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를 보고
김경애
미소의 이름은 ‘미소생물서식지(microhabitat)’에서 왔다.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잠시 머물 작은 공간을 찾아 떠도는 그녀는 도시의 여행자다.
미소의 직업은 가사도우미. 그녀의 손길이 필요한 집을 찾아 그녀만의 신박한 청소 도구로 쓸고 닦는 모습은 정성스럽다. 청소가 끝난 뒤 자신의 앞치마를 단정히 개서 챙기는 모습은 품위 있어 보인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온기와 미소가 남는다. 친구에게 얻은 쌀이 비닐 봉투에서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비둘기에게 적선하며 걷는 첫 장면은 헨젤과 그레텔을 연상시킨다.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한솔)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그녀는 한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 단칸방에서 한솔과 재미난 한 때를 누리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된다. 새해가 되면서 집세를 비롯한 모든 물가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미소는 그녀의 지출 목록에서 집세를 지운 후 모든 짐을 싸서 둘러멘 후 길을 떠난다. 그녀의 손엔 대학 밴드 동아리 멤버 다섯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들려 있다.
맨 처음 찾아간 멤버는 최문영. 스스로 포도당 주사를 놓아가며 일해야 할 정도로 바쁜 삶을 살아가는 그녀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미소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룻밤의 신세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멤버다. 정주하지 않는 미소를 납득할 수 없는 문영은 말한다.
“스탠다드는 아니지.” “너 바람 든 것 같다.” “여전하네.”
두 번째로 찾아간 멤버는 키보드 정현정. 아직 마땅한 직업이 없는 남편과 함께 시부모가 사는 빌라에 얹혀사는 처지로 ‘독박 집안일’에 지칠대로 지쳐있다. 미소의 방문을 반기며 ‘정신 없던 것들’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현정은 미소의 백발(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세는 게 병)이 병이 아니라 ‘결혼이 병’이라는 명언을 남긴다.
“다 네 선택이야. 피해자 코스프레 그만해.”
힘겨워하는 현정에게 그녀의 남편이 던진 말은 더 지독하다.
다음 경유지는 한대용의 집이다. 아니 거긴 쓰레기가 가득한 감옥이다. 결혼한 지 팔 개월이 되었으나 아파트가 필요하대서 아파트를 샀더니 아내는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월 이자 100만원을 20년 동안 갚아야 한다. 안방을 두고도 작은 방에 기거하며 술과 담배와 눈물로 밤을 보낸다. 이쯤 되면 집 없는 미소가 홀가분하니 행복해 보일 지경이다.
“나 같은 게 왜 결혼은 해 가지구... 펴! 펴! 이혼도 하는데 뭐 다해도 되지 뭐.”
눈물, 콧물 뒤범벅인 어른 남자의 자조적인 언사가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만든다.
다음 집은 미소가 가장 환대를 받은 김록이네다. 멤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결혼하지 않은 채 노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미소를 처음부터 며느리감으로 낙점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긍정한다. 직업인 가사도우미는 천상여자다로, 조실부모한 처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간다고 하자 집안에서 피우라며 재떨이를 준비해 준다. 끝내는 아들과 한방에서 자도록 계략을 꾸미고 문을 밖에서 잠가 버린다. (영화가 잠깐 호러물로)
“너랑 나랑 제일 중요한 게 안정감이야.”
김록이의 안정감은 아무런 고난도 없어 보이지만 웬지 곰팡이 같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멤버는 미소가 가장 긴 시간 머물렀던 최정미의 집이다. 한때 뜨거웠던 여자, 웃음 소리가 큰 여자 최정미는 미소를 반갑게 맞이하며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고 한다. 자신의 본 모습은 숨긴 채 재력가 남편의 기호에 맞춰 사는 그녀가 아슬아슬하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한 식사 자리 후 정미는 돌변한다. 위스키와 담배를 사랑한다는 미소에게 일갈한다.
“그 사랑 참 염치없다. 한심하다.”
단지 재워 주는 게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풍족해도 눈치 보며 사는 자신보다 돈이 없어도 편안하고 당당해 보이는 미소에게 느끼는 불편함과 자신에게 언제 균열을 낼지 모르는 미소의 정직함으로 야기되는 불안 때문에 그녀는 미소를 내친다.
한밤중에 짐을 들고 길을 나선 미소의 표류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제 또 다른 결정의 시간이다. 위스키 가격이 올라도 그 한 잔의 위로는 포기하지 않으며 담배 연기는 여전히 그녀의 배경이 된다. 한강 변에 미소가 친 텐트에서 새어 나오는 빨간 불빛과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빌딩 숲이 대조를 이루는 마지막 장면이 절묘하다. 미소는 미소서식지에 그렇게 정착한다.
소공녀는 사랑과 우정, 일과 내 집 마련이라는 대도시 젊은 세대들의 과업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겪거나 들었을 만한 에피소드로 위트있게 버무려낸 영화다. 고단하고 불안할 수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니야.’라고 미소의 입을 빌어 능청스럽게 말한다. 미소는 ‘돈을 쫓는 자’ 또는 ‘돈에 쫓기는 자’가 되는 대신 최소한의 벌이로 삶을 영유하며 나머지 시간을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채우고 누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미소의 삶 전반을 대변하는 이 대사는 많은 이들에게 회자 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나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위해 안정감(집)을 포기할 수 있는지, 당신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하는 일을 기꺼이 하고 있는지, 누가 정했는지도 불분명한 ‘스탠다드’에 나도 모르는 사이 묶여 있는 건 아닌지, ‘염치없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줄곧 이어갈 용기가 있는지, 영화는 묻고 있는 것 같다.
연인과 함께 사랑을 나눌 방을 마련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한솔이 미소에게 ‘사랑한다’고 외치며 떠나는 장면도 이채롭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그것은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대답할 것 같은 요즘 젊은 세대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가지 사랑을 유예하지 않아도 된다는 외침처럼 들린다.
미소는 존재할까? 다섯 멤버나 영화 밖의 우리들에게 바람처럼 우렁각시처럼 어쩌면 도깨비처럼 왔다간 트릭스터가 아닐까? 변주된 미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