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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강 산 제사
26.04.04(토)
로마서 12장 1절에서 5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오늘 공부할 분량은 로마서 8장만큼이나 중요한 12장이 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산 제사 라는 주제로 말씀을 좀 함께 하겠습니다. 우선 이 제목부터 한번 같이 생각을 해볼까요?
제사는 뭐죠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죽음을 전제로 해요. 그렇죠. 그런데 그 앞에 무슨 수식어가 붙어 있는가 하면 산 제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요.
사실 이 제목 자체가 이율배반이죠.
제사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 앞에 왜 산자가 붙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제가 되는 1절부터 좀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로므로 우리 시청자들이 내용을 많이 잊었을 테니까. 한번 복수 겸 간단하게 세 가지 초점으로 앞에 1장부터 11장까지 우리가 무슨 강의 들었지 한번 기억을 해보도록 하죠.
첫 번째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뭐다 죄인이다. 그런데 그 죄인인 것을 누가 말했냐 율법이 말했죠. 율법이 주어지자 인간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죄인인 걸 알게 되었어요.
세 번째는 다른 한 의가 나타났다. 이 의는 누구를 가리킨다고요. 예수 그리스도 이게 11장까지 전체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러므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형제들이라는 말은 불신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기독교 공동체를 얘기하는 거예요.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모든 뭐 하시므로 자비하시므로 자 여러분 이제 이 자비하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중요하냐하면 로마서 5장 8절을 한번 제가 읽어드릴게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에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원래 단어가 같아요. 보통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는 전부 무슨 말을 쓰냐하면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헤세드라는 말을 써요 헤세드 이 말을 또 다른 번역으로는 인애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인애 호세아서에 나오죠. 저희 딸 이름이 여기서 따가지고 이름이 공개를 다 해버리네요. 인해요. 인애 헤세드라는 의미예요.
이 단어 못지않게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권한다. 너희를 권한다. 여러분 이 권한다는 말을 어떻게 여러분 이해하셨어요.
이 권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 파라칼로라는 말을 써요 파라칼로 이 말은 목숨을 건 제안을 얘기합니다.
그 정도로 부터 하고자 하는 얘기는 사도바울이 엄중한 마음을 담아서 말하고 싶다. 그 말이에요. 권한다라는 말은 그냥 좀 어떻게 해주시겠어요.
이렇게 권면 의식 개념의 그런 권면이 아니에요. 목숨을 건 제안을 얘기하는 거예요. 아주 간절한 상태를 담아서 또 찢어지는 마음으로 이런 의미여요.
그러니까 얼마나 권한다 파라칼로라는 말이 강렬한 단어인지 알겠죠. 근데 여기서 잘 보세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뭐가 나오지 산 제물이 나와요.
그런데 여기 좀 이상한 게 있어요. 너이 뭐예요? 몸을 몸을 왜 산 제물로 들이라고 할까요? 몸이라는 개념은 뭐예요? 여기서 말하는 몸이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몸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모든 삶을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1장에서부터 11장까지 우리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은 존재인가를 중요한 복음의 교리를 담아서 공부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너무 감사하다 너무 고맙다 끝 이게 맞나요? 아니죠. 그러므로 이제 구원받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이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그 사랑 여러분 한번 여쭤볼게요
여타 다른 종교에도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는 사랑과 우리가 이해하는 사랑의 근본적인 차이는 뭘 것 같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모든 게 무의미한 거예요. 심지어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와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말은 중의적 의미가 있어요.
우리의 모든 삶이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행해지고 이루어지고 번져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기초하지 않는 삶은 자칫하면 그냥 박애주의자가 되고 인간애가 될 뿐입니다. 도덕률이 될 뿐입니다.
