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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향(沈香)을 지고 가는 시마(詩魔)와의 고된 동행
김호길 『사막시편』- 책만드는집
최연근 『새, 날다』- 고요아침
이정환 『별안간』- 고요아침
박권숙 『모든 틈은 꽃핀다』 -동학사
정용국(시인)
1. 들어가면서
봄호에 게재할 네 권의 시집을 챙겨 보며 서평만큼 애매한 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이번 호에 함께 다룰 시인들의 등단 연대만 보아도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넓은 분포를 이루며 저자의 연치를 따져도 50대에서 70대까지 골고루 섞여 있어서 한 꼭지의 글에 어떤 맥락이나 흐름을 관통하여 글을 이끌어 가기가 어렵다. 또한 시집의 해설을 맡은 분들도 이경철, 유성호, 방민호, 황치복 등으로 평단의 내로라하는 평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집 속에 감칠맛 나는 좋은 작품들은 이미 들춰내어 갖은 방법으로 지지고 볶아 속속들이 발려진 상태여서 서평을 써야하는 입장에 선 필자들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작품이나 감정의 흐름 등을 잡아내서 글을 엮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평란을 원래 한 권의 책만을 다루면 좋겠지만 계간지의 특성상 다뤄야 할 시집들의 양이 많을 경우 이번 호처럼 많게는 네 권을 한꺼번에 다루어야 하는 번다함도 감내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어쨌든 필자에게 주어진 이번 호의 서평은 시인들의 연륜과 다양한 체취들만큼 이리저리 오래 서성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네 시인의 작품과 약력을 살펴보며 필자는 평생 시업을 지켜내며 온전히 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생의 역경이며 정신적 부담인지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생업을 유지하기 위한 커다란 곤경을 무릅쓰고, 건강상의 위험을 부둥켜안아 이겨내고, 종교와의 갈등과 화해를 힘써 지켜내고, 오랜 습작의 공백을 다시 이어가며 각자 자신의 험난하고도 아스라한 공간에서 좁은 여백 위에 시를 적어 나간다는 것은 속된 말로 시마(詩魔)에 걸리지 않고는 감내할 수 없는 지난한 도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종내 엮어내는 시편들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침향을 맡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차례로 네 권의 시집들의 연륜과 깊이를 압축하고 또한 그들이 파 놓은 융숭한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 보기로 한다.
2. 혁명정부로의 망명 -『사막시편』
머리에 잠깐 언급했듯이 詩魔가 몸에 한 번 들어와 둥지를 틀면 그 둥지를 허물어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고역 같으면서도 아슴아슴 심장을 두드리며 달아오르는 취기는 마약이나 알코올의 중독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잠시 잠깐 더러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취기는 다시 도지기 일쑤여서 늘 그늘과 같은 어룽으로 마음 한 구석을 점령하고 있다가 틈만 나면 들이닥치는 것이다.
김호길 시인은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였고 1967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그런데 육군 복무 중 월남전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 후 민간 항공기 조종사로 직업을 갖게 되면서 그 사이『하늘 환상곡』등 세 권의 시집을 묶는 등 활발한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돌연 1981년에 도미하며 또 다른 삶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그래서 81년 이후 한 권의 수필집 외에 시집을 상재하지 못 한 채로 상상을 초월하는 여러 갈래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며 순탄치만은 않은 여정을 가게 된다. 필자는 그가 한국문인협회 미주 지부장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시조 전문 계간지인『시조월드』발간에 참여한 사실을 결과물이나 제3자의 위치에서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도미 후의 자필이력을 보아도 잠시 미주 중앙일보 기자를 하다가 멕시코로 떠나가 농업에 종사하게 되는 도전을 단행하였다. ‘시인의 말‘ 을 통해 기술한대로 이 시집은 도미 이후 첫 시집이다. 그러니 삼십 년이 넘게 가슴에 들어 온 시마를 억누르며 살아 온 그의 삶은 얼마나 큰 응어리가 들어 앉아 있었을까. 시집 전편이「사막시편」이라는 제목 아래 부제가 달린 57편의 시조와 10편의 단장시(單章詩)로 엮여져 있는데 그간 시인의 소회와 막막한 감정은 물론이고 인생관이 통째로 들어 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행사인 본업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한번 떠난 조국은 나를 환영하지 않았다. 멍청한 사막농부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극한상황에 처박혀 귀양 아닌 귀양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극한의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처절한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피와 땀과 눈물로 엮어낸, 그래서 상처투성이 몸으로 풀어낸 ‘눈 먼 무소처럼 사막 벌을 뒹굴어 오며’ 혼자 부른 나의 노래이다. - 시인의 말 중에서 -
필자는 김호길의 인생 역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후회하는 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국에서의 삶이 늘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 지지만 그는 늘 용감하게 새 길을 열고 싸우며 나아갔다. 몸에 시마가 들어 온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고 하는데 그는 역마까지 숨어 들었으니 두 배의 역경을 헤쳐오지 않았을까.
내 몸은 나의 혁명정부
번번이 탈출을 시도했다.
겨우 낡은 시대를 몰아내고
새 깃발을 올렸지만
우수수 시간의 화산재
허옇게 머리를 덮고 있다.
