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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초등을 국위선양으로 간주하던 1957년까지 세계 열강 가운데 8,000m급 봉우리를 초등하지 못한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1938년 찰스 허드슨 대가 케이투봉(K2·8,611m) 아브루치 능선상의 최대 난코스인 하우스 침니(6,400m)와 블랙 피라미드(7,400m)를 돌파해 7,925m 지점까지 진출했고, 1939년 비스너 대가 아브루치능선 상부의 최난코스 폭 3m, 경사도 45도의 얼음 걸리인 보틀네크의 좌측 암릉을 돌파하며 8,370m 지점까지 진출했다. 또한 1953년 찰스 허드슨 대가 숄더 7,800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미국 대는 행운이 외면하여 다 잡은 토끼를 놓치듯 1954년 이탈리아 대에게 K2 초등을 넘겨주었다.
가셔브룸6봉의 남벽 아래 5,182m 지점에 베이스캠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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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1봉(히든 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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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대는 마칼루(8,463m) 남동릉 7,163m 지점의 암벽지대까지 진출했지만, 다음해 1955년 프랑스 대가 북서릉의 설릉으로 마칼루 초등을 차지했다. 1956년 오스트리아 소규모 등반대의 가셔브룸2봉(8,035m) 등정, 1957년 오스트리아 대의 브로드피크(8,047m) 초등 이후 카라코룸의 4개 8,000m급 봉우리 중에서 가셔브룸1봉(8,068m·히든 피크)만 미답봉으로 남았다.
미국 스탠퍼드 법과대학을 졸업한 니콜러스 클린치(Nicholas Clinch)는 가셔브룸1봉의 1958년 등반허가를 어렵사리 얻었다. 1892년 영국 탐험가 마틴 콘웨이가 카라코룸 원정대를 이끌면서 발토로빙하에서 가셔브룸1봉을 찾았으나 여러 봉우리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숨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히든 피크’라고 명명했다.
하버드 산악부 출신인 앤디 가우프만이 등반대에 참가했다. 봅 스위프트, 톰 매코맥, 팀 닥터 톰 네비슨도 등반대원이 되었다. 피트 쇼닝(31·엔지니어) 대원도 클린치 대장의 집요한 초빙에 마지못해 응했다. 쇼닝은 1953년 K2의 남벽 7,600m 지대의 절벽에서 혈전증에 걸린 환자 아트 길키 대원을 확보하고 있던 중에, 두 자일 파티가 빙벽을 미끄러지며 아트 길키와 연결된 자일과 엉켜 추락하는 것을 아이스 액스 빌레이(belay)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5명의 생명을 구한 산악영웅이었다. 파키스탄의 아크람 중위와 리즈비 대위도 이 등반대에 참가했다. 한편 클린치 대장은 스위스로 건너가 수소문 끝에 스위스 육군의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던 1934년 가셔브룸1봉 등반대원 로흐(Roch)를 만나 그 산의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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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치 등반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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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는 파키스탄의 스카르두에서 알렉산더 거룻배에 짐을 실어 인더스강 건너로 옮기고, 긴 행렬을 이룬 포터 일행과 캐러밴을 시작해 덩굴 다리를 건너고, 무릎까지 빠지는 브랄두강을 건너 아스콜(Askole)에 도착했다. 7명의 대원과 6명의 지원조 그리고 150명의 포터들이 캐러밴을 계속해 높이 150여m의 가파른 자갈 걸리(gully)를 올라 발토로빙하에 들어섰다.
그들은 모래밭 릴리고(Liligo)에 도착해 포터들에게 신발을 지급했으나, 포터들은 신발을 아끼려고 그들의 관습대로 바윗길을 맨발로 걸어서 발가락이 찢겨 피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파이유 피크와 거대한 암탑들, 롭상 타워들, 무즈타그 타워를 지났다. 캐러밴은 모레인 지대로 10여km 계속되었고, 발토로빙하 90여m 위쪽에 위치한 유명한 캠프지, 즉 초록색 풀밭 우르두카스(Urdukas)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들이 캐러밴을 계속할 때 빙하 건너편에 마셔브룸이 나타났다. 돛단배를 빼닮은 ‘발토로 얼음 배들’이라고 불리는 높이 30여m의 빙탑 3개의 아름다운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눈밭이 나타나자 포터들에게 설맹에 걸리지 않도록 고글(goggle·보안경)을 분배하고, 눈길로 캐러밴을 계속해 콩코르디아에 도착했다. 구름 속에 가려서 정상의 일부만 바라보이는 K2 쪽으로 고드윈 오스틴빙하가 뻗어 있었다. 그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부 발토로빙하에 도달해 야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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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캠프(6,85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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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운반할 아스콜 출신의 포터 20명만 남기고, 나머지 포터들은 귀가시켰다. 그 이튿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화이트아웃 속에서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지원조 칸이 선발대가 되어 베이스캠프 지를 찾아 아브루치빙하 쪽으로 떠났고, 나머지 대원들과 포터들은 그들의 뒤를 따라 짐을 운반했다.
