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말년의 역작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책이다.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과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자로 유명하다.
그는 문학 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신랄하고 정확한 평을 가했으며 그의 유머와 날카로운 현실감각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많은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책에는 이렇게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버나드 쇼의 경험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인 환경을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쇼는 정치인들조차 잘 모르는 정당제도의 기원부터 금융의 미스터리와 토지 문제, 교육과 복지, 과학과 종교, 예술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면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갈망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때로는 짧은 희곡 형식을 빌어, 때로는 본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가히 최고의 극작가답다. 1장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질문부터 44장 ‘에필로그’까지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 보면 은행, 학교, 병원, 민주주의, 자본주의처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뭘 모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기존의 제도나 개념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동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셰익스피어 이래 최고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의 작품은 번역의 어려움 때문에 국내에 잘 소개되지 못했다. 이 책은 역자들이 특유의 만연체와 대구, 방대한 배경지식에서 비롯된 풍부한 사례를 살리기 위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시적 아름다움과 재기 발랄함,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만나볼 수 있다. 버나드 쇼가 일생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읽으면서 현대 사회와 현대인이 직면한 문제를 풀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5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해 1950년 사망하기까지 거의 1세기를 살면서 근현대의 중요한 사건들을 목도한 그는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사상가, 비평가, 연설가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자신을 이상주의자이자 예언가로 간주하며 낡은 사상과 체제를 전복시켜 세계의 발전을 꾀하는 개혁가를 자처한다.
극작을 시작하기 전에 다윈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입센을 자신의 극작의 모델로 간주해 ≪입센주의의 정수(The Quintessence of Ibesenism)≫라는 책을 썼다. 그는 ≪유쾌하지 않은 희곡(Plays Unpleasant)≫이라는 작품집에 수록된 초기 극들 <홀아비들의 집(Widowers' Houses)>, <바람둥이(The Philanderer)>, <워렌 부인의 직업(Mrs. Warren's Profession)>에서는 “잘 짜인 극”이나 멜로드라마에서 잘 사용하는 기존의 극적 기법을 사용해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도록 유도하며 사회, 경제, 정치적 체제에 대해 공격했다. 모든 위대한 연극은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믿은 쇼는 소위 “토론의 극”, “이념의 극”의 전통을 확립하고 그 후에도 무대를 하나의 설교단으로 생각해 사회 개혁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초기극들이 받은 강력한 반발과 함께 이러한 교훈주의 극의 한계를 자각한 그는 다음에 발표한 ‘유쾌한 희곡’이라고 불리는 세 작품 <무기와 인간>, <캔디다(Candida)>, <알 수 없어(You Never Can Tell)>에서는 전통적인 희극 기법을 이용해 자신의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라이프 포스” 사상과 “초인”에 대한 개념이 구체적인 연극을 통해 제시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1903년에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둔 <인간과 초인간(Man and Superman)>을 비롯해 <바버라 소령(Major Barbara)>, <피그말리온(Pygmalion)>, <하트브레이크 하우스(Heartbreak House)> 등 그의 주요 작품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으며 그의 극작 경력은 1925년의 노벨상 수상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 후에도 그는 사상가로서, 사회 개혁가로서, 꾸준한 작품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종종 세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희곡 작품은 발표하지 못한 채 19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문학과 연극 분야에서는 적임자지만 수학과 체육, 기계 분야에서는 군중에 속한다. 우리 중 최고라는 사람도 99%는 군중에 속하고 1%만 적임자에 속한다. 결국 군중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나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셈이다.” ---p. 52 “이런 사회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무능력과 실패는 대부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말뚝을 끼우려는 사회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다 보니 나타난 결과다.” ---p.83 “놀라운 점은, 문학작품에 대한 재산권의 적용기간과 상속을 제한한 것처럼 토지와 산업시설에 대한 재산권도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태 입법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작권을 영구히 보호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p.167 “한 번 확립된 도덕은 사람들을 생각없이 조건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p.267 “사람들이 금융과 지대와 보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 세 가지를 국유화하라고 할 것이다.” ---p.304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모르는 용사에게 영웅적 포부, 헌신적 봉사, 불굴의 용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과 같은 자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 ---p.459 드디어 버나드 쇼를 제대로 만나다! 버나드 쇼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말년의 역작, 국내 최초 완역! 우리는 버나드 쇼를 익히 알고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그의 묘비명을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최근 경이적인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어떤 책은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라는 쇼의 명언으로 시작한다.