-「사막시편」‘亂打’ 전문 -
‘난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사막시편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부제가 시인의 정신 상태와 강력한 의지를 상징하고 있으며 초장의 첫 구 ‘내 몸은 나의 혁명정부’ 라는 표현은 김호길 인생을 이해하고 그의 시를 관통하는 핵심어로 보여 진다. 그는 늘 스스로 안주의 길을 박차고 나가며 새로운 길을 찾았다. 민간 항공사에서 조종사는 일반인들이 부러워하는 고수입이 보장된 직업군에 속하지만 그는 미국행으로 그 안위를 박차고 나섰고 미주 언론지사의 자리를 버리고 멕시코 낯선 곳으로 이주를 감행했다. 이런 행동을 그는 ‘탈출을 시도했다’ 라는 직접적이며 도발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 이유는 ‘낡은 시대를 몰아내’ 기 위함이다. 그의 정신은 늘 새롭게 추구할 대상을 찾는 맹금류의 눈처럼 번득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처지가 불안 하거나 부족하더라도 가족과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며 자세를 낮추고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안주하는 방향을 선택하지만 김호길은 늘 새롭고 위험한 길을 선택하며 스스로를 시험하고 험난한 길을 자초하였다. 그 과정의 이야기가 ‘전갈좌’ ‘사막거북’ ‘야자수’ 등의 시편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난타’는 사막시편의 총체적 범주를 그리고 있는 표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댈 곳 절망뿐일 때
절망에라도 기대야지.
구름이 석양에 기대듯
서산이 노을에 기대듯
기댈 곳 지푸라기도 없을 때
너 절망 품에 기대야지
-「사막시편」‘절망에 기대어’ 전문 -
‘절망’ ‘석양’ ‘서산’ ‘노을’ ‘지푸라기’ 등 부제부터 모든 시어가 부정적이고 몰락이나 종말을 의미하는 시어로 가득하다. 이 작품은 김호길의 삶이 가장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무렵의 시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기댈 곳 지푸라기도 없을 때’ 라는 표현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부정의 부정‘은 긍정의 의미를 담는다는 유추를 따라 가 보면 그가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했다면 즉 ’절망 품에 기대‘ 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포기하였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임을 인정하고 순리에 따라 상황을 수긍하고 스스로의 새 길을 열 수 있을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며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사막시편 중 김호길이 아주 편한 마음으로 하소연하듯 자신의 진한 감정을 나타낸 시가 있는데 바로 다음의 ’전갈좌‘라고 생각한다.
가재처럼 생겼으면 개울로 보내든지
게처럼 생겼으면 바다로 보내든지
어째서 마른 바위 밑으로 날 보내주셨나요?
꽁지에 독을 담아 치켜들고 싸우라고
애당초 戰士로 보내신 그 뜻은 무언가요?
“녀석아, 그게 싫으면 별이 되어 박혀라”
-「사막시편」‘전갈좌’ 전문 -
전갈이라는 사막의 동물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통찰하고 있다. 이 시편은 표제인 ‘사막’ 과 ‘김호길 시인’이라는 두 상징을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재’ ‘게’ 라는 이미지를 차용하여 사막의 대표적인 동물인 ‘전갈’을 드러나게 엮어놓은 재치와 ‘꽁지에 독을 담아 치켜들고’ 다니는 전갈을 도전적이며 發想則實行을 감행하는 시인 자신의 이미지와 유사한 면을 담고 있어서 저절로 깊은 웃음이 나게 엮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는 시치미를 뚝 떼며 하늘의 말씀 같은, 인생의 표어 같은 명령형 화두 하나로 마무리하면서 부제를 확연하고 맛깔스러운 상징으로 보이게 한 점은 이 작품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난타’의 종장처럼 어쩌면 김호길은 ‘우수수 시간의 화산재/ 허옇게 머리를 덮고 있’ 는 처연한 상황으로 생의 후반에 도착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감행한 ‘스스로의 노역’과 ‘도전’은 그의 생을 이끌었으며 현재의 그를 만든 인생의 부표였다고 보여진다. 종심(從心)의 자리에 선 그는 이제 논어의 구절처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여도 삶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튼튼하고 노회한 전갈좌의 별로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라 여겨진다. 그의 바람과도 같았던 시마와 역마를 함께 짊어지고 걸어온 길은 고됐지만 그 삶에 묻어나는 향내를 맡으면서 독자들은 오래도록 기립박수를 보낼 것이다.
3. 사랑의 힘이 끌고 가는 시 -『새, 날다』
최연근 시인도 김호길 시인만큼이나 오랜 동안 시마를 짊어지고 다녔다. 20대에 활발한 동인활동(밀우, 백지동인) 기간을 가졌던 시인은 방송국에 취업하면서 기자라는 직업에 눌려 시를 잊고 살았다. 그러나 시마는 그를 45세의 나이에 다시 등단하게 만들었는데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시조문학이 공식적인 발단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방송기자의 삶은 밤낮없이 그를 현장으로 내몰았고 다시 60이 다 된 나이가 되어서야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대략 그의 직장생활이 마무리 되는 시기가 되면서 기사회생의 시간을 얻어 나온 시집이『허기진 소나기 울면 천둥은 치는가』였으니 2005년의 일이었다. 직장이 정리된 시인은 이내 제 자리로 돌아와 4년 후 두 번 째 시집『은행나무는 잎이 지지 않는다』를 상재하였고 이번 새 시집은 세 번째이니 많이 에돌아 온 길이라 하겠다.