그게 잘못 확대되면 율법주의에 빠질 요소가 많은 거죠.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이 근거는 하나님의 완성된 십자가의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그래서 너희를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간절히 권하는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그래서 여기 몸이라는 말은 삶이라고 했어요. 삶 그렇기 때문에 이 제물을 뭐라고 표현했죠. 그렇지요 산 제물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러니까 삶이 쫓아가지 않는 기독교는 공허한 언어유희나 말장난에 빠질 위험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독교가 그냥 명분론자들의 언어 잔치가 될 뿐이에요.
우리 흔히들 그런 소리 듣잖아요.
예수쟁이들은 말은 잘해 이건 굉장히 모독스러운 이야기죠
그러니까 사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뭐라고요. 영적인 예배니라 이 예배는 우리가 눈으로 가견적으로 보이고 드리는 그런 형식이 갖추어진 예배보다 훨씬 어려운 예배입니다.
요즘 신학자 가운데 톱라이트 글들을 많이 읽으시더라고요. 그분이 참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했어요. 부부는 서로에게 예배하는 삶이다. 다시요. 부부는 서로에게 예배하는 삶이다.
그 표현을 듣고 제가 좀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부부 생활이 서로에게 예배하는 삶이래요.
그러면 심각해지죠 제가 오래전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노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건데 아내랑 같이 봤습니다.
저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늘 소감을 서로 묻잖아요. 않아요. 당신은 어땠어 그러더라고요. 당신이 나한테 좀 더 많이 잘해줄 것 같다 라고 얘기하니까 자기는 이렇게 느꼈대요 남편한테 너무 빠져 살지 않아야 되겠다.
서로 적용을 잘못한 거죠. 이건 이제 부부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죠크인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 마지막 장면에 할아버지 영정 사진의 모습이 등장을 합니다. 깜짝 놀랐는데 보니까 그분이 크리찬이었더라고요. 성도 아무개 이렇게 쓰여져 있어요.
그런데 제가 두 분의 늦도록까지 해로하는 다큐멘터리식 영화를 보면서 톤 라이트의 말이 생각이 나요? 서로가 참 예배하듯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참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한번 끌고 왔을 때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일터가 정말 예배 현장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뜻밖에도 이분법 사고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분법 사고라는 것은 뭐냐하면 성과 속을 구분하는 구조를 얘기하는 거예요. 어떤 건 세상 일이고 어떤 건 하나님의 일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은 뭐라 그러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뭐라고요. 영적 예배니라
만약에 정말 예배가 이렇게 우리가 딱 갖추어 놓은 카테고리 안에 드려지는 예배만 예배라면 이런 예배는 어쩌면 우리가 배우처럼 흉내도 낼 수 있고 잘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 형태가 깨지고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로 바뀌어야 된다면 우리의 하루는 그 예배자로서 만만치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어떤 비즈니스를 하는 현장도 전부 뭘로 바뀌어야 돼요. 영적 예배로 바뀌어야 된단 말이죠. 단순히 부부관계에서 뿐이겠습니까?
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는가
우리가 2절을 한번 보십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여기 보시면 이 세대라는 말이 등장을 하죠. 이 세대라는 말은 1세대 다음 세대 이런 개념도 물론 녹아져 있지마는 세상 풍조를 얘기합니다.
풍조 그 다음에 본 받지 말고 라는 말은 흉내 내지 말고 흉내 내다 카피하다 본 받지 말고 라는 말은 흉내 내지 말고 그 뜻이에요.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실지 우리 한국계와 같은 비슷한 고민을 가졌어요. 왜 교회 청년들이 떠나가는가 왜 머물지 않는가 어떤 문화적으로 수준이 떨어져서 그럴까 아니면 고리타분해서 그럴까 여러 가지 조사와 리서치와 설문을 한 끝에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하나 나왔어요.
제일 많은 대답이 뭔지 아세요.
교회가 들어와 보니까 세상과 너무 비슷하더라 다른 게 없더라 세상과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가 하면 어줍잖게 쉽게 얘기하면 셀트 니드가 뭐냐를 집착하다 보니까 현장의 필요가 뭔가를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교회 안에 모든 칼라들이 세상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그래야 마치 청년들이 돌아오는 것처럼 근데 청년들은 그걸 원했던 게 아니라고요.