그들은 가셔브룸6봉의 남벽 아래, 즉 아브루치빙하의 모레인 지대 5,182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빙하 건너편 발토로 캉리의 가파른 빙벽 위로 굉음과 함께 눈사태가 규칙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남부 가셔브룸빙하와 아브루치빙하 사이에 미국의 그랜드 캐년같이 생긴 거대한 피라미드인 히든 피크가 3,000여m 높이로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산이 바로 그들의 등반목표인 가셔브룸1봉이었다.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봅 스위프트는 가셔브룸1봉의 북서벽과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정찰했다. 그들은 숨은 크레바스들이 벌집 모양으로 밀집되어 있는 남부 가셔브룸빙하 상에 위치한 빙폭의 5,639m 지점까지 올라가 높이 15m의 빙탑 꼭대기에 텐트를 설치하고 야영했다. 북쪽으로 가셔브룸4봉이 보였다. 마틴 콘웨이가 8,000m에서 20m가 모자라는 이 산의 서벽을 ‘빛나는 벽’이라고 명명하여 유명해진 산으로, 그 해 가셔브룸1봉 등반허가를 신청했다가 밀려난 이탈리아 대의 등반 목표였다.
다음날 정찰대는 2시간 동안 빙폭을 돌파하고, 숨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전진해 히든 피크의 북서릉을 정찰했다. 북서릉의 하단 설사면은 등반이 어렵지 않았다. 정상까지의 경사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상부 760여m는 암릉이라는 사실이 커다란 부담감을 주었다.
베이스캠프 남서쪽으로 초골리사의 백색 피라미드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1892년 영국의 탐험가 마틴 콘웨이는 초골리사 동벽을 보고, 신부의 드레스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 산을 ‘신부 봉’이라 명명했다. 신부 봉은 오후의 그늘 속에서 측면의 세로 얼음주름들이 진홍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년 전 낭가파르바트의 초등자 헤르만 불이 브로드피크를 초등하고 나서 쿠르트 디엠베르거 대원과 함께 초골리사 동벽을 등반 중에 정상 부근에서 푹풍설을 만났다. 두 사람은 화이트아웃 속에서 하산 중에 헤르만 불이 눈처마를 밟고 실종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미국 대원들은 그 비극을 생각하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클린치 대장, 암릉보다 설릉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로흐 아레트’ 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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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1봉의 북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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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는 가셔브룸1봉의 루트 선택에 난항을 겪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고산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연에 맡길 수는 없었다. 선택은 생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산악인은 충분히 계산된 모험을 선택해야 한다. 산악인은 오산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등반과정의 예측된 난관과 위험에 관한 오판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산악인의 등반 경험이 풍부할수록 등반과정의 난관과 위험에 관한 그의 평가가 정확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요소를 주의 깊게 고려한 다음, 내포된 위험과 등반성공의 가능성을 저울질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등반 목표가 겪게 될 위험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지 가늠해야 한다.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결정으로서, 모든 고산 산악인은 자신의 등반관과 인생관에 입각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등반 목표가 높을수록, 산악인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감당해야 할 모험의 강도가 그만큼 높아진다. 고산 등반 자체가 위험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100% 안전이란 존재할 수 없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뿐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부주의하게 판단해서도 안 된다. 등산가의 무능력은 모험이 아니라 하나의 죄악이다.
등정 가능성이 있는 5개의 등로 중에서 클린치 대장은 로흐 아레트(arete·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날카로운 암릉이나 설릉)를 선호했고, 봅 스위프트, 쇼닝 등 다른 대원들은 북서릉 루트를 선호했다. 대원들은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은 북서릉을 선호했지만, 북서릉으로 가자면 먼저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빙하가 숨은 크레바스 투성이여서 대원들이 고소 포터를 일일이 에스코트해야 할 판이었고 암릉 구간도 미지수였다.
