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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사적공원
▣ 제1부 수영사적공원과 수영강변 주변 경관
* 25의용단
* 안용복 장군 사당
* <우리 땅 울릉도, 독도, 그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 경상좌수영선소비와 박인로 가사문학 <산상탄>
▣ 제2부 ; 수영사적공원 벗들과 학습하는 모습 (2022.3.12.)
▣ 작성 : 학정 이재익 시인 / 2022.3.12.
제1부 ; 수영사적공원과 수영강변 주변 경관
오늘날 부산시의 수영구, 수영은 원래 경상좌수영이 설치된 곳이라, 경상좌수영에서 수영으로 줄여서 불리게 된 것이다. 수영사적지 옆에는 큰 재래시장인 팔도시장이 있다.
1) 25 의용단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사당인 의용사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사당인 의용사
* 1853년 철종 때 겅상좌수사 장인식이 처음 이곳에 의용단비를 세우고,
* 199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정화사업을 하였다.
첫째 대문(외삼문) 존성문
둘째 대문(내삼문) 영회문
내삼문의 이 현판(영회문)은 오늘 함께 참여한 벗 이남수님 부친 일천 이순종 서도가님께서 쓰신 현판이다. 감개가 무량함.
입구에 25의용단 안내석
현재 음력 9월 말정일에 제향을 봉행한다.
동쪽에 13위 석비
위와 같은 장소/ 동쪽에 13위 석비
서쪽에 12위 석비
위와 같은 장소/ 서쪽에 12위 석비
의용제인비 앞면
의용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싸운 백성들, 이 곳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백성 25인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
의용제인비 뒷면 ↑↓
의용제인비 요지
1) 왜란이 끝난지 17년 뒤 1609년 광해군 원년에 동래부사 동악 이안눌 부사가 25인의 행적을 조사하여 정방록에 기록하였다.
2) 순조 대(1800~1834년)에 동래부사 오한원 부사가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하며 포상하였다.
3) 1853년 철종 4년에 경상 좌수사 장인식이 의용단을 쌓고 25개의 비석을 세웠다.
이 의용제인비를 세울 때 글씨는 이형하(전승지)가 쓰고, 감동관 즉 공사감독은 백채현(첨정)이 하였다는 것.
2) 안용복 장군 사당
왜 안용복 장군 사당이 여기 있는가?
안용복은 수영 어부, 수영에 소속된 수군이었기 때문이다. 수영 출신 위인. 초량 왜관에 드나들며 장사를 하기도 해서 일본말을 할 줄 알았다.
안용복 장군 사당
안용복 장군상
안용복 장군상
안용복이 왜인 관리와 담판하는 장면
안용복 장군이 왜인 어부들과 싸우는 장면
안용복 장군 충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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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 내용 ] 1967.7.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니 저 동래 사람 安龍福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 그는 본시 수영 군졸로 이조 숙종 19년 계유년 서기 1693년 여름 울릉도에 표착하여 국경을 넘어온 倭들과 싸운 끝에 강제로 끌려가 五浪島로 伯耆州로 다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여 일본이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江戶關伯의 서약서를 받아 쥐었으나 대마도에 이르러 도로 빼앗기고 50일 동안 구류까지 당한 뒤에 동래왜관으로 와서 또 40일 갇혔다가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던 바 부사 또한 월경하였다 하여 도리어 형벌을 가하는 것이었다.
비분한 속에 2년이 지난 을해년 여름 그는 흥해인 유일부, 낙안인 김성길, 영해인 유봉석, 연안인 김순립, 평산포인 이인성, 순천승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 등 열사람의 동지를 데리고 다시 울릉도를 찾아가 도적질 하는 왜선을 추격하여 伯耆州에 이르러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세금을 징수하거나, 죄인을 체포함)이라 일컫고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마침내 다시는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 받은 뒤에 강원도 영양으로 돌아왔든 바 감사 심평은 도리어 그들을 묶어 서울로 올려 보냈고, 조정에서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 했는데, 尹趾完, 南九萬 등 원로 대신의 변호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만 갔던 것이다.