최연근의 시는 힘이 있다. 그의 연치는 이미 이순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지만 누진다초점 망원렌즈를 장착한 그의 안테나는 쉼 없이 움직이며 세상의 환부와 사물의 정경은 물론 그 안의 두런거림까지 세세하게 잡아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가 방송기자라는 직업을 오래 지켜 왔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 지며 사회적 다양한 문제들을 시에 녹여 내는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노숙자, 형벌, 달동네, 잡초, 생존 등의 시어들이 아직도 그의 시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두 기자라는 직업의 연장선상에서 치루는 의식의 제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 다르게 그의 시가 가지는 덕목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끝없는 탐미와 애틋한 천착을 멈추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 두 가지 특장을 작품을 통하여 나란히 살펴보자.
잡초보다 낮은 동네
방울방울 비 내린다
빗방울이 더 큰 오후
비에 멍든 개는 졸고
어설픈 광란의 불꽃놀이
멍이 든 줄 모른다
-「달동네」전문 -
‘잡초보다 낮은 동네’ ‘멍이 든 줄 모른다’ 로 압축할 수 있는 이 시는 초장의 첫 구와 종장의 대구가 제목인 달동네를 유기적으로 조명하며 긴축미를 지켜내고 있는 탄력을 유지하고 있다. ‘잡초보다 낮은 동네’ 라는 첫 구는 은유와 역설이 탄탄히 손을 잡으며 시 전체의 이미지와 주제를 엮어내고 있다. 달동네는 대체적으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잡초보다 낮은’ 이라는 서술어로 인해 더 이상의 표현이 필요 없는 ‘달동네’ 의 극한이 되는 효과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잡초’ 와 ‘달동네’ 라는 시어는 아주 친밀하고 적절하게 상통하는 시어여서 작품 전체를 아주 적절하게 끝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 ‘멍이 든 줄 모른다’ 로 마무리한 종장의 대구도 사회적 병리현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어인 ‘어설픈 광란의 불꽃놀이’를 다시 한 번 ‘모른다’ 라는 부정어로 마무리함으로 인하여 더욱 강한 비판 의식을 돋보이도록 하였다. 자칫 제목이 조금 상투적인 단어여서 구질구질한 소시민의 넋두리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작품을 잘 갈무리 해놓고 있다.
짜릿한 순간마저
침묵하는 노래여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내려둔 남루여
끝없이
비워도 비워도
활화하는 그대는
- 「무화과」전문 -
무화과는 사실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지만 사실 자체를 떠나 이미 새로운 이미지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제인 無花果는 변용된 뜻 그대로 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놓고 시를 보면 최연근의 미의식에 대한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초, 중, 종장이 각각의 한 문장으로 독립해 있는 병렬적인 구조를 가지고 점차 이미지를 확장시켜 가면서 무화과의 주관적 인식을 펼쳐놓고 있다. 그리고 ‘노래‘ ’남루‘ ’활화‘ 라는 세 핵심어들을 ’짜릿한 순간마저/ 침묵하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내려둔‘ ’끝없이/ 비워도 비워도‘ 가 각각 주어를 살려내는 최상의 서술어 역할을 확실하게 해내고 있다. 시의 마지막 단어인 ’그대는‘ 은 확대해석해 보면 종장의 ’활화하는 그대는‘ 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초, 중장에도 해당하는 생략된 주어로 볼 수 있다. 즉 ’노래인 그대는’ ’남루한 그대는’ 으로 보면 더 깊이 있는 시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열매의 이름’ 이기도 하고 ‘나무의 이름’ 이기도 하지만 시에서는 열매의 뜻이 강하다. ‘꽃이 없이 열매를 맺는다‘ 라는 무화과의 이미지를 주관적 이미지로 얻어내기 위한 시인의 탐미적 관찰과 객관화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연근의 시들 중에서 또 눈여겨 볼 것은 국내외를 다니며 발품 팔아 건져 올린 상처의 흔적들이다. 제4부에 집중적으로 모아 놓은 시들은 모든 시인들이 저어하는 여행시의 우려를 말끔하게 걷어낸다. 그것은 아주 깊은 우물에서 건져 낸 사색의 편린들이며 땅의 아픔이며 무지렁이들의 신음이다.「백두산」에서는 천지를 ‘아버지의 눈물’ 로 피워 올렸고,「독도」는 ‘침묵하는 사랑’ 으로 노래했으며「두만강 뗏목배」를 보면서 ‘등 돌린 숙명의 역류’ 라는 역사의 상처를 그려냈다.「흔적」의 제목에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이라는 부제를 붙인 시에서는 ’피멍 쌓아 얹어 놓은 백팔계단‘ 의 다랭이논을 보며 ’하혈하는 남해바다‘ 를 이미지화 해내면서 국토의 상처마다 따사로운 혼을 불어 넣으며 어루만진 여정은 참으로 인간미와 역사의 그늘을 한 눈으로 더듬어 보게 한다. 그의 지난한 발품이 어린 작품들 중에서 두 작품을 통해 맛깔 나는 최연근의 다른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바람소리