로흐 능선, 즉 남서릉 버트레스의 상단은 6,858m 지점으로, 이곳에서 평균 고도 7,010m 이상의 남동 만년설 플라토와 만난다. 이 플라토로 8km를 더 오르면 정상 피라미드의 밑이 된다. 그들은 1934년 앙드레 로흐가 크램폰도 착용하지 않고 3시간 만에 남서 버트레스의 6,300m 지점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흐 능선 쪽에는 눈처마(커니스)들이 너무 많아서 등반이 중단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북서릉 상부의 길이 762m의 암릉을 돌파하느냐, 아니면 로흐 아레트로 등반을 시작하여 정상까지 8km의 플라토를 돌파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클린치 대장은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등정에서는 암릉보다 설릉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에베레스트도 북동릉의 암벽지대, 즉 슬랩(slap) 지대에서 실패한 후 남동릉의 설릉으로 초등되었고, 또한 K2의 아브루치능선을 제외하고 그때까지 초등된 모든 8,000m 봉우리들이 설릉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도가 낮은 암벽에서는 피톤과 볼트만 설치하면 돌파가 가능하지만, 7,925m 지점에 위치한 암벽에서는 1m 거리의 난관도 등반을 좌절시킬 수 있다. 1954년 미국 대의 마칼루 등정 실패가 바로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그러나 히든 피크의 설릉 루트, 즉 남동 만년설 플라토는 낭가파르바트의 악명 높은 ‘질버 자텔(1934년 비극의 현장)’을 빼닮았고, 그곳의 수많은 크레바스들이 그들의 등반을 저지시킬 가능성도 컸다. 그리하여 클린치 대장만 제외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북서릉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은 루트 결정의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클린치 대장은 로흐 아레트를 정찰하기로 했다. 나머지 대원들과 고소 포터들은 북서릉 등반의 기점인 남부 가셔브룸빙하 상의 제1캠프까지 짐을 운반했다. 클린치 대장은 대원들과 고소 포터들이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등반 중에 숨은 크레바스에 혼쭐나서 로흐 아레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 하늘 산책’ 가셔브룸1봉 초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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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세 사람은 아브루치빙하로 진출했다. 우측 남쪽에는 1936년 프랑스 대가 6,900m 지점까지 진출했던 사우스 스퍼(South Spur)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는데 이 루트도 암릉 통과가 내포되어 있었다. 프랑스 스퍼 옆에는 1934년 스위스 산악인 G.O. 디렌퍼스 교수가 국제 등반대를 이끌 때 앙드레 로흐 대원과 한스 어틀 두 사람이 6,300m 지점까지 진출했던 남서 스퍼(Southwest Spur)가 솟아 있었다.
그들은 로흐 아레트 밑의 아브루치빙하에 도달해 제1캠프를 구축했다. 높이 1,067m의 오목한 설사면이 위쪽의 눈과 얼음의 돔(dome·半球形)으로 이어졌다. 이 설사면의 좌측은 바위와 눈의 버트레스(Buttress)였다. 버트레스 맨 꼭대기에서 눈처마 투성이의 좁은 아레트가 돔으로 이어져 있었다. 높이 6,706m의 돔에서 고도가 150여m 높아지며, 800여m를 더 오르면 남동 플라토와 이어지고, 그곳에서 정상 피라미드까지 거리는 8km나 되었다.
세 사람은 남서 버트레스의 우측에 있는 설사면으로 90여m를 올라, 작은 눈사태를 막아줄 작은 쿨와르 밑의 암반(5,730m)에 임시 텐트를 설치했다. 주변의 여러 산에서 쾅쾅 소리를 내며 눈사태들이 계속 쏟아져 내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클린치 대장과 쇼닝은 캠프 위쪽으로 46m를 더 등반하면서 로흐 아레트의 등반이 수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북서릉을 향하여 남부 가셔브룸빙하로 짐을 운반한 대원들과 고소 포터들은 빙하의 눈이 녹아서 숨은 크레바스에 빠지며 무척 고생을 했다. 미국 대는 결국 로흐 아레트를 최종 등로로 결정했다.
악천후 속에서 험난한 암릉과 눈 깊은 설릉 등반하느라 애먹어
카우프만과 매코맥이 남서 버트레스의 침니를 오르고 아브루치빙하 위쪽 762m의 지점의 바위 버트레스 뒤쪽에 제2캠프(6,401m)를 구축하고 그곳까지 마닐라 로프로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클린치 대장과 고소 포터 쿠심과 라힘이 그곳까지 짐을 운반하고 두 명의 고소포터는 하산하고 클린치 대장은 그곳에 남았다. 카우프만과 매코맥, 클린치 대장 세 사람은 제2캠프의 텐트 속에서 악천후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냈다.