여기 그의 행적을 대강 적고 다시 헤아리매 저 섬(울릉도, 독도)이 오늘 우리 판도 속에 들어 있음은 오직 그의 은공이다. 남쪽 선비들이 찬양회를 결성하고 겨레의 이름으로 울릉군을 봉한다(평민이었나 위대한 업적으로 후세인이 장군으로 추존함) 함은 진실로 느꺼운 일이다. 그를 위하여 한덩이 돌을 세움에 미쳐 내 이제 노래를 부르노니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님 혼자 애쓰던가
상이야 못 드릴 망정 형벌 귀양 어인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이제 와 울릉군 봉하오니 웃고 받으옵소서.
(노산 이은상 선생)
서기 1967년 7월 일
이은상 지음 / 오제봉 글 씀 / 안재구 시공
[참고자료편] 우리 땅 독도, 그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 이재익 작성. 2008.07.27
17년전 이재익 시인이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시에 한 시간 공개수업을 하기 위하여 84면의 자료를 작성하였던 것.
지난 날에는 학생들과,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학습하게 되었다.
[시] 독도의 사명
이 재 익(2001.08.26)
언젠가 한번은, 벼르고 또 별러
쉰도 넘어 이제야 찾아 왔더니
저 바위 덩어리가 무엇이건대
이렇게 상기되고 긴장되는 것일까.
경어를 쓰랴 말을 놓으랴
가까이 가면 덥석 손 내밀듯 다정하고
백마 탄 용사 준수한 남아 같고
의연한 자태에 숨이 막힐 듯.
칼날 같은 정의가 저 바위에 녹았어라
자양분 없는 흙도 물보다 진해
한 움큼 파보면 붉은 피가 솟을 듯.
네 무슨 사명으로 외따로이 솟았느냐
한줌의 국토 사랑 교과서라네.
[시] 성인봉에 오르며
이재익(2001.08.25)
3무5다도에 우뚝 솟은 성인봉
더 높아 굽어보면 장관일 터이지만
섬에 산만 높으면 사람은 어디사노
그 높이 984m 참으로 적당하구나.
섬피나무, 솔송나무 아름드리 원시림
곳곳에 향나무 향기도 맑고
어린 손자 할머니, 연인들 함께 오르네.
내려다보니 나리분지 분화구 위로
구름은 걷혔다 피고 피었다가 걷히누나.
一日淸閑 一日仙이 빈말 아닐세
성인봉 있어 울릉도의 기품을 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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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무=도둑, 공해, 뱀 / 5다= 水(물), 美(미인), 石(돌), 風(바람), 香(향나무)
▲ 一日淸閑(일일청한) 一日仙(일일선) : 하루 동안 마음이 깨끗하고 한가로우면 하루 동안의 신선이다. (명심보감, 성심편상 제55장)
[시] 울릉 태하 성하신당
이 재 익
시원한 숲속 작은 신당에는
사모관대 차려놓은 동남동녀童男童女 한 쌍.
하늘도 땅도 야속했건만
후세인은 무심히 소원만 비네.
-엄마 아빠 저희들만 왜 두고 가십니까?
-이제 그만, 우리 둘 지아비 지어미 되어 살아보세!
-아니어요, 난 어려서 우리 엄마 없인 못살아요!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다가 혼이 되어 따라갔다네.
해신海神이시여, 사람 종자 남기려고 했으면
살아갈 길을 인도하셔야지요
아! 해신이 잠깐 졸은 사이에 몇 년이 흘렀구나
오늘도 울릉도 해신은 미안해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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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노트 ] ; 울릉도 태하 성하신당 전설
조선 태종시(113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여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주민철수)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병선 2척을 이끌고 울릉도 태하동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모두 모아서 태우고
출발하려는 전날 밤의 꿈속에 해신이 나타나 남녀 2명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이 섬에 남겨두고가라고 계시하였다.
다음날 출항하려니 거센 풍파가 일어나서 출항을 못하자 동남동녀 2명을 골라서 거짓심부름을 시키고 풍랑이 멎자 안무사는 급히 출항하였다.
그 뒤에 안무사는 늘 그 두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던 차에 수년 후 입도入島하여 수색을 하였더니 두 남녀는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다. 속은 두 동남동녀가 울다가 지쳐서 죽은 것이다.
신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 혼령을 달래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의 풍년과 어로의 해상 안전을 빌고 있다.