무슨 신식으로 목사님 무슨 청바지를 입고 그런 어떤 문화적인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이 갈급하고 진짜 필요로 했던 것은 복음 바른 복음 정말 그 예수 이런 걸 듣고 싶어서 교회에 왔더니 세상이나 교회나 별 차이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왔다간 실망을 하고 떠밀려 나가고 세상에 대해선 그 사람들이 전문가 아니에요. 근데 왜 교회가 그런 걸 자꾸 어줍지 않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흉내를 애써 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닮아간다고요.
그런 것 없어도 정말 성령에 임재가 있는 예배가 있고 그 예배속에 강렬한 그리고 선명한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선포된다면 청년들은 그 복음의 매력에 이끌려 오는 거지 교회가 어줍지 않게 흉내 내는 세상의 문화에 청년들이 이끌려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걸 우리 한국 교회가 좀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로마서 10~2강 산 제사
본받지 말고 오직 뭘 새롭게 하죠.
마음 심령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이 변화라는 말은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말인데 여러분 요즘도 그런 장면이 있나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기차가 요즈음 ktx처럼 빠르질 않았죠
천천히 가다가 갑자기 서요 뭐 하는가? 보면 선로를 바꿉니다. 그런 장면 가끔 본 적 있어요.
어린 시절에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탔거든요.
가다가 이렇게 선로를 바꿔요 그러니까 여기서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노선을 바꾼다는 말이에요.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뭐하라 분별하도록 하라 이 분별이라는 말은 아주 간단치 않은 얘기인데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똑바로 똑바로 길을 내다 우리 앞선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그 길이 뭐가 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죠. 또 뒤에 걸어올 사람들의 길이 된다는 얘기예요.
아시는 것처럼 로마 시대는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뭘 닦았죠 길을 닦았어요. 길 이 길 그래서 길을 닦고 전쟁을 해요.
물론 병력이 들어가고 물자가 들어가요
그러면 그 길 끝에는 반드시 뭐가 생기냐 하면 로마 제국이 형성이 됩니다.
우리 개념으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사도 바울는 이것을 복음의 진보라고 말했죠. 여기에 가장 중요한 전제가 길을 잘 닦아야 돼요.
그 당시 전쟁을 위해서 닦아놓았던 모든 로마의 길에서 무슨 표현이 등장을 했죠. 모든 길은 로마로 2천년 전에 닦아놓았던 공법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지금도 그 길을 쓰고 있잖아요.
이 시대에도 이제 저에게는 청년들이 있으니까 가끔 대화를 해보면 뜻밖에도 이들의 변화를 강렬하게 촉발시켰던 경우들이 물론 말씀을 듣고도 변화가 일어나지만 이런 얘기를 가끔 해요.
제가 목사님 그때 정말 고민이 많았고 힘들었는데 선배가 말하는 그 한마디에 제가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러니깐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 삶의 본이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굉장히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요즘 멘토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좋은 멘토에 해당하는 앞서 걸어간 선배들의 걸음 족적이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면 이러한 거룩한 산 제사를 내가 어떤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성경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좀 공부를 해보도록 하죠.
로마서 15장 16절을 보시면
이 은혜로 곧 나의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에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요
표현이 좀 어떻습니까?
그러면 이방인을 잡아서 죽여야 된다는 얘기인가 그 얘기가 아니에요.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걸 받으신대요
이거는 하나의 언어의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선교적 명령을 얘기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선교를 하고 있는데 그 선교 자체가 몸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영적인 예배여요.