해박하고 기지가 번뜩이는 ‘말과 글의 달인’ 버나드 쇼는 명언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그 뿐인가? 학창시절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버나드 쇼의 기나긴 영어 문장을 독해하느라 진땀깨나 흘렸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유명한 영국 문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 『피그말리온』을 제외하면, 국내에 온전하게 소개된 버나드 쇼의 작품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이자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눈부시게 활약한 지식인 버나드 쇼의 경험과 철학의 집대성! 『쇼에게 세상을 묻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던 버나드 쇼를 “제대로” 보여주는 최초의 책이다. 역사 속 위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버나드 쇼 역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이뤘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놀라운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쇼를 단순히 극작가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상 그는 극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름난 비평가였고, 역사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한 마디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진정한 예술가였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꼽히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하다. 작가로서 버나드 쇼의 이력에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와 함께 ‘영어권 3대 극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피그말리온』의 원작자로서 오스카상까지 석권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그의 이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소설 『타임머신』으로 유명한 H.G. 웰스, 20세기의 지성이라 불리는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온건 사회주의자 단체인 페이비언협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영국 노동당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네루와 같은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가 캠브리지에서 버나드 쇼의 강의를 듣고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0대에는 약 6년간 런던 시의원으로 활동하며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쇼에게 세상을 묻다』는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버나드 쇼의 경험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다.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인 환경을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버나드 쇼는 “정치란 사회생활의 과학”이지만 사람들은 “정치를 삶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요즘에는 누구나 정치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대부분은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돈키호테가 기사도를 현실과 연결짓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사회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기타 모든 종류의 낭만적 이상주의에 대해 그저 신문에서 주워들은 대로 떠들어대고 때로는 논쟁까지 벌이면서 현실세계와는 조금도 연관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든 여덟의 버나드 쇼는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다. 정치인들조차 잘 모르는 정당제도의 기원부터 금융의 미스터리와 토지 문제, 교육과 복지, 과학과 종교, 예술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면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갈망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때로는 짧은 희곡 형식을 빌어, 때로는 본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가히 최고의 극작가답다. 1장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질문부터 44장 ‘에필로그’까지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 보면, 은행, 학교, 병원, 민주주의, 자본주의처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뭘 모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기존의 제도나 개념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회의 갖은 해악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같이 겪는 일들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버나드 쇼 말대로,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힐링’이 화두인 시대 열심히 일해도 살기 힘든 현실,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번 생은 망쳤다”는 자조섞인 농담도 들려온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살기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투성이고 곳곳에 유리천장이 드리워져 있다면, 맥이 풀리고 눈앞이 캄캄한 게 당연하다.
땀 흘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삶의 조건은 보장이 돼야 한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바쁘게 공부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복지국가란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복지국가란 사람들이 마음 편히 본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나라다. 학생이라면 '알바' 뛰는 시간보다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하고, 청춘을 바쳐 일하고 꼬박 꼬박 납세하는 '유리지갑' 직장인들에게는 안정된 노후가 보장되어야 한다.
부당한 이유로 삶의 터전이 한 순간에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대다수 국민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상황이라면 그 사회에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1. 수입의 3분의 1 이상이 ‘집’에 들어간다? 살면서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할 때는 언제일까? 바로 집을 장만할 때다. ‘집’이 버는 돈의 대부분을 잡아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사를 하는 상인들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임대료다.