* 조선 태종때부터 울릉도는 공도정책으로 비워 두었다. 왜구 해적의 피해를 피하고 혹피역 죄인들이 도피처를 막고자하였으나, 국토관리는 소홀했다.
우리 땅 독도, 그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이재익(학정, 시인)
1️⃣.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고유영토 ;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장군 우산국(于山國) 병합 때부터.
2️⃣. 독도가 우산도로 불렸던 의의 ;
1) 세종실록지리지에 무릉도(울릉도), 우산도(독도) → 독도는 예로부터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등으로 불려왔다. 그중에서 19c 후반까지 독도 이름이 우산도인 의미는 우산국의 영토 즉 울릉도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2)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 '서계잡록' ;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이거나 울릉도와 인접한 섬인 죽도·관음도라고 주장했던 일본 측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죽도와 관음도는 날씨가 흐리거나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섬들이다.
3️⃣. 프랑스인 당빌의 1737년 <조선왕국전도>에서 독도(우산도)가 조선 왕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4️⃣. 일본의 허구적 주장(1) ; 일본은 17c부터 독도를 지배했다고 주장 ; 제시하는 근거는 돗토리현 요나고 주민에게 발급한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 도해면허(渡海免許), 그러나 ‘도해면허’란 외국 나갈 때 가져가는 문서로, 도리어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입증해 주는 문서일 뿐이다.
5️⃣. 일본인이 스스로 ‘독도=조선 땅’으로 확인한 서적과 지도들
1)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 독도가 최초로 나오기 시작한 1667년의 일본관찬고문헌이다. 울릉도(당시 일본 호칭 竹島)와 독도(당시 일본 호칭 松島)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오키시마(은기도 ;隱岐島)를 한계(限界)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 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에 편찬한 삼국접양지도는 나라별로 색깔을 달리하였다.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녹색으로 표시했는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조선 색깔인 황색으로 정확하게 칠했을 뿐 아니라 그 옆에 조선의 것(朝鮮ノ持二)이라고 써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료하게 표시하였다.
6️⃣. 일본 정부는 17세기 말 울릉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하였다.
1) 왜구의 피해 → 조선 태종 공도정책(空島政策) → 일본 죽도 송도 도해면허 발급 → 안용복(安龍福)의 노력(1693년 숙종 19년, 1696년 숙종 22년 2차례 도일, 호키주(伯耆州) 태수 등과 만나서 담판함) → 1699년 도쿠가와 막부 최고책임자인 관백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오고, 죽도, 송도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고, 일본어민에게 출어금지령.
[안용복 장군 도일 활동코스]
* 1차(1693) ; 부산-울릉도-오키시마-요나코-돗토리-나카사끼-쓰시마-부산
* 2차(1696) ; 부산,울산-울릉도-독도-오키시마-돗토리-양양 귀환
안용복 장군 / 이은상(노산)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땅이라 돌보지 않을 적에
적굴속 넘나들면서 저님 혼자 애섰던가
상이야 못 줄망정 형벌귀양 어인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이제와 울릉군 봉하나니 웃고 받으소서.
7️⃣. 순시(巡視) ‘수토(授討)제도 ; 1697년(숙종 23년)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의 건의 채택, 울릉도에 대한 '쇄출․공도정책’은 그대로 지속하되, 3년 간격으로 순시선단을 편성, 울릉도 일대의 영토를 감독 관리하였다.
8️⃣.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태정관 문서 ; 울릉도 독도 조선 영토 인정.
1) 明治정부 태정관(총리대신), 14항목 조선정탐 지령, 14항목 중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조사하라는 항목이 있었다.
- 외무성 관리 ‘조선국교제시말 내탐보고서’를 통해 태정관은 ‘울릉도 독도’ 의 한국영토 인식을 가짐.
2) 1876년 내무성 지도 작성 작업 지시 → 시마네현은 울릉도 독도의 포함여부를 내무성에 질문 → 내무성은 태정관에게 질문→ 1877년 태정관은 ‘조선영토임을 심득(心得)하라’ 훈령, 내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서 빼라’고 지시함.
9️⃣. 대한제국은 지도에 분명히 함.