물, 숨소리
적막을 훔친 노을 길
유령처럼 지친 인연
범종 소리 가쁘다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
그 소리 찾아 헤맨다
오래 묵힌 노역의 성
침묵이 더욱 서러운 날
홈통 헤맨 늙은 시인
노을 꽃을 밟고 간다
또 하루
춤추는 법고 소리
푸석하게 부어있다
- 「소리길」 <해인사 가는길> 전문 -
海印이란 우주의 일체를 깨달은 부처의 지혜로 모든 법을 비추어보는 것이 바다에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야말로 해인삼매란 최고선의 자리인 셈이다. 그런데 해인사로 가는 길이 시 안에서는 원래의 듯과는 반대로 휘청거리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군다나 시제가「소리길」인데 ‘지친 인연’ 으로 ‘범종 소리 가쁘’ 고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 그 소리 찾아 헤매’ 고 있다. 시인은 진리와 현실이라는 상대적 개념들을 제목과 내용이 상반되게 표현하여 스스로 독자들에게 의문을 제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은 더욱 서러운 날’ 이 될 것이고 ‘홈통 헤맨 늙은 시인’ 은 허무한 하루를 맺고 있다. 결국 소리를 찾아 나선 해인의 길은 아무 소득도 열매도 구하지 못한 채로 ‘푸석하게 부어있다’ 로 시는 종말을 맞는다.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시일지 모르나 시의 모든 내용과 제목이 반목하고 불화하고 있는 상황을 통하여 결국 시는 般若心經의 주제인 ‘色卽是空 空卽是色, 不生不滅 亦復如是‘ 와 같은 거대한 불교의 진리를 역설적으로 엮어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해인사 가는 길에서 얻어낸 시인의 사색 깊이는 천 길 만 길을 넘어 해인의 대 장엄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바람이다
그대의 목소리다
수평선에 펼쳐놓은
빛바랜 가필의 흔적
아직도 마음의 문 잠근
외돌개의 한숨이다
그것은 눈물이다
그대의 고백이다
옛사랑의 분노만큼
상처 난 주상절리
아직도 생의 마지막 소리,
기도처럼 뜨겁다
- 「올레길 바람소리」 전문 -
외돌개는 제주 올레길 중 가장 경관이 수려하다는 서귀포에 있다. 뭍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아 있는 자태가 기이하면서도 먼 바다와 범섬을 배경으로 자태가 아름답다. 최영 장군이 병사처럼 바위를 세워 두었다는 전설 때문에 장군석이라고도 부른다고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 지식을 가지고 시에 접근해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뜻이 통했다면 아마 이 시는 대체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최연근은 ‘바람’ 이고 ‘눈물’ 이고 ‘그대의 목소리’ 이며 ‘그대의 눈물’ 이라고 딱 잘라 말하며 시의 첫 발을 뗀다. 이 만큼 쯤에서 독자들은 외돌개의 생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듯하다. 용암이 흘러 내렸다가 파도와 바람과 장구한 세월의 침식이나 융기 작용으로 우뚝 솟아 있게 된 ‘주상절리‘ 하나가 외롭게 서 있게 된 배경을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옮아오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 잠근‘ 외돌개의 긴 ’한숨‘ 도 이해될 것이며 ’눈물‘ ’고백‘ 이라고 소리 친 시인의 외침도 ’엣 사랑의 분노‘ 도 어렵지 않게 가슴에 다가올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외돌개에게 다시 새로운 ’생명‘ 한 줌을 얹어주며 시를 닫게 되는데 그 주문 같은 외침은 묵직하고 따스한 가슴을 통째로 주고 있으니 ’아직도 생의 마지막 소리/ 기도처럼 뜨겁다‘ 라는 외돌개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갈구의 목소리인 것이다.
비록 네 작품을 통해 둘러 본 최연근의 시세계는 탐미를 넘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쉼 없이 아득한 ‘사랑’ 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회적 문제들을 통하여 보여 준 관심과 자연을 통해 읽은 미물에 대한 애틋함, 또한 여행지에서 주워 든 역사와 인간에 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애처로움은 결국 ‘사랑’ 이라는 짧은 단어가 확실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꾸려온 시인의 영역에 대한 세평은 아직 야박하지만 긴 세월 시마를 걸머지고 돌아와 최근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보여준 세 권의 시집을 통하여 최연근이 구가한 위상은 널리 새로운 평가를 받을 것으로 믿는다.
4. 最高善에 바치는 열정과 가없는 자기갱신 -『별안간』
2년 전 필자는 이정환의 시집『悲歌, 디르샤에게』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76편의 작품이 온통 한 가지의 주제와 처절한 기도로 구성된 시집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글로 서평을 마무리 했다.