‘단지 집에서 살기 위해’, ‘단지 일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만 줄어들어도 열심히 일하는 많은 이들이 절망감에서 벗어날 것이다. 요즘 하우스푸어, 렌트푸어라는 말이 돌고 있는데 버는 돈의 상당 부분을 지주(임대업자)나 은행이 가져가는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현재 신문을 보면 한 가구당 소득은 주당 40실링인데 그 중 14실링이 임대료로 나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땅주인이 너무 많은 몫을 가져간다고가 아니라 자기들 수입이 너무 적다고 불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주의 권리는 집행관과 브로커, 경찰, 심지어 모든 육해공군의 비호를 받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묘사한1944년 영국의 현실은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다. 지주는 아무 일 안 해도 꼬박꼬박 임대료를 챙길 수 있고, 자기 땅에서 사업을 하거나 거주하는 사람들을 임대기간만 끝나면 그들의 사정과 관계없이 마음대로 내쫓을 수 있다.
부동산의 “영구세습”은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떤 아기들은 처음부터 백만장자로 태어나는 반면, 일평생 고된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가난뱅이로 남는” 것이 다반사였다.
농업과 기사도를 기반으로 한 봉건시대에는 지주가 자기 영토에 대해 사법과 치안을 책임지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상업과 경쟁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봉토’는 ‘작고 좋은 자산’으로, ‘책임을 지닌 공직자’는 ‘무책임한 무위도식자’로 바뀐 것이다.
버나드 쇼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은 소득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토지제도에 있다고 확신했다. “땅을 소유한 덕에 먹고 사는” 불로소득자들을 보며 프루동은 “부동산 재산은 훔친 것이다!”라고 했고, 윌리엄 모리스는 “지주는 다 도둑들이다”라고 했으며, 케인스는 지주를 “벌집 안의 수벌들” 즉, 무위도식자들로 간주했다. “모든 토지가 사유화되면 그 다음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이상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신농노 계층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로지 지주들만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갖게 된다… “땅을 소유한 덕에 먹고사는” 지주들은 이제 자본가가 되어 사업가들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듯 이자를 받는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 토지에 대한 계급 독점이 이루어지고 나면 반드시 자본에 대한 계급 독점이 뒤따른다.” 버나드 쇼는 금융의 발달이 토지 문제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얼마나 심각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일찍부터 경고했다. 금융 미스터리와 지폐의 연금술은 우리에게 언젠가는폭발하고 말 시한폭탄을 떠안겼다.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눈앞의 종잇조각(지폐)을 황금인양 여기는 우리에게 작금의 금융위기는 예정된 운명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토지와 금융에 대해 이 책에서 설명한 만큼만 알고 있었어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 같은 것들이 불러올 파장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융이 민간영역에 맡겨져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손 하나 까딱 않고도 막대한 불로소득을 누리는 한,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터무니없는 계략들이 창궐하게 될 것이다.” 버나드 쇼는 “사람들이 지대와 금융과 보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 세 가지를 국유화하라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불로소득’을 누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조장할 따름이다. “땅이 없어서 지대를 내야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지면 그 상황에 길들여진다. 우산을 살 때 값을 지불하듯 땅을 빌리면 지대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려 한다. 그런 사람들은 토지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언젠가는 자신도 지주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돈만 있으면 언제나 살 수 있는 땅이 널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도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땅을 살 수 있다.” 버나드 쇼는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자지만 실제 신분은 지주였다. 그는 불로소득을 누리는 지주가 사회악이라는 점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하지만 “나를 지주로 만든 법률체계는 내가 고안한 것도 아니고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등에서 내려오고 싶어도 도무지 내려올 수가 없다”고 말한다.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로소득자에게 유리한 상황은 바뀔 수 없으며 불공정한 소득분배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울수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소득 불평등, 양극화의 문제는 오직 정치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현명하게 다스려지는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재화와 여가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반면 금권정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소수 특권층이 재화와 여가를 독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자기들이 생산한 결과물에서 점점 더 적은 몫만을 차지할 뿐”이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 등에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의 등에서 내려오고 싶어도 도무지 내려올 수가 없다. 톨스토이는 개인적으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자전적인 희곡을 집필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톨스토이가 개인적으로 도모했던 일은 오직 국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문학작품에 대한 재산권의 적용기간과 상속을 제한한 것처럼 토지와 산업시설에 대한 재산권도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태 입법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작권을 영구히 보호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그 근거는 이렇다. 증조 할아버지가 시카고에서 양배추 밭을 선점한 덕분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 있는 반면, 디킨스의 증손주가 흥부네 자식처럼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상한 상황을 없애기 위해서, 작가의 후손들이 무식한 개척자들의 자손과 마찬가지로 뻔뻔한 기생충이 되게 하는 것보다는 시카고의 부지를 국유화하고 임대기간을 제한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노동과 여가의 분배가 엉망으로 남아있는 한,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모든 정부는 그 구성원들이 얼마나 민주적인 원칙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노동과 여가의 분배를 망치는 도구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최근 복지국가 논의가 대두되면서 ‘공공 임대주택 확충’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정당마다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해결 방안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토지와 금융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정치인들에게 ‘부동산 영구세습’과 같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정책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고 만성적인 계급전쟁이 야기될 것이다(최근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99퍼센트 운동’을 보자).