1) 일본인 울릉도에 불법 상륙, 벌목하고, 이주시도 → 조선은 1882년 공도정책 폐기, 이주 정책 실시
2) 1898년 대한여지도(大韓與地圖), 1899년 대한전도(大韓全圖)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1️⃣0️⃣. 대한제국 영토로 정식 공포
대한제국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로 서양국제법 체계를 갖춰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정식으로 공포. 종래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도군수를 임명하여 울도군이 관리하는 구역은 울릉도 죽서도(죽도)와 석도(독도)로 하였다. 이 관제 개정을 중앙 관보에 게재.
1️⃣1️⃣. 독도(獨島)의 명칭
1) 우산도→ 바위섬, 석도, 돌섬 → 돌의 전라도 방언이 ‘독’이므로, 독섬으로 → 독도
- 독도라는 명칭으로 처음 쓰인 것은 1906년(광무 10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울릉군수 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라는 기록과 한말 지사 황현의《매천야록》에서였다.
2) 서양인들은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호를 따서 리앙쿠르 바위섬(Liancourt Rocks)이라고 호칭하였다.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는 한국의 독도 소유권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일본이 집중 로비하여 국제사회에 적극 퍼뜨리는 지명이다.
1️⃣2️⃣. 일본의 허구적 주장(2) ; 1905년에 무주(無主)?의 독도를 편입
1) 일본은 러일전쟁의 작전상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나카이가 대한제국에 어업권 신청한 것을 계기로 일본내각회의(1905.1.28)에서 독도 편입 결정 → 뜻뜻하게 중앙관보에 싣지 못하고 시마네(島根)현의 현보(縣報)에 몰래 고시함. → 1906. 3월 강원도 관찰사 보고받고, 참정대신이 규탄 항의, 4년 후 1910년 8월 29일 망국(亡國).
1️⃣3️⃣. 일본의 허구적 주장(3) ; SCAPIN은 무시한 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영토로 인정 주장.
1) 연합군은 SCAPIN 제677호와 제1033호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임을 확인, 아직도 국제법적 효력을 가짐.
-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677호 ; 1946.1 한반도 주변의 제주도, 울릉도, 독도 등을 일본은 한국에 반환하라는 명령.
- SCAPIN 제1033호 ; 1946.6 독도와 그 12해리 수역에 일본 어부 접근 금지령.
2) 샌프란시스코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 언급 누락
- 대일강화조약 제1~5차 미국 초안 : ‘독도 한국 땅’ → 제6차 초안 ‘일본 땅’ (아내가 일본인인 친일인사인 주일 미국정치고문 윌리엄 시볼트를 통해 일본이 로비한 결과) → 타연합국 반발, 7~9차 초안 및 대일강화조약에서는 독도 언급 누락.
-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는 언급하였으나 독도의 명칭은 누락되었으므로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했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러나 대일본 강화조약에서 언급이 없었지만, 연합국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인정한 문구가 없었으며, 이미 SCAPIN 제677호와 1033호가 국제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4️⃣. 일본의 허구적 주장(4) ; 일본은 유엔군 KADIZ는 무시하며, 한국전쟁 중 ‘미 공군이 독도를 폭격훈련구역으로 한 것은 미일행정협정에 의거한 것”이라며, 일본영토 주장.
1) 한국전쟁 중 유엔군 KADIZ(한국방공식별구역)안에 독도를 포함시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판정하여 방어, 유엔군은 KADIZ를 통해 독도를 한국 영토로 확실히 함.
2) ‘미일합동위원회에 의해 독도가 미 공군 연습기지로 선정’ 소문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항의하자 미국 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되었다고 회답하였다.(1953.2)
1️⃣5️⃣. 국제사법재판소 관련 문제
1) 평화선 ;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인접 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 평화선, 이승안라인)을 선포.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을 긋고 그곳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었는데, 평화선은 독도를 확실한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영토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 주권 국가의 정당한 권리 행사임은 당연한 것이었다.
2) 일본은 1954년부터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고 주장한 것은 한국 고유영토에 대한 침략이다.
- 근거 ; 다음과 같은 사항으로 이미 판정받은 한국 영토를 또 판정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 독도 영유권 관련 모든 역사적 자료가 ‘한국령’, 일본은 전무하다는 사실.
• 연합군최고사령부 지령인 SCAPIN 제677호(1946)과 제1033호
•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1950년)
• 유엔공군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으로 지정.
