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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의 역사와 그 의의
1. 필자의 교회학교 역사
필자의 교회학교 역사는 기독교 미션 스쿨에 입학하던 중학교 시절부터다. 학교에서 교회에 다녀 온 증거로 도장을 받아 오라고 했기에 할 수 없이 예배당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다. 교회는 집에서 약 20-30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했는데 야산 기슭에 지어진 아담한 시골교회였다. 처음으로 들어간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필자를 맞아 준 사람은 예쁘장하고 키가 큰 늘씬한 누나였는데 참으로 밝게 웃으면서 ‘어서 오라’고 환영해 주었다. 이제껏 그렇게 친절한 마중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었기에 마치 귀빈이 된 듯한 느낌이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필자의 초등학교 동창의 누나였는데 교회에 갈 때마다 항상 웃으면서 마중해 주었다. 이처럼 필자의 교회학교 첫인상은 그 누나의 밝은 미소였다. 그런데 필자가 교회에 열심을 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동네에 같은 학년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의 우상이었던 그녀가 그 교회 교회학교 학생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말을 거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발이 끌려서 교회에 다니다 보니 소속된 교회학교 학생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 나를 바라보니 필자는 이미 그 교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낙숫물에 땅 파이고,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학생회에 소속되어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꾸준하게 성경 말씀으로 교육받은 힘으로 나의 신앙이 자란 것이다. 또한 미션 스쿨 중학교의 정규 과목이었던 ‘성경’ 시간에 들은 신구약의 위인들 이야기는 어린 내 마음에 행복한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청년이 되자 교회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맡은 반은 5·6학년 어린이들이었는데 보름달만큼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던 가슴 떨리던 첫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아이들도 50대 중반의 초로가 되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몇몇 학생들이 있다. 5학년과 3학년 된 자매인데 집에서 교회까지 약 한 시간을 걸어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교회에 와서 교회학교의 성경 교육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수하였다. 지금은 오래된 이야기이고 고향 떠난 지 세월이 꽤 지난 지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서든지 착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을 것 같다. 또 있다. 정말 그 이상은 더 개구쟁이일 수가 없는 3남매였는데 그 아이들을 전담할 교사가 따로 정해질 만큼 정말 엄청난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필자가 맡았는데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십 년 지난 어느 날 모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3남매 모두 교회의 집사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얼마나 웃음이 나고 또한 행복하던지 ······.
이처럼 필자를 위시하여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신앙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교회학교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이 훌륭한 신앙 교육기관인 교회학교가 교회가 시작된 2천여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시행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기록을 살피다 보니 현대식의 체계 잡힌 교회학교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2세기 반 전인 1780년부터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2천 년이라는 길고 긴 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늦은 시기다.
2. 교회학교의 성서적 모형
오늘날과 같은 교회학교의 형태는 18세기에 이루어졌으나 이와 유사한 형태의 모체는 성서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신 4:10),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신 11:19)라고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자녀교육 강조는 고대 사회에서 시행해야 할 당대의 교회학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여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는데 약 350여 년간 이어진 사사기의 신앙 암흑기가 바로 그 사례이다. 사사기 2장 10-11절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했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역사를 다음 세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자멸하는 불행을 자초한 가장 큰 이유는 신앙교육의 부재였다.
포로기 이후에야 영적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정 이외의 장소에서 교육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회당이다. ‘웨슬리 윌리스(W. R. Wills)’는 「교회학교 200년사」에서 “회당이 예배와 교육을 위한 기본적인 장소가 될 때까지 그 회당들의 중요성은 계속 증대되었다. ······ 그리스도 탄생 수백 년 전에 5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 조직이 설립되었다. 한 집단 속에 열 가정이 되면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그 지도자들이 학교를 하나 세우게 되었으며, 학생이 25명 이상이 넘지 못하게 하였다.”(18쪽)고 말했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교육의 중요성은 반감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의하여 교육은 선교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었다.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신들의 온 정력과 시간을 쏟아부었다.(행 2:42) 윌리스는 “이 학교들은 성경적 진리들을 강조하였고, 또한 진리들을 실생활에 적용함으로써 증거하는 방법 면에서 현대의 교회학교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19쪽)고 말한다. 교육선교는 바울의 전도 방법에서도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랬고(행 15:35), 고린도 교회에서 그랬으며(행 18:11), 에베소 교회에서 그랬다.(행 19:9-10, 20:20)
3. 중세 이후 교회학교의 역사적 토대
‘웨슬리 윌리스(W. R. Wills)’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형태에 대하여 조각들을 제시하면서 퍼즐을 맞추어 놓았다. 역사가들은 “초기 4세기 동안의 기독교의 놀랄 만한 성장은 스스로 교회학교의 선구자들에 의하여 제공된 효과적인 교육에 기인하였다고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반면 “로마의 황제 줄리안(Julian)은 교회의 교육 조직을 통제하였는데, 만일 어린이들을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의 확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기술한다. 교회학교 교육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역설로 보여주는 증거다.