이 시집은 이정환 시인의 고백록이다. 자신의 모든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는 자칫 바보스럽기까지 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 역설적인 고백을 통하여 이정환이라는 시인의 대범함과 시 앞에 모든 것을 바친 구도자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면서 붙였던 소제목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지순한 시인일지라도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마음 밭을 숨김없이 토로해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인의 그러한 우직함에 놀라고 감동받은 필자의 예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시집의 해설을 맞았던 장경렬교수는 현란하고도 집요한 유미적 혜안으로 관념적이고 지루한 시편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일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정환이 새로이 상재한『별안간』도 그가 지금까지 추구하고 지향해 왔던 절대자(또는 그의 문학적 最高善)를 향한 열정과 쉼 없는 자기갱신을 통한 경배의 차원에서 본다면 제4, 5, 6부는 물론이며 제1, 2, 3부의 많은 시편들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면 시인은 왜 일관되게 가파른 주제를 가지고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운 작업에 몰두하고 천착하는 것일까? 물론 시인 자신에게는 날마다, 또는 순간마다 절절이 솟구쳐 오르는 지순을 향한 의문과 반성, 또 이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모색들이 절절하게 피어오르기 때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독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최고선에게 바치는 작가의 열정과 반성이 극히 주관적이고 관념적이며 때로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종교적인 소재와 갈구로 가득한 이 시집을 통하여 시조미학적인 쾌감이나 카타르시스를 구현하기란 매우 회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작가도 충분하게 인식하고 추측하고 있을 것으로 보여지지만 작가가 가진 열정과 항심이 이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시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통한 그의 시들을 살펴보는 것보다는 먼저 해설이나 표4에 붙인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이 특수한 시편들을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추론(推論)에 이르게 되었다.
해설에서 유성호 교수도 ‘시인 자신의 존재론적 갱신은 물론, 신성한 존재에 닿으려는 열망의 결실’ ‘이정환 시학이 지향하는 신성하고도 숭고한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면서, 우리 시조문학에 매우 빈곤한 종교적 상상력의 한 범례로 다가온다’ 라는 표현으로 이정환의 고통과 화평을 통한 종교적 상상력의 성취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표4에 실린 구모룡 교수와 염창권 교수의 짧지만 의미 있는 중요한 견해를 살펴보자
‘몸을 지닌 인간의 나약과 위대한 우주의 숭엄을 대비하면서 숭고의 미학을 창출한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숭고는 무조건적인 경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내 안의 뜨거운 고통을 통과하면서 항구적인 화평의 세계를 지향한다’ -구모룡-
‘실존의 현기증을 넘어서서 근원적 존재자를 수용하고자하는 구도자의 세계를 보여준다. (중략) 시의 리듬이 아가서의 유리한 가락을 닮은 것은 현존 자체를 영원성과 조응으로 파악하여, 영원성 속에서 현존을 되비추어 보는 심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염창권-
이 두 견해는 나름대로 이정환의 연작시들에 대한 평론가들의 이해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연작시집 한 권의 비중을 다루기에는 지극히 짧고 극한적이며 종합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일면 예우의 차원에서 긍정적인 단견만을 담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깊은 사색과 고뇌로 점철된 시편들에는 종교적 무게 뿐만이 아니라 세속의 단견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감성들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 연작 시편들은 시로서의 완성도와 시조의 생명인 정형미학을 지켜내는 데에는 많은 부족함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비가, 디르사에게』이전까지 시인 이정환이 구축해 놓은 시인으로서의 성취도를 저하시킬 수도 있는 큰 충격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숨길 수 없다. 시인이 시집을 출간할 때 여러 가지의 의도와 효과 등 많은 생각을 추스르게 된다. 그런데 왜 이정환은 경제적 지출을 감수하고 더 큰 공력을 들여가며 시의 종교적 편집이 강한 연작 시편들에 집중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 시점에서 조금 위험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정환이 추구하는 ‘시의 완성미학‘ 과 ’종교적 편집(偏執)‘ 에 대해 집중해 보는 것도 이 시집을 살펴보는 중요한 거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아주 극단적인 두 작품을 통해 위에 제기한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넉장거리로 누워 한 사흘 쯤 하늘을 보라
쇠말뚝 박혀 뼈아픈 언덕을 내려서면
탁 트인 망망한 바다 와락 안겨들 것이다
동백나무 숲길 따라 그늘진 둘레길이
저절로 발길 끌어 맞닥뜨릴 바위벼랑
한 순간 벽공을 치솟는 바닷새가 될 것이다
-「지심도」전문 -
비롯됨과
마침의 일
처음과
나중의 일
모든 것
품에 안고
죄다
열어 보여준
내 목숨
안팎의 경계
피오르드
피오르드
-「피오르드 12」전문 -
시집『별안간』에 실린 작품 중에서 필자는 가장 서정성이 짙고 시로서 완성미가 뛰어난 작품으로「지심도」를, 상대적으로 시인이 추구하는 최고선에 다가서기 위한 고뇌와 방편이 담긴 시의 대표작으로 시집에 마지막으로 게재된「피오르드12」를 꼽아 보았다. 먼저 「지심도」를 살펴보면 이정환의 역량과 상상력이 활달하게 펼쳐져 있어서 시인의 넉넉하고 따듯한 시어들이 독자의 밋밋한 마음들을 위무하고 더 나아가 이 땅의 아픈 역사에 이르기까지 오밀조밀한 눈길로 어루만지며 많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한 작품이다. 시의 문을 열자마자 ‘넉장거리로 누워 한 사흘 쯤 하늘을 보라’ 는 청유형 문장은 일단 ‘넉장거리’ 라는 재미있는 시어와 ‘한 사흘 쯤’ 으로 던져 준 푸근한 제안은 도시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현대인들의 긴장을 일순에 풀어내고 아름다운 지심도를 독자의 가슴 속에 한 가득 풀어 넣으면서 단박에 그들의 마음을 압도하게 된다.