다음날 카우프만과 클린치 대장은 킥스텝으로 두 번째 바위 버트레스 밑까지 진출했다. 클린치 대장이 살얼음이 덮인 버트레스 위로 30m 리드(선등)했고, 카우프만이 선등을 교대해 가파른 암벽을 올라 바위 버트레스를 돌파했다. 90여m 아래쪽의 제2캠프가 독수리 둥지처럼 바라보였고, 그 아래 아브루치빙하 상의 제1캠프도 직선으로 내려다 보였다. 그들 앞에 작은 눈처마들과 암탑들이 늘어선 길이 137m의 좁은 병목(bottleneck) 아레트가 돔 쪽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일을 묶고 카우프만이 좁은 아레트를 가로질러 리드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레트 마루로 9m 전진하고, 높이 1.5m의 설탑을 좌측으로 트래버스한 후 클린치 대장을 확보해 주었다. 클린치 대장은 설탑에 도달해 아이스 액스로 설탑을 부수고 그 위로 전진했다. 카우프만은 클린치 대장의 확보를 받으며 능선 상의 높이 6m 높이의 바위 스텝 우측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텝 위의 눈이 녹아 그의 발이 자꾸만 미끄러지자 그는 등반을 포기했고, 그들은 하산하면서 버트레스 꼭대기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제2캠프로 자일 하강했다. 그들은 그날 고도 90m 이상을 높이며 루트를 개척했지만, 이런 등반 속도로는 가셔브룸1봉을 등반하는 데 일 년이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새도록 눈이 내렸고 다음날도 눈은 계속되었다. 쇼닝, 네비슨, 지원조 칸이 제1캠프까지 짐을 운반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던 중에 가셔브룸4봉을 등반하려는 이탈리아 선발대 월터 보나티와 토니 고비 그리고 120명의 포터들은 만났다. 그날 밤도 눈은 계속되었고, 6월 18일 매코맥의 건강 상태가 나빠서 제2캠프에 있던 세 사람은 고정 자일을 붙잡고 15cm의 가루눈이 덮인 설사면으로 하산하여 제1캠프까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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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자 피트 쇼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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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밤새 30cm의 눈이 내렸다. 다음날 오전 10시 스위프트, 네비슨, 카우프만이 제2캠프를 향해 먼저 심설 속으로 등반했다. 고소 포터 후세인, 쿠아심, 칸이 뒤따랐고, 리즈비와 클린치 대장이 맨 뒤에서 올랐다. 선등자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방에서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클린치 대장이 쿨와르 속의 심설로 60m를 오르는 데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파키스탄 군인 리즈비 대원이 90m를 오르고 기관지 이상으로 심한 기침을 하며 하산했다. 제1캠프와 제2캠프 중간 지점부터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클린치 대장은 그곳에 짐을 보관했다. 지원조는 바위 버트레스 밑까지 짐을 운반하고 하산했다. 공격조 3명만 제2 캠프에 머물렀다. 피트 쇼닝과 하지가 제1캠프까지 짐을 운반했다.
6월 21일 강풍이 불고 폭설이 내려 눈보라가 휘날리는 가운데, 클린치 대장과 지원조는 설사면으로 짐을 운반했다. 쇼닝, 카우프만, 네비슨이 제2캠프 위쪽에서 등로를 개척하다가 악천후로 인해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처럼 고정 자일을 움켜잡고 바람에 날리며 퇴각하느라 사투를 벌이는 처절한 모습이 보였다. 지원조는 덤프(dump·임시의 짐 보관 캠프)에 짐을 벗어놓고 하산했다. 클린치 대장은 제2캠프 아래 고정자일까지 짐을 운반했다.
6월 22일 팀 닥터 네비슨은 기관지 감염으로 제2캠프의 공격조에서 하산했고, 쇼닝과 카우프만은 루트 개척에 나서서 2시간 만에 137m의 병목 아레트의 최난코스에 마닐라 로프로 고정자일을 설치하며 돌파했다. 두 사람은 넓은 리지의 좌측 가파른 설사면으로 61m를 트래버스하고 다시 능선 마루에 붙어 돔의 사면에 도달했다. 그들은 설벽으로 60m를 프런트포인팅으로 오르고 청빙 지대에 도달했다. 쇼닝은 카우프만의 확보를 받으며 경사도 55도, 길이 60m의 빙벽에 스텝을 깎고 나일론 자일로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정오에 쇼닝과 카우프만은 돔 정상까지 돌파하고 제3캠프지(6,706m)를 확보했다.