그나마 영국과 유럽 선진국에서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꾸준한 시행착오를 거쳐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자리매김 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복지국가를 국가의 최우선 아젠다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럽 선진국에 비해 유독 뒤쳐진 부분이 있으니, 바로 부동산 관련 제도다. 서구 복지국가들은 공공임대의 비중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 토지 문제가 복지국가를 여는 열쇠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스펙’ 강요하는 사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지금의 젊은 세대는 거의 병적으로 취업 경쟁에 매달리고 있다.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입사시험의 경쟁률은 하늘을 찌른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을 봐서 교사나 공무원 같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거나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먹고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교사나 공무원, 회사원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적성과 재능이 다르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더구나 사회는 교사와 공무원도 필요로 하지만 시인과 요리사, 청소부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각자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 즉 시인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는 시인이 되고, 변호사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는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그런 이상과 거리가 멀다. 소득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학에서 마음 편히 공부하는 것조차 어려워졌고, 국가사회보장을 믿을 수 없어서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아닌 보다 자유분방한 직업 (이를테면 예술가, 발명가 등)을 택하려면 배를 곯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다들 공무원 시험과 취업 스펙에 목을 메고 다른 가능성은 열어둘 엄두도 못내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처럼 생산수단이 사유화되고 소득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계급사회로 가기 마련이다. 계급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소득수준을 넘어서는 직업을 선택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당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무능력과 실패는 대부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말뚝을 끼우려는 사회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다보니 나타난 결과다.” 버나드 쇼가 말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1940년대의 영국인지... 21세기 한국인지 헛갈리지 않는가? 버나드 쇼에 따르면, 그런 문제는 개인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생활고 때문에 예술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며,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되려면, 소득이 공정하고 현명하게 분배되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오로지 국가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는 공기처럼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출세의 문이 모든 재능에게 열려 있지 않다. 어떤 재능은 굉장히 가치 있어도 돈이 되지 않는 반면, 어떤 재능은 너무 천박해서 재능이라기보다 악덕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이 좋다.” 우리가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공정한 소득분배와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부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낡은 제도와 구조적 모순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나 혼자 멈춘다고,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린다고 그런 문제들이 해결될까? 세상에는 알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지금 버나드 쇼를 읽어야 하는 이유... 복지국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있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지난 100년간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시장에 얼마만큼 개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이른바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문제다.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버나드 쇼는 당시 정치경제의 표준이었던 자본주의(자유방임주의, 자유무역주의)가 사회주의와 절충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다시 말해, 작은 정부가 큰 정부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버나드 쇼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경제학자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발표하고 한창 지지를 얻고 있을 시기였다. 