1️⃣6️⃣. 한일협정 ; 2005년 8월 26일. 문서가 공개, 구구한 억측들이 명쾌하게 밝혀졌다.
1) 한일회담은 13년 8개월이나 끌었다. ; (1951년 10월 예비회담 시작~ 1965년 6월 22일 최종 조인)
-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와 1953년에는 일본 대표 구보타(久保田貫一郞)망언(“일본의 36년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으로 고비를 맞고 중단됨.
2) 1964년 한일회담 추진, 대규모 반대 시위(6·3사태)가 발생.
-1962년 김종필(金鍾泌 ;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간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기초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민간차관 1억 달러(뒤에 3억으로 증가)’에 최종 합의, 전체 8억 달러. 이중 무상자금 3억 달러의 대부분은 일제 피해 보상이 아니라 포스코와 고속도로 건설 등에 썼다고 한다.
-김종필 씨는 ‘독도를 폭파해 버리자’ 라는 발언 한 것으로 지탄을 받아왔으나, 실제 그 말을 한 사람은 김종필이 아니라 1962년 일본 대표 이세키 유지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독도문제는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동안 독도를 양보하여 청구자금을 얻어왔다는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 포스코 명예회장인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는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시간을 더 많이 끌었다면 돈을 더 받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의 효과’라는 게 있는 것이니 견줘봐야 한다, (포항)제철소도 짓고, 제1의 조선소도 생기고 요새 자동차도 잘 만들어 팔 수 있는 여건을 만들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1️⃣7️⃣. 한일 신어업협정에서 독도 해역은 공동수역이 되고 말았다.
1) 1999년 1월22일(김대중 정권) 한일 신어업협정 체결. 우리 영역의 독도를 공동수역(중간수역)으로 밀어낸 점이 안타깝다. 일본정부는 대한민국이 1997년 12월3일 IMF의 관리체제에 들어가 경제가 취약해지자 이것을 기회로 1998년 1월 일방적으로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해버렸다.
2) 한일 신어업협정에서는 울릉도 기점 35해리와 오키도 기점 35해리까지를 한․일 양국의 EEZ로 합의.
- 1994년 유엔 '신해양법'으로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전관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약칭 EEZ)을 영해와 별반 다름없이 설정할 수 있음
- 한국정부는 한국 EEZ의 기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취하는 것을 양보했다. 그래서 독도는 중간수역이 되었다.
- 중간수역의 해석 차이 ; 한국은 ‘공해(公海)적 성격', 일본 측은 '잠정조치수역, 즉 한․일 공동관리 성격'의 수역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잠정조치수역'이란 국제법상으로 그 수역 안에 영토분쟁이 있어서 EEZ 획정이 어려울 때 잠정적으로 설정하는 수역을 의미한다.
# 한일 신어업협정은 대한민국 최대의 외교실책!
2008년 7월 미국정부지명위원회(BGN)가 최근 웹사이트에서 독도의 한국령 표기를 ‘주권 미지정 지역’(Undesignated Sovereignty)으로 변경하였다. 한국에 귀속된 섬으로 표기해온 BGN이 돌연 독도에 대한 영토주권 표시를 '주권 미지정'(Undesignated Sovereignty)으로 변경하여 독도를 '주인 없는 섬'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근거는 김대중 선생이 박정희 정권 때 자신이 일본에 진 신세를 갚으려고 그랬는지, IMF 관리체제하에서 일본의 경제협력을 기대하여서였는지, 김대중 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에 반대하는 거센 여론을 무시하고 여당 주도하에 날치기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던 때문이다. 제 나라 땅이면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독도 해역의 이익을 일본과 함깨 나누어 가지자는 의미가 함축된 중간수역으로 합의한 것을 보고 미국도 점차로 독도의 영유권에는 문제가 있는 지역이라는 인식을 하고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독도 해역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확실한 보장도 없는 어떤 기대를 하며 팔아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대중 정부가 독도 중간수역으로 양보한 것은 대한민국 외교 최대의 실책이다. 이보다 더 큰 어처구니없는 외교가 어디있겠는가.
1️⃣8️⃣. 일본은 왜 독도문제를 집요하게 일으키는가?