6월 24일 쇼닝이 지원조 쿠아심과 칸을 데리고 제2캠프를 출발했고, 클린치 대장은 지원조 후세인과 라힘과 함께 제3캠프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바위 버트레스 꼭대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병목 아레트를 건너기 시작했다. 쇼닝과 카우프만이 전에 좁은 능선 마루를 따라 루트의 얼음을 잘 깎아 놓았고 난코스 구간에 고정 로프를 설치했지만, 능선이 좁아서 그들은 매우 조심해서 트래버스했다. 능선 상의 높이 2.4m의 암탑 통과가 가장 힘들었다. 그들이 암탑의 왼쪽 밑 눈밭으로 트래버스할 때 발판으로 사용하도록 암벽에 박아놓은 길이 10cm의 아이스 피톤이 몸무게를 싣자마자 금세 휘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암탑이 나타나 우측으로 트래버스했다. 좁은 능선 끝에 확보용으로 알루미늄 막대가 박혀 있었다. 능선은 점점 넓어지며 위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파른 설사면을 60m 트래버스했는데, 마닐라삼 로프가 확보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개의 피톤을 통과하는 나일론 로프를 따라 능선을 오르고 이어 높이 5m의 수직 설벽을 올랐다. 그들은 짧은 빙벽 밑의 레지를 따라 좌측으로 트래버스하고, 경사도 50도의 빙벽에 깎아놓은 스텝을 올랐다. 설벽 18m 위쪽에 쇼닝과 카우프만이 설치한 나일론 로프의 끝이 보였다. 드디어 그들은 6,706m의 돔 정상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고 하산했다.
6월 25일 스위프트, 쿠아심, 클린치 대장은 짐을 지고 제2캠프를 출발했다. 그들은 병목 아레트의 자일이 설치되지 않은 구간에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마닐라 로프가 설치된 트래버스 구간을 든든한 나일론 로프로 교체했다. 그밖에 난코스 구간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돔 정상까지 짐을 운반한 후 제1캠프까지 하산했다.
투표 통해 쇼닝과 카우프만 정상 공격조로 선발
6월 26일 클린치 대장이 앞장서고, 쇼닝, 카우프만, 네비슨, 매코맥이 뒤따르며 제3캠프지까지 짐을 운반했다. 클린치 대장이 바위 버트레스 상부에서 병목 아레트를 트래버스하기 시작했을 때 쿠아심과 타스가 그의 뒤를 따랐고 스위프트, 리즈비, 라힘도 뒤따라 올랐다.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혹한에 시달리던 스위프트는 하산했다. 그들은 돔 꼭대기에 두 개의 텐트를 설치하고 제3캠프를 구축했다. 쿠아심과 라힘이 한 텐트에, 클린치 대장과 타스가 다른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제3캠프 주위에 식량 24상자, 산소통 19개가 운반, 정리되었다. 그들은 폭풍으로 잠을 설쳤는데, 다음날 아침 강풍은 잦아들었으나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6월 28일 쇼닝과 카우프만 그리고 후세인이 제2캠프에서 등반 중에 폭풍설을 만나 돔 아래 쪽 설사면에서 고초를 겪으며 비박하고 제3캠프에 늦게 도착했다. 후세인은 복통과 설맹으로 고통을 받았다. 클린치 대장과 지원조 쿠아심, 라힘은 플라토까지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출발했다. 구름이 다시 몰려오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능선은 30m 낮아졌다가 150여m 높아졌다. 그들은 우측의 눈처마 크기를 분간할 수 없어서, 눈처마를 피하여 능선의 좌측으로만 진행했다. 제3캠프에서 90m의 거리에서 클린치 대장은 숨은 크레바스 속에 어깨까지 빠졌다. 가시거리는 3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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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자 카우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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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심설 속에 무릎까지 빠져드는 상황에서 117m를 더 전진하고 이후 능선이 너무 좁아 산소통을 보관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 제3캠프로 되돌아왔다. 리즈비와 카우프만이 한 텐트에, 쇼닝과 클린치 대장이 다른 텐트 속에 들어가 비박했다. 스위프트, 네비슨, 매코맥, 라힘 4명이 돌풍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제3캠프로 올라왔다. 대원들이 투표를 통해서 쇼닝과 카우프만을 정상 공격조로 선발했다. 스위프트, 네비슨, 파키스탄 군인 리즈비는 제4캠프의 지원조로 선발되었다.
