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동문선 제7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기겸선(寄兼善)
김종직(金宗直)
겸선이 복을 입고 함녕의 호계 동쪽 언덕에 있었다. 내가 만일 부름을 받고 부임하게 되면, 길을 굽혀서라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병으로 벼슬을 하직했으니 처음 계획이 어긋났다. 그런데 생각하면 내 병은 아직 낫지 않았으나 겸선의 복은 끝났으니, 멀지 않아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비록 병은 났지만 바다에 뜰 생각은 원래 정해진 것이라, 아마 10년 동안은 쉬이 만나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시를 지어 보내는 것이다.
지금의 큰 솜씨로 반과 양같은 이를 얻었으니 / 當今大手得班楊
나는 욕되게 빈교로써 얼마나 꽃다움을 입었던고 / 我忝貧交幾沐芳
두 땅의 소려(선비의 집)에서 같이 경경하였고 / 兩地素廬同耿耿
10년의 청쇄(홍문관)에서 각기 망망하였다 / 十年靑瑣各茫茫
병으로 서쪽을 웃기 어려워 풍의가 막히었고 / 病難西咲風儀阻
늙어서 동쪽으로 뜨려 하매 계획이 길다 / 老欲東浮畫計長
황악과 호계는 겨우 백 리이거니 / 黃嶽虎溪才百里
고달피 경렴당에 누워 있는 것 견디지 못하겠네 / 不堪羸臥景濂堂
[주-D001] 반(班)과 양(揚) : 반(班)은 한나라의 반고(班固)라는 사람이요, 양(揚)은 양웅(揚雄)이란 사람이니, 모두가 큰 문장들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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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 김산군(金山郡)
『신증』 【누정】 서하루(棲霞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김세균(金世鈞)이 세우고, 강혼(姜渾)이 이름을 지었다. 경렴당(景濂堂) 김종직이 옛날에 살던 집으로, 군의 서쪽 백천리(百川里)에 있다. 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고 이름을 경렴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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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鶴山樵談)
우리나라의 시학(詩學)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위주로 하여 비록 경렴(景濂) 같은 대유(大儒)로도 역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나머지 세상에 이름 날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찌꺼기를 빨아 비위를 썩게 하는 촌스러운 말을 만들 따름이니, 읽으면 염증이 날 정도이다. 성당(盛唐)의 소리는 다 없어져 들을 수가 없다. 매월당(梅月堂)의 시는 맑고 호매(豪邁)하고 세속을 초탈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스스로 다듬고 꾸미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더러는 마음을 쓰지 않고 갑자기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간혹 가다가 박잡한 것도 섞여 결국 정시(正始)의 시체는 아니다.
나의 중형은 논평하기를, 국초 이래 문은 경렴당(景濂堂)을 제일로 치고, 지정(止亭)을 다음으로 치며, 시는 충암(冲庵)의 높음과 용재(容齋)의 난숙함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충암은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용재는 너무 진부하니, 시 또한 경렴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정 남곤(南袞)의 자는 사화(士華), 의령인(宜寧人)이며 벼슬은 영의정,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기묘사화 때 간인(奸人)의 괴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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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잡록 2 본조(本朝) / 김종직(金宗直)
○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숙자(淑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前後)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
○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총각 때에 벌써 시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매일 수천 마디를 기억하였고, 나이가 약관(弱冠)도 못 되어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다. 〈지서(志序)〉
○ 친상을 당하여 복상을 마치자 금산(金山) 황악(黃岳) 밑에 서당을 짓고 그 옆에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 놓고 서재의 이름을 경렴당(景濂堂)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무극옹(無極翁 주염계)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그 안에서 시만 읊고 세상일에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비서(碑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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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문집 부록 / 연보(年譜) / 점필재 선생 연보(佔畢齋先生年譜) 간옹(艮翁) 이공(李公)이 박재(璞齋)가 편집한 것을 따라 다시 교정(校正)을 가하였다.
성화 15년 기해(1478)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0년. 선생 49세.
10월에 모부인이 병환으로 누워 치유가 되지 않자, 중씨(仲氏) 과당공(苽堂公)은 청송(靑松)으로부터 와서 모시었고, 조카인 치(緻) 또한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이 때 계매(季妹)는 밀양(密陽)에 있었는데, 평소에 모부인이 그를 가장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였으므로, 선생은 매씨가 만일 와서 모부인을 뵙는다면 혹 기쁨으로 인하여 병환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 사람을 보내어 그를 맞아옴으로써 5인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모부인이 마침내 12월 21일에 공아(公衙)의 중당(中堂)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0세였다. 이 달 28일에 선생이 널[柩]을 받들고 발인(發引)하여 길에 올랐다.
성화 16년 경자(1480)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1년. 선생 50세.
정월 3일에 널을 운반하여 지동(池洞)의 분저곡(粉底谷)에 이르러 초빈하였다가, 3월에 선공 및 민 부인(閔夫人) 두 묘의 중간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묘 밑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처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에 따라 하였는데,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치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이준록(彝尊錄)》 가운데 보도(譜圖), 기년(紀年), 사우 성씨(師友姓氏) 등의 기록은 무인년(1458, 세조4)에 이미 찬술(撰述)한 것인데, 이 해에 다시 더 고정(考定)하였고, 사업(事業) 및 제의(祭儀)에 대해서는 모두 무인년에 찬술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
성화 17년 신축(1481)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2년. 선생 51세.
양 수재 준(楊秀才浚)이 그의 아우 침(沈)과 함께 홍 공생 유손(洪貢生裕孫)을 따라 서울로부터 도보(徒步)로 천리 길을 걸어와서 배웠다. 홍유손은 남양인(南陽人)이다.
성화 18년 임인(1482)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3년. 선생 52세.
이 해 2월에 복을 마쳤다. 이 때 안시숙(安時叔 시숙은 안우(安遇)의 자)이 종학(從學)한 지 2년이 되었는데, 대상(大祥) 뒤에 초계(草溪)로 돌아갔다. 전 집의(前執義) 김 선생 맹(金先生孟)이 그의 아들 기손(驥孫), 일손(馹孫)을 보내어 수학(受學)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그들에게 한유(韓愈)의 문장(文章)을 가르쳐 주어,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성취시켰다. 그리고 절효(節孝) 김 선생 극일(金先生克一)의 효각명(孝閣銘)을 찬하였다.
3월 15일에는 화물선(貨物船)에다 가속(家屬)들을 싣고 금릉(金陵)의 옛 집으로 돌아갔는데, 통지(通之) 형이 중보(仲甫) 아우와 함께 수안역(水安驛)에서 선생을 전송하였다. 이 때 중보의 시에
평생의 부탁에 대해서는 황간이 아니요 / 平生付托非黃榦
만년의 슬픈 읊조림은 정수와 흡사하네 / 晩歲悲吟似靜修
라고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감히 두 분을 바랄 바는 아니나, 평생에 한되는 것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니, 비록 나의 실록(實錄)이라 하더라도 되겠다.”
하고, 거기에 감동하여 마침내 화답하였다.
손 생원 효조(孫生員孝祖)가 선생에게서 《춘추(春秋)》를 배운 지가 모두 석 달이 되었는데, 이 때 영산(靈山)의 일문역(一門驛)까지 선생을 전송하였다.
선생이 금산(金山)에 이르러서는 서당(書堂)을 지은 다음 그 옆에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는 경렴당(景濂堂)이라 편액을 걸었으니, 그것은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한 때문이었다.선생은 날마다 그 안에서 시나 읊조리면서 세상일에는 뜻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