버나드 쇼는 케인스가 가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다가 다시 큰 정부론이 대두된 그 이후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복지국가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체제는 특정 계층에 부가 몰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더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구조로 치닫기 때문에, 결국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으며 자유방임주의나 자유무역주의는 소득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된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일해서 남부럽지 않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에는 자본가에게는 돈이 되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공익 사업들이 산적해있기 때문에 국가는 이미 절반쯤 공산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공산주의적 입법을 통해 가난과 예속상태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남는 여가와 여윳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나라가 건설된다면, 자유무역주의는 손상된 위신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코브던이 주창한 자유무역주의가 되살아나서 밀의 『자유론』이 다시 출간되고 베네데토 크로체가 칼 마르크스와 대등하게 인정받을 수도 있다. 코브던과 브라이트가 잘나가던 시절처럼, 자유무역주의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국가가 사유재산과 자유를 지키는 경찰 노릇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공통된 인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중요해진다. 영국의 노동당을 필두로 유럽과 미국에 나타난 ‘큰 정부’들은 과연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을까?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표방한 노동당이 집권 후 버나드 쇼를 비롯한 페이비언 사상가들에게 어떠한 실망감을 안겨줬는지 한 번 살펴보자. “사회주의자들 가운데는 사회주의 정부가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는 비사회주의 정부보다 부패하기 쉬운데 말이다. 비사회주의 정부는 경제가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고 경찰 역할만 담당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 정부는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동원해 산업발달을 이끌고 수익성이 낮거나 민간자본으로 한계가 있는 분야에서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렇게 국가 권력이 미치는 범위가 광대해지면 권력남용의 가능성도 커지기 마련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국유화를 통한 수입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돌려주기로 했었다. 그러나 분배 과정에서 그 뜻을 실현하려는 정당이 없었다. 국가의 생산과 수입을 파라오가 되어버린 사회주의자들이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내가 정치를 시작할 무렵만 해도 자본가들은 국가를 향해 “산업에서 손 떼라”, “농업에서 손 떼라”, “금융, 선박, 광업에서 손 떼라”, “외교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외쳤다. … 요즘 자본가들은 “뭐든 국유화하려면 해라. 전부 시유화해라. 법원은 군법재판소로 바꾸고, 의회와 기업은 인기 웅변가로 구성된 이사회로 전환해라. 지대와 이자, 이윤은 전처럼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고 프롤레타리아는 계속 아무것도 못가져가게 하라”고 외친다. 이는 현재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로, 사회주의가 부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부패한 사회주의는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으로, 독일에서는 나치로, 미국에서는 뉴딜로 불리며, 영국에서는 참 영리하게도 이름 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어디나 똑같으며, “사회주의적인 생산과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분배”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지금 상황은 완전 도둑 피하려다 강도 만난 격이다.” 버나드 쇼는 노동당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움직임을 등에 업고 나타난 모든 ‘큰 정부’들이 ‘분배’에 있어서는 그 뜻을 실천하는 의지와 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문제는 ‘큰 정부’가 아니라 정부의 ‘의지와 역량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버나드 쇼는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큰 정부’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경고했다. “선을 행하는 정부의 힘이 그 어떤 민간기업보다 강력한 것처럼 악을 행하는 정부의 힘도 그 어떤 민간기업보다 강력하다”면서 정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거듭 강조했다. 지난 100년 간 세계 경제의 이념전쟁을 두고 ‘자본주의 vs 사회주의’ 혹은 ‘자유주의+자본주의 vs 독재+사회주의’ 구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려는 제스쳐를 보이면 ‘자본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자유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눈에 띈다.
논의를 단순화하고 흑백대결 구도로 만드는 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 동안 정치적, 종교적 혼란에 빠진 전문가들이 “자기들이 용납할 수 없는 모든 대상에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산계급이 누리는 사치보다 인류 복지를 우선시하는 모든 제안을 나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마르크스의 등장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 중 어느 한 체제를 온전하게 유지한 국가는 거의 없다. 영국을 비롯한 소위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두 체제를 혼합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국가가 토지를 직접 소유하거나 지대나 이자를 몰수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자금력과 정치력을 지원 받는 영리기업들이 생겨났다”.