6월 29일 카우프만, 쇼닝, 쿠아심, 클린치 대장은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플라토로 향했다. 첫 번째 돌기지대에서 내려다보니 150여m 아래쪽에 제2팀이 능선과 수직을 이루는 숨은 크레바스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다. 선발대는 우측의 눈처마를 피하고 바위 노두(露頭)를 지났다. 등로가 막히자 카우프만이 확보를 받으며 커다란 눈처마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가 눈처마 꼭대기에서 아이스 액스로 쇼닝을 확보하고 쇼닝이 킥스텝으로 아래쪽 능선 상의 구렁(depression) 쪽으로 내려갔다. 카우프만은 눈처마 꼭대기에 알루미늄 막대기를 박고 구렁까지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다음 등성이의 꼭대기에서 카우프만은 앞선 쇼닝을 확보했다. 쇼닝은 9m를 전진했으나 좁은 능선으로 루트 개척이 불가능했다. 카우프만과 쇼닝은 눈처마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쇼닝이 아이스액스로 눈처마 측면의 가장자리를 깨냈다. 높이 3m의 절벽 아래 동굴이 있었고, 그 아래로 경사도 50도의 설벽이 이어졌다. 쇼닝은 설벽 21m 아래쪽까지 통로를 깎아내고 숨은 크레바스 자리에 조성된 설벽 측면의 평지에 도달했다. 고정자일로 짐을 쇼닝에게 하강시켰으나 짐이 동굴 바닥에 걸렸고, 그것을 다시 내려보내니 쇼닝이 회수하기가 어려운 지점에 도달하여 애를 먹었다.
그리하여 쿠아심이 짐을 지고 쇼닝이 있는 곳까지 자일 하강했다. 칸과 라힘은 짐을 지고 가파른 절벽으로 자일하강 하기를 거부했다. 자일의 군데군데 몇몇 대원들이 배치되어 릴레이식으로 모든 짐을 내려보냈다. 매코맥은 몸이 불편하여 혼자 제3캠프로 하산했다. 리즈비는 기관지가 나빠서 제4캠프에서의 지원조 역할을 포기하고 하산했기 때문에 클린치 대장이 그를 대신하여 지원조가 되었다. 그들은 능선으로 90여m 횡단하여 평지에 도달했다. 네비슨이 텐트 칠 장소의 눈을 다지고 있었다. 그들은 플라토가 가까운 그곳에 텐트 2동을 설치하고 제4캠프(6,858m)를 구축했다.
다음날 지원조 클린치 대장, 네비슨, 스위프트는 플라토의 허벅지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루트를 개척했다. 그들은 20분 간격으로 선등을 교대했다. 플라토로 800m를 전진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는데 거대한 크레바스가 나타났다. 네비슨이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스노 브리지로 크레바스를 건넜다. 히든 피크 남봉의 능선과 우르독 콤(Urdok Comb) 사이의 높은 안부 위쪽으로 히든 피크의 정상이 바라 보였다. 정상 피라미드까지 거대한 크레바스들이 산재한 빙원이 8km 뻗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가파른 빙벽에 스텝을 깎고, 암벽 절벽에 피톤을 박아 거기에 매달리며 살아온 산악인에게, 8,000m급 봉우리의 정상 부분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한 발 한 발 그저 터벅터벅 걷기만 하면 되는, 7,010m 높이의 빙원길, 즉 ‘하늘의 산책길’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제4캠프에서 심설 속으로 1.6km를 전진하여 플라토 중간 지점에 접근했다. 피로가 엄습했고 강풍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등로 표시 막대기(wand)를 눈 속에 박고 제4캠프로 귀환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한 후 제4 캠프의 능선 마루로 올라가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즐겼다. 카라코룸의 방대하고 장엄한 풍광 속에서 인간 영혼의 영원한 고독감이 자취 없이 녹아 버렸다. 남쪽으로 콘웨이 새들(Conway Saddle) 너머 발토로 캉리가, 동쪽으로 마셔브룸이, 발토로빙하 상부에 가셔브룸3봉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의 히든 피크 남봉의 능선 너머 가셔브룸1봉의 정상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노르딕 스키를 휴대하지 않았던 사실을 후회했다.
밤새 눈이 내렸고 다음날도 온종일 눈이 내렸다. 7월 2일 제3캠프에 있던 고소 포터들이 눈처마 꼭대기까지 짐을 운반한 후 고함을 질러댔다. 카우프만과 클린치 대장이 눈처마 밑의 고정 자일 밑에 도달하자, 포터들이 자일로 두 개의 짐을 하강했다.
