 화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파도도 물이고 바다도 물이죠. 둘이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물을 직접 볼 수 없고 파도를 보든가 고요한 바다를 보든가 푸른 바다를 보든가 하는 식으로 물의 여러 가지 응용 형태를 보는 것뿐입니다. 응용 형태가 다른 것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싸우죠.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싸우고 옳고 그른 것을 나누어 싸우는데 그게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전호근, 38)
우리가 사람을 보는 것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사실일지라도 전부 같은 데서 나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타협점을 모색하고 결국에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원효의 ‘화쟁론’입니다.(전호근, 39)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싸우고 옳고 그른 것을 나누어 싸우는데 그게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아야’ ‘그 하나하나가 사실일지라도 전부 같은 데서 나왔다’는 말에서 ‘옳고, 그름’이 하나의 ‘사태 자체’에 대한 다른 해석과 입장에서 기인한다는 것, 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도 ‘사태 자체’에 있다는 점에서 ‘사태 자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그럼으로써 진리로서의 타협점도 찾을 수 있다는 변증법의 논리가 겹쳐진다.
한데, 원효는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싸우는데’,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타협점을 모색하고 결국에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것이 ‘화쟁론’이라는 것인데,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화쟁’도, ‘변증법’도 각기 다른 입장의 양측이 양보함으로써 ‘타협점’에 이른다기 보다는 ‘사태 자체’에 충실함으로써 드러난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태 자체’에 충실하는 그 과정에는 ‘화’도 있고 ‘쟁’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화와 쟁’이라는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진리라는 타협점에 다가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쟁의 방법으로는 개합(開合), 여탈(與奪), 입파(立破)가 있습니다. 먼저, 개합(開合)에서 ‘개(開)’는 여는 것, ‘합(合)’은 합치는 것, 곧 닫는 것입니다. 원효는 이 둘을 합쳐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개’는 하나의 불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고 ‘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진 불법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상반되는 것이 불법의 한 방편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게 개합의 논리입니다.(전호근, 40)
여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與)’는 주는 것이고 ‘탈(奪)’은 빼앗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빼앗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죠. 입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立)’은 세우는 것이고 ‘파(破)’는 깨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논리를 자기가 깨는 것입니다.(전호근, 40)
개합은 변증법에서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사고’와 겹친다. ‘여탈’은 ‘상호침투’와 ‘상호보완’의 논리와 겹친다. ‘입파’는 ‘내재 비판’(아도르노)과 겹친다.
원효가 이야기하는 화쟁의 최종 종착지는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며 만법귀일(萬法歸一)을 제시합니다. 만 가지 다른 법칙, 불법이 있지만 그걸 넘어서라고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방편인데 그걸 회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만법귀일입니다.(전호근, 41)
‘사태 자체’에 충실하라는, 촘촘한 미시론적 사고를 통해서 대상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즉, ‘정면돌파’할 때(아도르노), ‘일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읽힌다. 여기서 ‘정면돌파’는 “용수가 펼친 공(空) 사상으로 상대적 대립물 중에 어느 한 편에 집착하지 않는 것”, “중도(中道)”의 의미와 겹친다.
*한국 철학사, 전호근, 메멘토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