버나드 쇼는 그러한 경제체제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며, 국가자본주의가 오래된 민간자본주의와 동일시되는 용어 혼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70년대 이후 세계 경제를 휩쓴 신자유주의 열풍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정부의 역량과 의지 부족에서 찾기보다 ‘큰 정부’ 그 자체가 문제라고 여긴 바람에 지금과 같은 역풍으로 되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결과를 지켜본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최근 내놓는 의견들은 버나드쇼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분배구조가 안정되고 상당 수준의 복지사회를 이루기 전까지는 정부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위해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분배 문제와 양극화를 해결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특히나 지금 우리 사회처럼 모든 정당이 한 목소리로 복지국가를 외치는 상황에서는 버나드 쇼의 다음 조언들을 새겨들어야 할 듯하다. 버나드 쇼에 따르면, 국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정부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경제 전반에 대한 지식과 통화관리 역량이다. 유권자는 실제로 정부가 어떤 식으로 부패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며 선거를 통해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정치인이 (스스로 사회당이라고 생각하든 보수당이라고 생각하든) 통화관리를 잘못하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다.” “경제학에는 지대이론도 있고 가치이론도 있는데, 둘 다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공리로 삼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원칙들이다. 그러나 600명이 넘는 우리 의원님들 중에서 지대이론을 들어보기라도 한 것 같은 사람은 내가 알기로 딱 한 명이다. 그런데 그 의원조차 내각에서 빠졌다.” “영국은행 총재는 최근 금본위제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 “독일과 러시아의 인플레이션은 갑자기 정계에 진출한 과일장수의 작품이 아니다. 대학도 나오고 책과 경험을 통해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일을 그 지경으로 몰고갔다.”
“계란 1개에 1페니를 주고 사는 데 익숙해진 정부는 어느 순간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계란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계란 12개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지폐를 발행한다. 실제로 시장에는 계란이 6개 밖에 없는데 말이다! 당연히 계란 가격은 개당 2펜스로 올라가고, 정부는 격노하며 암시장에서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을 비난한다.
또,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겠다면 가격상한제를 도입하고 계란을 1페니보다 비싼 가격에 팔면 100파운드의 벌금이나 몇 년짜리 금고형을 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정부 보증’이 얼마나 믿을만한가는 그 정부의 지불능력과 정직함뿐만 아니라 각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파시스트 정당이나 공산주의 정당이나 똑같이 시유화와 국유화를 주장하고, 공공자본이 민간자본을 대체해야 한다고 한다면?…… 자유방임주의가 1921년 레닌이 시작한 ‘신경제정책N.E.P’과 별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 마디로, 정당마다 목적은 흑과 백처럼 다른데 같은 수단을 사용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렇게 되면 유권자들에게 사상이나 이론은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실제로 국가가 어떤 식으로 부패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가 투표에서 제 눈을 찌르는 일이 생길 것이다.” 여전히 간과하고 있는 문제들 이 책을 읽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깜짝 놀라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본다. 과학자 파블로프와 종두법을 발명한 제너, 유명한 구강청결제의 이름에도 사용된 리스터에 관한 내용이 그렇다. 파블로프와 제너, 리스터가 누군가? 그들이 살아있던 그때나 지금이나 위대한 과학자 내지는 의사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 아닌가? 그런데 버나드 쇼는 그들을 ‘얼간이 과학자들’이라고 부르며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과연 근거가 무엇일까? ‘과학자: 파블로프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나’라는 제목의 23장은 파블로프로 대표되는 일부 실험실 과학자들이 왜 얼간이인가를 밝히는 장이다. 파블로프의 개를 이용한 조건반사 실험은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험이 상당히 잔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파블로프는 개의 뺨에 구멍을 뚫고, 해머와 끌, 톱 등을 사용해 두개골을 열었다. 실험에 이용된 개들은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굉장한 동물애호가였던 버나드 쇼는 그와 같은 실험의 잔혹성에 치를 떨면서 파블로프를 “잔인한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파블로프의 장점은 조건반사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일생동안 조건반사 연구에 매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파블로프는 그 자신이 두 개의 강력한 조건반사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쇼에 따르면, 파블로프는 삶의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은 무엇이든 부인하는 19세기 과학적 사고에 갇혀 있었다. 