이렇게 사로잡은 독자의 부푼 마음을 데리고 별천지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탁 트인 망망한 바다 와락 안겨들 것이다’ ‘한 순간 벽공을 치솟는 바닷새가 될 것이다’ 라는 희망의 메시지 두 개를 독자에게 던지는데 여기서 한껏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정도면 누구나 시를 읽고 나서 당장에라도 지심도로 가고 싶을 것이며 ‘이정환표 지심도’ 는 확실한 이미지로 각인된 채 아주 오래도록 독자의 뇌리에 박힐 것이다.「지심도」 는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라고 적어 이정환에게 제17회 이호우시조문학상을 안겨 주었던「애월 바다」와 어깨를 견줄만하지 않은가.
다음은 연작 시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정환의 연작시는 오류동인 제4집『먼길-1988년』에「모퉁이1,2」와 오류동인 제8집『잡새 댓 마리-1992년』에「바다 앞에서1,2,3」「수평선1,2,3」등이 보인다. 그 이후로 시집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2002년』에서 본격적으로「원에 관하여1~21」가 상재되었다. 그러나「원에 관하여」연작은 시제는 동일하지만 부제가 제 각각 다르게 붙여진 상태에서 그 부제에 따라 내용이 꾸려졌기 때문에 연작이기는 하지만 주제의 강력한 통일성이나 유기적 기능이 확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비가, 디르사에게』에서는 시집 전체가 동일 제목으로 꾸려지면서 아주 강한 주제의식과 종교 편집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상재한『별안간』에서도 절반에 해당하는「붙드심의 노래」「주상절리」「피오르드」각각 12편 씩 총 36편이 실렸고 나머지 작품들 중에도 제목이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주제나 소재 면에서 연작물과 상통하는 작품들이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종교 색채가 강하며 동일 주제가 확연한 작품들은 주제의 강력한 특성을 구현하기 위해 집중하기 때문에 위에 설명한대로 운문의 특장인 상징, 반복 등과 특히 시조미학의 요체인 對句와 종장의 긴장미 등에서 결정적인 하자를 범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실제로 이정환의 연작시 여러 곳에서 이러한 현상들을 여러 군데 발견할 수 있다. 위에 제시한「피오르드 12」에서도 ‘비롯됨’-‘처음’, ‘마침의 일‘-’나중의 일‘, ’모든 것‘-’죄다‘ 등의 동의어가 반복되게 나열되어 있으며 강한 추상으로 인하여 시의 진행이 스토리를 잃은 채 관념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시조가 감당해내기 어려운 측면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마무리에서도 ’피오르드/ 피오르드‘ 로 막을 내림으로서 생략과 압축을 통한 많은 상상의 여운을 남겨주고 있는데 이런 경우가 반드시 작가의 의도대로 작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유성호 교수가 해설에 언급한대로 ’통증과 고난의 이미지‘ 로 해석할 수야 있겠지만 전편을 통하여 수없이 반복되어지는 ’꽃‘ ’너‘ ’벼랑‘ ’불‘ ’빛‘ ’솟구침‘ 등의 번다함이 시어로서의 상징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 교리에 관심이 없거나 거부감으로 인해 시의 소재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도 상당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우려는 연작으로 상재한 작품들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떠나 일반 독자의 수준에서 파생할 수 있는 개연성(蓋然性)을 거론한 것이라는 점을 아울러 밝힌다. 여기까지 길게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다 보니 이번 시집『별안간』의 서평은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는 대신 작가가 의도한 연작 시편들이 파생할 제반 문제들에 대한 글이 되고 말았다. 시의 창작에 관해서는 작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임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타인의 의지가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시집은 물론이고 앞으로 발표될 신작에 대해서도 누구든 이정환 시인의 창작의도를 존경하고 결과물인 신작에 대해 경의와 더불어 주관적인 판관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끝으로 온갖 추측과 비판적 평에도 불구하고『비가, 디르사에게』에서부터 이번『별안간』에 이르기까지 이정환 시인이 최고선에 바친 열정과 자기갱신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한다.
5. 시마로 이겨내는 생의 신산한 곡절들 -『모든 틈은 꽃핀다』
제24회 이영도시조문학상을 수상한 후 박권숙 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감을 발표하던 장면을 필자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부는 소감문에도 적지 않은 말이었는데 ‘생명처럼 시조를 받들고 살아온 시간이었지만 결코 모든 상황들이 저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라는 운을 떼며 울컥 벅찬 감회를 누르고 이어 ‘푸른 청춘의 봄날 꽃샘바람처럼 제 삶을 휩쓸었던 병고와도 이제 제법 오랜 세월 익숙하게 살고 있는 저로서는 늘 인간적 희비와 격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라며 소감을 마쳤다. 2012년 『나래시조』가을호에 박희정의 파워인터뷰 중 본인의 구술을 살펴보면 그는 1987년 신부전증이 발생하였고 아버지로부터 신장 이식을 받았다. 그러나 거부반응으로 재직하던 학교를 그만둔 채 절망적으로 격심한 병고와 싸우던 중 시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정신을 모아 시조에 몰입한 결과 등단 2년 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놀라운 집중과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마와 병고를 함께 짊어지고 여섯 권 째 시집을 펼쳤으니 그의 삶은 시조와 온전히 일체가 된 지고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시조에 바쳤다고 하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나 박권숙에게서만은 통할 수 있는 경우라 하겠다. 책을 낼 때마다 또박또박 걸어온 길을 정리하고 더디지만 쉬지 않고 걸어 온 길이기에 도정을 살펴보면 어느 시인보다도 성실하고 뚜렸한 자국을 남기며 지나 온 길이 되었다. 그의 시는 자신의 병고를 극복하는 일에서 시작하였지만 그 범위와 영역은 점차 넓고 활달해져서 역사와 사회 현실을 조망하고 우려내는 인식의 깊이는 깊고 넉넉하다.