7월 3일 날씨가 흐린 가운데, 그들은 2개의 산소통을 플라토 전에 도달했던 지점까지 운반했다.
대장 비롯한 지원조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제5캠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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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1봉 초등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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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5명의 대원들은 플라토에 제5캠프를 구축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들은 도중에 이미 휴대하고 있던 짐 꼭대기에 전에 플라토까지 운반했던 6개의 산소통을 더 짊어졌는데, 각자의 짐 무게가 23kg에 달했다. 플라토로 800m를 전진하자 크레바스들이 산재한 오르막길이 우르독 피크와 히든 피크 남봉(7,071m)의 능선이 만나 이루는 안부로 이어졌다.
선등자는 산소를 사용하기로 하고, 쇼닝이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앞장섰다. 쇼닝이 너무 지쳐서 길 위에 쓰러지자 카우프만이 선등을 교대했다. 탈진만이 아니라 극한의 노력도 보잘것없는 결과만 낳는 데서 오는 히말라야 등반의 심리적 좌절감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맨뒤에서 자일을 풀어주던 쇼닝이 지쳐서 길 위에 쓰러졌다.
네비슨이 선등했다. 길이 120m의 가파른 길에서 30분간씩 세 번의 선등에 세 시간이 경과했다. 클린치 대장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로 선등했다. 그는 빨리 선등을 끝내고 후미에서 등반하고 싶었다. 네비슨이 맨 뒤에서 “교대!” 하고 소리치자 스위프트가 앞장섰다. 산소 조절기가 고장이 났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너무 탈진한 그들은 여분의 산소 조절기가 누구의 짐 속에 들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들 5명은 무산소로 10분씩 선등을 교대하기로 했다.
혹한 때문에 장시간 휴식을 취하면 몸이 곧 얼어붙을 것 같았고, 출발하려고 일어서면 걷고 싶은 충동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쇼닝이 10분간 선등했을 때, 모두가 지쳐서 길 위에 쓰러졌다. 그 사이 30m의 거리를 돌파했고 9m의 고도를 높였다. 걷는 시간보다 휴식시간이 자꾸만 더 길어졌다.
클린치 대장이 교대했다. 한 발자국 옮기면 다리가 무릎까지 빠졌다. 그는 아이스 액스에 매달려 허리를 굽히고 숨을 헐떡거렸다. 고소여서 움직일 때 몸에서 땀은 나지 않았으나, 그가 건조한 공기를 마실 때마다 허파 속에서 습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분신이 그의 몸 밖으로 빠져 나와 아이스액스에 매달린 무기력한 그에게 “거기 서 있지만 말고 빨리 걸어. 어서 걸으라니까, 당장”하며 꾸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느라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겨우 한 발짝 옮겼다. 그리고 나서 더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는 동료들의 등반을 무한정 지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교대 시간!”
네비슨이 맨 뒤에서 소리쳤다. 또 다른 대원의 30m 전진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가파른 사면 밑에 도달했다. 이제 30m쯤 만 더 오르면 절벽에 위치한 평평한 곳에 도달할 성싶었다.
“저 위에 제5캠프를 구축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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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닝은 고통에 겨운 나머지 그들이 이미 주지하고 있던 사실을 재차 확인하듯이 말했다. 스위프트가 선등했다. 그가 기를 쓰고 절벽을 절반쯤 기어올랐다. 쇼닝이 선등을 교대, 이윽고 그들은 커다란 크레바스 앞의 넓은 터에 도달했다. 그 크레바스는 우르독 피크 쪽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눈사태를 막아줄 것 같았다. 그들은 그곳에 텐트를 설치해 제5캠프(7,315m)를 구축했다. 고도 457m 아래쪽의 제4캠프가 멀리 내려다 보였다. 정상 공격조 쇼닝과 카우프만을 그곳에 남겨두고 네비슨, 스위프트, 클린치 대장은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 주고 제4캠프로 하산했다. 탈진한 스위프트가 30분마다 휴식을 취하며 하산하자고 제안했지만 짐을 지지 않고 이미 다져진 눈길로 하산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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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캠프(6,70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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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5시 카우프만과 쇼닝은 각자 산소통 2개씩 짊어지고 수직고도가 150여m이고, 거리가 1.6km 이상인 위쪽의 안부를 향해 제5캠프를 출발했다. 