종교개혁 이후에 이르러서도 교회학교의 중요성은 반복하여 강조되었다. 루터는 “기독교학교는 교회를 위하여 설립되어야 하고 또 유지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학교를 통해 교회를 유지하신다”고 말했다. 멜랑히톤은 “일주일의 하루를 종교교육을 위한 날로 정하자”고 제의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도 개혁자들의 성공 이면에 학교가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회 학교(Jesusit School)를 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날의 교회학교 시스템이 시작되기 약 50년 전에 유사한 형태가 시도되었는데 모라비안의 지도자 진젠도르프 백작에 의해 세워진 ‘교육 써클’이다. 진젠도르프는 소그룹이나 공동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그룹들 안에서 어린이 교육을 강력하게 후원하였다. 동이 트면 해가 뜨는 법, 이러한 배경에서 드디어 현대식의 교회학교가 등장하게 된다.
4. 체계화된 교회학교의 태동과 사회 배경
1780년에 영국의 글라스터에 사는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1735-1811)’는 그 지역의 빈민가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는데 교회학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때를 현대적 교회학교 형태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쉽게도 ‘부익부빈익빈’으로 불리는 빈부격차는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어린 자녀들까지도 학교 대신 공장이나 굴뚝 청소에 투입해야 했으나 그들이 받는 급여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로버트 레이크스는 원래 종교지도자나 교육자가 아니라 신문발행인 겸 기자였다. 그러했기에 그가 생각한 교회학교는 종교와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학교라기보다는 가난하고 굶주린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먹이고, 글을 가르쳐 읽고 쓰게 하는 오늘날의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 같은 형태였다. 그는 영국 사회의 악, 범죄, 그리고 부도덕, 글라스터 빈민 지역의 가난 등, 이 모든 것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가 시작한 교회학교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날인 일요일에 빈민가의 난폭한 어린이들을 오게 하여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면서 성경을 함께 가르치는 미션 스쿨 형태였다. 그에게서 성경 교육은 도덕 교육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학교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드디어 1803년에는 ‘런던 교회학교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이러한 교회학교와 연합체가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캐나다 등 세계로 확산되어 각지에서 결성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교파 분열이 극대화한 시대였음에도 ‘교회학교 연합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여서 교재를 출판하고, 교사들을 교육하고, 교육시스템을 개발하였다는 점이다.
이즈음 교회학교를 적극 지지하여 교회학교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인물 중에는 영국에서는 존 뉴톤, 찬송가 작가인 윌리엄 쿠퍼, 신학자 토마스 스코트, 요한 웨슬리 등이 있고, 미국에서는 유명한 부흥강사 무디가 있다, 특히 존 뉴톤은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하여 복음전도자가 되어 유명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작사한 바로 그 사람이다.