무너진 하늘에도 연꽃 같은 해가 뜬다
아직도 우러를 무엇 층간마다 남았다며
버티는
백제의 뼈다
아름다운 안간 힘
-「미륵사지 석탑」전문 -
구원의 의미로 시조에 전념한 박권숙의 초기 작품들은 병고에서 시작된 육체와 정신의 괴리감을 통해 삶과 죽음의 처절한 대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출발하였지만 그는 곧 시인으로서의 안목과 인식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개안하면서 많은 작품 속에 역사 속의 인물들과 사물 등을 조명하고 그들의 거친 삶을 통하여 건강하고 활달하게 새로운 인식을 표출해냈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역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연작을 통하여 그간 시조단에 미미했던 여류시인의 안목을 개척해내면서 튼실한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2년 제12회 한국시조작품상을 수상한「천마총13」은 박권숙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좋은 답장이었으니 등단 11년 만의 일이었다. 박권숙의 새 시집 속에는 제1부에 역사적 소재를 담은 시편들을 배치해 놓고 있다. 새 책에 그려 낸 유물들은 격랑의 시대적 배경을 오롯이 둘러 쓴 채로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아주 건강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와 우리들과 만나게 된다. 평론가 방민호는 해설에서 ‘생명의 의지를 나타내는 시조’ 라는 다소 어눌한 제목을 취하며 시인의 신상을 그린 작품들을 취하고 역사물들을 배제하였으나 제1부의 작품들은 시집의 골격을 이루는 가장 핵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 소개한 작품은 박권숙의 시안이 역사의 기저를 아주 튼실하게 이해하며 그것을 표출하는 방편에서도 유물들의 시대적 소명과 동시대인들의 올곧은 생각들을 긍정의 편에서 우려내고 있다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단수를 드물게 구사하는 그가 그려 낸「미륵사지 석탑」은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미륵사지 석탑의 흉한 몰골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석탑의 영원한 구원의 이미지를 제대로 일으켜 세워 놓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석탑이 있는 박물관에 가면 아이들의 놀이터로 전락해 거의 다 무너진 탑을 일제가 시멘트로 임시 보수해 놓은 낡은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무너진 하늘에도 연꽃 같은 해가 뜬다’ 로 초장을 여는데 잠시 착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너진 것은 탑인데 ‘무너진 하늘’ 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읽어 가자면 그 말이 더 적합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백제인들에게 미륵사지 석탑은 곧 ‘하늘’ 과 같이 소중한 종교였기 때문이며 이미 그 하늘에 ‘연꽃 같은 해가’ 떠 있어서 ‘무너졌다‘ 는 의미 보다는 ’그래도 몇 조각이나마 탑은 남아 있다‘ 라는 아주 건강한 인식으로 관점을 바꿔 놓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남아 있는 탑의 몸들에게 ’우러를 무엇 층간마다 남았다며/ 버티는/ 백제의 뼈‘ 라는 크나 큰 화두를 던지고 있다. 박권숙의 단수 시조 한 편이 무너져 보잘 것 없고 흉했던 미륵사지 석탑을 ’아름다운 안간 힘‘ 으로 버티고 있는 끈질긴 백제 정신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해도 좋겠다.
여기 일천 이백 년을 끓여 낸 눈물 한 솥
잊혀진 어느 사찰 금빛새벽 안치고
화왕산 억새꽃 무덕 끝자락도 마저 안쳐
그 쇠 냄새 뜨거운 김 아직도 자욱한 땅
남도 창녕 말흘리 흙 뚜껑 밀어내고
부처님 마음 두신 곳 하늘빛으로 익었다
땅속 깊은 냉기도 일천 이백 년쯤 끓다 보면
김해 국립박물관 삼 층에 호젓이 앉아
뜸 잘 든 가야 비원을 고슬고슬 퍼 올린다
-「천 년의 허기」(가야 쇠솥) 전문 -
박권숙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사소한 유물일지라도 그것이 애초에 꿈꾸고 발원하려 했던 역사적 근본에 집착하며 화려한 복원을 꿈꾼다. 위 작품에서도 미륵사지 석탑만큼이나 가야 쇠솥의 못다 한 꿈들을 상상력으로 이루어 내고 있는 웅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일단 그가 주목한 것은 ‘가야 쇠솥’ 이지만 사실은 솥을 통해 드려내려고 한 것은 ‘가야 비원’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국가로 먼저 성장한 신라에 복속되기까지 가야의 슬픈 역사는 그저 한낱 숨겨진 비사로 치부 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시의 의도는 더욱 빛이 난다. 박권숙의 시는 초장이 강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일천 이백 년을 끓여 낸 눈물 한 솥’ 이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다시 둘째 수의 초장이 우뚝하게 받아 이어 가는데 ‘쇠 냄새 뜨거운 김 아직도 자욱한 땅’ 이라 적고 있다. 이 대목을 통하여 가야가 본래 신라 철기문화의 요지였음을 암시하며 ‘부처님 마음 두신 곳’ 으로 마무리한 종장을 통해 가야의 역사적 무게감을 은밀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 다음에야 천천히 ‘김해 국립 박물관 삼 층’을 이야기 하며 일천 이백 년의 잠자는 역사를 깨워낸 후 시인은 그 솥에 쌀 대신 ‘가야 비원’을 안쳐서 밥을 짓는 것이다. 이렇게 사실과 상상력이 단단하게 엮여 시 속에서 이야기가 무르익게 만드는 비법은 가히 ‘박권숙표‘ 시조의 우수성이 아니겠는가. 시인이 정성들여 쇠솥 가득 지어낸 ’가야 비원밥‘ 은 그야말로 ’뜸이 잘 든‘ 맛깔 나는 밥이 되었다. 변방의 역사로 ’남도 창녕 말흘리‘ 에서 녹슬어 가고 있던 쇠솥은 발굴 작업을 거쳐 1차로 국립박물관까지 왔다면 2차는 시인의 힘으로 가야의 꿈을 완성하게 되는 놀라운 발현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박권숙은 이제까지 우리 여류시인들이 보여 준 시조의 면모와는 확연하게 다른 힘차고 유장한 모습을 구현해 낸 보기 드문 자취를 꾸려오고 있는데 높은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을 통한 시로의 분출 방식에 있어서는 선배 시인 정수자의 자취와 일맥이 상통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다.