그들은 크레바스 속의 스노 브리지를 건넜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에서 무릎 사이까지 심설 속에 빠졌다. 커다란 크레바스가 눈으로 메워져 조성된 넓은 터가 나타났다. 그 위쪽에 존재하는 높이 120m쯤 되는 가파른 설벽이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설벽으로 계속 올랐다. 안부까지의 진행을 가로막는 커다란 눈처마가 나타났다. 다행스럽게도 그 눈처마의 일부가 깨져 있어 탈출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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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반대 앞줄 좌측부터 봅 스위프트, 톰 네비슨, 딕 어윈, 뒷줄 좌측부터 아크람, 길 로버츠, 리즈버, 피트 쇼닝, 닉 클린치, 앤디 카우프만, 톰 매코맥(딕 어빈과 길 로버츠는 초등 이후 베이스 캠프에 도착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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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얼음 덩어리 사이로 요리조리 피하며 등반을 시작한 지 5시간 만에 안부에 도달했다. 강풍이 불고 있었다. 하나의 능선이 안부의 동쪽으로 솟아오르다가 우르독 피크에서 내려 뻗은 주능선과 만났다. 그곳에 능선이 북쪽 방향으로 뻗어 오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히든 피크의 정상으로 이어져, 반원형의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 원형의 능선이 권곡(圈谷·쿰)을 만들어 거대한 빙하의 시발점이 되었고, 그 빙하는 히든 피크의 서벽쪽으로 뻗어내렸다. 그러니까 히든 피크의 정상은 이 권곡 너머 정북 방향에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고도를 높이기 위해 우측 방향으로 계속 올랐다. 그들이 등로를 정찰하니 가파른 설벽 위쪽에 얼음이 덮인 암벽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정상 능선 120m 아래쪽에서 시작되는 암벽이 있었다. 동쪽의 좁은 스노 쿨와르가 암벽지대의 통로 구실을 할 것 같았다. 그들은 1분당 2.5리터의 산소가 흐르도록 산소 조절기를 조정했다. 두 사람은 10분마다 선등을 교대하며 권곡을 넘고 커다란 빙탑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위쪽으로 빙하가 높이 솟아 있고, 정상은 약간 서쪽에 있었다. 정상 능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그들은 빙벽을 프런트 포인팅으로 올랐다. 네 발짝 걷고 숨을 헐떡거렸고, 한 발짝 더 걷고 또한 숨을 더욱 헐떡거렸다. 카우프만의 산소가 떨어졌다. 쇼닝의 산소도 역시 떨어졌다. 그들은 새 산소통으로 갈아넣고 1분에 3리터의 산소가 흐르도록 조정한 후, 빈 산소통은 절벽으로 미끄러뜨렸다.
설벽에 바위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빙벽을 따라 계속 올랐다. 그들의 좌측에 쿨와르가 보였다. 그들은 때때로 확보를 하며 설벽과 얼음이 덮인 암벽으로 트래버스하여 쿨와르 밑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했다. 쿨와르는 가파른 암벽 사이로 뻗어 있었다. 만일 쿨와르 속의 눈이 무너지면 바위를 잡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오른쪽 암벽에 가까운 눈 속으로 등반을 재개했다.
둥그스름한 능선 위에 오르자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정상까지는 150여m만 더 오르면 되었다. 눈 알갱이들이 층을 이루어 잘 부서졌다. 그들의 쿨와르 속의 눈길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쿨와르의 상부에서 좌측으로 트래버스하여 정상 능선 마루에 올라섰다. 북쪽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이 둥그스름한 능선을 다 오르니,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1958년 7월 5일 오후 3시 그들은 드디어 갈망했던 히든 피크의 정상을 밟았다. 북쪽 24km 떨어진 곳에 K2가 보였다. 쇼닝은 1953년 K2를 등반했을 때 제8캠프 위치를 확인하고 감개무량했다. 브로드피크, 가셔브룸2,3,4봉도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동쪽으로 남부 가셔브룸과 아브루치빙하가 보였고 그 너머 가셔브룸5봉과 6봉도 보였다.
쇼닝은 사우스 가셔브룸빙하를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정상에서 약간 북쪽 벽으로 더 내려섰다. 제3캠프에서 대원들이 거울 반사 신호를 보냈다. 등정자들도 캔 뚜껑을 이용하여 햇빛을 반사하여 답을 보냈다. 그들은 정상에서 유엔기, 파키스탄기, 미국 국기 등을 걸고 사진 촬영을 했다.
그들은 4시에 하산을 시작하여 밤 9시 제5캠프로 귀환했다. 클린치 대장과 네비슨이 2차 등정을 시도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 플라토 상의 제5캠프에서 중요 장비만 회수하고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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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산책’ 가셔브룸1봉 초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