우리가 그 많은 시간과 땀과 물질을 투자해서 자비량으로 또 교회 파송을 받아 선교지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죠. 뭐하는 거예요.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선교적 명령 중요한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또 하나 만일 너희 믿음의 재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들일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여러분 이 빌립보서는 아시는 것처럼 옥중서신이라고도 불리우죠 그리고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불리어요 근데 여기 재밌는 표현이 뭐냐 하면 만일 너희의 무슨 제물 믿음의 제물이 있어요.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쁘대요 서술 형식으로 쓰여서 설명 없이 읽으면 좀 헷갈려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본문은 옥중에서 쓴 서신인데 바올이 이 본문을 왜 쓰게 됐는가 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쓸 것이 필요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시일반 헌금도 하고 또 물질도 모아서 바울에게 공궤를 한 겁니다. 믿음의 제물이에요. 믿음의 제물과 그래서 뭐라고 되어 있죠.
성기기 위해 그러니까 영적으로 몸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는 이런 의미도 녹아있단 말이야.
첫째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도 몸으로 들이는 예배고
두 번째는 그런 이웃을 돕고 복음사역에 동참하는 섬김도 뭐라고 표현을 한 거예요. 몸으로 드리는 예배로 이해를 한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린대요
여러분 이 전제라는 말은 구약의 희생 제사입니다. 희생제사 그런데 이 제사는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째가 가장 길다
두 번째가 반드시 제물을 잡아드리는 희생제사예요.
세 번째가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해요.
그런데 여기서 핵심 가치가 뭐냐 하면 반드시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예요. 이 말이 갖는 의미는 사도바울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도와주는 그런 구제와 섬김의 봉사가 왜 그런 사랑을 입은 바탕으로 내가 나를 뭘로 드릴지라도 내가 목숨을 바치더라도 나는 너의 무리와 함께 기쁘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성도들의 섬김과 바울의 주를 향한 충성스러운 고백이 녹아져서 뭘로 지금 바뀌고 있죠. 복음의 기쁨으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 디도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뭐라고 되어 있죠.
향기로운 제물이오 아까 빌립보서 2장에서 말씀하신 그런 성도들의 성김 구제의 내용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뭐하는 것이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로마서 우리 12장 1절 2절에서 한 이야기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재물로 우리 몸을 드리라 그러니까 산 제사라는 것은 단순히 형태로 드리는 예배를 넘어서서 놀랍게도 이런 성도들의 전방위적인 삶의 총체적 믿음의 고백을 믿음의 행위를 향기로운 제물로 설명하고 있는 거죠.
히브리서 또 13장이나 이런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여기에는 여러분 뭐가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여요.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늘 24시간 항상 찬양을 듣거나 찬양을 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그렇게 생활할 수 있나요?
24시간 찬송만 해요. 이 얘기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조금 더 내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제사로 표현됐는가를 아셔야 돼요.
성도가 가장 마지막 신앙의 꽃은 찬양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삶 속에 찬양의 요소는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 시편 40편인가에 보면 다윗이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자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러분 3절을 들으시면서 뭐 좀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았나요? 제가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드릴 테니까. 한번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듣고입니까? 보고입니까? 찬송은 듣는 겁니까? 보는 겁니까? 듣는 거죠.
그런데 시편 40편 3절에는 많은 사람이 보고 그랬어요. 왜 보고라고 얘기했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음악적 요소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가 깊은 수렁 웅덩이에 있었지만 그 진노와 흑암에서 건져 올리신 하나님께 달라진 삶의 태도를 많은 사람이 봤다. 그 말이에요.
그 자체가 뭐죠 찬송의 제물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감사 그 구원받은 대로 삶이 변화된 기쁨 그걸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듣고가 아니라 시편 40편 3절에서는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리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했을 때 이 말은 그냥 노래하는 측면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걸 훨씬 더 뛰어넘어서 그 찬양이 나오도록까지 변화되고 바뀌어진 우리 내면과 삶의 행위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제사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회복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마지막으로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뭐가 됐죠 상달되어
여러분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여기 네 기도와 구제가 그러니까 기도와 구제도 하나님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 굉장히 중요한 요인으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거죠.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요인들 열거했지만,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삶이 사실 뭐로 나타나야 되냐하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나타나야 된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겁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빛의 갑옷을 입자라는 주제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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