1) 섬나라인 일본은 해양 영토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러시아와 쿠릴열도(일본명·북방영토),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한국과 독도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독도문제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사안을 묶어서 접근하고 있다.
2)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기 위한 목적도 있으나,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기 위해서는 분쟁 양당사국이 모두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세가 급변하는 특정 시점에 독도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려는 재료를 꾸준히 축적해 가는 과정이다.
3) 일본 정치권 내에서 우파 진영의 영향력 증대, 우경화 경향 때문이다. 체제의 상징인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교전권을 갖는 국가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가주의 교육의 고양 등으로 나타난다.
4) 독도 바다 밑의 천연가스 하이드레이트 매장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장기적 포석을 하고 있다. ●
▣‘독도, 일본땅 아니다’라는 1951년 일본 법령,재일교포가 찾아냈다
[2009.01.03 이후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도에 의거함]
울릉도·독도·제주도는 일본의 부속 도서가 아니라고 명기한 일본 법령이 최근 발견됐다. 1951년 공포된 ‘총리부령 24호’와 ‘대장성령 4호’이다. 일본 지바현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3세 이양수(58)씨가 이 법령을 찾아냈다. 이양수씨는 ‘일한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사무국 차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정보공개 소송 끝에 일본 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문서 6만여 페이지 속에서 독도의 영유권과 관련한 이 법령의 존재를 찾아냈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문서의 25% 정도는 먹칠이 돼 있어서 주요 사항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나 싶어서 실제 법령 내용을 찾아봤더니 뜻밖에도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는 독도와 관련된 이 법령을 완전히 숨기려고 한 것이다.
◇ 이 법령의 의의는?
이 법령들의 존재는 1877년 ‘죽도(=당시의 울릉도) 외 1개 섬은 일본과 관계없다’는 결정을 내린 일본 ‘태정관(太政官·지금의 총리실) 문서’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에 알려진 법령들에선 일본 정부가 ‘독도(竹の島)’를 특정해서 명백하게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 땅으로 편입한 지방 고시를 갖고 영유권을 주장해 왔는데, 1951년의 법령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독도가 한국령임을 시인했다는 의미이다.
◇ 일본 정부의 구차한 ‘독도 변명’
일본 외무성은 “문제의 법령은 일본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범위를 표시한 것일 뿐 일본의 영토 범위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두 법령은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최고사령관사령부(GHQ)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며, 행정권의 범위와 영토의 범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방어 논리다. 그러나 이는 구차하고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애초 독도 영유권 시비의 연원(淵源) 자체가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를 총칼로 강점해 식민지화한 데 있었다. ●
3) 수영성 남문 유적
수영성 남문유적 / 1692년 숙종 18년 축성
수영사적공원 시설
수영사적공원 시설
4) 수영 야외공연장
야외공연장. 지붕이 있어서 우천에도 사용가능
야외공연장. 매달 첫 토요일 오후에 여기서 민속음악과 수영야류 공연이 있다
야외공연장 주위에 가지가 멋진 소나무
5) 500년 수령 푸조나무
* 푸조나무는 안용복 사당(좌측) 옆에 있다. 수령 5백년. * 높이 18m, *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8.5m, * 퍼진 가지 동서의 들레는 23m
봄이 왔어요
납매 라는 아주 작은 이른 봄꽃 , 안용복장군 동상 아랫쪽 길가 언덕에 있다.
매화. 3월 초순이 핀다.
산수유꽃, 다른 곳보다 일찍 핀다, 3월 중순경
산수유꽃(추은수)
산수유꽃(추은수)
산수유
민들레도 일찍 피었고,
황금 남천 열매. 남천 열매는 대개 붉은데 특이하게 항금색도 있다.
6)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박인로, 가사문학 <선상탄>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역을 방어하였던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의 군선이 정박한 선소이다.
경상좌수영 예하에는 2개의 첨절제사영(첨사영)과 1개의 동첨절제사영 및 4개의 만호영이 있었으면 거북선을 비롯한 군선 50 여척과 2만여 명의 상비병력을 거느린 거진으로 경북 영해에서 낙동강 까지의 해상을 방수한 본영이다.