5. 우리나라의 교회학교 역사
약 1세기 전 우리나라의 교회학교 교육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가 남아있다.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한국 선교 초기에는 ‘교회학교’라는 개념이 사회에 꽤 시사성이 있는 주제였던 듯하다. 아마도 의식주 해결이 급선무였던 시기에 ‘학교’라는 용어를 사용했기에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일반 계층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3년에 발간된 종교시보(宗敎時報) 제2호에는 종교교육부 협동총무 ‘허대전’이 쓴 “교회학교의 의의”라는 글이 실렸는데 그 일부를 보면 “교회학교는 무엇이냐? 교회학교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를 저희들의 구주로 알게하며 또 그 학생들을 그리스도의 성격으로 훈련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 세기가 지났어도 지금의 교회학교 개념과 목적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종교교육부’는 장로교 총회에서 교회교육을 총괄하던 기구였는데, 1966년에 ‘교회교육부’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의 교회학교는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로버트 레이크스가 교회학교를 세운 지 약 1세기가 지난 뒤였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 직전으로 조선 말기의 혼란기에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선교의 측면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일제에 의해 조선이 국권을 침탈당한 강점기에 교회학교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교회학교는 실의에 빠진 조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선교의 도구로 본격 활용되었다. 김폴린은 「한국 기독교 교육의 역사」에서 “한국교회의 교회학교의 시작은 1888년 1월15일에 스크랜튼의 인도로 이화학당에서 여성교회학교가 시작되었고, 남성교회학교는 1888년 3월 1일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인도로 배재학당 학생 중심의 영어 교회학교가 시작되었다.”(74쪽)고 말했다. 다른 견해도 있다. 민경배는 「한국기독교회사」 에서 교회학교와 교회학교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최초의 교회학교는 1890년에 조직된 것 같다. 그러나 이 당시의 교회학교는 장년들까지 포함한 일종의 성경공부반과 같은 것이었다. 1907년에 와서 장감연합공의회는 세계 교회학교 연맹과 교섭해서 한국에서 교회학교 일을 전담할 사람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다. 이것이 결실하여 1912년 2월 서울에서 선교회와 한국교회 및 예수교서회 대표자들 13명이 모여서 한국 교회학교 실행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아울러 만국 통일 공과를 편찬 발행하였다.” 한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기독교의 역사I」 을 보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국내에 입국하여 처음 시도한 선교방법은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였다.(196쪽) 실제로 그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공식 입장은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라 ‘교사’였다. 그들은 정식으로 교육기관 설립허가를 받기 이전부터 ‘제중원’이나 ‘정동진료소’의 교사로 있을 때 만난 이들에게 개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영어강습으로 시작하여 성서와 신앙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 당시의 교육선교 개념이 교회의 교회학교는 아니었으나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목표와 방법은 거의 비슷하였다. 물론 조선 여성들을 찾아 전도하고 가르친 스크랜튼을 중심으로 시작한 이화학당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의 조선에는 현대식 공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학당과 교회의 교회학교는 교육목표가 거의 비슷하였다.
6. 교회학교의 의의
왜 교회학교가 필요하고 존재해야 하는가?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스펜서는 미국의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나이를 조사했는데, 1,000명의 기독교인 중 548명은 20세 이전에, 337명은 20-30세에, 그리고 50세 이후는 불과 4명뿐이었다. 이 통계를 근거했을 때 참다운 크리스천이 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어릴수록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통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교회학교는 어린이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훌륭한 선교·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신앙교육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교회학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이 글을 쓰려고 교회학교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갑자기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커다란 사건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산주의운동이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기 시작한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인하여 공업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세계 굴지의 강대국가가 된다. 그러나 산업은 발전했으나 잉여가치의 평등하지 못한 분배로 인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단면이 드러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칼 마르크스의 이론으로 시작된 공산주의의 등장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비록 약 200여 년 후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함께 공산주의는 괴멸되고 말았지만 그만큼 당시 영국사회의 하층 계급은 처참할 정도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그즈음에 레이크스가 등장하여 교회학교를 세워 영적 공백상태에 빠진 영국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교회학교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필자는 “돈(공산주의)이냐, 영(靈, 교회학교)이냐?”의 문제 같은, 갈급함의 해결을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교회학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와 그 의미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회학교는 태동부터 사회의 부조리와 소외계층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교회 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꿈을 꾸면서 꾸준하게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
둘째, 교회학교는 신학을 전공한 특수층이 아니라 오히려 소위 평신도들의 주도로 진행된 신앙교육운동이라는 점에서 교회 전체가 유기체로 봉사할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운용구조를 보여준다. 많은 교회가 교역자 중심의 목회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보니 평신도들의 위치와 역할이 애매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교회학교 운동은 전교인이 하나되어 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 활성화에 매우 유익하다.
셋째, 교회학교 운동은 처음부터 비·초교파의 성격을 띄고 다양한 교회공동체가 연합하여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일치를 가르치는 성서의 요구에 부합하며 환원운동의 정신과 실천방법론에서 대단히 유익한 신앙의 실천이다.
넷째, 교회학교는 어린이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세분하여 같은 눈높이에서 소그룹으로 선교하고 교육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효율적이기에 적극 권장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시냇물이 흘러 큰 강을 이루듯이, 어린이 부에서 잘 배워서 청소년 부로 가고, 또 그들이 자라서 청장년 부로 흘러가기에 교회학교가 발전하면 교회도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바람직한 구조다,
다섯째, 교회학교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인 ‘예배, 선교, 교육, 봉사, 교제 그리고 일치’라는 과제를 실천하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온다 해도 교회학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많은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임학균
등대 그리스도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