잘린 허리로도 무순이 자라고
목숨이 목숨을 불러 푸른 속삭임으로
미명의 싹 트임 속에
이끌어 들였을 때
말라 쪼그라진 알 감자 몸을 빌려
검정 비닐봉지 속에 잠자고 있던 봄이
겨울과 겨울을 건너
씨눈 불러 올릴 때
-「다시라고 말할 때」 전문 -
위에 살펴 본 두 작품들이 역사 유물들에게 숨어 있는 생명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면 위 작품은 아주 작은 미세한 생명럭을 간절하게 받아 올리는 여성다운 손길이 담뿍 담긴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모두가 ‘생명’ 을 기리고 축복하는 가없는 작업이라는 면에서 보면 상응하는 것이라 보여 진다. 이 작품의 제목은 참으로 자별하다. 특히 박권숙 시인의 병고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다시’ 라는 시어에 반짝 눈물이 맺힐 듯도 하다. 아마 박시인은 1987년 이전의 건강한 자신의 모습을 늘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시점을 늘 그리고 있지 않을까. ‘잘린 허리로도 무순이 자라고’ 라니 참으로 초장이 처연하다. 전편을 늘 압도하는 박권숙표 초장답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말라 쪼그라진 알 감자’ 는 약하게 보이지만 무순과 씨눈은 두 가지 생명을 받들며 ‘다시’ 라는 간절하고도 고귀한 말을 따스하게 감싸서 피워 올리고 있다. ‘다시’ 라는 말을 또렸하게 입을 벌려서 발음해 보시라. 입을 조금 크게 벌려야만 하는 첫소리와 양성단모음이 가져오는 밝고 활기찬 기운이 ‘시’ 의 짧고 약한 치음이 만들어 내는 싸늘한 쇳소리를 끝까지 감싸 안고 마무리한다. ‘다시’ 는 ‘틀렸어 그게 아니야’ 라는 의미로 냉정하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는 약속의 의미가 내포된 구원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시라고 말할 때‘ 는 모든 앞의 잘잘못을 수용하며 새롭게 잘 해내라는 수용과 격려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시‘ 라는 시어는 박권숙 시인에게 있어서 만은 그래서 더 없이 자별하다는 것이다. ’미명의 싹 트임 속에‘ ’겨울과 겨울을 건너‘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모습들 속에는 분명히 ’다시‘ 라는 은근하고도 강한 생명의 마력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박권숙의 연치도 지천명의 계단에 올라와 있다. 25년 동안이나 외롭고 아스라이 고된 생명을 지켜내며 시마를 서로 부둥켜안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때로는 외로워 보이지만 그의 시는 듬직하고 활달하며 유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생이 결코 외롭지 않음을 알고 있다. 몸은 언제나 나이와 함께 소멸해 가는 것이니 여섯 번째 시집 출간을 맞아 많은 이의 기원과 시마의 힘으로 박시인의 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 졌으면 좋겠다.
6. 나가면서
이번 호 서평을 쓰면서는 오래 뜸을 들였다. 나름 힘에 겨웠고 눈시울도 붉어졌다. 고되지만 수십 년 동안 버리지 못한 채 짊어지고 온 시마를 만나는 자리가 벅차고 가슴도 뭉클하였다. 하지만 결국 네 시인들도 시를 모시고 받드는 힘들이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었다. 서평을 쓴답시고 자잘한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가 나는 말씀으로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본다. 그러나 시조단 말석의 불목하니가 오는 봄이 흥에 겨워 두드린 부지깽이의 칭얼댐이라 여겨주시길 바란다. 네 분 선배님들의 새 시집을 만나는 자리도 시마와 벌이는 한 판 씨름처럼 고되었지만 침향이 뿜어내는 향기는 그윽하고 달콤했음을 밝히며 글을 맺는다.
- <<시조시학>> 201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