이 선소에는 전선 3척, 병선 5척, 귀선 1척과 사후선 12척이 주둔하였으며 이 주위에는 적을 탐지하는 점이대(覘夷臺)와 망경대(望景臺)가 위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선조들의 호국얼이 깃든 현장을 기리고자 통주사로서 이곳을 지킨 노계 박인로의 <선상탄, 船上嘆> 중 몇 귀절을 새겨 기념한다.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박인로의 가사문학 <선상탄>이 왜 여기 있는가?
* 박인로는 수영(경상좌수영)의 수군으로 임진왜란때 종군하였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가사이다. 전선에서 사색 창작한 가사문학으로 창작지가 부산 수영의 진중문학인 것이다.
* 이 비석을 세운이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김석희 교수이며, 글씨는 부산대학교 중국어 교수였던 한형석 부산출신 독립운동가 이다. 이 비석은 수영사적공원에서 수영강변 부근으로 나가다 보면 있는 현대아파트 앞에 있다.
박인로는 무인 출신이지만 정극인, 송순, 정철, 윤선도 등과 함께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담양 가사문학관에 박인로의 조홍감시가 눈에 확 띄었다.
[참고 회면] 이 <조홍시가>는 작자는 노계 박인로이며, 담양의 가사문학관에 걸린 것이고, 글씨는 모산 심재완 님이 쓰신 것이다.
박인로(임진왜란시 의병 참가, 군관 출신)의 조홍시가
* 영천 출신, 본관 밀양, 호는 노계 蘆溪. 가사 9편, 시조 68수 지음.
조홍시가는, 오나라 육적이 6세 때 원술 집에서 귤을 얻어 먹고 3개를 품속에 감췄다가 인사를 하느라고 흘려버렸는데, 어머니 갖다드릴려고 했다는 고사를 활용하여, 소반에 올라온 일찍 익은 감홍시를 보고, 유자가 아니지만 품어서 어버이를 드리고 싶은데, 계시지 않으니 그것이 서럽다는 내용.
* 육적의 회귤(懷橘)은 효성의 상징.
가사 선상탄의 내용 구성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삼황오제시대 훤원씨를 원망한다.처음 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가 없으면 무슨 수로 왜적이 쳐들어 와서 괴롭히겠는가?
다음에는 진시황제가 불로초 구하러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낸 것을 원망한다.서불이란 자는 못구했으면 돌아갈것이지 일본에 눌러 앉아 왜구들의 씨가 됐다는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도 산 중달을 쫓아냈고, 다리잘려 앉은뱅이 된 손빈도 방연을 잡았는데, 나는 몸이 성하다. 적들아 섬멸하기 전에 항복하라. 왜구들을 물리쳐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7) 수영강변~수변공원~광안리 해변산책길에서
수영강 위로 걸쳐진 수영교 다리 난간의 돌고래상
수영강. 건너쪽은 센텀시티와 나루공원
수영강
센텀시티와 광안대교 2층교량
센텀시티와 광안대교 2층교량
광안리 갈매기
제2부, 벗들과 함께
2022. 3.12. 수영사적공원 역사탐방 학습,트레킹
[오늘의 코스] ; 도시철도 3호선 망미역 2번출구 -> 동원로얄듀크 ->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안용복 사당 수강사 -> 팔도시장 부근 점심 -> 경상좌우영 선소유허비와 박인로 선상탄 가사문학에 대하여 -> 수영강변로산책로~수변공원~광안리해수욕장 //
수영사적공원에서 멋진 하루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70대 노인이 되었어도 시험친다고 하니 겁을 낸다.??
25의용단에서
25의용단에서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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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25의용단에서 열정의 하루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안용복 장군 사당은 수강사라고 한다. 영토를 수호한 분의 사당이라는 의미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이 세분 탐구심이 대단하시다.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이 세분은 앉아서 휴식 ??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사당 수강사에서
500년 수령 푸조나무
500년 수령 푸조나무
500년 수령 푸조나무
500년 수령 푸조나무
500년 수령 푸조나무
수영사적원~수영강~수변공원~ 광안리 해변 걷기로 마무리
벗 상재께서 어려운 길거리 할머니 리어카도 밀어주고, 위로의 말과 함께 성금도 전달하는 모습이 좋았다.
봄비 맞는 살구꽃(2022.0318), 추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