그것이 파블로프를 지배한 첫 번째 조건반사였다. 그를 지배한 두 번째 조건반사는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최초의 과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고대의 사제들이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행했던 ‘피의 희생’ 의식과 관련이 있다. 버나드 쇼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해 “살아있는 동물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과학과 어떤 반사로 얽혀있는지”를 밝혀낸다. “실험실이라는 제단에서 개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희생시키는 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행위는 피라미드가 세워지기도 전에 습득되고 수세기에 걸쳐 (파블로프의 표현에 따르면) “강화되어” 이제는 완전히 몸에 밴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얼마든지 인도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지만 욕 나올 정도로 미련하고 잔인한 연구방법을 택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러한 연구방법이 실패했다고 고백하면서도 같은 실험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파블로프의행위를 조건반사 말고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내용들이 처음에는 다소 충격적일지 모르겠지만 버나드 쇼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 얼마 전 신문에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동물실험의 98%는 과학적 관행 때문에 일어나는 불필요한 실험이다”라는 기사가 났다. 버나드 쇼가 비난한 과학자들의 조건반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얘기다. 버나드 쇼는 제너와 리스터에 대해서도 우상파괴작업을 실시한다. 우리는 제너가 우두접종을 통해 천연두를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연두가 재발했고 나중에는 천연두보다 우두로 죽는 아이들이 많을 정도로 예방접종이 위험했다고 한다.
쇼는 “엉터리 치료법이 공인되어온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반나절만 투자하면 된다”면서 “수술로 금전적 이득을 얻는 의사협회의 권고나 자칭 과학자들의 어설픈 통계와 증거를 바탕으로 정부가 나의 인권을 침해하고 내 피에 강제로 독을 주입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되려 독감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뉴스에 나온다. ‘과학 맹신주의’와 ‘의사의 특권’에 대한 버나드 쇼의 통찰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버나드 쇼의 조언들은 2012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만일 파블로프가 그의 개에게 한 짓을 그도 똑같이 당하는 수가 있다고 국가가 엄중하게 경고했더라면, 파블로프는 진짜 유용한 과학적 업적을 조금은 남겼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돈 때문에 외과의사들이 불필요한 수술을 하거나 내과의사들이 있지도 않은 병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정연함, 허를 찌르는 위트와 유머, 믿기 어려운 박학 다식함, 이것이 버나드 쇼다! 버나드 쇼는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무지한 노인네가 그 동안 공부하고 일평생 세상사람들과 부딪치고 냉엄한 현실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알게 된 기초적인 사회정학을 그것조차 모르는 더 무지한 사람들과 나누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물리학과 형이상학 자연사와 철학을 넘나들고, 사실과 연속성, 사고방식과 준거틀, 그리고 실제 사건들에서 타고난 이야기꾼들이 알기 쉽게 풀어낸 전설과 드라마까지 두루 짚는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정치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인용은 놀라우리만치 풍부하고 흥미롭다. 누군가의 말대로 “좋은 책이란 다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면, 『쇼에게 세상을 묻다』는 좋은 책일 수밖에 없다. 『쇼에게 세상을 묻다』를 읽다보면 버나드 쇼의 친구로 자주 등장하는 H.G. 웰스와 길버트 체스터턴에서부터 윌리엄 모리스와 러스킨, 경제학자 스탠리 제번스의 책까지 독서 욕구가 무한히 자라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생전에 버나드 쇼는 좌중을 압도하는 연설가로도 유명했다. 이 책에서도 역시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를 선보이면서도 적절한 순간에 수준 높은 유머까지 구사하는 것을 보면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미국의 저명한 교육사상가 앨버트 제이 낙은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렇게 썼다. “버나드 쇼는 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우리 시대의 유일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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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었으나 기억에 남고 처음부터 제 맘에 와 닿은 것은
우물 쭈물하며 눈치 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남습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하지 맙시다.
감사 합니다
ㅎㅎㅎ
우물 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ㅋ
my fair lady 영화
올려 볼까요
고맙습니다.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오드리 헵번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기억이 납니다.